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뤽 고다르 특별전이 열린다. 1월 3일부터이고 장소는 서울아트시네마이다. 관련기사를 읽은 건 '씨네21'에서인데, 유운성 평론가가 쓴 기사의 타이틀은 '이미지의 정치학을 사유한다'이다. 여기서는 경향신문의 간략한 소개기사만을 옮겨놓는다. 주로 80년대의 대표작들이 상영되는데, <주말 Week-end> <원 플러스 원 One Plus One> <즐거운 자식 Le gai savoir> <넘버 2 Numéro deux> <잘 돼 갑니까? Comment ca va> <열정 Passion> <카르멘이란 이름 Prénom Carmen> <탐정 Détective> 등 총 여덟 작품 가운데, <주말>과 <카르멘이란 이름>을 제외한 여섯 편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는 것이라고 한다. 영화팬들이라면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경향신문(06. 12. 29) 실험 가득한 ‘대가의 美學’ 장 뤼크 고다르전

현대 영화의 혁명가’ 장 뤼크 고다르 특별전이 1월3∼14일 종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감독 데뷔 이전 평론가로 활동했던 고다르는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해 관습적인 영화문법에 함몰돼 있던 이전 세대 프랑스 감독들을 혹독히 비판했다. 그는 1959년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를 내놓으며 새로운 영화언어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입증해보였다. 프랑수와 트뤼포 등과 함께 프랑스 누벨 바그를 이끌었고, 68년 5월혁명 이후에는 ‘지가 베르토프’ 집단을 조직해 기존 상업 배급망과 절연한 급진적 제작 환경을 실험했다. 상업영화계에 복귀한 80년대 이후에도 영화 미학의 한계를 실험하는 파격적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번 특별전에는 그동안 국내에서 보기 힘들었던 6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작품 8편이 소개된다. ‘주말’(67)은 파리 교외로 빠져나가려는 끝없는 자동차 대열을 10분간 보여주는 수평 트래킹 샷으로 유명한 걸작이다. 중산층 부부의 순탄치 않은 주말 여행 과정을 보여준다. 고다르는 영화의 공간적 깊이감을 의도적으로 제거해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얄팍함을 폭로한다. ‘원 플러스 원’(68)은 신보를 녹음중이던 록그룹 롤링 스톤스와 흑인 민권 운동가의 인터뷰를 콜라주해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대안 매체로서의 비디오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넘버2’(75), 이미지와 텍스트의 상관성에 대한 탐구 ‘잘 돼 갑니까’(76)도 보기 힘들었던 작품이다. ‘열정’(82)에선 이자벨 위페르, 한나 쉬굴라 등 유럽권 명우들의 연기를 볼 수 있다. 김성태씨(파리3대학 영화학 박사)와 김성욱씨(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가 6, 7일 강연을 통해 작품 이해를 돕는다.(백승찬 기자)

형편상 상영작들을 모두 챙겨볼 여유는 없는데, 그래도 <열정>(1982) 정도는 시간을 내고 싶다. 이자벨 위페르와 한나 쉬굴라라는 걸출한 여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본전은 뽑을 영화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개에 따르면, "렘브란트, 고야, 앵그르, 들라크루아, 엘 그레코의 걸작들을 영화적 활인화로 완벽하게 재현해낸 촬영감독 라울 쿠타르의 솜씨는 탄성을 내뱉게 만든다. 시몬느 베이유의 저서 <중력과 은총>에 대한 헌사이기도 한 이 영화를 두고 콜린 매케이브는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고다르 작품'이라 평하기도 했다"니까 더욱 궁금하기도 하고.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레흐 바웬사를 앞세운 자유 노조가 집권에 성공한 즈음, 폴란드 영화감독 예르지는 프랑스에서 TV 영화를 만든다. 명화들을 재현하는 이 영화는  예산을 초과하고, 영감마저 바닥난 듯 보이는 예르지는 지지부진하게 연출 작업을 한다. 한나는 영화 스태프들이 묵는 호텔 주인이다. 그녀는 공장을 운영하는 미셸과 함께 사는데, 미셀은 공장에서 일하던 이자벨을 해고한다. 한나와 이자벨은 예르지에게 끌리고, 호텔 메이드들은 영화 엑스트라가 되기 위해 일을 그만둔다. 이 영화를 알랭 베르갈라는 실재계와 사랑의 스펙타클의 차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라 칭했다." 이것만으로는 물론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한편, 고다르와 관련하여 놀라운 점은 그에 관한 단행본 저작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 내가 갖고 있는 책으로는 리차드 라우니의 <장 뤽 고다르>(예니, 1991)와 제임스 모나코의 <뉴 웨이브1,2>(한나래, 1996) 정도가 고다르와 누벨 바그를 다루고 있다. 고다르의 영화가 갖는 영화사적 맥락에 대해서는 로도윅의 <현대 영화이론의 궤적>(한나래,  1999), 로버트 스탬의 <자기반영의 영화와 문학>(한나래, 1998), 안니 골드만의 <영화와 현대사회>(민음사, 1998) 등을 참조할 수 있다. 모두가 중량감 있는 책들이다.

그 중에서도 로도윅의 <현대 영화이론의 궤적>은 원제가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The Crisis of Political Modernism)>(1989)이며, 조만간 자세히 읽을 계획을 갖고 있는 책이다. 그러고 보면 2000년 이후에 이 주제와 관련한 무게 있는 책들이 전혀 출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영상의 시대'란 말을 무색하게 한다. 다들 무슨 공부를 하는 것일까?(물론 전공자들이야 번역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지만.)

07.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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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3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7-01-03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라크루아적이고 앵그르적이네요. 잘 알았습니다.^^

나비80 2007-01-1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로쟈님의 페이퍼를 보고 있자면 세상이 풍요로운 느낌입니다.

로쟈 2007-01-12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안타깝게도 시간이 안 날 거 같습니다.--;
소이부답님/ 좋게 봐주시는 것일 테지요.^^
 

'사회적 독서'를 위한 점검으로 일단 한국사회의 현단계를 짚어보는 두 칼럼을 읽어둔다. 하나는 정치학자가 진단하는, 한국사회 20-30대의 급격한 보수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학자가 꼬집는바 좌파연하는 사회적 엘리트층의 생활우파화 경향이다. 나는 이게 2007년을 맞는 우리 사회의 '액면'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얼마만큼 변화할 수 있을까? 이달에 새로 바뀐다는 천원권, 만원권 지폐의 도안만큼이나 변화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액면'은 언제나 그대로 보존되는 것일까?

한국일보(07. 01. 01) 젊은 보수

새해가 밝았다. 지겨운 한 해가 끝난 것이 다행이면서도 정치권이 대선을 앞두고 얼마나 이전투구를 벌일지,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새해에는 무엇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지금 현재 워낙 인기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뒤 노 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대적으로 좋아질 것이다. 노 대통령이 최소한 3김 식의 제왕적 대통령제와 사당정치를 해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도하지 않은 성과도 있다. 그것은 국민통합을 이룬 것이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대부분 “연초부터 무슨 헛소리냐”고 분노할 것이다. 현 정부의 가장 큰 잘못 중 하나가 전투적 언행으로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고 국민분열을 가속화시킨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노 정부가 엉뚱한 방식이긴 하지만 국민통합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국민들이 반(反)노무현으로, 그리고 그 결과 한나라당 지지로 뭉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특히 지역대립에 이어 새로운 사회적 갈등으로 부상하던 세대갈등을 깔끔하게 해소시켜줬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 사회는 노 대통령을 지지하는 20~30대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50대 이상이 부딪쳤다. 그리고 노 대통령은 젊은 표 덕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이후 탄핵 사태도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 덕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재보궐선거와 관련해 한국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은 취약층이었던 20대에서 49.5%의 지지율을 기록했고 특히 최취약층이었던 대학생들에서 54.5%라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는 한나라당의 평균지지율 47.9%보다도 높은 것이다.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 덕분에 심각한 세대갈등이 해소되고 젊은이든 노인이든 모두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세대통합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노무현 정부가 젊은이들까지도 정치적으로 보수적 생각을 갖는 ‘??은 보수’의 시대를 활짝 열어준 것이다. 대학생의 54.5%의 지지를 받는 한나라당이라,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다.

지난 대선 당시의 여론조사를 보면 이들 20~30대가 50~60대와 다른 것은 북한과 미국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서였다. 이들은 친북적인 주사파나 반미운동세력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북한과 비교할 수 없는 경제력에 기초한 자신감에서 대북 포용정책을 지지했고 미국에 대해서도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자주노선을 지지했다. 한마디로, 탈냉전적 사고를 가진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핵심정체성인 냉전주의를 벗어나지 않는 한 20~30대의 지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구체적으로, 한나라당이 변하지 않는 한, 잇따른 재보궐선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국적 선거이고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높은 대통령선거의 경우 인구분포 면에서 가장 비중이 큰 20~30대의 지지를 얻지 못해 또 다시 패배할 것이 뻔해 보였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냉전주의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30대가 한나라당지지로 돌아섰으니 이변 중의 이변이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이라는 포괄적인 답을 넘어서 20~30대가 한나라당 지지로 돌아선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한 청년실업과 폭등한 집값에 따른 절망감 등을 추측해볼 따름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탈냉전적 사고를 가지고 있고 한나라당과 상극인 20~30대를 한나라당 지지로 만들어낸 것을 보면 역시 노 대통령이 재주 하나는 비상하다는 감탄이다. 낡은 냉전주의의 망령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 덕에 한국에도 ‘젊은 보수’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것인가?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 놓고 지난 연말 갑자기 내놓은 병역 복무기간 단축이라는 깜짝 카드로 돌아선 젊은이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손호철의 정치논평)

한국일보(06. 12. 20) 사상-생활 분리주의

탁석산씨의 <대한민국 50대의 힘>이라는 책을 읽었다. 가장 눈길이 가는 대목은 '사상과 생활의 네 가지 조합'이었다. 그는 사람의 사상과 생활을 좌ㆍ우파로 분류해 ①사상 우파-생활 우파 ②사상 우파-생활 좌파 ③사상 좌파-생활 우파 ④사상 좌파-생활 좌파 등 네 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②유형이 가장 바람직하고 ③유형이 최악이라는 탁씨의 주장엔 논란의 소지가 있겠지만, 이제 '사상'만 말하지 말고 '생활'과 '인격'에 대해서도 말할 때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문제 제기는 소중하다 하겠다.

● '사상 좌파, 생활 우파' 엘리트의 문제

한국의 엘리트 계급을 놓고 말한다면, 가장 흔한 게 ①, ③ 유형이다. 사상에 관계없이 대부분 생활은 우파라는 것이다. 사상ㆍ생활 분리주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거니와 여전히 그 장점도 있기 때문에 ③유형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긴 어렵다. 문제는 ③유형이 너무 많다는 데에 있다. 좌우 개념을 세력균형 중심의 상대적 관점에서 보아 개혁파까지 '사상 좌파'로 간주한다면 말이다. 그로 인한 문제는 대략 네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사회적 의제 설정의 왜곡이다. 개혁 의제를 민생과 동떨어진 의제 중심으로 가져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생활 중심 의제에선 자신들이 '사상 우파'를 압도할 수 있는 차별성을 보여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활 우파'인지라 서민 중심 의제의 절박성을 감지하기 어려운 탓도 있을 게다.

둘째, 출세를 위한 사상의 도구적 이용이다. 사상이 생활과 분리된 채 출세주의의 도구가 되면 '사상 좌파' 권력에 대한 충성 경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경쟁에선 생활이 우파일수록 강경파 노릇을 하는 법이다. 이는 권력의 자기성찰과 자기교정 기능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셋째, 불신 초래와 민심 이반이다. 민심은 처음에는 '사상 좌파'가 '생활 우파'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 탈법ㆍ부도덕의 혐의가 짙은 '생활 극우파'의 모습이 드러나는 일이 빈발할 경우 등을 돌릴 뿐만 아니라 기만을 당했다고 분노하게 된다.

넷째, '생활 좌파'의 득세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생활 우파'는 사상에 관계없이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생활 좌파'보다 높은 경쟁력을 자랑한다. 또 언론은 '사상'만 보도할 뿐 '생활'은 다루지 않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생활 좌파'의 진정성을 접하거나 그 가치를 평가하기 어렵다.

이런 네 가지 문제를 이젠 본격적으로 거론할 때가 된 것 같다.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이 국민에게 안겨준 가장 큰 실망은 '사상ㆍ생활 분리주의'와 그에 따른 부작용이라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좌파쪽 입장에선 생활은 우파인데도 사상은 좌파인 사람들이 힘을 보태준다고 해서 고맙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득세로 인한 기회비용의 문제를 이젠 심각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겠다.

● DJㆍ노 정권이 준 가장 큰 실망

고액 연봉을 받는 고위 공직자나 전문직 종사자라고 해서 곧장 '생활 우파'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사상 좌파'이면서도 소득 상위 20% 계층의 연간 가구소득(7,280만원)보다 더 많이 재산을 불려놓고선 자신을 '청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놓고선 가만 있으면 모르겠는데, 한국엔 기부 문화가 없어서 큰 일이라고 개탄하기까지 한다. 아마도 부정한 돈 한푼 안 받으면 '생활 좌파'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한국에서 사상ㆍ생활 분리주의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데다 그럴 만한 역사적ㆍ구조적 조건이 있기 때문에 쉽게 극복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분리주의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더 탄탄한 이론적 배경을 자랑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상ㆍ생활 분리주의의 폐해를 더 겪어봐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07. 01. 01.

 

 


 

P.S. 한국사회의 현단계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읽어볼 만한 책은 손호철의 <해방 60년의 한국정치>(이매진, 2006)와 강준만의 <한국생활문화사전>(인물과사상사, 2006)이다. 서구의 이론과는 다른(짝퉁!) '한국적' 정치사와 생활문화사에 대해서 한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다.  

P.S.2. 겸사겸사 한겨레에 실린 박명림-김명인 교수의 대담도 옮겨놓는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더불어, 박명림 등의 <해방전후사의 인식6>(한길사, 2006)과 김명인의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6)를 참고할 만한 책으로 추가해야겠다.

한겨레(07. 01. 01) 6월항쟁 20돌 ‘시대정신’을 찾는다

박명림-김명인 교수 대담

2007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새해를 맞는 국민의 마음은 밝지만은 않다. 1987년 6월항쟁 이래 더디지만 꾸준히 진척돼온 한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기로에 봉착했다. 노무현 정부와 민주주의 세력의 지리멸렬과 좌충우돌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믿음에 상처를 입혔다. 희망보다는 불안이 큰 시기다. 그러나 전망이 어둡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더구나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다. 어떤 사람을 다음 5년 대한민국호 선장으로 뽑느냐, 어떤 세력에게 나라의 미래를 맡기느냐에 온 국민의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다. 눈앞의 안개를 걷어내고 길을 여는 시대정신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견 학자로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김명인 인하대 교수와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모처럼 맞주앉아 오늘 한국사회에 절실한 시대정신을 찾는 일에 지혜를 모았다. 대담은 지난 25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렸고, 사회는 한승동 문화부문 책·지성 팀장이 맡았다.

사회= 2007년은 특별한 해다.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지만, 6월항쟁 20돌이 되는 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20년이면 한국 민주주의가 풍성한 수확을 얻을 만한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우리 민주주의의 현재를 냉정히 진단해볼 필요가 있겠다.

박명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부터 짚어보고 싶다. 2007년은 6월항쟁 20돌이기도 하지만, 김대중 정부 이래 민주정부가 지속된 지 10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 10년 동안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현실 사이의 괴리 문제가 불거졌다. 둘째, 민주주의 실천의 내용이 문제로 떠올랐다.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이느냐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됐다. 셋째, 한·미 에프티에이(FTA)와 북핵문제를 포함한 국제적인 현안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문제가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 10년, 6월항쟁 20년을 맞은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무현 정권 사회통합 의제 손놔

김명인= 대통령 선거를 생각해보면, ‘노무현 이후’ 한국사회를 어떻게 이끌 것이냐는 게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딱히 답할 만한 것이 없다.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떠안고 가야 할 과제로서의 ‘공안’(公案)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김영삼 정권 이래 공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세계화’밖에 없었다. 하다 못해 박정희 정권 때는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라도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 오늘 이 자리가 그런 공안을 찾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 노무현 정부의 지난 4년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정부는 결국 실패한 것인가.

=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사회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불안과 희망 없음이 우리 사회의 주조가 됐다. 노무현 정권 이후 불안이 더 확산됐다. 박탈감, 절망감이 더 번졌다. 민주 정권이 2기에 들어섰는데, 민주주의가 정착하기는커녕 오히려 삶의 활력을 빼앗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심리적 안정감이 위태로울 정도로 흔들리고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형국이다. 악마적 시장경쟁이 사람들을 완벽하게 포박해 실존적 궁지로 몰아넣었다. 국가는 그런 상황을 방치했다. 사회를 통합할 어떤 의제도 제시하지 못한 채 손놓고 있다. 노 정권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그만큼 큰 것 같다.

=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정부라고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성공적이지 못한 건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의 한국적 모델을 정립하지 못했다. 국가경영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준비도 연구도 부족했다. 과거 반독재 투쟁의 열정에 비해 민주주의적 대안을 찾는 지혜는 현저히 부족했다. 그 결과 개인이 시장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삶의 집합적 안정성이 흔들렸다. 민주주의가 실현될수록 삶이 예측 가능한 것이 돼야 하는데 오리혀 그 예측 가능성이 크게 파괴됐다. 이 점에 관해서는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로 책임을 다 돌려서는 안 되고, 한국사회 진보세력 전체가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엄정한 반성이 필요하다.

사회= 과거와 비교해 삶의 안정성, 예측 가능성이 줄었다고 했는데, 외환위기 사태와 무한경쟁으로 내몬 신자유주의 물결이라는 불가피한 흐름에 떠밀린 탓도 있지 않을까.

= 신자유주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면을 강조하고 싶다. 6월항쟁 이후 민주화를 이뤘다고 하지만, 소극적 차원에 머물렀고 적극적인 내용을 창출하지 못했다. 우리가 상상한 민주화는 구성원의 자발적 합의에 기초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사회 공동체가 자기 운명의 결정권을 갖게 되는 것이었는데, 신자유주의가 들이치면서 과거보다 더 강력한 구속상태로 떨어졌고 공동체적 자기 결정권은 더 약해지고 형해화했다. 개인의 자유, 의지, 희망을 보호해주는 장치가 사라져버리고 외적 강제에 내맡겨진 상황이 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타율성을 강화하는 역설이 빚어졌다.

사회=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시민의 실패, 국민의 실패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국민 몫으로 돌릴 잘못은 없는가.

=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라는 두 가치의 결합이다. 자유주의는 경쟁을 보장하는 것인 반면에, 공화주의는 박애와 연대와 평등으로 자유의 빈 곳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급경한 좌우 이념논쟁에 휘말리면서 자유주의 원칙만 남고 공화주의 원칙은 실종되고 말았다. 경쟁의 원칙에 연대의 원칙이 짝으로 서야 하는데, 연대의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여기에 위기의 원인이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임과 동시에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실천은 훨씬 정교한 디자인과 비전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 제도만 성립시키면 된다고 자만하다보니,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았다. 실패는 실천의 영역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국민은 그걸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 노무현 정권 실패는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 자체의 실패라고 보아야 한다. 진보개혁 세력이 정권에 무책임하게 자유를 의탁했고 수수방관했던 측면이 있다. 민주 정부는 민주주의의 조건을 확보한 것일 뿐인데, 그 내용을 채우는 일에 진보개혁 세력이 방관했다.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신자유주의 개혁이 훨씬 더 급격하게 진행됐는데, 거기에 편승하는 게 마치 민주화의 성과를 다지는 일인양 생각했다. 김대중 정부 때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견제장치라도 있었는데, 노무현 정부는 그런 장치마저 포기했다.

유럽, 우파가 집권해도 ‘사회국가’ 유지

사회=‘국가의 역할’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인 듯하다.

= 신자유주의에 따른 문제는 정부의 실패이자 시장의 실패다.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건 정부밖에 없는데, 정부가 그 몫을 다하지 못했다. 유럽의 상황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유럽에서는 우파가 집권하더라도 헌법에 명문화된 ‘사회국가’ 원리는 그대로 유지된다. 시장의 실패나 정부의 실패를 보완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국가’ 모델을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권위주의 국가 모델 아니면 시장국가 모델 두 가지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내몰린 사람들은 누가 보호할 것인가?

사회=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좀더 논의해보자.

= 민주주의는 시간이나 비용 측면에서 싸지 않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386세대’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386세대가 너무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과학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측면이 있다. 일종의 오만이다. 사회과학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을 목적으로 보는 인문적이고 사회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경쟁과 연대가 공존하는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 나는 70년대에 학생운동을 한 사람인데, 그 시절엔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마틴 부버의 <나와 너>,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등을 먼저 읽었다. 내면적인 가치를 중시했다고 할 수 있는데, 386세대는 사회공학적 측면이 훨씬 더 강한 것 같다.

386세대 정치적 실패 겪은적 없어 성찰 부족

= 70년대와 80년대 학생운동의 독서행태를 조사해본 적 있는데, 정말 달랐다. 70년대 세대는 인문적 상상력을 소중히 여겼고, 소설을 많이 읽었다. 80년대엔 강령이나 지침으로서의 독서가 주종을 이뤘다. 게다가 이 세대는 정치적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다.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민주정부를 성립시켰고, 또 386이 정권을 장악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정권 집행세력이 전혀 실패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성찰의 시간이 없었다. 이들이 주도한 한국 민주주의는 탈지성화, 탈인문화와 같이 갔다. 인문적 지성 없이는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경제’를 만들어낼 수 없다.

= 지식 담론이 김대중 정부 때 좀 나왔다가 ‘신지식인’으로 변질돼버렸다. ‘인문학적 지식’을 사회적 의제에서 빼버렸다. 특히 대학이 그 대열에 앞장섰다. 그러다 보니 낭만적 상상력,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고갈돼 버렸다. 속도·경쟁·양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고방식에 일대 전환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이런 인문학적 상상력이 복원돼야 한다.

사회= 이야기를 정치 쪽으로 돌려보자. 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민주노동당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 87년 이후 ‘시민담론’과 ‘민중담론’이 분리됐는데, 그래서는 보수세력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분열돼서는 개혁을 집행할 힘이 생기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노동자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이 연대해 ‘노동-자유연합’을 만들고 그 힘으로 현재의 사회국가를 이루었다. 우리는 작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진영이 분화돼버렸다. 민주주의는 타협·대화·소통을 요구한다. 시간과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드는 제도다. 노무현 정부는 그런 문제에 대처하지 못했다. 민주세력의 분열이 희망의 소멸에 큰 책임이 있다.

= 그러다 보니 보수기득권층한테 헤게모니를 빼앗겨버렸다. 관료조직에 대한 어떤 통제도 하지 못했다. 보수적 지배구조가 민주적 절차라는 방식으로 옷만 갈아입은 꼴이 되고 말았다. 집권한 민주세력은 그걸 성공이라고 오인했다. 민중적 가치를 민주적 가치와 분리한 뒤 민중적 가치를 다 내버렸고, 그걸 내버렸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사회=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뤄야 하나.

= 민주주의 사회는 구성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그런 확신이 넓게 공유돼야 한다. 기층민중과 소수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려면 이제껏 실종된 민중적 상상력이 다시 작동해야 하며, 새로운 변혁 역량을 찾아야 한다.

비정규직 양산은 연대와 배려 없는 집단광기

=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말하면 ‘경쟁사회에서 연대사회로’ 가는 것이다. 지나친 경쟁으로 영혼이 부박해졌고 삶이 강퍅해졌고 핏발선 사회가 됐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목표가 아니고 과정이며 수단이다. ‘좋은 삶’이라는 집합적 가치를 이루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 최근 우리은행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했다. 이건 자본에게 여력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비정규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식의 얘기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일 뿐이지, 자본주의적 합리화와는 별 관련이 없다. 연대와 배려를 부인하게 만드는 집단적 광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정신을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자.

= ‘경쟁에서 연대로’를 다시 강조하고 싶다. 사회적 영혼을 돌보고 사회의 인간화를 이끄는 것은 연대밖에 없다. 또하나 이야기한다면, ‘격물치지’의 가치를 들 수 있겠다. 우리 사회의 역할에 합당한 품격이 사라져버렸다. 대통령의 대통령다움이 없고, 언론의 언론다움이 없고, 지식인의 지식인다움이 없다. 말하자면 품격이 없다. ‘다움’이 없다보니 배려도 관용도 따뜻함도 없다. 이 가운데 지식인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좋은 시민을 길러내는 데 지식인의 역할이 크다.

=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정신으로 ‘성찰적 행동주의’를 제시할 수 있겠다. 한 사회 전체가 성숙하려면 성찰과 배려가 행동 속에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가치를 사회 속에 실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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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1-01 15:19   좋아요 0 | URL
강준만씨의 글은 언제 봐도 참 예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근데 궁금한 건 강준만씨 자신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③사상좌파 생활우파? 아니면 ②사상 우파-생활 좌파? ④사상 좌파-생활 좌파 요건 좀 아닌것 같고..-_- 로쟈님은 몇번 유형쯤?^^

로쟈 2007-01-01 22:07   좋아요 0 | URL
대학교수나 기자나 변호사들도 '서민'이라고 우기는 편이니 제가 생활우파 행세하는 건 턱도 없구요, 사상좌파를 하기엔 몸이 너무 무겁습니다. 분류하자면, 가장 바람직한 경우(사상우파-생활좌파)의 아류쯤 될 거 같습니다. 혹은 패러디...

마태우스 2007-01-01 22:12   좋아요 0 | URL
호호 손호철의 칼럼 재미있군요. 노무현이 전혀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군요^^

biosculp 2007-01-01 23:55   좋아요 0 | URL
서점에 갔다가 복거일지음.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이라는 제목이 보여 훓어보다 샀습니다. 정말 노무현 때문인지 복거일을 다시보게 되더군요. 한국사회의 현단계라는 글때문잊도 모르고.
복거일씨 후기에 도덕적 삶이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결론을 내리던데. 사상우파 생활좌파일런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알라딘에 이책이 뜨지는 않더군요.
 

새해 첫 신문에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일제히 발표되는 건 한국사회/언론의 관행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근래에 '웰메이드' 작품들이 양상되면서 신춘문예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내가 근심하는 건 당선자들의 평균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다간 문학 또한 '실버산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문제의식과 맞물려 신년 벽두부터 '센' 구호가 등장했다. '한국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 '변화'가 아니라 '진화'이다. 그건 두 가지를 전제한다. (1)'단편'보다 '장편'이 진화한 양식이다. (2)그러한 진화의 과정은 좀 시간이 걸린다. 사안의 견적상 그러한 '진화'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건 다 아는 일이다. 필자도 지적하고 있는 바대로, 단편 중심의 등단제도와 문예지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국 문단의 '체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계 사람들 대부분 인정하는 건 단편보다 장편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다. 고액의 상금이 걸려 있는 문학상들이 대부분 장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는 장편의 일정한 '질'을 담보할 (제도적?) 방책이 불비하다는 것, 혹은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 문학의 위기 국면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의견이 적지 않으므로 모종의 윈-윈 전략이 마련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한겨레(07. 01. 01) 한국 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

새해 첫날 아침이다. 저마다 희망과 포부를 한껏 부풀리고 있을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들은 누구일까? 여러 사람이 있겠지만, 문학 담당 기자의 직업의식을 조금 발휘해 답해 보고 싶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어떨까? 그들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세상 전부를 얻은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보고 있지 않을까.

새해 첫날 아침을 신춘문예라는 문학적 축제와 더불어 맞이하는 일은 분명 축복이다. 문학의 위기가 공공연히 운위되는 가운데서도 신춘문예를 비롯한 문예 공모의 출품작들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은 고무적이다. 문학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응모자들의 열기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신춘문예에도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춘문예 제도의 제정 취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적 견해들이 제출되어 있다. 당선 작품들의 천편일률성, 소수 심사위원들의 독점적 ‘심사권’ 행사, 패기와 실험성이 결여된 ‘웰 메이드’ 계열 작품들의 난무 등….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조금 다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거의 모든 신춘문예에서 소설 부문은 단편으로 제한해서 모집하고 있다. 드물게 중편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편이 신춘문예에 포함된 사례는 전무하다. 물론 장편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 공모가 없지 않고 갈수록 느는 추세이기는 하다. 그러나 소설가를 꿈꾸는 이들은 등단의 관문을 뚫기 위해 우선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단편 습작에 매진하기 마련이다.

등단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지면은 대체로 문학잡지들이다. 이때도 잡지들이 청탁하는 작품은 대개가 단편들이고 약간의 중편이 포함된다. 문학잡지에 장편소설이 실리는 것은 다소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다음 단계는 각종 문학상이다. 우리나라 유수의 문학상들은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단편소설에 쏠려 있다. 일본의 아쿠타가와상 정도를 제한다면, 외국의 소설 부문 문학상들은 대체로 장편을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쪽 사정은 오히려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삼은 문학상이 예외로 취급되는 현실이다.

등단에서 잡지를 통한 작품 발표, 그리고 각종 문학상 수상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 우리의 소설 장르가 단편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히 작가들 역시 습작 무렵부터 단편을 써 버릇하고, 등단 이후에도 잡지 발표와 문학상을 염두에 두고 단편을 쓰는 데에 진력하게끔 되어 있다. 장편은 단편에 비해 소홀히 취급되기 마련이다.

물론 단편은 장편을 쓰기 위한 훈련으로서도 의미가 없지 않다. 대개의 작가들이 등단 초기에는 단편에 주력하다가 점차 필력이 붙으면서 자연스럽게 장편 쪽으로 옮아 가곤 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 작가들은 과도하리만치 단편에 매달리는 것이 사실이다. 장편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단편에 ‘낭비’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단편을 쓸 때 작가들은 단어 하나와 문장 한 줄에도 최선을 다해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다. 상대적으로 장편을 쓸 때는 전체적인 틀에 신경을 쓰면서 독자와의 소통에 더 무게를 둔다. 미학적 완성도라는 기준을 들이대면 장편에 비해 단편소설 쪽이 높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따라서 단편은 '소설'보다는 '시'에 더 근접한다. 소설다운 소설'보다는 '시적인 소설'이 더 득세하는 것이 우리의 문학현실이다).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단편문학의 전통이 있다. 이효석, 김유정, 이태준에서 김승옥과 오정희를 거쳐 내려오는 미학주의의 전통이다(*물론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장편문학의 전통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독자들은 단편에 비해 장편을 선호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즈음의 출판사들이 단편을 묶어 책으로 낼 때 ‘소설집’이라는 표기 대신 그저 ‘소설’이라는 모호한 표기를 앞세우는 까닭은 단편(집)에 대한 독자들의 냉담한 반응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은 장편소설을 원한다

우리 소설을 외국에 소개할 때에도 단편은 장편에 비해 꽤 불리하다.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보아도 우리 독자들이 외국의 단편집보다는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 소설이 외국어로 번역 출간될 때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오르한 파무크의 주요 작품들을 비롯해 오에 겐자부로, 엘프리데 옐리네크, 귄터 그라스 등 대부분의 역대 수상 작가들은 장편 작가들이었다(*국제시장에 대한 감각이 탁월한 작가 김영하가 장편에 매진하는 이유이다).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말할 차례다.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한국 소설의 체질을 단편에서 장편 중심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 작가들 자신과 문학잡지 및 출판사들, 그리고 평론가와 독자들이 두루 합의하고 노력해야 한다(*이미지는 가장 최근에 나온 몇 권의 공모 장편들이다). 우선 이 아침,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행운을 거머쥔 주인공들에게 당부드리고 싶다. 단편보다는 장편에 주력해서 침체에 빠진 한국 소설의 활로를 열어 주시라!(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1. 01.

 

 

 

 

P.S. 몇 권 더 꼽아본 작품들이 지난해 장편으로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문학상에 당선된 작품들이다. '장편'으로의 진화를 가늠해보는 척도가 됨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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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7-01-0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신춘문예를 두 편 읽어보았는데..뭐랄까. 갈수록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단편에서의 역량을 잘 살려서 멋진 장편들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이 되길 바라는 마음, 저도 함께입니다....좀더 공부하는 작가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구요...

로쟈 2007-01-0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편과 장편은 시와 소설만큼 차이가 크다고 여기는 편인지라(문장의 기본기만 공유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진화'에 대해서 좀 회의적이긴 합니다. 단편(short story)와 소설(novel)을 '소설'로 통칭하는 데 문제의 일단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신년이긴 하나 휴일의 하루인지라 느지막이 일어났다(돼지해이니까 돼지꿈이라고 꿔줘야 했을 텐데, 설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아침신문들을 읽다가 눈에 뜨인 기사는 '책읽기 365'를 제안하는 도정일 교수의 칼럼이었다. 365이니까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끈을 바짝 조이는 의미가 있겠다. 그간에 독서문화운동이나 독서캠페인 등을 많이 있어 왔지만, '사회적 독서'를 기치로 내건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 독서'의 짝이 될 이 말의 효용에 대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의 방점은 '해보자'에 찍힌다. 뭐라도 해보기로 결심하는 게 또한 시년을 맞는 의례이기도 하므로 '사회적 독서를 시작해보자'라는 제안에 한 표를 던진다.   

경향신문(07. 01. 01) 독자여, 당신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미국 일리노이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 바락 오바마는 차세대 대통령 감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떠오르는 별로 알려지고 있는 사람이다. 마흔 다섯 살의 초선 의원이 정계 진출 3년 만에 이처럼 빠르게 부상한 것은 존 F. 케네디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이런 오바마 현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정치에 실망하고 정치판에 덧정 떨어진 국민들에게 그가 신선한 희망으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희망’을 말하기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근년 한·미 두 나라 정치판은 기이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국민은 극단적인 분열과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풍비박산 쪼개져 있으나 정치는 이 분열을 치유할 힘이 없다. 정치 자체가 분열의 조장자이자 분열을 먹고 사는 독버섯 같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판은 진지한 토론과 숙고 대신 막말, 욕설, 비방, 험담으로 날 새는 저열하고 잔인한 정쟁의 지옥이 되어 있다.

-희망의 원천은 시민의 자질-

대립과 싸움은 정치의 숙명이다. 민주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대립이고 싸움이냐에 따라 정치의 품질과 수준은 한참 달라진다. 국민을 위한 봉사보다는 오로지 권력잡기가 목표일 때 정치는 사회악이 되고, 국가적 현안과 국민생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보다는 당략과 점수따기를 위한 진흙던지기가 될 때 정쟁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싸움질로 전락한다.

인권변호사, 공동체 운동가, 시카고 법대 강사의 경력을 가진 오바마가 정치에 투신한 이유는 미국의 ‘깨진 정치과정을 수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분열보다는 공통의 희망과 꿈으로 국민을 한데 묶어주는 일이 더 위대하고 시급하다는 것이 그가 최근 저서 ‘대담한 희망’ 등에서 말하는 희망의 정치 기조다. 당리당략과 이데올로기를 넘어 건강한 양식과 상식의 힘으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자는 주장도 그가 제안하는 새로운 정치 방법론이다.



-‘사회적 독서’를 시작해 보자-

금년은 우리에게 대선의 해다. 우리에게도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정치문화가 필요하고 정치과정의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하다. 희망의 메시지도 그립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를 가능하게 할 궁극적인 힘은 ‘시민’에게서 나오므로 그 시민의 판단력과 자질이 또다시 요긴해지고 있다. 시민적 자질을 강화하는 첩경 중의 첩경은 누가 뭐래도 책 읽기이고 독서를 통한 숙고의 능력 키우기다.

무슨 책? 독자여, 나는 당신에게 어떤 책도 권할 생각이 없다. 나는 오히려 당신이 뽑아주는 책, 당신이 만드는 책들의 목록을 보고 싶다. 그 목록으로 우리가 사회적 독서를 시작하고, 이슈를 가리고 문제를 토론해 보는 것이 금년에 우리가 해야 할 소중한 일의 하나다. 경향신문이 새해 벽두부터 책읽기 문화의 확산을 위한 연중시리즈 ‘책읽기 365’를 시작하는 의미도 거기에 있다.(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07. 01. 01.

P.S. 그러니까 논리는 이렇다. 새로운 정치문화는 시민에게서 나온다 -> 따라서 시민의 판단력과 자질이 요긴하다 -> 그러한 자질을 강화하는 첩경은 책읽기이다. 이 책읽기가 다가올 '파국'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해줄 수 있을지 회의적이긴 하나(지젝의 표현을 빌면, 소행성과의 충돌 같은 재난 앞에서 철학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기분이면 못할 것도 없겠다. 한데, '주최측'에서 어떤 책도 권할 의사가 없다고 하므로 좀 난감하다. '당신이 뽑아주는 책으로 시작해보겠다고 한다. 젠장, 민주주의의 고단함이여!

 

 

 

 

해서, 마지못해 몇 권의 책을 꼽아본다. 한국사회에 대한 책으로 지승호의 대담집 <금지를 금지하라>(시대의창, 2006), 그리고 미국에 대한 책으로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알마, 2006), '인문서'로 어느샌가 출간된 테리 이글턴의 <우리시대의 비극론>(경성대출판부, 2006), 그리고 시집으로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네 권을 1월에 짬짬이 읽을 책으로 정해둔다. '이슈를 가리고 문제를 토론해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 책임감'이 강제하는 책읽기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올해는 분단국에서 또 한 차례 대선이 치러지는 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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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 책 2007-01-01 11:46   좋아요 0 | URL
새해를 맞이해서 올해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고 있는 제게 좋은 화두를 던져주셨네요..감사합니다..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로쟈 2007-01-01 11:50   좋아요 0 | URL
제가 '화두'를 인수인계한 셈이군요.^^

승주나무 2007-01-02 09:13   좋아요 0 | URL
경향에서 1면마다 책 한 권을 소개하기로 했다네요. 경향의 기획력은 인정하지만, 제발 동아처럼 설대 교수가 추천하는 고전 100선처럼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제에발~

로쟈 2007-01-02 11:15   좋아요 0 | URL
첫호를 보니까 김지하의 서평을 싣고 있더군요. 한데, 분량이 너무 짧아서리...
 

2006년의 책들을 꼽아보려던 생각을 접었다. 이미 여러 매체들에서 나름대로 선정한 책들과 부분적으론 중복되고 무엇보다도 내가 완독한 책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이다(이유가 없지도 않은 게 대부분이 두툼한 책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른 독서가'가 면책될 수는 없겠지만). 다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 한번 더 군소리를 덧붙인다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과거를 돌이켜보기엔 아직 일이 너무 많다. 차라리 2007년으로 발빠르게 넘어가는 게 더 나은 성싶다.

그래 책장을 뒤져 책상에 올려놓은 책이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민음사, 1992)이다. 나는 그해 여름에 나온 초판을 갖고 있는데, 기억에 내가 책을 완독한 건 96년 겨울이었다(정확하게는 97년 1월?). 그러니까 대략 10년전이다. 얼마전에 이 책을 2007년 1월에 (다시) 읽을 책으로 꼽아놓은 이유이다. 물론 이거 말고도 읽어야 할 책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들이 얼추 20여 권은 된다. '책읽는 로쟈'를 여럿 빌려와야 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식의 고고학>(1969) 국역본은 2000년에 새로운 판이 나왔지만 역자 서문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내용 자체에 수정이 가해진 것 같지는 않다. 해서, 아마도 몇 차례 <지식의 고고학>을 다룰 페이퍼의 인용문 쪽수는 모두 1992년판에 근거한다. 잠시 서론을 읽어보다가 문득 캉길렘(캉기옘)의 중요성에 대해 상기해보게 됐는데, '푸코와 캉길렘에 관한 메모'라고 제목을 달고 우선은 몇 자 적어놓는다. 내가 참조한 것은 국역본 외에 영역본과 러시아어본, 그리고 김현의 <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지성사, 1990)이다(아직 국내에서 이 책을 넘어설 만한 연구서가 나오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인문학이 죽었다는 이유가 외부에만 있을까?).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십 년이 지났다."(17쪽) <지식의 고고학>의 첫문장이다. 여기서의 '역사가들'은 역주에서 밝혀진 대로 페르낭 브로델 등의 아날학파를 말한다. 국내에서 아날학파에 정통한 학자는 <아날학파의 역사세계>(아르케, 2001), <페르낭 브로델>(살림, 2006) 등을 쓴 김응종 교수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특이하게도 브로델과 아날학파가 과대평가됐다는 언급으로 시작되는데, 아날학파에 대한 프랑스 내의 신랄한 비판은 프랑수아 도스의 <조각난 역사>(푸른역사, 1998)에서 읽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날학파는 역사/시대를 지질학에서의 지층처럼 다루었는바(그래서 총체성의 결여로서의 '조각난 역사'다), 그럴 경우에 당연히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연속과 불연속에 대한 물음이다. 그들의 관심은 변화/불연속보다는 (장기)지속/연속에만 두어졌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당시 프랑스에서 역사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지속이 아닌 단절에 더 관심이 두어졌다. 푸코에 따르면, "(일반적인 역사학과는) 반대로, 흔히 '시대'나 '세기'로 기술되는 방대한 단위들로부터 비약의 현상들로 관심이 옮겨졌던 것이다."(19쪽) 인용문에서 '비약의 현상'은 영역본의 경우 'phenomena of rupture, of discontinuity'로 풀어서 옮기고 있는데, '단절 현상' 혹은 '불연속 현상'이라고 하는 게 이해에 용이하다. '연속성'의 상대어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사/과학철학에서 이런 단절, 단면에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가 바로 바슐라르와 캉길렘이다. 바슐라르가 사용하는 개념으론 '인식론적 활동과 문턱들(epistemological acts and thresholds)'이 있고, 캉길렘의 모델에 따르면 '개념들의 변위와 변환(displacements and transformations of concepts)'이 있다.

이에 대한 역자의 주석은 이렇다: "캉길렘(깡길렘)은 과학사를 '개념'의 수준에서 다룬다. 캉길렘은 개념과 이론을 구분한다. 바슐라르가 이미 지적했듯이, 순수한 자료 또는 해석되지 않은 자료는 없다. 그러나 캉길렘은 자료와 해석을 그들을 이론에 의해 읽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료를 최초로 해석하는 것은 개념이다. 그 뒤에 이론은 자료를 '설명'하는 것이다. 개념은 한 대상에 대한 '최초의 이해'를 담지하며, 그 대상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이룬다. 이 개념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한 이론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캉길렘에 따르면, 오히려 한 개념이 여러 이론들의 변환과정을 담지할 수 있다. 즉 개념은 '이론적으로 다가(多價)'이다. 캉길렘에 있어서 과학사는 바로 이러한 개념의 현성과 변환을 다루는 것이다."(20쪽)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캉길렘이 바로 미셸 푸코의 스승인 조르주 캉길렘(1904-1995)이다. 사르트르, 레이몽 아롱 등과 고등사범학교 동급생이었던 캉길렘의 주된 관심분야는 과학철학이었고(그는 소르본대학의 과학사연구소 소장직을 바슐라르로부터 이어받는다), 주저는 <정상과 병리>, <생명의 인식>. 전자는 <정상과 병리>(한길사, 1996),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인간사랑, 1996) 2종이나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모두 품절됐다.

 

 

 

 

이 책들과 함께 '바슐라르-캉길렘-푸코'로 이어지는 인식론의 계보를 다룬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 필독서이지만 역시 품절됐다(영역본의 제목은 <맑스주의와 인식론>이다). 아쉬운 대로 참조할 수 있는 책이 개리 거팅의 <미셸 푸코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의 제1장 '바슐라르와 캉길렘'이다. 이정우의 <담론의 공간>(산해, 개정판 2000)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

새삼 <정상과 병리>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독서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지체된다!) 구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내 사두지 못한 책이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없어서 영역본의 이미지를 대신 붙여놓았는데,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서문은 제자인 푸코가 썼다. 곁에 국역본이 없어서 영역본에서 인용하면, 아래의 문단은 캉길렘의 위치와 영향력을 단적으로 웅변해준다. 캉길렘을 제쳐놓으면, 알튀세르도 부르디외도, 라캉도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얘기.

"Take away Canguilhem and you will no longer understand much about Althusser, Althusserism and a whole series of discussions which have taken place among French Marxists; you will no longer grasp what is specific to sociologists such as Bourdieu, Castel, Papperson and what marks them so strongly within sociology; you will miss an entire aspect of the theoretical work done by psychoanalysts, particularly by the followers of Lacan. Further, in the entire discussion of ideas which preceded or followed the movement of '68, it is easy to find the place of those who, from near or from afar, had been trained by Canguilhem." 

그 캉길렘은 제자인 푸코에 대해 뭐라고 적어놓았을까? 푸코에 관한 자세한 전기는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1995)이지만(아직 절판은 아니라지만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박스보관 도서인지라 참고할 수 없다. 대신에 <시칠리아의 암소>에서 캉길렘의 말을 인용한다. 자신이 지도한 푸코의 박사학위논문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1961)에 대해서.

 

 

 

 

"(*스웨덴의) 웁살라에 머무는 것을 이용하여 많은 일을 한 뒤에, 다시 말해 그것도 하나의 탄생 방법인 책읽기를 우선 한 뒤에, 그때는 함부르크의 프랑스문화원에 있던 푸코가 고등사범학교 교장이던 이폴리트에게 934면의 두툼한 원고를 제출했을 때, 그는 그것에 감탄한 그의 독자(*이폴리트)에게서 그 작업을 내게 넘기라는 충고를 받았다. 내가 그 전에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쓴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코를 열광적으로 읽고 나니 내 한계도 보였다. 1960년 4월에, 이 작업이 우선 인쇄되면, 소르본에 학위논문으로 그것을 제출할 것을 나는 제안했다. 아주 호의적인 보고서에서 나는 심리학의 '과학적'지위의 기원들을 다시 문제삼는 것은 이 연구가 촉발한 놀랄 만한 주제들 중의 하나를 이룰 것이라고 미리 예측했었다... 이것은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1938년에 <역사철학 서설>이라는 레이몽 아롱의 학위논문이 불러일으킨 아연실색을 상기시킨다. 심리학에서의 과학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역사에서 객관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22쪽) 

그러니까 푸코의 학위논문 지도교수는 장 이폴리트였지만, 그는 본논문의 지도를 과학철학 전공자인 캉길렘에게 넘기도록 충고하며 푸코는 그에 따랐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광기의 역사>였다...

06. 12. 31.

P.S. 이제 30여 분 후면 제야의 종이 울리겠군. 여기에 새해 인사를 적어놓기로 하자.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비록 서재를 자주 찾아주시는 분들 때문에 나의 게으름은 축나고 지적 허영은 남아돌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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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 의학철학의 전통과 깡귀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12 18:52 
    국내에는 미셸 푸코의 스승으로 처음 알려진 프랑스의 과학철학자(혹은 의학철학자) 조르주 깡귀엠의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아카넷, 2010)이 출간됐다. 타이틀은 책 제목이라기보다는 논문 제목에 더 어울릴 만한데('학술서'의 티를 팍팍낸다) 마침 교수신문에 책의 내용과 의의를 소개하는 역자의 글이 실렸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필자의 동의하에 옮긴이의 글을 재수록했다고 하니까
 
 
끼사스 2007-01-01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이 페이퍼는 (약간의) 읽고 싶었던 책과 (대부분의) 읽고 싶어지는 책들로 가득한 '환상적 비블리오그래피'입니다…. 로쟈님이 선사하는 새해 선물로 알고 퍼갑니다. 즐거운 일로 가득한 정해년 되시길!

로쟈 2007-01-0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관심이 맞아떨어졌던 모양이네요. 비슷한 관심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알라딘의 매력입니다.^^

테렌티우스 2007-01-26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작긴 하지만 한길사 정상과 병리 표지가 아래에 있네요...^^

http://www.hangilsa.co.kr/bookimage/106normal1.jpg

로쟈 2007-01-2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