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신문에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일제히 발표되는 건 한국사회/언론의 관행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근래에 '웰메이드' 작품들이 양상되면서 신춘문예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내가 근심하는 건 당선자들의 평균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다간 문학 또한 '실버산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문제의식과 맞물려 신년 벽두부터 '센' 구호가 등장했다. '한국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 '변화'가 아니라 '진화'이다. 그건 두 가지를 전제한다. (1)'단편'보다 '장편'이 진화한 양식이다. (2)그러한 진화의 과정은 좀 시간이 걸린다. 사안의 견적상 그러한 '진화'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건 다 아는 일이다. 필자도 지적하고 있는 바대로, 단편 중심의 등단제도와 문예지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국 문단의 '체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계 사람들 대부분 인정하는 건 단편보다 장편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다. 고액의 상금이 걸려 있는 문학상들이 대부분 장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는 장편의 일정한 '질'을 담보할 (제도적?) 방책이 불비하다는 것, 혹은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 문학의 위기 국면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의견이 적지 않으므로 모종의 윈-윈 전략이 마련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한겨레(07. 01. 01) 한국 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

새해 첫날 아침이다. 저마다 희망과 포부를 한껏 부풀리고 있을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들은 누구일까? 여러 사람이 있겠지만, 문학 담당 기자의 직업의식을 조금 발휘해 답해 보고 싶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어떨까? 그들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세상 전부를 얻은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보고 있지 않을까.

새해 첫날 아침을 신춘문예라는 문학적 축제와 더불어 맞이하는 일은 분명 축복이다. 문학의 위기가 공공연히 운위되는 가운데서도 신춘문예를 비롯한 문예 공모의 출품작들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은 고무적이다. 문학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응모자들의 열기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신춘문예에도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춘문예 제도의 제정 취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적 견해들이 제출되어 있다. 당선 작품들의 천편일률성, 소수 심사위원들의 독점적 ‘심사권’ 행사, 패기와 실험성이 결여된 ‘웰 메이드’ 계열 작품들의 난무 등….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조금 다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거의 모든 신춘문예에서 소설 부문은 단편으로 제한해서 모집하고 있다. 드물게 중편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편이 신춘문예에 포함된 사례는 전무하다. 물론 장편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 공모가 없지 않고 갈수록 느는 추세이기는 하다. 그러나 소설가를 꿈꾸는 이들은 등단의 관문을 뚫기 위해 우선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단편 습작에 매진하기 마련이다.

등단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지면은 대체로 문학잡지들이다. 이때도 잡지들이 청탁하는 작품은 대개가 단편들이고 약간의 중편이 포함된다. 문학잡지에 장편소설이 실리는 것은 다소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다음 단계는 각종 문학상이다. 우리나라 유수의 문학상들은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단편소설에 쏠려 있다. 일본의 아쿠타가와상 정도를 제한다면, 외국의 소설 부문 문학상들은 대체로 장편을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쪽 사정은 오히려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삼은 문학상이 예외로 취급되는 현실이다.

등단에서 잡지를 통한 작품 발표, 그리고 각종 문학상 수상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 우리의 소설 장르가 단편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히 작가들 역시 습작 무렵부터 단편을 써 버릇하고, 등단 이후에도 잡지 발표와 문학상을 염두에 두고 단편을 쓰는 데에 진력하게끔 되어 있다. 장편은 단편에 비해 소홀히 취급되기 마련이다.

물론 단편은 장편을 쓰기 위한 훈련으로서도 의미가 없지 않다. 대개의 작가들이 등단 초기에는 단편에 주력하다가 점차 필력이 붙으면서 자연스럽게 장편 쪽으로 옮아 가곤 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 작가들은 과도하리만치 단편에 매달리는 것이 사실이다. 장편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단편에 ‘낭비’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단편을 쓸 때 작가들은 단어 하나와 문장 한 줄에도 최선을 다해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다. 상대적으로 장편을 쓸 때는 전체적인 틀에 신경을 쓰면서 독자와의 소통에 더 무게를 둔다. 미학적 완성도라는 기준을 들이대면 장편에 비해 단편소설 쪽이 높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따라서 단편은 '소설'보다는 '시'에 더 근접한다. 소설다운 소설'보다는 '시적인 소설'이 더 득세하는 것이 우리의 문학현실이다).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단편문학의 전통이 있다. 이효석, 김유정, 이태준에서 김승옥과 오정희를 거쳐 내려오는 미학주의의 전통이다(*물론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장편문학의 전통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독자들은 단편에 비해 장편을 선호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즈음의 출판사들이 단편을 묶어 책으로 낼 때 ‘소설집’이라는 표기 대신 그저 ‘소설’이라는 모호한 표기를 앞세우는 까닭은 단편(집)에 대한 독자들의 냉담한 반응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은 장편소설을 원한다

우리 소설을 외국에 소개할 때에도 단편은 장편에 비해 꽤 불리하다.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보아도 우리 독자들이 외국의 단편집보다는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 소설이 외국어로 번역 출간될 때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오르한 파무크의 주요 작품들을 비롯해 오에 겐자부로, 엘프리데 옐리네크, 귄터 그라스 등 대부분의 역대 수상 작가들은 장편 작가들이었다(*국제시장에 대한 감각이 탁월한 작가 김영하가 장편에 매진하는 이유이다).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말할 차례다.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한국 소설의 체질을 단편에서 장편 중심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 작가들 자신과 문학잡지 및 출판사들, 그리고 평론가와 독자들이 두루 합의하고 노력해야 한다(*이미지는 가장 최근에 나온 몇 권의 공모 장편들이다). 우선 이 아침,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행운을 거머쥔 주인공들에게 당부드리고 싶다. 단편보다는 장편에 주력해서 침체에 빠진 한국 소설의 활로를 열어 주시라!(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1. 01.

 

 

 

 

P.S. 몇 권 더 꼽아본 작품들이 지난해 장편으로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문학상에 당선된 작품들이다. '장편'으로의 진화를 가늠해보는 척도가 됨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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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7-01-0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신춘문예를 두 편 읽어보았는데..뭐랄까. 갈수록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단편에서의 역량을 잘 살려서 멋진 장편들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이 되길 바라는 마음, 저도 함께입니다....좀더 공부하는 작가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구요...

로쟈 2007-01-0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편과 장편은 시와 소설만큼 차이가 크다고 여기는 편인지라(문장의 기본기만 공유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진화'에 대해서 좀 회의적이긴 합니다. 단편(short story)와 소설(novel)을 '소설'로 통칭하는 데 문제의 일단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