저녁을 먹고 디저트 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가 같이 사들고 온 한국일보를 뒤늦게 펼쳐들었다. 별로 눈길을 끄는 기사는 없었는데 한 칼럼의 제목이 '좌파의 가치'여서 읽어보았다. 며칠전 소설가 이기호의 '우파의 길, 좌파의 길'을 읽은 소감을 적어놓은 칼럼이었다. 잠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에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2. 06) 우파의 길, 좌파의 길

예전 어느 에세이스트 책을 보다가 이런 구절을 보고 절망한 적이 있었다.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문구를 보고 내가 절망한 것은, 내가 평생 우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근원적인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에게 양심을 건사하는 일이란, 책을 읽고 또 읽어도, 고민을 하고 또 해보아도, 도무지 알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어떤 안개 같은 것이었다.

한데, 이 시대엔 그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겸손치 못하게 나는 우파요, 쟤는 좌파요, 라고 말을 한다. 쟤는 좌파요, 라는 말 속엔, 그래도 저 사람은 다른 이의 양심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고 있소, 라는 뜻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모른 채, 그저 험담처럼 내뱉는다. 나는 또한 내 주위에 진정한 좌파들을 보지 못했다.

얼치기 좌파들만이 '나, 좌파요'라고 떠벌리고 다닌다. 진정한 좌파들이란, 진정한 우파를 통과한 다음에야 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절대 자신이 '좌파'라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양심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소설가 이기호)

한국일보(07. 02. 09) [편집국에서] 이 시대 좌파의 가치

며칠 전 한국일보 연재물 <길 위의 이야기>를 읽고 묘한 생각이 들었다. '우파의 길, 좌파의 길'이란 제목이 붙은 그 글에서 글쓴이 이기호는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부담감 때문에 자신이 평생 우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근원적 한계를 인식했다고 고백했다.

글을 읽은 뒤, 우파보다 좌파가 더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이건 좀 불공평하다는 작은 반발도 생겼다. 진정 잘못된 세상을 바꾸겠다면, 자신이 먼저 깨끗해져야 하며, 그때 도덕성이나 삶의 진실성은 좌파든 우파든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옳든 그르든 이기호의 글은 좌파, 우파에 대한 사회적 잣대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시대의 좌파는, 거친 목소리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설파하는 투사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날카로운 지식인의 모습보다는, 생활 속에서 양심껏 살아가고 타인의 양심까지 지켜주는 성실한 사회인상을 요구 받는다.

21세기에 접어든 뒤에도 우리 사회에는 좌우의 이념 갈등이 여전하다. 역사를 보는 눈도, 사회를 보는 눈도, 북한을 대하는 태도도, 미국에 대한 생각도 서로 다르다. 언뜻 양측이 경합하는 듯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이미 승부가 났다고 볼 수 있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시장주의가 몰아쳤고 그것과 맞설 힘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했는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성장주의, 성과주의, 배금주의에 숨이 막힐 정도다. 승자는 싹쓸이하고 패자는 구석으로 몰리는 씁쓸한 양극화가 우리의 자화상이다. 기업이든, 개인이든 돈에 혈안이 돼있고, 돈만 된다면 다소의 잘못이나 부도덕도 용인하는 그런 세상이다. 지향점도, 작동원리도 다른 정부는 기업 흉내 내기에 바쁘다.



그래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이라는 책에서 이런 모습을 '기업사회'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약자를 안고 못난 자를 격려하겠다는 좌파의 가치가 더 존중돼야 하지 않을까. 그 동안 우파는 노무현 정부를 좌파로 몰아 부쳤고 대기업 노조를 이기적 집단이라고 비판했다. 노무현 정부를 좌파로 보는 게 어이가 없지만, 어쨌든 그런 식의 규정을 통해 좌파의 무능, 좌파의 공허함, 좌파의 부도덕성을 질타했고 국민적 공감도 어느 정도 얻었다. 그러나 좌파 진영 인사의 행태를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좌파의 목소리 자체를 누르는 것은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고 보니 동구권이 몰락한 직후 한 잡지에 실린 우파 지식인의 글이 생각난다. 그렇게 동구권이 무너지고 좌파의 설 자리가 좁아질수록 좌파는 더욱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기호는 좌파 되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진정한 좌파라면 도리어 쉬울 수도 있겠다. 양심을 인정받는 진정한 좌파가 하는 주장이라면, 국가와 민족의 장벽을 넘어 약자와 함께 가자는 좌파의 가치가 쉽게 팽개쳐질 것 같지는 않다.(박광희ㆍ문화팀장)

07. 02. 09.

P.S. 소설가는 갈팡질팡하고 문화팀장은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읽힌다. 좌파/우파에 대해서는 이전에 여러 차례 관련 페이퍼를 써놓았기 때문에 재론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단순 이분법으로 얘기하자면, 좌파는 학습하는 반면에 우파는 공부하며, 우파가 교양을 쌓는 시간에 좌파는 품성을 단련한다. 그건 각기 다른 가치이며 세계관이다. "진정한 좌파들이란, 진정한 우파를 통과한 다음에야 나오는 법이다"라는 이기호의 주장은 <공산당 선언> 강의 등에서 강유원이 주장한 바이기도 하다(사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이후에 오는 거 아닌가). 문제는 말세에 등장하는 적그리스도처럼 중구난방으로 떠벌이는 사이비좌파들과 '좌파 딱지붙이기'로 기득권이나 챙기는 무교양 우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는 것이다. 품성은 모자라고 교양은 부족하다. 우파의 길이건, 좌파의 길이건 혹 남의 얘기는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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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10 00:05   좋아요 0 | URL
제쳐두고 품성을 닦고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디저트 치고는 새겨들어야 하는 이야긴걸요.
 

일간지들의 북리뷰가 주로 주말에 몰려 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온라인 기사가 미리 뜨는 금요일 밤시간이면 할일이 좀 늘어난다. 내일이면 어느새 날짜가 10일로 접어드는구나, 란 생각에 경악(!)을 하면서(주말의 빨래감처럼 밀려 있는 일들이여!) 또 하던 일 안할 수는 없는지라 '작가와 문학사이'의 연재도 옮겨놓는다. 이번 주는 진은영 시인 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철학전공자로서(아래의 기사를 읽으니 어느새 학위도 받았다) <순수이성비판>의 '리라이팅'을 쓰기도 했다. 그녀의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을 나는 사두지는 않았지만 개성적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 더 미더운 촉수를 가진 신형철 평론가의 감식의견을 들어보기로 한다.

 

경향신문(07. 02. 10) [작가와 문학사이](6) 진은영-청신한 몸·유연한 머리의 언어

그녀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은 명품이다. 재료도 고급이고 만듦새도 정통이며 외장도 우아하다. 열혈독자가 많다는 소문이다. 그녀는 나가르주나와 니체를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도이기도 하다. 그녀가 철학적인 시를 쓰고 시적인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은 거의 오해에 가깝다. 반쯤은 호메로스이고 반쯤은 플라톤인 사람은 호메로스도 플라톤도 되지 못한다.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 횔덜린의 시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문학/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시인의 독백/“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혁명/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묻는다. 시란 무엇입니까. 시인 왈, 시는 메타포다. 시 조갈증에 걸린 우편배달부에게 이 시를 처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는 고급 메타포의 일대 향연이다. 무릇 메타포는 수혈(輸血)이다.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 혁명 시 등과 같은 혼수상태의 단어들이 젊은 피를 받아 막 살아난다.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 특히 ‘혁명’을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로 혹은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로 규정한 대목은 곱씹을수록 아득해진다. 사유를 건너 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 그녀의 좋은 시들이 대개 그러하다.

혹자는 그녀를 최승자의 후계자라 칭한다.(시인 김정환의 말대로라면 이 후계책봉은 어느 술자리에서 최승자 본인의 기꺼운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한다.) 최승자가 누구인가? 한국 여성시의 발성법을 혁신한 시인이다. 발명이라고 해도 좋다. 최승자의 언어는 격렬한 액체의 언어다. 그녀는 시에서 오줌 싸고 똥 누고 생리혈을 흘린 최초의 여성이었다. 생의 막장에서 자존심 내던지고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너에게 가겠다고 매달리는 여자의 발화다. 참혹하고 두렵고 아름답다. 이 몸의 언어가 머리의 언어와 연동해 지진을 일으킬 때 그녀의 시는 더욱 위력적이었다. 역사·정치·문명의 허위를 사유하는 강인한 지성이 또한 그녀의 것이었다. 덕분에 ‘여류’라는 수상쩍은 말이 척결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는 식의 발성은 확실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더 깊이 앓는 몸과 더 깊이 사유하는 머리가 최승자 이후에 없지 않았으나 그 둘의 뜨거운 합선(合線)은 이후에도 드물었다. 후계 운운하는 사람들의 저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 시인이 몸의 언어와 머리의 언어 모두에 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숙한 선배와는 또 달라 보인다. 덜 뜨겁지만 더 청신한 몸의 언어, 덜 치열하지만 더 유연한 머리의 언어가 그녀의 것이다. 그 차이가 더 소중하다. 그녀는 그녀만의 또 다른 혁신으로 선배에게 진 빚을 탕감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두 번째 시집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시인은 시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한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2. 09.

P.S. 알라딘의 소개에 따르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진은영의 첫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짓는다. 허나 '모든 표정이 사라진 세상'에 '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막 심어진 묘목이 파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듯, 조심스레 손가락을 내어밀어 적은 시편들이 담겼다."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평론가 이광호의 해설도 그렇지만, 대개 이 시인의 키워드로 꼽는 단어(그러니까 '일곱 개의 단어' 중 하나이겠다)가 '손가락'이다. 손가락에 주의를 두는 사람들은 주로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면 그녀의 시들은 '긴 손가락'으로 씌어진 시들이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고 시인은 적었다. 듣기에 두번째 시집이 늦어지는 건 시인이 건강과도 무관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간의 잎들'이 더 풍성하게 피어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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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자입니다. 리라이틸 -> 리라이팅

로쟈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기인 2007-02-10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저도 진은영 시인 이 시집 잘 읽었는데, 어느새 박사학위도 받았다니! 역시 공부하느라 창작하기 힘들다는 것은 변명이군요.
 

작년 여름에 근간 목록에 올라와 있던 파스칼 키냐르의 에세이 <섹스와 공포>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바 있는데, 반년이 지나서 드디어 책이 출간됐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중후한 에세이 한 권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발빠른 리뷰도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2. 10) 쾌락 뒤에 숨겨진 공포 '섹스와 공포'

사회적인 공인을 통과하지 않은 섹스에 대한 현대인들의 끈질긴 공포감은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이 같은 공포감의 연원으로 기독교의 엄격한 청교도주의를 꼽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있지만,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인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이에 의구심을 품었다. 특히 1980년대 에이즈의 등장으로 인한 청교도적 윤리의 확산은 키냐르의 의구심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섹스에 대한 현대인의 공포감의 뿌리를 찾아가던 키냐르의 눈길이 멎은 곳은 폼페이의 회화였다. 통음난무의 자유분방한 풍조를 반영하듯 폼페이의 벽화들은 에로틱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시선은 수줍고 심각했다. 즐겁고 쾌활해야 할 그림 속의 여인들은 정면을 바라보지 못했고 겁에 질려있었다.

키냐르는 <섹스와 공포>에서 자유로웠던 초기 로마의 성윤리가 공포감에 짓눌리게 되는 시기는 공화정이 제국의 형태로 정비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기(BC 18~AD 14)라고 지적한다. 황제는 간통 처벌법인 ‘율리아의 법’ 제정 등 성의 억압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하고 이를 기반으로 황제권을 강화하려 했다. 여자를 유혹, 밀애를 즐기는 내용을 노래한 당대의 인기시인 오비디우스는 당장 ‘불온시인’으로 낙인 찍혀 다뉴브 강변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성에 대한 억압과 금기가 없었던 기독교가 ‘로마의 윤리’를 따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온다’ ‘음행하는 자는 제 몸에 죄를 짓는 것이다’라며 기독교인의 윤리를 설파하는 신약의 로마서는 바로 이 때에 쓰여졌다. 로마인들이 알몸을 가리기 위해 팬티를 착용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의 변화된 성 모럴을 반영한 풍속이라는 것.

키냐르는 아우구스투스가 재위하던 32년이 단지 로마역사의 변곡점과 같은 시기가 아니라 세계사의 ‘지진’과도 같은 기간이었다고 과감하게 결론내린다. 디오니소스적이었던 로마의 에로티시즘이 이 시기 불안과 공포감에 가득찬 우수로 변질됐고, 이 공포감은 적대감으로 탈바꿈하면서 기독교 원죄의식의 질료가 됐다는 것이다. 섹스를 지옥으로 보내버린 중세의 청교도적 윤리가 이 시기에 뿌리 내리고 있고 현대의 성 윤리 역시 일정 부분 중세 윤리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신대륙 발견기보다도 더 큰 변혁기라는 것이다.

역자 송의경씨는 “탄생이 죽음으로의 출발을 의미하는 양면성이 있듯이 섹스에는 쾌락과 공포가 본질적으로 혼재돼 있다”며 “섹스에서 공포만을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현대인들이 쾌활함이라는 에로티시즘의 또 다른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책”이라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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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10 00:01   좋아요 0 | URL
성병에 대한 두려움에 떨면서도 사창가를 드나드는 심리가 바로 그것일테지요.

승주나무 2007-02-10 02:53   좋아요 0 | URL
저는 욕구불만의 공포는 좀 알고 있습니다만..그러고 보니 이것도 섹스의 공포 중 하나겠군요.^^

기인 2007-02-10 07:08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

stella.K 2007-02-10 11:14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참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사실 알고보면 문화의 탄생과 발전이란 게 에로티시즘을 발전시킨 것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요?

다락방 2007-02-10 23:25   좋아요 0 | URL
아, 오늘 신문에서 이 책을 봤는데 여기서 또 보네요. 반갑게스리.
 

'비평이론 총서 01'로 <들뢰즈와 그 적들>(우물이있는집>이 출간됐다(처음에 '들쥐와 그 적들'로 읽었다). 정정호 교수 편의 논문집인데, 11명의 필자 모두가 국내의 어문학, 철학 전공자들이다. (재)작년인가 영미문학회인가의 학술발표회 주제가 '들뢰즈와 그 적들'이었고 아마도 이번에 묶인 논문들은 그때 발표된 것들인 듯하다. 몇년 전에 <들뢰즈 철학과 영미문학 읽기>(동인, 2003)가 같은 편자에 의해서 나온 적이 있는데, 그간에 보다 확장되고 심화된 연구 성과들을 열람해볼 수 있을지 기대된다(이진경의 <노마디즘>과 이정우의 몇몇 저작을 제외하고도 국내 저자가 쓴 들뢰즈 관련서들은 댓 종 이상 출간돼 있다).  

 

 

 

 

아직 아무런 리뷰기사가 뜨지 않아서 소개를 옮겨오면, "철학사 교수에서 철학자로, 예술이론가에서 영화이론으로, 정치경제이론가로, 문학이론가로 종횡무진 횡단하는 인문 지식인인 들뢰즈의 폭넓은 연구 영역을 각 분야별로 고찰했다. 들뢰즈의 문학예술론 및 몸철학, '중간'문학론, 언어와 문화론, 영화론, 윤리론, 정치론, 유목주의와 자율주의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들뢰즈에 대해서 다양하고 종합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목차로 보아 좀 아쉬운 건 지젝의 들뢰즈론 <신체 없는 기관>에 대한 참조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 커플의 작업을 맹비판하면서, 가타리야말로 들뢰즈의 적임을 주장한 이가 지젝 아닌가?(내부의 적!) 그런 관점에서 들뢰즈/가타리를 다시 읽는다면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연말에 나온 걸로 돼 있는(하지만 알라딘에는 꽤 늦게 올라온) 책이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 3부작' 중 마지막 책 <들뢰즈와 시네마>(동문선, 2006)이다. 따져보니까 작년 한해 동안 세 권이 모두 출간됐다(역자들의 부지런함을 치하할 일이다). 사던 책이니만큼 이미 구색을 다 맞춰놨는데(원서로도 진작에 맞춰놨었다), 완독하는 건 아마도 역순이 될 듯싶다. 그건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해서 숙지해야 할 필요 때문이다.

 

 

 

 

이번에 나온 <들뢰즈와 시네마>는 "<시네마1>과 <시네마2>에 대해 영어로 쓴 최초의, 최상의 해설이다"란 평도 듣는 만큼 한번 도전해봄 직하다. 물론 '들뢰즈와 영화'란 주제에 한정하더라도 읽을 책은 차고 넘친다. 책읽기에만도 거의 '진화적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거기에다 보그는 "시네마에 대한 들뢰즈의 접근에는 베르그송으로부터 그가 받은 영감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시간에 관한 베르그송의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지 않으면 <시네마1>과 <시네마2>의 많은 부분이 애매하게 된다."(11쪽) 협박해놓고 있으니 견적은 더 불어난다(물론 저자가 베르그송에 대해선 잘 정리해놓고 있지만).

지난 1월에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읽고 또 들뢰즈의 <푸코>까지 읽어보겠다던 계획이 입에 침만 묻히고 무산돼 버렸는데, 어느새 스테이지는 '들뢰즈'로 바뀌었다. 이 숨가쁘게 반복되는 차이 속에서 잠시 넋을 놓는다...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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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2-09 22:15   좋아요 0 | URL
<들뢰즈와 시네마>일단 주문해 놓긴 했는데 워낙 악명높은 동문선이라. 번역이 어떨지 심히 걱정되는군요. 로날드보그의 다른 들뢰즈책도 그래서 구입을 안했다는..원서대조작업으로 읽어야하는 공을 다시 들여야 하는건지..-_-

로쟈 2007-02-09 22:17   좋아요 0 | URL
역자인 정형철 교수가 보그의 제자라는군요. '전력투구'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yoonta 2007-02-09 22:20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그렇다면 일단 믿고 읽어봐야겠네요. 이상한 부분은 로쟈님이 검열해 주시리라 기대해 봅니다..^^
 

작년 4월에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두레, 1997)를 몇 페이지 들춰보면서 '도스토예프스키와 타르코프스키'란 페이퍼를 쓴 적이 있다. 이후에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자료들을 나는 더 긁어모았고(그에 관한 논문이나 책을 쓰는 것이 나의 목표이자 핑계이다), 어제는 <순교일기>의 영역본 <시간 속의 시간(Time within time)>(1994)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 주문한 책을 얼마전에 대출해서 복사한 것이다.  

집에까지 들고 온 김에 몇 페이지만 다시 읽어보았다. 영역본은 국역본과 마찬가지로 지난 1989년에 나온 독어판 <순교일기(Martyrolog)>를 대본으로 한 것인데,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짐작엔 아직 출간되지 않은 듯하다. 좀더 검색을 해보니 출간은 이미 기획돼 있고 원래는 작년말 정도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적어도 올해는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독어본 일기는 1권(1970-1986), 2권(1981-1986) 두 권으로 돼 있는데, '편집자의 말'에 보면 "1권이 출간되고 난 뒤 그의 부인조차도 몰랐던 많은 양의 일기와 방대한 자료가 새롭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기적으론 1권과 부분적으로 중복되는 2권이 다시 출간되었던 것. 아래가 그 2권이다.
 
 
짐작할 수 있지만 독어본 두 권은 71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본문 370쪽이 되지 않는 국역본은 당연히 발췌본이고 이에 대해서는 역자가 해명해 놓았었다. "이 일기를 모두 우리말로 옮겨 출판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그것은 너무 벅찬 일이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만을 골라서 책을 엮게 되었다. 일기의 선택기준은 타르코프스키의 인생관,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 그가 어떤 사람인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의 영화예술론, 작품의 구상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그의 예술이 소련의 이데올로기 및 영화당국, 관졔예술과 어떤 충돌을 빚어내고 그래서 어떻게 박해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것, 그가 즐겨 읽었던 작가, 예술가, 사상가는 누구이며, 가장 많은 감명을 받은 글은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주는 것 등을 중심으로 하여 글을 골랐다."(400쪽)
 
<봉인된 시간(Sculpting in Time)>과 마찬가지로 키티 헌터-블레어(Kitty Hunter-Blair)가 옮긴 영역본은 색인까지 포함해서 407쪽 분량이니까 국역본과 큰 차이는 나지 않으며 짐작에는 독어본의 제1권(만)을 번역한 듯하다. 부제가 '일기 1970-1986'라고만 붙어 있는 것도 그런 심증을 갖게 한다. 하지만 조금 읽어보니까 국역본에 누락된 대목들도 군데군데 포함하고 있다. 국역본보다는 조금 자세한 게 아닐까란 짐작을 해보게 된다. 겸사겸사 국역본에 몇 가지 교정사항(의문사항)이 있어서 적어둔다. 현재 품절되었다고 하니까 혹 재출간시(완역본이 나오면 더 좋겠고) 교정사항이 반영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지난번에도 인용한 바 있지만, <순교일기>의 첫문장은 1970년 4월 30일 일기의 것으로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우리는 다시 한번 <도스토예프스키>를 영화화하는 작업에 관해 사샤 마사린과 이야기했다."이다. 여기에 나는 "역주에도 있지만, 마사린은 영화 <거울>의 시나리오 작업을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했었다"라고 덧붙였었는데, 영역본을 보니까 '사샤 마샤린'이 아니라 '사샤 미슈린(Sasha Mishurin)'이다. 사샤가 '알렉산드르'의 애칭이므로 공식 이름은 '알렉산드르 미슈린'이다. 국역본의 '등장인물해설'에는 또 '알렉세이 미샤린(Aleksei Mischarin)'이라고 표기돼 있다(374쪽). 이게 왜 이리 왔다갔다 하는 건지.
 
 
나타샤 시네씨오스가 쓴 작품해설 <거울>(2001)을 보니까 각본은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Alexander Misharin'이 맡은 것으로 기재돼 있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알렉산드르 미샤린'(사샤 미샤린)이라 해둔다('미샤린'이 '미슈린'으로도 불릴 수 있나?). 국역본의 '알렉세이 미슈린(1912-1982)'은 다른 러시아 영화감독의 이름이다.
 
'편집자의 말'에 보면 "등장인물의 표기는 독어판과 영어판을 대조해가면서 정확을 기하려 했으나 러시아어판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곳이 적지 않을 것이다."(403쪽)라고 했는데, 첫문장에서부터 그런 사례가 나오고 있는 것. 재판이 나온다면 <봉인된 시간>처럼 그냥 다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류들을 정정하여 보다 정확한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어지는 대목. 타르코프스키는 어쨌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이 아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에 관한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적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성격, 그의 신, 그의 악령들, 그가 이룩한 일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톨야 솔로니친은 도스토예프스키 역할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지적한 대로 '톨야 솔로니친'은 '톨랴 솔로니친'라고 표기하는 게 맞다. '톨랴'는 '아나톨리'의 애칭이며 아나톨리 솔로니친(1934-1982)은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주역을 맡았던 그 배우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솔로니친을 도스토예프스키의 배역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 아래 사진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솔로니친과 도스토예프스키. 타르코프스키는 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배역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것.  

"이제 나는 우선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쓴 글을 모조리 읽어야만 하겠다. 그리고 그에 관해 쓴 모든 글들 그리고 러시아 종교철학자들인 솔로비요프, 베르쟈예프, 레온체프의 글들도 모두 읽어야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영화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 모든 것들의 총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25쪽)

여기서도 표기 하나. 레온체프는 영어로 'Leontiev'이며 러시아 철학자 콘스탄틴 레온티예프(1831-1891)를 가리킨다(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경제학자는 바실리 레온티예프이다). 발음대로 하면 '레온찌예프'가 되지만, 관행에 따라 '레온티예프'라고 해둔다. 여기까지가 4월 30일의 일기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5월 10일자 일기. "1970년 4월 24일 우리는 므야스노예에 집 한 채를 구입했다"(26쪽)고 나오는데, '므야스노예(Myasnoye)'의 바른 표기는 '먀스노예'이고 타르코프스키 가족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아래의 사진들은 타르코프스키의 아들 안드레이가 찍은 먀스노예의 사진들이며 영어본 폴라로이드 사진첩 <순간의 빛(Instant Light)>(2004)에 들어 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분위기가 사진들에서도 묻어난다. 아래사진에 나오는 여인이 타르코프스키의 아내이자 안드레이의 어머니 라리사이다.  

아들 안드레이는 1970년 8월 15일 일기에 보면 "라리사가 8월 7일 6시 25분 아들을 낳았다. 안드류슈카(안드레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라는 구절에서 처음 이름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이름도 안드레이여서, 이 부자는 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유작 <희생>에서 자신의 영화를 아들 '안드류슈카에게 바친다'라고 나중에 적게 될 것이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러시아 고유명사의 표기는 거의 매 페이지마다 문제가 된다. 가령 5월25일 일기에서는 "바스카코프 집에 갔었다."라고 시작하지만, 영역본을 보면 "바자노프 집에 갔었다"고 돼 있다. 둘다 일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이서 오타 문제도 아니다(러시아본이 빨리 출간됐으면 싶다!). 한 가지 덧붙이지면, 같은 날짜 일기에서 "점차 일이 진행되고 있다"로 시작되는 문단은 영역본에 6월 4일 일기로 돼 있다. 국역본이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만 타르코프스키의 독자로서 '정독'하려고 하면 아쉬운 부분들이 많다...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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