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의 책들을 꼽아보려던 생각을 접었다. 이미 여러 매체들에서 나름대로 선정한 책들과 부분적으론 중복되고 무엇보다도 내가 완독한 책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이다(이유가 없지도 않은 게 대부분이 두툼한 책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른 독서가'가 면책될 수는 없겠지만). 다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 한번 더 군소리를 덧붙인다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과거를 돌이켜보기엔 아직 일이 너무 많다. 차라리 2007년으로 발빠르게 넘어가는 게 더 나은 성싶다.
그래 책장을 뒤져 책상에 올려놓은 책이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민음사, 1992)이다. 나는 그해 여름에 나온 초판을 갖고 있는데, 기억에 내가 책을 완독한 건 96년 겨울이었다(정확하게는 97년 1월?). 그러니까 대략 10년전이다. 얼마전에 이 책을 2007년 1월에 (다시) 읽을 책으로 꼽아놓은 이유이다. 물론 이거 말고도 읽어야 할 책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들이 얼추 20여 권은 된다. '책읽는 로쟈'를 여럿 빌려와야 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식의 고고학>(1969) 국역본은 2000년에 새로운 판이 나왔지만 역자 서문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내용 자체에 수정이 가해진 것 같지는 않다. 해서, 아마도 몇 차례 <지식의 고고학>을 다룰 페이퍼의 인용문 쪽수는 모두 1992년판에 근거한다. 잠시 서론을 읽어보다가 문득 캉길렘(캉기옘)의 중요성에 대해 상기해보게 됐는데, '푸코와 캉길렘에 관한 메모'라고 제목을 달고 우선은 몇 자 적어놓는다. 내가 참조한 것은 국역본 외에 영역본과 러시아어본, 그리고 김현의 <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지성사, 1990)이다(아직 국내에서 이 책을 넘어설 만한 연구서가 나오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인문학이 죽었다는 이유가 외부에만 있을까?).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십 년이 지났다."(17쪽) <지식의 고고학>의 첫문장이다. 여기서의 '역사가들'은 역주에서 밝혀진 대로 페르낭 브로델 등의 아날학파를 말한다. 국내에서 아날학파에 정통한 학자는 <아날학파의 역사세계>(아르케, 2001), <페르낭 브로델>(살림, 2006) 등을 쓴 김응종 교수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특이하게도 브로델과 아날학파가 과대평가됐다는 언급으로 시작되는데, 아날학파에 대한 프랑스 내의 신랄한 비판은 프랑수아 도스의 <조각난 역사>(푸른역사, 1998)에서 읽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날학파는 역사/시대를 지질학에서의 지층처럼 다루었는바(그래서 총체성의 결여로서의 '조각난 역사'다), 그럴 경우에 당연히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연속과 불연속에 대한 물음이다. 그들의 관심은 변화/불연속보다는 (장기)지속/연속에만 두어졌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당시 프랑스에서 역사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지속이 아닌 단절에 더 관심이 두어졌다. 푸코에 따르면, "(일반적인 역사학과는) 반대로, 흔히 '시대'나 '세기'로 기술되는 방대한 단위들로부터 비약의 현상들로 관심이 옮겨졌던 것이다."(19쪽) 인용문에서 '비약의 현상'은 영역본의 경우 'phenomena of rupture, of discontinuity'로 풀어서 옮기고 있는데, '단절 현상' 혹은 '불연속 현상'이라고 하는 게 이해에 용이하다. '연속성'의 상대어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사/과학철학에서 이런 단절, 단면에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가 바로 바슐라르와 캉길렘이다. 바슐라르가 사용하는 개념으론 '인식론적 활동과 문턱들(epistemological acts and thresholds)'이 있고, 캉길렘의 모델에 따르면 '개념들의 변위와 변환(displacements and transformations of concepts)'이 있다.
이에 대한 역자의 주석은 이렇다: "캉길렘(깡길렘)은 과학사를 '개념'의 수준에서 다룬다. 캉길렘은 개념과 이론을 구분한다. 바슐라르가 이미 지적했듯이, 순수한 자료 또는 해석되지 않은 자료는 없다. 그러나 캉길렘은 자료와 해석을 그들을 이론에 의해 읽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료를 최초로 해석하는 것은 개념이다. 그 뒤에 이론은 자료를 '설명'하는 것이다. 개념은 한 대상에 대한 '최초의 이해'를 담지하며, 그 대상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이룬다. 이 개념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한 이론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캉길렘에 따르면, 오히려 한 개념이 여러 이론들의 변환과정을 담지할 수 있다. 즉 개념은 '이론적으로 다가(多價)'이다. 캉길렘에 있어서 과학사는 바로 이러한 개념의 현성과 변환을 다루는 것이다."(20쪽)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캉길렘이 바로 미셸 푸코의 스승인 조르주 캉길렘(1904-1995)이다. 사르트르, 레이몽 아롱 등과 고등사범학교 동급생이었던 캉길렘의 주된 관심분야는 과학철학이었고(그는 소르본대학의 과학사연구소 소장직을 바슐라르로부터 이어받는다), 주저는 <정상과 병리>, <생명의 인식>. 전자는 <정상과 병리>(한길사, 1996),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인간사랑, 1996) 2종이나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모두 품절됐다.
이 책들과 함께 '바슐라르-캉길렘-푸코'로 이어지는 인식론의 계보를 다룬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 필독서이지만 역시 품절됐다(영역본의 제목은 <맑스주의와 인식론>이다). 아쉬운 대로 참조할 수 있는 책이 개리 거팅의 <미셸 푸코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의 제1장 '바슐라르와 캉길렘'이다. 이정우의 <담론의 공간>(산해, 개정판 2000)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
새삼 <정상과 병리>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독서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지체된다!) 구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내 사두지 못한 책이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없어서 영역본의 이미지를 대신 붙여놓았는데,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서문은 제자인 푸코가 썼다. 곁에 국역본이 없어서 영역본에서 인용하면, 아래의 문단은 캉길렘의 위치와 영향력을 단적으로 웅변해준다. 캉길렘을 제쳐놓으면, 알튀세르도 부르디외도, 라캉도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얘기.
"Take away Canguilhem and you will no longer understand much about Althusser, Althusserism and a whole series of discussions which have taken place among French Marxists; you will no longer grasp what is specific to sociologists such as Bourdieu, Castel, Papperson and what marks them so strongly within sociology; you will miss an entire aspect of the theoretical work done by psychoanalysts, particularly by the followers of Lacan. Further, in the entire discussion of ideas which preceded or followed the movement of '68, it is easy to find the place of those who, from near or from afar, had been trained by Canguilhem."
그 캉길렘은 제자인 푸코에 대해 뭐라고 적어놓았을까? 푸코에 관한 자세한 전기는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1995)이지만(아직 절판은 아니라지만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박스보관 도서인지라 참고할 수 없다. 대신에 <시칠리아의 암소>에서 캉길렘의 말을 인용한다. 자신이 지도한 푸코의 박사학위논문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1961)에 대해서.
"(*스웨덴의) 웁살라에 머무는 것을 이용하여 많은 일을 한 뒤에, 다시 말해 그것도 하나의 탄생 방법인 책읽기를 우선 한 뒤에, 그때는 함부르크의 프랑스문화원에 있던 푸코가 고등사범학교 교장이던 이폴리트에게 934면의 두툼한 원고를 제출했을 때, 그는 그것에 감탄한 그의 독자(*이폴리트)에게서 그 작업을 내게 넘기라는 충고를 받았다. 내가 그 전에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쓴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코를 열광적으로 읽고 나니 내 한계도 보였다. 1960년 4월에, 이 작업이 우선 인쇄되면, 소르본에 학위논문으로 그것을 제출할 것을 나는 제안했다. 아주 호의적인 보고서에서 나는 심리학의 '과학적'지위의 기원들을 다시 문제삼는 것은 이 연구가 촉발한 놀랄 만한 주제들 중의 하나를 이룰 것이라고 미리 예측했었다... 이것은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1938년에 <역사철학 서설>이라는 레이몽 아롱의 학위논문이 불러일으킨 아연실색을 상기시킨다. 심리학에서의 과학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역사에서 객관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22쪽)
그러니까 푸코의 학위논문 지도교수는 장 이폴리트였지만, 그는 본논문의 지도를 과학철학 전공자인 캉길렘에게 넘기도록 충고하며 푸코는 그에 따랐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광기의 역사>였다...
06. 12. 31.
P.S. 이제 30여 분 후면 제야의 종이 울리겠군. 여기에 새해 인사를 적어놓기로 하자.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비록 서재를 자주 찾아주시는 분들 때문에 나의 게으름은 축나고 지적 허영은 남아돌게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