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에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랜덤하우스중앙, 2005)를 읽었다. 이 '30분 시리즈'에서 <니체>와 함께 지난주에 구입한 책인데, 비록 만만한 분량이긴 하나 30분은 족히 더 걸리고 아마 1시간 정도는 투자해서 읽어야 할 분량. 물론 이런 가이드북에 큰 기대를 걸어서는 곤란하지만, 책은 기대보다는 잘 짜여져 있으며 저자 로즈 밀러의 식견 또한 여간한 수준은 아니다. 그는 주로 영어권 연구서들을 참조하고 있는데, 이래저래 알려주는 정보도 요긴하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모출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책세상, 2000)와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공부 요령이기도 한데, 어떤 주제나 인물에 대해서 좀 두꺼운 책과 얇은 책을 나란히 읽으면 '정리'와 '부연설명'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데, 번역 자체가 비교적 만족스러운 <니체>에 비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몇 가지 오류가 눈에 띈다. 주로 러시아 인명과 관련된 것들인데, 직접적으로는 역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그닥 참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어서 씁쓸하다(교정자도 안 읽었다는 얘기이고). 비근한 예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맏형 드미트리의 애칭이다. 영어 표기로는 'Mitya'가 되는데, 이걸 '미챠(미쨔)' 대신에 '미트야'로 옮긴 것. '카테리나'의 애칭 'Katya'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카챠(까쨔)' 대신에 '카트야'가 돼 버렸는데, 좀 우스운 해프닝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친구였던 비평가 '스트라호프(Strakhov)'가 '스트라코프'로 옮겨진 것도 부주의하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사전>(열린책들, 2002)도 출간돼 있기 때문에 굳이 우리말 번역본을 직접 읽어보지 않더라도 고유명사 표기에서의 오류들은 피해갈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 참조하지 않은 것은 오만이거나 객기일 터이다.

또 그런 태도는 꼭 그 이상의 실수들을 낳게 된다. 책에서 여러 차례 인용되고 있는 연구서로 <도스토예프스키와 문학 창조과정>이 있는데, 역자는 그 저자를 '장 콕토'라고 옮겨 놓았다(86쪽 등). 터무니없는 오류인데, 'Dostoevsky and the Process of Literary Creation'란 연구서의 저자는 저자는 자크 카토(Jacques Catteau)이다. 원저는 불어이며, 저자 로즈 밀러는 영역본(캠브리지대 출판부, 1989)에서 인용하고 있다(원저는 불어권에서 나온 가장 유명한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이다). 또 135쪽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읽기(Reading Dostoevsky)>의 저자이자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인 'V. 테라스(Victor Terras)'를 'V. 테릿'이라고 옮긴 것도 오류이다. 아울러 본문에서 거명된 연구문헌들의 국역본이 참고문헌란에서 많이 누락돼 있는 것은 아쉽다. 요즘처럼 정보검색이 편리한 시대에 이런 누락이 발생하는 것은 그저 성실성의 문제일 뿐이다.

이런 류의 가이드북을 읽으면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만약에 내가 이런 책을 쓴다면'이다. 물론 관건은 분량이며, 얼마만큼 핵심을 압축해서 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라면 훨씬 두툼한 분량의 책을 써야하겠지만(나의 장기적인 목표는 2021년이다. 작가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 거기에 힌트가 될 만한 사항 하나. 92쪽에서 '자크 카토'를 인용하고 있는 대목: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고상한 인물들 중에서도 돈키호테는 가장 완성된 인물이다. 하지만 돈 키호테의 고상함은 그가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인물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동시대 작가 투르게네프에게서 돈키호테가 햄릿과 함께 인물의 두 전형이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돈키호테의 짝은 그리스도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상함'과 돈키호테의 '우스꽝스러움'을 동시에 구현하고자 했던, 세계문학사에서 아마 유례가 드문 작가이다. 물론 <백치>의 주인공 미슈킨(므이슈킨) 얘기이다. 사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자체가 진지함과 우스꽝스러움의 결합체이긴 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세르반테스 이래의 산문문학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도 하다. 그 전통을 가까이로는 고골로부터 이어받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나는 그러한 전통을 '파토스(pathos)의 문학'에 견주어 '바토스(bathos)의 문학'이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내가 '바토스'란 단어를 처음 본 건 나보코프의 <러시아문학 강의>에서였던 듯한데, 그는 고골 문학의 특이한 정서를 '바토스'란 말로 표현했다. '돈강법'이라고 옮겨지는 바토스는 "점차로 끌어올린 장중한 어조를 갑자기 익살스럽게 떨어뜨리기"란 (음악)기법을 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파토스'에 상응하는 폭넓은 뜻으로 새기며, 그때 바토스는 고양된 정념과 익살의 혼종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경애해마지 않는 것이 세르반테스에서 고골로, 도스토예프스키로 이어져오는 바로 그러한 '바토스의 문학'이다.   

세르반테스와 같은 스페인어권에서 그러한 바토스를 가장 숭고하게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 멕스코 영화의 거장 아르투로 립스테인의 <짙은 선홍색>(1996)이다(나는 지난 세기에 한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 영화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는 것은 상당히 미스테리한 일이다). '내 인생의 걸작' 중 한편인데, 내용을 살짝 퍼오면 이렇다.

"뚱뚱하고 볼품없는, 게다가 입에서는 심한 구취까지 나는 간호사 코랄은 두 아이를 가진 과부다. 누군가의 관심이나 호감을 끌지 못하는 코랄. 그렇지만 누구 못지 않은 열정과 낭만을 내면에 갖고 있는 욕구불만의 여자다. 잘생긴 영화배우 샤를르 브와이에를 연모하는 코랄은 어느날 잡지에 실린 사교란에 자칭 샤를르 브와이에를 닮은 남자라는 니콜라스의 광고를 보고 가슴이 부풀어 편지를 쓴다. 샤를르 브와이에처럼 우아하고 매력적인 스페인 신사 니콜라스의 방문을 받은 코랄, 그녀는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실상 그의 정체는 빈털터리에다가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쓰고, 엉터리 스페인 억양을 흉내내어 돈많고 홀로사는 여자들을 꼬셔 돈을 뜯어내는 삼류 제비였다."

"뚱뚱하고 못생긴데다가 재산도 없고 두 아이의 엄마인 코랄은 당연히 니콜라스의 표적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갈 차비마저 없는 빈털터리인 니콜라스는 코랄과 하룻밤을 보내고는 그녀의 지갑을 훔쳐서 달아난다. 그리고는 이내 그녀에 대해서는 잊는다. 그러던 어느날, 코랄이 두 아이를 데이고 니콜라스를 찾는다. 당황한 니콜라스는 그녀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하고 코랄에게 엄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실망한 코랄은 니콜라스가 자신의 아이들 때문에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길로 두 아이를 고아원 앞에 버리고 니콜라스의 집으로 돌아온다."(코랄이 엉엉 울면서 사랑을 위해 두 아이를 고아원에 버리는 장면은 압권 중의 하나이다.)

"니콜라스가 외출한 빈 집에서 코랄이 발견한 것은 자신과 똑같이 수많은 여자들에게서 온 편지와 사진, 그리고 NO가 그려진 자신의 편지였다. 코랄은 니콜라스의 과거의 의문스러운 약점을 잡아 니콜라스를 꼼짝 못하게 하고는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아이까지 버리고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코랄의 광적인 사랑에 감동받은 니콜라스는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제 둘은 동업자가 된 것이다. 코랄은 니콜라스의 사업이 번창하도록 돕기로 하고 표적이 될 여자들을 직접 고른다. 그러나 사업이 무르익어 갈때마다 질투심에 눈이 먼 코랄은 순간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곤 한다. 이제 그들은 단순한 동업자가 아닌 피로 맺어진 불안하고 광적인 사랑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결국은 형장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 커플의 엽기 살인행각을 따라가는 로드무비가 <짙은 선홍색>이다. 그리고 그런 게 내가 말하는 '바토스의 영화'이다.

 

 

 

 

또 다른 사례로 가령 낭만적 동경의 상징인 '푸른 꽃'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그 동경의 대상을 '푸르죽죽한 꽃'으로 변형시킨 시를 써보기도 했는데, 이런 식이다.    

  푸른 꽃향기에 나는 중독 되었구나 나는 눈이 멀었구나

  그대 살을 맞댄 자리에 이렇듯 깊이 박힌 대못이여, 내 몸의 가시여, 횡재여

  어느 입에 발린 사랑이 또한 나를 놓고 통곡을 하랴, 가슴을 치며, 물 말아먹으며

  마음의 일용할 양식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바대로 다 가져가리니

  가시를 묻은 자리에 피어나는 꽃들이여, 가시나무 꽃들이여

  너희의 다복한 일상에 어찌 찔리는 바 없지 않으랴

  우리가 서로를 아파하고 아프게 하며 이렇게 살아가는 음풍농월에 지화자,

  언젠가 햇빛 짱짱한 날에 백마 타고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우리를 

  개 패듯이 패리니

  그날에 마치 짙푸른 깻잎처럼 다시 푸르게 피어날

  목숨의 향연이여, 인과(因果)의 향연이여, 푸르죽죽한 꽃향기여!

 

여기엔 물론 노발리스의 '푸른 꽃', 이육사의 '광야', 니체의 '초인'의 어구나 이미지들이 혼종돼 있으며 그러한 혼종을 통해서 의도하는 효과가 '바토스'이다. 이 바토스는 파토스를 부정하면서도 보존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 지양의 한 문학적 등가물이기도 하다. 언젠가 보다 체계적인 '바토스의 시학'에 바탕을 둔 도스토예프스키론을 쓰고자 한다. 그것이 내 인생의 한 목표, 즉 '푸르죽죽한 꽃'이다...

 

05.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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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29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1-29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한때는 제 별명이 '개그맨'이기도 했습니다. 실없이 웃긴다고...

토마스 2005-12-07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짙은 선홍색>은 국내에서 개봉된 바 있습니다^^
 

'나의 고전'이란 제하의 원고를 청탁받고 작성한 글을 옮겨놓는다. 내가 고른 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사르트르'였는데, 문학작품은 가급적 피해달라는 주문이 있었기 때문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란 강연 팜플릿을 골랐다. 내가 아는 한,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올해 <문학과 사회> 여름호와 <현대문학> 10월호에서 특집이 꾸며졌다. 하지만, 이 '과거의 영웅' 철학자에 대한 주목은 소략한 편이다. 말년의 주저 <변증법적 이성비판>이 번역돼 나올 거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올해 책이 나오는 건지는 의문이다. 하물며 <집안의 백치> 같은 걸 기대하기는 현상황에서라면 더더욱 어려울 듯하다. 그런 게 아무튼 작금의 '상황'인 듯하다. 나는 그냥 나대로 그러한 상황에 편승하거나 거스르면서 내가 치러야 할 빚을 까나가도록 하겠다(연말까지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2-3편의 페이퍼를 더 쓸 계획이다). 무슨 빚? 청년시절의 우상에 대한 빚 말이다...

일반적인 고전들과는 달리 ‘나의 고전’에는 ‘이 나’라는 단독성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아무나의 고전’이 아닌 ‘나의 고전’이란 의미에서 ‘왜’란 물음 대신에 ‘왜 하필’이란 물음을 수반한다. ‘왜 고전인가?’가 아니라 ‘왜 하필 나에게?’란 물음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우연찮게도 그 물음은 어떤 고유한 죽음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과 상동적이다. 어떤 죽음에 대해서 ‘왜 하필 그가?’라고 묻는. 그러한 물음에 대하여 나는 아직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하필 그때 그가 그렇게 죽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 하나의 ‘고전적인’ 생애로 각인되었다는 것이다. 그 죽음은 1980년 4월 15일에 일어났으며, ‘장-폴 사르트르의 죽음’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사진은 사르트르의 장례 행렬).

바로 전해 10월 26일에도 매우 충격적인 죽음이 있었다. 나는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죽음이 몰고 온 충격적인 정황들 때문에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처럼 한 죽음의 간접적인 목격자이자 경험자가 되었다(TV에서는 며칠 동안 장송곡이 흘러나왔다). 분단국의 한 독재자가 연회장에서 부하의 흉탄에 맞아 숨진 것인데, 그 비극적인 죽음은 그러나 성대한 장례식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죽음’으로서의 아우라를 거느리지 못했다. ‘흔한 죽음’이었기에(대개의 독재자들은 그렇게 죽지 않던가?).

해서 어린시절,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까운 사람들 중 아무도 죽어주지 않던 내게 먼 이방인 철학자의 죽음과 성대한 장례행렬에 대한 자세한 보도는 그 죽음을 가장 매혹적인 어떤 것으로 각인시켜주었다(나는 신문의 일면 전체를 장식했던 이 장례식 보도와 사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신문지를!). 정치 대신에 문학을 인생을 걸 만한 일로 간주하면서 내가 작가로의 길을 꿈꾸게 된 건 아마 그 이후였던 듯하다(비록 아무런 작품도 아직 쓰지 않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작가이면서 철학자, 혹은 철학자이면서 작가. 나는 그런 저자가 되고 싶었다(‘저자의 죽음’이란 유행어가 떠돌 때는 나도 따라 죽고 싶었다). 그 고유한 죽음의 주인이었던 그 사람 사르트르처럼 말이다.

 

 

 

  

장-폴 사르트르(1905-1980).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사망 2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흔히 그의 데뷔작 <구토>(1938)나 철학적 주저 <존재와 무>(1943), 혹은 자서전 <말>(1963)이 그가 남긴 ‘고전’으로서 자주 입에 오르내리지만, 그러한 ‘일반적인’ 고전들 대신에 ‘나의 고전’으로 꼽을 만한 책은 1945년 10월에 있었던 강연을 책으로 묶어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1946)이다(그러니까 이 ‘팸플릿’은 내년에 환갑을 맞는다). 대학 초년생들도 읽을 수 있는 가장 쉽고, 가장 얇은 책!(<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2종의 국역본이 있다. 하지만, 마음놓고 인용하기에는 미덥지 않은 면이 있다. 새 정역본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대중강연의 원고였던 만큼 가장 확실하고 일목요연하게 자기 철학의 핵심을 짚어주고 있는 이 저작은, ‘공적인 교수들’과 대비되는 ‘사적인 사상가’로서 사르트르를 자신의 ‘스승’으로 경외했던 들뢰즈 또한 연극 <파리떼>의 초연, <존재와 무>와 함께 ‘사건’으로 간주했던 작품이다: “이들은 오랜 밤들을 지나온 우리가 사유와 자유의 동일성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던 작품들이다.”(Deleuze, "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77쪽)

  

참고로, 들뢰즈의 글모음집인 이 책은 불어본이 2002년, 영어본이 2004년에 편집돼 나왔으며, 단행본에 묶이지 않은 들뢰즈의 글 대부분을 카바한다. 1975-1995까지 발표된 글모음집이 될 제 2권은 "Regimes of Madness and other texts"란 제목을 갖고 있으며 근간 예정이다. 국내의 '들뢰즈 열기'를 감안하면 곧 번역/출간되어야 할 책이다. 책에는 1964년 11월 28일, 그러니까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 파문 한달 뒤에 들뢰즈가 'Arts'지에 투고한 글이 실려 있는데,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He Was My Teacher)"란 제목이다. 

 

 

  

 

한편, <문학동네>(2004년 겨울호)에 실린 실린 가라타니 고진의 평문 "근대문학의   종말"은 서두에서 "문학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정의를 인용하고 있는데,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결미에 나오는 이 구절을 그는 들뢰즈의 텍스트로부터 재인용하고 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르트르와 들뢰즈 두 철학자간의 연계성을 떠올려볼 수 있다.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한 들뢰즈의 평가를 직접 옮겨보면 이렇다.

"그의 철학 전체는 재현이란 관념, 재현이라는 질서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변적 운동이었다. (그에게서) 철학은 그 자신을 '선(先)판단적인', '전(前)-재현적인' 보다 생생한 세계에 정초하기 위해서 판단의 영역을 떠나 그 활동 무대를 바꾸었다."(His whole philosophy was part of a speculative movement that contested the notion of representation, the order itself of representation: philosopy was changing its arena, leaving the sphere of judgment, to establish itself in the more vivid world of 'pre-judgmental,' the 'sub-representational,')(78쪽) 이러한 평가는 들뢰즈 자신의 철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때문에 사르트르와 들뢰즈의 차이보다 더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그들간의 접점과 연속성이다).  

본론으로 돌아와보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경우 나는 2종의 국역본 외에 불어본(신아사, 1973)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영역본은 월터 카우프만이 편집한 <도스토예프스키에서 사르트르까지의 실존주의>(1972/1988)에 실려 있다. 니체 번역자이자 전문가로 잘 알려진 카우프만의 책으론 국내에는 <헤겔: 그의 시대와 사상>(한길사, 1995), <인문학의 미래>(미리내, 1998)가 소개돼 있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주저라 할 <니체: 철학자, 심리학자, 반그리스도>(1975)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예전에 니체학도들에게는 필독서였다). 

사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내용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선언적으로 제시돼 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주의’에 대한 오해와 비난들에 맞서서 실존주의는 무엇이 아닌가, 반대로 실존주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휴머니즘인가를 논변해 간다. 거기에 대전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자유이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란 명제이다(사르트르는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읜바, 그것을 행운으로 간주한 ‘후레자식’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자유를 죽었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말했다.)

사르트르가 예로 들고 있는바, 종이칼이나 망치 같은 것을 제작할 경우에는 그 제작에 앞서서 어떤 개념 혹은 디자인이 먼저 요구된다. 머릿속으로 만들고자 하는 물건의 개념(본질)을 떠올리고 그에 따라 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 실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보다 일관성 있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따를 때(사르트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마르셀과 야스퍼스 등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이다), 신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인간에겐 어떠한 본질도 사전에 주어져 있지 않다. 즉 실존은 아무런 사전 개념이나 계획 없이 존재하기에 본질에 앞선다.

따라서 ‘보편적 인간성’이란 없으며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이러한 근거에서 인간은 이끼나 토마토나 양배추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이어나가는 ‘지향적 존재’이다. 요컨대, “나는 내가 만들어!”라는 것이며(“사랑은 내가 해!”란 드라마 대사는 사랑에 대한 사트르르적 태도를 잘 집약해준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즉 “나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이것이 실존주의의 윤리이며, 이러한 책임으로부터의 도피가 ‘자기기만’이고 ‘불성실’이다. 자유에 처형된 존재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자유로우며 따라서 언제나 선택할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의 실존과 주체성을 우주의 한복판에, 초월적 중심에 갖다놓는 ‘오만한’ 철학이 어찌 휴머니즘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렇게 큰소리 칠만 했던 것이 대략 <현대>지를 창간하던 1945년부터 10여 년간이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르트르의 전성기였다. 해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는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당당한 한 지적 거인의 목소리가 육성으로 배여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에 매혹되어 나는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생각은 좀 바뀌었다.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자유로운가란 물음을 던지면서, 사르트르적인 ‘낭만적 합리주의’(아이리스 머독)에 대해 얼마간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후에 구조주의나 정신분석학 책들을 읽으면서는 이 사팔뜨기 철학자의 ‘영웅주의’ 철학이 갖는 유효성에 대해 의문을 갖게도 됐다(영국의 저명한 여성 작가 아이리스 머독의 'Sartre, romantic rationalist'(1953)은 영어권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이기도 하다. 머독의 평가는 적절해 보이는데, 나는 사르트르와 들뢰즈 모두 '낭만적'이란 수식어를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한 건 그가 나의 ‘영웅’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이때의 영웅성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참고로, <현대>지 창간사는 1966년 <창작과 비평> 창간호에 번역/소개된다. 사르트르의 시대정신은 <창작과 비평>의 창간사도 겸하고 있었던 것.)  

   

가령 사르트르의 전사(前史) 혹은 사르트르 이전의 사르트르.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떠났던 8개월간의 유학생활에서 돌아온 사르트르에게 곧 30세 남자의 위기가 들이닥쳤다. 그는 거울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대머리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랫동안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마사지해야 했다. 1934년 겨울이었고, 그는 르 아브르에서 키가 작고 뚱뚱한, 그저 늙어가는 시골 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부풀어오른 코담배갑처럼 혐오감을 일으키는 구제불능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한 친구는 그에게서 비곗살을 빼준다고 스웨터를 입은 그의 배를 두 손 가득히 움켜쥐고서 짓궂게 괴롭히기까지 했다! 이것이 내가 읽은 두툼한 전기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대목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 만에 그는 자신을 우리가 아는 ‘사르트르’로 만들었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였다. 그는 실존주의가 ‘행동과 앙가주망의 모럴’이라는 걸 직접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주었던 것. 해서, ‘나의 고전’은 적어도 사르트르의 경우에는 그의 책들이 아니라 그의 생애라고 말해야 온당할 듯싶다. 문학에 대한 사르트르의 언명을 조금 비틀자면, “고전은 그 본질상 영구혁명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자 ‘자기-되기(becoming-Self)’의 행동/사건이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05. 11. 28.   

 

 

 

 

P.S. 글의 제목은 (보다 관례적인) '사르트르의 삶과 철학'을 비튼 것이다. 내게서 그의 철학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의 삶이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되었던 것처럼(2002년판 TV용 <닥터 지바고>는 반대로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한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1965) 시작 장면은 오늘처럼 비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저녁 무렵으로 기억된다. 집에 가서 두 명의 지바고를 다시 보고 싶은 저녁이다. 러시아어 '지바고'의 어원적 의미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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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르트르를 발가벗기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1 23:45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고 나니 20세기 원조 지식인이라고 할 사르트르에 관한 평전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르트르 세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알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 역자는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 교수다. 968쪽에 달하니까 얼추 안니 코헨 솔랄의 세 권짜리 평전 <사르트르>(창, 1993)에 이어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네파벨 2006-01-12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사르트르의 "파리떼"라는 단편을 읽어보셨는지요...
중학교 1학년때 집에있는 세계문학전집에서 그 단편을 읽고..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엘렉트라의 오빠)의 복수를 소재로 한...햄릿과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카뮈의 이방인....등등의 이야기를 한데 섞어놓은 듯 한 그런 이야기......)
망치로 머리를 맞는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살면서 몇 번 경험하기 힘든 진정한 epiphany의 순간이었다고 할까요.....

아마...그 책이 저에게 특히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건...

절대 도덕, 절대적 사랑, 절대적 힘, 완전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던 어린시절의 알에서 막 깨어나오던 시절이어서 더욱 그랬을 거예요.

그 이후로 사르트르를 저의 우상으로 삼고...저 위에 언급된 그의 많은 저서들을 사놓고 읽어보았으나...까만건 글씨 하얀건 종이.....수준으로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이후 사르트르는...
좀 더 approachable한 까뮈나 보봐르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파리떼>가 담겨있던 그 책은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렸는데...언젠가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하지만 그 감동은 되찾을 수 없을것 같아요. 한번 흘러간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그지 못하듯....

로쟈 2006-01-1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문문고본으로 갖고 있었는데 가물가물합니다. 드라마 아니었던가요?.,

이네파벨 2006-01-12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연극 대본 형식이었어요.
사르트르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데...역시 로쟈님이십니다.^^
 

연말이 가까워지니까 이래저래 못다한 일들이 작당하여 "언제까지 할 건데?"라고 협박을 하기도 하고, 예기치 않은 일들까지 새로이 몰려다니며 "이것도 좀 해보지?"라고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기도 한다. 나는 협박에도 약하고 추파에도 약하다. 그러니 더더욱 진퇴양난이다. 머리가 손가락 수의 절반만이라도 됐으면 싶다(분신술 수련이라도 해야 할까?). 그럼, 능력있는 남편에, 자상한 아빠에, 명민한 학자에, 재능있는 작가에, 얼치기 정부(情夫)까지 5역 정도는 해낼 수 있을 텐데, 사정이 그러하질 못하여 유감스럽다(대략 '얼빠진 30대 가장'이 내 모습이다. 내가 집사람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정신나갔어!'이다). 그저 저녁 먹은 걸 소화시킨다는 이유로 또 책 얘기나 늘어놓는다.

 

 

 

 

가장 먼저 꼽을 책은 한나 아렌트(1906-1975)의 <과거와 미래 사이>(푸른숲)이다(내년이 아렌트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로군!). '푸른숲 필로소피아'의 13번째 책으로 나온 것인데, 9번째 책이 <칸트 정치철학 강의>였고, 12번째 책이 <정신의 삶> 3부작 중 제1권 '사유'였다. 세 권의 책을 옮김 역자 3인이 소위 '아렌트 3인방'으로 한국에 아렌트 번역/수용을 주도하고 있는 연구자들이다. 이번에 나온 <과거와 미래 사이>는 1968년에 나온 책인데,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연습'이란 부제를 갖고 있고, 당연히 8편의 논문 모음으로 돼 있다. 몇 년전에 아렌트에 심취하여(김선욱 교수의 <정치와 진리>가 계기였던 듯하다.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인연으로 저자와 메일을 교환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주저들과 연구서들을 구했었는데, <과거와 미래 사이>도 거기에 포함된 책이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아카넷, 2002)와 함께 이번 겨울에 읽어볼 짬을 내봐야겠다.

역자인 서유경 교수가 이전에 옮긴 책은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 2000)이다(나는 그 책의 원서까지 제본해서 갖고 있다). 알다시피 1920년대 대학 초년생 아렌트와 젊은 교수 하이데거는 사제지간이면서 그 이상의 연인관계를 잠시 유지했었다. 유부남 교수와의 관계에 대한 부담 때문에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추천에 따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던 야스퍼스의 지도학생이 되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유태인이었던 아렌트는 이후 1930년대 히틀러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학계와 언론계에서 지적인 명성을 쌓게 된다. 출세작은 '악의 평범성'을 묘파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과 함께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1)과 <혁명론>(1968)을 비롯한 나머지 주저들은 번역돼 있다.

아렌트의 고유한 용어들의 번역 문제가 제기되기는 하지만, 그녀에 관한 유일한 전기로 알로이스 프린츠의 <한나 아렌트>(여성신문사, 2000)를 참조할 수 있다. 아렌트 자신이 훌륭한 전기적 스케치들을 남기고도 있는데, 그녀의 저작으론 최초로 소개된 듯한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지성사, 1983)이 그 전범이다(현재는 절판돼 있는데, 재출간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러시아아어본도 갖고 있다). 얼마전에 나온 손택의 <우울한 열정>(시울)과 견줄 만한 책이다. 사실, 벤야민론에 있어서는 아렌트가 손택의 선배인데, 최초의 영역본 선집 <일루미네이션>을 편집하고 해설격의 서문을 붙인 이가 벤야민과 교우가 있었던 아렌트이다. 그녀의 벤야민론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일루미네이션>의 국역본인 <문예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7)에 수록돼 있다(모두 절판된 책들이지만).

 

 

 

  

두번째 책은 이미 지난주에 언론에 소개되었고, 기대만큼의 반응을 불어일으키고 있는 듯한 <대담>(휴머니스트)이다.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인문과학이란 제유가 가리키는 이는 영문학 전공의 도정일 교수이고 자연과학이란 제유가 지칭하는 이는 사회생물학 전공의 최재천 교수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간판급 지식인들인데, 연배로는 도정일 교수가 위이지만 두 사람은 (띠)동갑내기이다. 출판사 '휴머니스트'의 기획이 돋보이는 책인데, <대담>은 이승환, 김용석 교수의 대담을 기록한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2001), 임지현, 사카이 나오키 교수간의 대담을 기록한 <오만과 편견>(2003)에 이은 '물꼬틀기'의 세번째 책이다. 나는 세 책을 모두 진작에 사두게 됐는데, 아마도 이번에 나온 <대담>을 가장 먼저 읽게 될 거 같다. 내용이 나의 관심사와 가장 밀착돼 있기 때문이다.

'늦깎이' 평론가 도정일 교수의 첫평론집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민음사, 1994)가 나온 게 벌써 10년도 더 전이다(도교수는 작고한 평론가 김현보다 한 살 더 많다!). 저자는 그때 이미 수 권의 책들을 조만간 한꺼번에 낼 거란 예고를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러한 예고는 <대담>의 머리에서도 다시 읽게 된다. 이번 만큼은 공약(空約)이 아니었으면 싶다. 그만큼 기대를 걸고 있는 독자들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셔야겠다.

 

 

 

 

이상에서 이미지로 나열한 책들이 번역서들을 제외하고 내가 갖고 있는 최재천 교수의 책들이다. 단독저작으로는 올봄에 나온 <당신의 생을 이모작 하라>(삼성경제연구소, 2005) 정도가 빠진 듯하다. 물론 <개미제국의 발견>을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만하면 애독자로서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자연과학 전공자로서 최재천 교수는 발군의 필력을 자랑한다(황소개구리에 관한 글이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니!). 한국의 도킨스라고나 할까?(그는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나의 고전'으로 꼽기도 했다). 하긴, 애초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최교수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윌슨에 대한 관심이 연장된 것이다. 사제지간의 끈끈함을 보여주는 번역서들이 또한 아래와 같다(두 사람의 공통 키워드는 '개미'이겠지만).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최재천 교수의 지론이다. 그게 인간관계에도 적용이 될는지는 의문이지만(그쪽이라면,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라는 정현종의 시구에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자연과학에서라면 옳은 주장으로 보인다. '통섭' 효과라도 발휘가 돼서 그런 사랑이 인문학적 앎에도 통할 수 있었으면 싶다. 그게 바람이긴 하지만, 내가 아직 더 끌리는 쪽은 정신분석학이 말해주는 진리이다. "알면 사랑하지 않는다!" 왜 있잖은가, 이런 푸념들. "내가 그걸 몰랐던 거지!" "내가 바보였던 거야!" "진정 난 몰랐었네!" 그리하여 신파조의 결론: "이렇게도 사랑이 괴로울 줄 아아알았다면..."

 

 

 

 

한편, 생물학 분야의 책으로  루이키 루카 카발라-스포르차의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지호)와 재출간된 <에덴의 강>(사이언스북스)도 일독할 만하겠다. 예전에 <에덴 밖의 강>(동아출판사, 1985)로 출간됐던 도킨스의 책은 도킨스 입문서로서도 가장 적격인 책이다.   

 

 

 

 

세번째 책은 역시나 기획이 돋보이는 책인데, 60년대 문단에 '감수성의 혁명'(유종호)를 가져왔던 작가 김승옥을 문학적 생애를 기념/조명하고 있는 책 <르네상스인 김승옥>(앨피)이다. 그와 나란히 나온 책이 (이번에 처음 안 사실인데) "4.19 혁명의 기운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1960년 9월 1일부터 1961년 2월 14일까지 167일간, 대학생 김승옥이 서울경제신문에 연재한 네 컷짜리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을 해설과 함께 보여주고 있는 <혁명과 웃음>(앨피)이다. "만화의 인물, 아이콘, 상징들은 모두 대중적인 표상으로서 당시의 인간과 사회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작년에 새롭게 출간된 <김승옥 소설 전집>(문학동네)과 함께 꽂아둘 만한 자리를 서가에 두는 것이 좋겠다. (흔히 4.19세대라 불리는) 한 세대의 문학적 초상과 정신을, 그리고 그 감수성을 거기에 고스란히 모셔두고 음미해보는 것도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일 테니까.

 

 

 

 

네번째 책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마누엘 푸익이 1973년에 발표한 세 번째 장편소설"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현대문학)이다. 제목은 왕가위의 영화 <해피 투게더>의 원제로 익숙한데, 그게 푸익의 원작이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알았다. "내 영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마누엘 푸익이다."(왕가위) 설명을 보태면, "반페론주의적 성향과 동성애 관계에서의 남성성의 비하를 문제 삼아 1973년 출간되자마자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모티프가 된 책으로 화제가 되었다."

영화 <해피 투게더>(1997)도 한때 동성애 장면이 문제가 되어 수입이 보류되었던 적이 있었다. 대학가 축제때 야외에서 저녁시간에 영화상영되는 걸 본 적도 있는데(화질이 안 좋아서 주제가만 좀 들었다), 지금은 영화의 비디오와 음반도 갖고 있다. 물론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를 접하게 된 것도 이 영화를 통해서였고. 작년엔 이 영화의 메이킹 필름 <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2000)를 TV에서 볼 수 있었다. 생일파티를 맞은 장국영의 짓궂은 장난기도 메이킹 필름에는 담겨져 있었는데, 그가 더이상 우리 곁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아쉽다.  

아무튼 푸익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는 많은 걸 떠올려주는 소설이다. 그의 작품으론 <조그만 입술>(책세상, 2004)와 <거미 여인의 키스>(민음사, 2000)도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다. 윌리엄 허트가 주연한 헥터 바벤코의 영화 <거미여인의 키스>도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정치영화'인 걸 보면, 동성애는 푸익 문학세계의 중요한 코드인가 보다(푸익의 소설들을 모두 번역하고 있는 송병선 교수의 <영화속의 문학읽기>(책이있는마을, 2001)에는 이 영화에 대한 해설이 실려 포함돼 있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미국 작가 로버트 쿠버의 <잠자는 미녀>(열림원). 원제는 'Briar Rose'(1996)이다. 소개를 잠시 옮겨보면, "'하이퍼 픽션(Hyper-Fiction)'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소설가 로버트 쿠버의 <잠자는 미녀>가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의 열다섯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세간에 익히 알려진 그림 형제의 동화를 '다시쓰기' 한 작품으로, 잠자는 미녀 이야기에 대하여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버전들을 공주, 왕자, 노파 요정이라는 세 인물의 관점에서 나열한다."

사실 쿠버란 이름은 내게 <하녀 볼기치기>(책세상, 1987)의 작가로 각인돼 있는데,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무의식의 시학>(인간사랑, 2002)에는 이 작품에 대한 분석이 실려 있기도 하다(좀 어색하게도 <하녀 때리기>로 번역돼 있다). 많은 영감을 주는 작품이어서, 한때 언젠가 책을 쓰면 같은 제목을 달고, '주인과 하녀의 변증법'이란 부제를 붙일 생각을 하기도 했다(제목이 풍기는 인상으론 '헤겔과 페미니즘' 정도를 다뤄주어야 할 텐데, 어느 세월에!).

그런 작가가 지난 5월말에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내한하여 강연한바 있으며 나는 직접 작가의 육성을 들을 기회를 가져보았다. 후줄근한 차림의 쿠버 '교수'(브라운대학에선가 문예창작을 가르친다고)는 기대만큼의 카리스마는 보여주지 못했고, '하이퍼픽션'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해서 많은 걸 얘기하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 방면으론 아직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내 취향은 여전히 하녀의 볼기나 치는 것이다.  

참고로 동아일보(5.8)에 실린 김성곤 교수의 기고문을 잠시 발췌해 본다: "쿠버 씨는 집필이 끝나면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 소재한 명문 브라운대에 나가 창작을 가르친다. 쿠버 씨가 주관하는 ‘케이브(CAVE·최첨단 컴퓨터 영상화 센터)’는 전자시대의 문학을 산출하는 미래 소설의 인큐베이터다. 벽이 대형 스크린으로 돼 있는 가상 현실 랩이다. 그곳에 들어가면 컴퓨터그래픽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전자음악과 3D 가상현실이 뒤섞이면서 문학은 더 이상 종이 위의 고정된 활자가 아니라, 사운드와 동영상으로 이루어진 3차원 멀티미디어 종합예술이 된다."

-“나는 컴퓨터게임과 문학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보세요. 컴퓨터게임과 아주 흡사합니다.” 현실과 환상을 뒤섞어 새로운 형태의 문학을 만들어내는 쿠버 씨는 이렇게 말한다. ‘컴퓨터 소설의 대가’이자 ‘게임과 문학을 접목시키는 전자소설의 대부’라고 불리는 쿠버 씨가 73세라는 사실은, 나이를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최첨단 작가여서인지 쿠버 씨는 얼굴마저 동안(童顔)이다.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도 저는 말보다 스크린 이미지로 청중들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벌집문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구멍을 통해 들어가지만 우리는 결국 인터넷이라는 꿀통에서 만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교류하며 살고 있는 셈이지요.” 쿠버 씨의 아내 필라 씨는 46년 전 그가 스페인 체류 시 카탈루냐에서 만나 결혼한 여자다. “카탈루냐는 프랑스 쪽에 가깝다는 이유로 스페인에서는 차별받는 지역입니다. 그건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작가란 정신적 망명객과도 같아서 카탈루냐 사람들처럼 늘 소외된 삶을 살게 되니까요.”

-쿠버 씨는 아내 필라 씨에게 이번에 극동여행을 특별한 선물로 제공한다. 그의 대표작 <공개 화형>의 배경 가운데 하나인 한국을 아내에게 보여주기 위해 함께 서울에 올 계획이다. “현대판 마녀재판으로 불리는 매카시즘을 패러디하는 소설 <공개 화형>을 쓰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어 1985년 한국을 방문했지요. 이제는 인터넷 강국이 된 한국을 20년 만에 다시 찾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밤이 오면 쿠버 씨는 집에서 영화를 본다. 그의 소설 <영화 보는 밤>은 바로 문학과 영화를 접목시킨 소설이다. 아예 영화처럼 1부와 2부 사이에 막간 휴식도 있다. 쿠버 씨의 하루는 동화들에 대한 패러디 소설 집필로 끝난다. 최신작 ‘계모’에서는 계모가 등장하는 여러 동화들의 재해석을 통해 여성 문제와 성장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하나의 고정된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이끌어냄으로써, 동화들을 시대마다 다시 태어나게 하는 거지요.”

-그는 진부한 리얼리즘 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향해 이렇게 질타한 적이 있다. “차라리 다시 한번 고래 뒤를 추적하거나, 헨리 밀러처럼 유랑의 길을 떠나거나, 아니면 신화나 동화의 세계를 탐색해 보라.” 쿠버 씨는 지금 사이버공간 속에서 문학의 미래를 탐색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은 안개를 뚫고 수면 위로 솟아오르는 흰 고래 ‘모비 딕’처럼 이제 우리 앞에 그 신비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나온 '동화'는 바로 그런 계열의 책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읽고 싶은 건 <공개 화형>이나 <영화 보는 밤> 같은 작품들이다. 순서상으로도 그렇지 않은가? 한국전쟁과도 무관하지 않은 <공개 화영> 같은 소설이 아직 번역/소개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태는 나만의 것은 아닌 모양이다...

05. 11. 23-24.

P.S. 일본의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동아시아) 두 권, <대칭성 인류학>과 <신의 발명>이 새로 나왔다. 해서 시리즈는 모두 5권이 되었다(몇 권이 더 나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를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않았기에 뭐라 말할 처지가 못된다. 애독하시는 분들의 리뷰를 기다려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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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11-23 22:04   좋아요 0 | URL
오옷 스포르차의 책이 나왔군요!
맥닐의 책과 함께 무진장 기다리던 책인데...

비로그인 2005-11-23 22:45   좋아요 0 | URL

로쟈님, 저번에 소개해주신다고 하셨던 이 책 말이예요,

괜찮은 책인가요? "과학혁명의 구조" 너무 읽기가 고역이라서....

저 또 그리고 스피박 넘기 이 책 번역 상태가 어떤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로쟈 2005-11-24 13:01   좋아요 0 | URL
구스님/ <토마스 쿤>은 제가 안 갖고 있어서 뭐라고 말씀드릴 수 없네요.^^ 소개로는 읽을 만한 책입니다. <스피박>은 제가 원서와 함께 갖고 있는 책이지만 당분간은 손이 가지 않을 책이기도 합니다. 들뢰즈, 벤야민, 데리다, 지젝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라는 데다가 전공쪽의 책들도 산더미인지라... 언제 갑자기 마음이 동하면 리뷰는 쓰고 싶지만...

롯데명품위즐 2005-11-28 22:0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음.. 제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저는 로쟈님과는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래도 정말 궁금한 게 있어서 염치불구하고 메일을 드렸습니다.
제가 라캉에 대해 오인한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들뢰즈와 라캉을 접속시키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무리하게 생각해봤습니다. 흠..... 왠지 제가 메일을 드린 게
후회가 되네요.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로쟈 2005-11-29 09:34   좋아요 0 | URL
위즐님이 보내신 메일을 확인했습니다. '무의식'과 '되기'가 유사하지 않나고 하셨는데, '무의식-되기'가 불가능할 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일단은 '감'에 의지하기보다는 두 철학자에 대한 가감없는 '읽기'에 몰입하시는 게 더 생산적일 듯합니다(물론 독학보다는 대화적 소통이 더 바람직합니다. 이미 나와 있는 논의들도 참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와 라캉'이란 주제 자체가 상당한 견적의 사유를 요구하니까요. 라캉에 대하 '오인'하신 부분을 더 늘려나가시다 보면, 새로운 통찰을 발견하실 수도 있고, 굳이 저에게 문의하지 않으실 정도의 자신감도 얻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롯데명품위즐 2005-12-01 11:29   좋아요 0 | URL
친절한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내년이면 폴란드의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1941-1996)의 사망 10주년이 된다. 그의 이름은 'Krzysztof Kieslowski'로 표기되는데, 몇 가지 이형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키에슬로프스키)'라고 읽어주는 게 일반화된 듯하다. 여하튼 그 이름은 타르코프스키란 이름과 함께 나를 숙연하게 만드는 이름이다. 지난 90년대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동시대 감독으로서 그는 언제나 영감과 경탄의 원천이었다. 그보다 10년 전에 죽은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영화가 어떻게 시의 깊이에 도달하는지를 보여주었다면(내년이면 사망 20주년이군!), 키에슬롭스키는 영화가 어떻게 철학적 사유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시사해주었다. 물론 겸손했던 그 자신은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문학에 비해서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지 하소연하기도 했지만.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로 내가 제일 처음 본 건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이었던 듯하다(원제는 '베로니크의 두 가지 삶'). 기억에는 허리우드극장에서였던 듯한데, 연거푸 두 번을 보았고 이후에도 개봉관에서 한번 더 본 영화. 이후에 비디오로도 보고(몇년 전에 교보문고 지하도에서 구입한 중고 비디오는 유감스럽게도 정품이 아니라 복사품이어서 화질이 떨어진다. 2,000원짜리도 안 될 걸 8,000원이나 주고 샀었다! 환불하려고 벼르다가 끝내 교보쪽으로 다시 갈 일이 없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영화 자체도 매혹적이었지만, 주연을 맡았던 이렌느 야곱(1966- )의 신비한 매력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 물론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도 귓가를 오래 맴돈다(나는 영화속 가상의 작곡가인 '반덴 부덴마이어'의 음반을 사러 돌아다니기도 했었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베로니카의 이중 생활베로니카의 이중 생활레드

이렌느 야곱의 모습은 이후에 '삼색' 시리즈의 <레드>(1994)에서도 다시 만나볼 수 있었는데, 영화 관람 후에 얻는 포스터를 상당히 오랫동안 벽에 붙여놓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삼색' 시리즈의 시나리오 영역본과 키에슬롭스키의 대담집 등을 구하게 되었고, 며칠 전에는 그에 관한 새로운 연구서들이 나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중 안네트 인스도르프(Annette Insdorf)의 연구서 <두 가지 삶, 두 번의 기회(Double Lives, Second Chances)>(1999)는 막바로 구할 수 있었는데, 흥미로운 건 이렌느 야곱(Irene Jacob)이 짤막한 서문을 붙이고 있는 것. 책 중간에 저자가 키에슬롭스키와 함께 찍은 사진들도 들어가 있는 걸로 보아 이렌느 야곱과도 친분이 있었던 듯싶다. 키에슬로프스키의 한 인터뷰를 에피그라프로 하고 있는 이 서문을 옮겨보면 이렇다(아래는 책 표지. 저자는 콜럼비아대학 영화학과 교수이며 <영화와 홀로코스트> 등의 저작을 더 갖고 있다): 

세상은 휘황한 불빛들과 바쁜 걸음걸이, 코카콜라, 새로운 차... 이런 건만은 아닙니다. 또다른 진실이 있습니다... 내세에서요? 맞습니다, 틀림없이. 좋은 것일 수도 혹은 나쁜 것일 수도 있겠죠. 나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뭔가 다른 게 있을 겁니다.”(<텔레라마>지와 인터뷰에서 키에슬롭스키)

-크쥐시토프가 건네준 대본을 매번 다 읽고 나면 나는 항상 수수께끼들에 대면하곤 했다. 왜 그녀는 이 나무를 만지는 거지? 이 구두끈에서 그녀는 무얼 찾는 거야? 그녀는 왜 ‘마법 구슬’의 굴절된 빛을 통해서 풍경을 바라보는 걸까?(<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주인공은 투명한 플라스틱 공 모양의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그것은 바닥에 튕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빛을 분산시킨다.)   

-현장에서 내가 크쥐시토프에게 그 장면(scene)에 대한 아이디어가 뭐냐고 물어볼 때면 그는 대개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너한테 듣고 싶은 건데. 그게 나에겐 더 흥미로울 거 같아.” 그래서 내가 장황한 설명을 할라치면 그는 이렇게 가로막았다. “오호, 이렌코, 그건 너무 복잡해. 좀더 간단하게 말해주지 않을래요?”

-그는 현장에서 어떤 장면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걸 꺼려했다. 대신에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로 계속 발견하고자 했다. 이미 정해져있거나 틀지어져 있는 게 아닌 뭔가 새로운 해석을 말이다. 

 

-좋은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들은 열려 있다. 그래서 다양한 층위에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자기 안의 ‘마법구슬’을 사용하여 우리의 해석과 재해석이라는 굴절된 빛을 통해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경우에만이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궁금해하곤 한다. “왜 그녀는 그 나무를 만진 걸까?”... 그저 그 질문을 열어놓을 뿐이다.


-안네트 인스도르프는 이 멋진 연구서에서 크지시토프 키에슬롭스키 전작(全作)에 대한 통찰력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매 작품에 대한 해석의 가능성들을 넓혀놓으면서. 나는 그의 영화들과 인터뷰들을 새로운 호기심을 가지고 다시 방문해보았다. 내가 알지 못했던 아주 멋진 나무들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안네트는 우리가 그 나무들을 만져볼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루이 말의 <굿바이 칠드런>(1987)에 피아노 선생으로 처음 출연했었던 이렌느 야곱이 <베르니카의 이중생활>에 캐스팅된 것은 우연이었다. 키에슬롭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애초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앤디 맥도웰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케줄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고, 나중에 <블루>의 주연을 맡게 되는 줄리엣 비노쉬 역시 <퐁네프의 연인들> 촬영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그때 눈에 띈 것이 이렌느 야곱이며, 그녀는 이 영화로 칸느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이후에 안토니오니의 <구름 저편에>(1995)와 <오셀로>(1997) 등의 영화에 출연한 이렌느 야곱을 더 만나볼 수 있었지만, 그녀의 최고작은 아무래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으로 남게 될 듯싶다. 키에슬롭스키가 세상을 뜬 이상 말이다.

 

 

 

 

<레드> 이후에 키에슬롭스키는 감독직을 그만두었지만, 와병 중에도 <신곡> 3부작에 대한 각본 작업을 진행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키에슬롭스키판 <십계>(<데칼로그>)에 이어서 영화사에 남을 만한 유산이 되었을 텐데, 키에슬롭스키판 <신곡>을 끝내 만나볼 수 없게 된 것은 안타깝다. 원래 TV용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데칼로그>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두 편이 극장 상영판으로 따로 제작되기도 했다(두 버전은 런닝타임이 다르며 결말도 약간 상이하다). 

김용규 선생의 <데칼로그>(바다출판사, 2002)가 이 시리즈에 대한 유일한 참고문헌이다. 철학자/신학자로서 저자가 <데칼로그>의 핵심적인 전언들을 짚어내는 데 있어서 영화비평가들보다 더 깊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걸 책은 입증해준다. 저자는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이론과실천, 2004)도 내고 있는데, 이러한 저작들은 한편으론 한국 영화학계의 태만을 돌이켜보게 한다(하긴 한국영화사를 정리하는 데만도 일손이 모자랄 테니).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는 영화학에서의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에 지젝이 개입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책인데, 그가 키에슬롭스키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흥미롭다. 읽기에 만만찮은 책이지만, 읽을 만한 번역이며 충분한 보상을 제공한다.    

 Kieslowski on KieslowskiThe Films of Krzysztof Kieslowski: The Liminal Image

키에슬롭스키에 대한 기본적인 문헌은 <키에슬롭스키가 말하는 키에슬롭스키(Kieslowski on Kieslowski)>(1995)이며,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서는 Joseph G. Kickasola의 <키에슬롭스키의 영화세계(The Films of Krzysztof Kieslowski: The Liminal Image)>(2004). 나는 이 책이 물 건너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05.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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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5-11-23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제가......가장 인상깊게 본 영화...(가장 매혹적이었고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좋아하는...영화) 중 몇손가락 안에 꼽힐겁니다. (1위 2위 3위라고 순위를 정할 수는 없지만....)

삼색 시리즈 중에서도 레드를 단연 좋아했죠.

이렌느 야곱 역시.....너무너무 좋아요...

이 두 영화 말고...또 이렌느야곱이 주연한 키에슬롭스키의 단편 영화를 한 편 보았는데 제목은 기억이 잘 안나네요...
대학시절...정말 좋아하던 배우와 감독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로쟈님의 글...
싼타할아버지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의 맘으로 기다리겠습니다!

blowup 2005-11-23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로니카의 이중생활>과 <세 가지 색-레드>의 이렌느 야콥이로군요. 어여어여. 글 올려주세요.

로쟈 2005-11-23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키에슬롭스키 연구서 하나를 복사했는데, 이렌느 야곱이 짤막한 서문을 썼더군요. 제가 좋아했던 감독과 배우이기도 해서, 그걸 옮겨놓으려고 합니다. 대단한 글은 아니랍니다.^^

파란여우 2005-11-23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훈늉한 영화이죠
참고로 제 영세명이 뭐게요?^^

이네파벨 2005-11-23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베로니카??? ^^

mannerist 2005-11-2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망자2'를 아무 생각없이 보다가 눈 헉- 뜨고, 내내 통탄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쿨럭;;;;

검둥개 2005-11-23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전 이 영화를 어제 케이블에서 잠깐 봤어요. 십 년만에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는데 이렌느 야곱이 키에슬로브스키에 대해 쓴 글이 있다구요? 무척 궁금합니다. ^^ 이렌느 야곱은 <오델로>에서도 괜찮은 연기를 했죠.

이네파벨 2005-11-25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저도 삽입된 곡들이 너무 맘에 들어서..사운드트랙 앨범을 꽤 힘들게 찾아다니다 구매했던 기억이 납니다.(멜로디가 머리속에 떠오르네요. 배경으로 깔리던 곡들...베로니크가 노래한 합창곡....)

음...앤디 맥도웰이나 줄리엣 비노쉬가 연기한 베로니카는 상상하고싶지도 않네요.

배우의 이미지는 맡은 배역으로 각인되는 것이긴 하지만...
앤디 맥도웰은 신비스럽지도 순수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너무나 미국 냄새가 풍기잖아요...(세번의 결혼식...에 나온 그 이미지가 딱!)
줄리엣 비노쉬도 나름 개성있고 신비(?)스럽기는 하지만 그 개성과 신비감을 지나치게 돌출시키고 강요하는 타입이라 별로....(거칠게 말해 오버스럽다고 할까요..)

......
키에슬롭스키 감독이 벌써 죽은지 10년이 되었군요...(사실 죽은지도 몰랐지만..)
아름다운 우주 하나가 영원히 사라져버렸군요....

검둥개님, 케이블에서 이 영화를 해주었단 말이죠? 놓치다니....너무나 안타깝네요...지금 찾아보니 DVD 타이틀도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것 같아요...TV에서 이걸 보셨다니 그저 부러울 뿐...ㅠ.ㅠ

2007-02-28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들뢰즈는 자신의 저서들의 영역판에 새로이 서문들을 붙이고 있는데, 이 서문들에서 자신의 핵심적인 주장들을 잘 정리해놓고 있기 때문에 입문자들에게는 더없이 요긴하다. 국내에 출간되고 있는 들뢰즈 번역서들이 영역판에서 중역을 하는 대신에 불어원전을 옮겨오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한편으로 이 영역판 서문들이 소개되지 못하는 것은 아쉽다. 예외적인 경우라면, 영역판 서문을 부록으로 옮겨놓고 있는 <베르그송주의>(문학과지성사, 1996), 그리고 불어판을 옮기고 있는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2001)과는 달리 영역판을 옮긴 <니체, 철학의 주사위>(인간사랑, 1993) 등이다.

 


 

 

 

 

 

 

<니체와 철학>(1962) 영역판(1983) 서문은 역자인 '휴 톰린슨(Hugh Tomlinson)에게‘라는 헌사를 달고 있는데, 우리말로 옮겨진 첫문장은 이렇다: “어떤 책이 번역된다는 것은 항상 흥미로운 일이다.”(11쪽) 이에 대한 원문은 “It is always exciting for a French book to be translated into English."이다. 즉, ”어떤 불어 책이 영어로 번역된다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라는 것.


우리말 번역대로, 이 흥분은 ’번역 일반‘의 것일 수도 있지만, ’불어에서 영어로‘라는 특정한 번역에 한정된 것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 다른 언어의 번역본들에도 매번 서문을 달았는지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영어와 영미문학/철학이 갖는 의미가 좀 각별하다는 점을 여기서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경험론자로서 당대의 이질적인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를 나는 ’영국 철학자‘로 분류하고픈 유혹을 자주 느낀다).  


그에게서 왜 영어와 영국이 문제되는가? “니체가 가장 많이 오해되어 온 것은 아마 영국에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프랑스 합리주의와 독일 변증법에 맞서서 투쟁한 주요 주제들은 결코 영국식 사유들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것은 아니었다. 영국인들은 이론적으로 사용하기에 별다른 불편함이 없는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소유했었다. 그것은 니체를 통한 우회가 그들에게는 별로 큰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들의 ‘양식’에 어긋나는 니체의 바로 그와 같은 특별한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통한 우회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역본에는 생략돼 있지만(Tomlinson suggests), 이러한 지적은 영역자 톰린슨의 견해를 들뢰즈가 수용한 것이다.


즉, 합리주의와 변증법에 감염돼 있지 않은 영국인들에게 ‘니체 철학’이라는 처방(우회로), 혹은 '백신'은 불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면역돼 있는 상태였으며, 니체의 ‘망치로 하는 철학’ 대신에 이미 경험주의(empiricism)와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영국식 망치를 잘도 쓰고 있었던 것. 해서, 영국에서 니체는 (철학자들에게가 아니라) 소설가들, 시인들, 그리고 극작가들에게나 겨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철학적으로 수용된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수용됐다. 


여기서 상기해둘 것은 들뢰즈의 철학이 독특하게도 ‘장소’에 대해 질문하는 ‘지리철학(geophilosophy)’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를 기원으로 하는 서구 형이상학과 철학을 동일시한다면, 그의 철학은 반철학(anti-philosophy)이기도 하다. 그는 다른 기원, 다른 계보, 다른 종족의 철학을 기획했었다(작년에 나온 들뢰즈 가이드북 하나는 'Deleuze and Geophilosophy'란 제목을 갖고 있다).

 


 

 

 

 

 

아무튼 니체 철학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영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그가 처음에 전제하고자 하는 것은 니체 철학이 영국인들에게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으며 그것은 일면 필연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그는 비로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왜 위대한가? 철학의 이론과 실천 둘 다를 뒤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유자(thinker)를 날고 있는 화살에 비유한다. 그것은 또다른 사유자가 그 이외에 다른 곳에 그것을 쏠 수 있기 위하여 그 떨어진 곳을 찾는 그러한 화살이다. 그에 따른다면, 철학자는 영원하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으며 ‘반시대적(untimely)’, 언제나 반시대적인 것이다.”(12쪽) 그래서, 이 반시대성은 니체 철학의 표지이다.  

 


 

 

 

 

 

 

그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니체는 (철학사에서) 어떤 선배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오래전의 전-소크라테스학파(Pre-Socratics)와, 그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는 단 한 사람의 선배인 스피노자만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니체 철학의 계보는 단촐하다. 사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잘 알려진 것이다. 니체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삶을 ‘질병’으로 간주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러한 ‘병적인 철학’에 맞서서 니체는 삶과 철학에 건강을 다시 되돌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 ‘건강’의 문제는 들뢰즈에게서도 핵심적이다. 소크라테스의 금언이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면, 니체-들뢰즈의 금언은 “너 자신이 되라!”이다.

 


 

 

 

 

 

 

그렇다면 누가 불건강한, 병약한 자들인가? 주제를 파악한 자들이다. 그리하여, 삶을 두려워하는, 그래서 삶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삶을 (긍정하는 대신에) 부정하며 진정한 삶을 내세의 삶으로 유예시킨다. 말하자면, 감히 살려고 하지 않는다.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가령 체홉의 <벚꽃동산>에서 늙은 하인 피르스의 마지막 대사: “인생이 다 지나갔군. 산 것 같지도 않게!..” 왜 그런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긍정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노예로서 타성과 관습에 의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해서 자신의 삶을 어떠한 술어로도 고정/한정시킬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표어는 "삶은 다른 곳에 있다!(Life is elsewhere!)"이다.


반면에 건강한 자들이란 주제 파악 못하는 자들이다. 삶에 대한 넘치는 식욕으로 잠못 이루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삶은 지금/여기에 있다!(Life is here/now!)"이다. 그들은 언제나 앙콜(Encore!)을 외친다. "좋아, 한번 더!" 하지만, 이러한 긍정은 '이대로!'라고 건배하는 '부유한 노예'의 나르시시즘적 동일시와는 다른 것이다.

 

이 ‘너 자신이 되는 것(To become what one is)’에 대한 주판치치의 창의적인 주해에 따르면, ‘자신이 존재하는 바가 되는’ 순간은 합일의 순간이 아니라 순수한 분열의 순간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아는 순간’은 주체화로 진입하는 순간이자 합일의 순간이고, 니체의 ‘너 자신이 되는 순간’은 주체로 퇴거하는 순간이자 분열의 순간이다('주체화'와 '주체'의 차이는 토이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 참조. 한편, 이 ‘분열적 주체’는 막바로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이 분열의 표현들 중 하나는 퇴락 또는 부정의 원칙과 시초 또는 긍정의 원칙 사이의 구분이다.”(<정오의 그림자>, 43쪽) 그리고 이 분열에 대한 ‘개념적 인물들’이 그리스도(십자가에 못박힌 자)와 디오니소스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디오니소스란 그 분열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 “디오니소스는 십자가에 못박힌 자 뒤에,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서 오는 게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단순히 새로운 다른 가치들의 등가물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낡은 것의 몰락 이후에 오는 새로운 시대의 시초, 신기원의 아침이 아니다. 디오니소스는 한낮으로서의 시초이며, ‘하나가 둘로 변하는(one turns to two)' 순간이며 다시 말해서 새로운 그 무엇으로서의 바로 그 '둘이 됨(becoming two)' 또는 분열의 순간이다."(43쪽)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책세상판, 21쪽) 내가 좋아하는 번역본은 아니지만, 당장 옆에 있는 거라서 인용한다(내게 친숙한 것은 최승자 역의 청하판이다. 나는 5종의 국역본을 갖고 있다).

독어의 'Untergang'은 이행과 몰락의 뜻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안다. 내가 읽은 서론에서 주판치치가 들고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디오니소스란 따로 하나가 둘이 되면서 이러한 과정(이행)과 몰락을 동시에 수행하는 자, 그러한 순간의 이름이 아닐까도 싶다. 그런 것들은 새로이 니체 전집도 완간된 김에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나는 불어본과 함께 영어본, 러시아어본, 2종의 국역본을 갖고 있다)과 주판치치의 <정오의 그림자>를 마저 읽어나가면서 확인해볼 작정이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어쨌든 여기까지가 영역본 <니체와 철학>에 들뢰즈가 붙인 서문의 첫 페이지 '브리핑'이다. 원문보다 길어지는 것도 브리핑에 속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점점 쌓여가는 머리속의 글들을 처치(!)하기 위해서 이 글의 초안은 어제 자정 넘어 (아주 드문 일이지만) 집에서 작성한 것이다. 하지만, 몇 시간 걸려 한 페이지를 소화하는 걸 보면, 위대하기는커녕 내 위장이 얼마나 작은지 알겠다(떠들어대는 것들을 조지기 위해서는 깍두기들이라도 동원해야 할 모양이다). 언제쯤이나 주제 파악을 하게 될는지!..

05. 11. 23.

P.S. 그러니까 들뢰즈의 이 서문의 '본론'에 대한 브리핑은 또 미뤄지는 셈이 됐다(덕분에 애초의 제목과는 달리 니체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게 돼버렸다!) 그런 식으로 미뤄지는 만큼 수명도 연장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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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5-11-23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 자신이 돼라"에서 '되다'는 피동형이 아닌가요. 그래서 문맥과 상충하는 어미인 듯합니다. '하다'가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다형으로 하자면 문장을 변형해야겠지만요.
퍼가겠습니다.

로쟈 2008-11-1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다'는 어떻게 결합되는 것인지요? 문맥상 '하다(do)'와는 관계가 없는 내용이라...

포월 2005-12-29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의 식욕(?)에 까무라칠 지경입니다. @_@ 몇년 사이에 들뢰즈의 글 모음집이 프랑스에서 두 권으로 나왔는데, 그 중 첫번째 권이 영역되었고 둘째권은 잘 모르겠습니다. 뭐 ... 판권계약해서 한국어번역도 진행중일텐데, 프랑스어판 둘째권은 들뢰즈가 쓴 영역판 서문이 모조리 모아져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