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박이문 선생의 <예술철학>(문학과지성사, 2006) 개정판이 출간됐다. 지난 1983년 초판을 찍은 이후에 20쇄를 거듭 찍었다고 하는 이 책은 예술철학에 관한 국내서로서는 단연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초판이 나온 지 벌써 23년이 넘었고, 그동안 예술계에도 다른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고 다양한 변화가 있었지만, 내용에 있어서 책의 후기에 실은 최근의 논문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를 원래의 내용을 새롭게 요약하는 의미에서 추가한 것 이외에는 개정판의 내용이 초판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적어도 예술의 개념의 철학적 정의에 관한 한 나의 생각에는 핵심적인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어서 한자들은 모두 한글로 바뀌었고 도판들도 (비록 흑백이긴 하지만) 더 보충되었다. 게다가 별첨된 논문(27쪽)까지 보태져서 분량은 100쪽 가량 늘어났다. 10년도 더 전에 이미 두번쯤 읽은 책이지만 이번에 덧붙여진 논문에 대한 흥미도 있고 해서 나는 책을 다시 구입했다(이전에 갖고 있던 책은 박스 보관도서이다).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라고 제목이 붙어 있긴 하나 그 부제는 '<예술의 종말 이후>의 예술의 개념'이며, <예술의 종말 이후>는 지난 봄에 열심히 읽은 바 있는 아서 단토의 바로 그 책이다. 그리고 그 '단토'란 이름은 박이문 예술철학의 '기원'과도 연관되는 이름이다. 저자는 초판 서문에 이렇게 적었었다.

"예술이 갖는 신비한 힘은 무엇일까?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나는 지난 약 10여 년 간 예술철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가르쳐왔다. 이런 물음에 대해 하나의 일관성 있고 통일된 대답을 찾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1977년 여름 '인문학국가연구비'를 받고, 단토의 주도하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열렸던 12명의 예술철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들의 두달 간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난 후였다. 여기서 나는 처음으로 단토나 디키의 새로운 이론에 접하게 되었고 그후 대충 그런 테두리에서 예술에 대한 총괄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왔다."(개정판, 10쪽)

그러니까 여기서 그려지는 것은 '박이문-단토-디키'의 삼각형이다('트리오'라고 부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박이문 예술철학은 미국의 두 현대 예술철학자의 영향/압력하에 그들과의 이론적 긴장/대결을 자양분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해서 나의 생각으로 <예술철학>을 읽는 중요한 독법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와 조지 디키의 <예술사회> 등과 같이 읽는 것이다(예술제도론자인 디키 또한 그 책에서 단토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쓴 바 있다). 이론은 언제나 그것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있을 때 더 잘 이해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미학 연구자' 진중권은 뒷표지에 새겨진 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예술철학>은 단토의 생각에서 출발하되 '양상 논리'의 관점에서 예술을 그와는 다르게 정의하려는 시도다. 텍스트는 자기의 삶을 산다. 이 책에서 지은이가 예술의 정의로 제시하는 '가능세계'란 말 속에서 '가능성'을 '잠재성'으로 살짝 옮겨놓으면, 20년 전에 쓰인 책이 디지털 문화 속에서 새로이 풀어놓는 의미에 문득 놀라게 될 것이다." 

예술철학에 초면인 독자들도 이 분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평이하고 명쾌한 언어로 씌어진 이 입문서의 일독을 권한다.

06. 12. 28.

P.S. 개정판의 서문에는 출간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많은 이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데, 멋쩍게도 '아서 단토Arthru Danto'라고 병기된 영어 이름에서 오타가 났다('Arthur Danto'이다). 이런 걸 '삑사리'라고 부르던가. 학술지 편집에 오래 관여하다 보니 책을 펼치면 오문/오타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건 또 '삐딱이'라고 불러야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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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2-2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박이문 선생의 글에 대해서는 학부 1학년 때 안 좋은 추억(비문 투성이의 글을 읽다가..) 때문에 그 이후로 접하지 못했는데 한 번 읽어봐야 겠네요.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

로쟈 2006-12-2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철학과현실>에서 데리다를 추모하는 글을 읽으며 좀 당혹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아무래도 연세 탓인 듯). 한데, 그걸 제대로 교정보지 않는 편집자들의 직무유기가 더 무책임하다는 생각입니다...
 

'돈이냐 행복이냐'란 물음은 '돈이냐 사랑이냐'란 물음만큼이나 구닥다리이지만, 연말정산의 시즌이 돌아오면 직장인들은 한번쯤 생각해보는 주제일 법하다. 평소 연소득이라는 게 별로 의미가 없었던지라 '연말정산'을 해본 적이 없지만 올해엔 한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까닭에 몇 가지 서류들을 떼고 정보/자료를 입력하고 하는 일들을 해야 하게 생겼다. 그게 오늘의 일과 중 하나이다. 때마침 지난주에 출간된 <행복경제학>(미래의창, 2007)에 대한 리뷰들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고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본다(책의 출간일자는 2007년 1월 15일로 돼 있다. 이맘때면 '미래의 책'들을 앞당겨 보게 되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새롭다. 2007년의 책들!). '돈이냐 행복이냐'란 제목의 '게으른' 리뷰를 쓰면 왜 안되는지에 대해서. 책의 부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얼마가 필요한가'이다.

이데일리(06. 12. 27) 돈이냐 행복이냐

돈이 없는 사람은 항상 돈을 생각한다. 돈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돈만 생각한다." 억만장자로 유명한 폴 게티의 말이다. 우디 앨런은 "돈은 가난보다 좋다. 오로지 재정적인 이유뿐이라고 해도.."라고 말했다. 돈의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있으면 좋은 게 바로 돈이다. 이미 돈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다.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애쓰고, 쓰는 데서 희열을 느끼며, 벌어놓은 돈을 더 불리는데 집중한다.

실제로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도, 노후를 위해 들어놓은 보험이나 연금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돈이 있다면 이런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일종의 안도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보다 두배를 번다고 반드시 두배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다. 이처럼 당연하지만 아주 진부한 명제를 저자는 다양한 연구통계와 사례, 맛깔스런 언어로 버무려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겨우 이 정도라면 책은 읽으나 마나한 것 아닌가?).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400대 갑부들 중 설문에 응한 억만자들의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소 몇 마리가 전부인 동아프리카의 마사이족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 백만장자 보도 셰퍼와 행복하기 위해 돈과 저축, 의료보험, 사회보장 혜택 마저 버린 하리데마리 슈베르머의 대조적인 삶이 던져주는 의미도 크다.

미국의 노숙자가 인도의 노숙자보다 열배나 부유하지만 덜 행복한 이유도 흥미롭다. 미국의 노숙자들의 경우 배우자나 자식이 없거나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이유도 있지만 인도의 노숙자들이 더 가난한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난하게 느끼지 않고, 그만큼 행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빌 게이츠의 재산이 매년 자동적으로 몇 억 달러씩 늘어난다고 해도 줄곧 행복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혹여 큰 실수로 증가하는 흐름이 역전된다면 빌게이츠 역시 신년 보너스가 취소된 직장인처럼 우울해질 수도 있다.



그럴듯한 말의 조합으로 여겨질 법한 `행복경제학`이란 이 책의 제목은 실제 학문이다. 행복경제학의 개척자인 리처드 이스털린은 1930년대 혁명적인 논문을 통해 돈과 행복의 관계를 제시했고, 최근 행복경제학자들에 의해 속속 입증되고 있다. 저자인 하랄드 빌렌브록(1967- )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언론인으로 일하고 있다. 유력 잡지에 경재관련 현장 보고서를 게재해 여러차례 상을 수상한바 있으며 독일 최고의 경제 언론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양미영 기자)

문화일보(06. 12. 22) 무소유와 백만장자 사이 행복과 돈의 난해한 함수

행복과 돈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돈만 있으면 무조건 행복할까. 아니면 돈이 없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까. 현실론자들은 당연히 돈이 있어야, 그것도 충분히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낭만적 또는 관념적인 이들은 돈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행복이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책은, 돈과 행복 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고들고 있다. 결코 과도한 현실론이나 관념론에 빠지지 않고,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례들을 통해 돈과 행복이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행복경제학’이란, 단순히 행복에 관한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기만 하는 분야가 아니다. 소득과 재산이 삶 속에서 실제로 느끼는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다. 물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지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이를 전공으로 하는 학자들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점차 주목받고 있는 학문 분야다.

책은, 두 가지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행복과 돈의 상관 관계를 살핀다. 우선,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 ‘머니 코치’ 보도 섀퍼다. 그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가난은 잘못된 생각의 결과다. 사는 동안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은 자기 잘못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메시지로 섀퍼는 수백만명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스스로 백만장자가 됐다. 하지만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또 다른 예는, 행복하기 위해 돈 없는 삶을 선택한 하이데마리 슈베르머다. 그녀는 돈, 신용카드, 저축, 의료보험, 사회보장 혜택 등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선택한다. 단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필요한 일을 해준 대가로 충당할 뿐이다. 또는 상대방의 호의에 기대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같은 삶을 택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책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돈이 필수불가결함을 보여준다. 행복경제학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은 부자들 중에 있다’는 주장에 강하게 긍정한다. 하지만 ‘재정적인 자유를 얻는다면 누구나 행복해진다’는 명제엔 확실하게 부정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돈은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국민 1인당 연간 소득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엔 소득이 올라갈 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지만, 연간 소득 1만달러가 넘어서면 소득의 증가가 곧 행복감의 고취와 연결되지는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마디로 돈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돈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책은 증명하고 있다.(김영번 기자)

06. 12. 28.

 

 

 

 

P.S. 그러니까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돈이냐 행복이냐' 따위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돈이 필수불가결하며, 다만 이때의 행복은 상대적이어서 1인당 연간 소득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엔 소득이 올라갈 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지만, 연간 소득 1만달러가 넘어서면 소득의 증가가 곧 행복감의 고취와 연결되지는 않는다(인도의 노숙자가 미국의 노숙자보다 행복하다!). '가난한 날의 행복'도 있는 것이지만 가난 때문에 더 행복할 리는 없는 것이다. 그게 일상적 삶의 감각이다.  

김소운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은 과거에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교과서적' 내용과 무관하게 내가 기억하는 행복은 돈과 관련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덜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내가 초등학교때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께서 어느 해 연말인가 보너스를 포함해서 50만원의 월급을 받아오신 적이 있었다. 사상 '최고액'을 봉투에 두둑히 담아 들고 오신 아버지나 그걸 받아드신 어머니나 그날만큼은 더없이 행복해 하셨다. 아마도 그날 아버지는 북어 안주에 한잔 하셨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돈 자체가 행복을 대신해주는 건 아니다. 그 돈으로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걸 장만해줄 수 있다는 부듯함이 행복의 원천이었던 것. 적어도 '소득 1만달러'가 되기 전까지는(사실 이 '1만 달러'는 민주주의의 경제적/심정적 토대이기도 하다).

그 '1만 달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3인 가족을 기준으로 하면 연소득 3000만원 이상의 소득을 가리킬텐데, 얼마전에 신문을 보니까 그 정도 소득이면 60억 세계 인구 가운데 상위 6% 부근이라고 한다. 좀 넉넉하게 잡아서 10%라 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90%는 아직도 소득이 올라갈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는 계층에 속한다. 하므로 '돈이냐 행복이냐' 같은 '배부른' 소리는 자제하는 게 옳겠다. 

내 생각에 '근대소설'은 그 90%를 위한 문학 형식이었다(먹고살 만한 10%에게 필요한 건 엔터테인먼트이다). 우리가 1인당 연평균소득 3만불 시대로 진입한다면 '소설'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가난'이 빠진 문학은 김 빠진 사이다만큼이나 밋밋하다. 물론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을 고민할 수도 있고, 우아 떠는 소설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걸로 '문학정신'을 운운하는 일은 삼가하는 게 좋겠다.

어쩌다 이야기가 문학으로 번진 김에 나로선 미스테리하게 여겨지는 시 한편을 인용해본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인가에도 실렸(었)고 수능 문제로도 한번 출제된 바 있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이다. 얼마전 북데일리에 실린 인터뷰를 읽어보니까 이 시는 시인이 "남을 위해 쓴 유일한 시"라고 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시인이 자주 드나들던 동네 술집의 딸과 그의 애인. 남자가 도피중인 노동운동가라 결혼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신경림이 직접 식을 준비해 주례를 섰다. 그 때 선물한 축시가 바로 ‘가난한 사랑 노래’다. 지금 부부는 인천에서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나도 젊을 때 그런 사랑을 한 경험이 있어요. 실패한 첫사랑이 다른 사람의 성공에 오버랩된 거지. 남을 위해 썼지만, 결국 담은 정서는 내 거였어.” 일화를 알고 나서 읊는 시는 더욱 애잔하다.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이 가슴까지 전해온다. 이것이 신경림이 말한 ‘제 맛’인가 보다. 깊은 울림을 독자와 나누기 위해, ‘가난한 사랑 노래’ 전문을 싣는다."(06. 12. 08)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두 점을 치는 소리 /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란 마지막 구절만을 놓고 보아도 이게 어떻게 '결혼식 축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실패한 첫사랑의 시'가 말이다!). 언젠가 중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히고 시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물어보기도 했는데,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움, 사랑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라는 게 이 시의 메시지라면 말이다(이 시의 '깊은 울림'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시를 읽히면서 '자발적 가난'을 운운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시가 희망을 노래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가난의 울분과 한을 노래한 시를 굳이 모든 학생들이 읽고 음미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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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6-12-28 16:00   좋아요 0 | URL
'평균치'의 삶도 꾸려가지 못하리라는 위협/죄의식(!)과 '행복'이라는 어떤 도달해야 하는 시대적 이상...초자아가 행복의 자리로 귀환하고 있다는 지젝의 지적이 떠오르네요.

마노아 2006-12-28 22:05   좋아요 0 | URL
오늘 이 페이퍼 유독 마음에 와 닿아요. 내가 중학교 때에 이미 이 시를 절감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싸아하기도 합니다.

로쟈 2006-12-29 16:51   좋아요 0 | URL
suture님/ 요즘은 '행복' 또한 '자유'나 '평등'만큼이나 모호하고 무의미한 말이란 생각이 듭니다.
마노아님/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군요.^^
 

날짜로는 어제가 되겠지만 '오늘' 오전엔 강의가 있었고 오후엔 전시회 관람이 있었다. 그리고는 성적처리하는 데 나머지 시간을 꼬박 쏟아부었다. 별다른 개성이나 성의가 없는 답안지/리포트들을 읽는 일은 나름대로 고역이다. 그나마 잠시 마음을 달래준 것은 한꺼번에 들이닥친 책들인데, 학교에 가보니 얼마전 미국과 러시아의 인터넷서점에 주문한 책들과 해외도서관에 주문한 자료, 그리고 복사를 맡긴 책들과 알라딘에 주문한 책들까지 모두 합해 15권의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이번달 북매거진 '텍스트'까지 포함하면 16권이다). 책을 많이 구해보는 편이긴 하나 이 15권은 올해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해마다 나의 장서는 4-500권씩 불어난다).

그 '기록'을 기록해두기 위해서 집에 들고 온 몇 권의 책들 가운데 한권을 집어든다. 푸슈킨 연구논문집인 <나의 아프리카 하늘 아래서(Under the Sky of My Africa)>가 그것인데, 노스웨스턴대학출판부에서 올해 나온 책이다(이 대학에선 '러시아 문학과 이론 연구 총서'가 출간된다). 제목에 걸맞게 표지는 까만색이고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1799-1837)의 초상화가 박혀 있다. 그런데, 어인 아프리카?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푸슈킨의 외증조부가 표트르 대제의 총신이었던 아브람 페트로비치 한니발(1696-1781) 장군이었고 그가 아프리카 노예 출신의 흑인이었다. 족보를 따지자면 러시아 최고 시인에겐 아프리카의 피가 흐르고 있는 셈. 푸슈킨의 그의 조상을 모델로 <표트르 대제의 흑인>이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런 사정을 감안하여 던질 수 있는 질문. "푸슈킨은 흑인이었고 그게 정말 중요한가?" 이 연구논문집은 러시아와 미국의 정상급 학자들이 그러한 물음에 답한 글들을 모아놓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앤솔로지로서는 최고의 책이다. 분류하자면, 이런 게 나의 '전공서적'이며 이런 류의 책이나 논문들을 읽고 그와 유사한 성격의 논문들을 쓰는 게 나의 '전공공부'이다(아직도 간혹 당신의 전공이 뭐냐고 물어오시는 분들이 있다).   

 

이미 지난 1999년에 푸슈킨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한국어로 된 푸슈킨 선집이 2종 출간된 바 있다. 그것만으로도 러시아문학 연구자들의 체면은 얼마간 유지된다. 단, 아쉽게 생각하는 건 푸슈킨에 관한 국내 출간 단행본 연구서나 논문모음집이 단 한권도 없다는 것(놀라운 일이지만 이건 톨스토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출간되는 탐나는 연구서들을 구해볼 때마다 마음 한켠에서는 매번 그런 비교를 하게 된다. 2009년에는 사정이 좀 달라지기를 기대하며 나 자신에게도 분발의 채찍질을 가한다. '아프리카의 하늘 아래서'.(점차 인문학은 '니그로의 학문'이 되어 가는 게 아닐까?)

06.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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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隣) 2006-12-28 10:23   좋아요 0 | URL
'니그로의 학문', 참 재밌는 지적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문학은 '황인종의 정체성'이 있을까요. 항상 백색의 뒤에서 백색의 타자로서만 다른 색깔들을 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니 좀 우울해지기도 하네요. 재밌는 공부 많은 성취 하시길 빕니다. 추천하고 퍼갑니다.

로쟈 2006-12-28 11:19   좋아요 0 | URL
사회적으로 홀대받는 학문이란 뜻으로 썼습니다. 혹은 백수들의 학문. 토니 마이어스의 책에 따르면, 사회적 호명(주체화) 이전의 '주체'를 헤겔은 '니그로'라고 불렀다죠...

sommer 2006-12-28 15:47   좋아요 0 | URL
아직 호명의 '기회'를 실제로 받지 못했다는 의미일테죠. 그럼 언제라도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얘기가 되버리네요...

로쟈 2006-12-28 15:56   좋아요 0 | URL
뒤집어서 말하면, 언제든지 다시 '니그로'가 될 수 있다는 뜻도 되죠. 혹은 자발적인 자기-철회의 제스처를 통해서도 가능하겠고...
 

주말에 잠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후유증'으로 진종일 리포트와 씨름하게 됐다. 150여 명의 리포트와 시험지를 채점하는 일이 생각만큼 만만찮다. 예전엔 학기말에 350명까지 채점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탓(?)인지 100명만 넘어도 숨이 차다(100통이 넘으니 이메일 발송도 되지 않는다).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저녁을 먹고 나서 속이 다 울렁거린다. 이럴 때 딱 어디론가로 '넘어가고' 싶다. 비욘드(beyond)란 전치사가 머리속에 떠오른 이유이다. 그리고는 지난주에 나온 신간 <그레이트 비욘드>(지호, 2006)에 대해 몇 자 적고 싶어졌다.

 

 

 

 

책의 부제는 '고차원, 평행우주 그리고 만물의 이론을 찾아서'이다. "인간의 인식 너머에 있는 차원과 그것을 탐구한 물리학자들의 이야기. 지난 백 년 동안 이루어진 발전으로 중요한 물리적 개념이 된 고차원에 대해, 지은이 폴 핼펀은 고차원 이론의 시작과 발전, 그리고 앞으로의 발전 방향까지 모두 담았다."라는 게 책의 개요이고.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와 <초공간>이 최고의 책들이다(비록 나는 <초공간>만 읽었지만).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와 함께 이 분야의 필독서 내지는 필수 소장도서 되겠다. 젊은 물리학자 폴 핼펀이 차세대 '이야기꾼'이 될 수 있을까?

문화일보(06. 12. 22) 인식한계 넘어선 고차원이론 ‘미지’를 탐구해 온 과학자들

물, 불, 흙, 그리고 공기. 그리스 자연철학 이래로 세상을 구성하는 네가지 근원적 물질로 이해됐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다. 다섯번째 물질에 대한 탐구가 계속됐으며 유력한 후보로 빛이 꼽혔다. 물리학에서 이 제5원소의 존재를 뛰어넘어 버린 사람은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본질을 넘어, 속도에 착안하면서 상대성이론이라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창을 열었다.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일반상대성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넘어 이를 통합하는 ‘통일장’이론에 몰두했지만 실패했다. 이 책은 최신 과학이론을 ‘더 그레이트 비욘드(The great beyond)’, 현재를 넘어서는 위대한 무엇에 접근해온 과학자들의 기록이다.

현재 인식 가능한 차원은 1차원 점, 2차원 면, 3차원 입체, 그리고 4차원 시간이다. 이런 4차원 속에 존재하는 우주의 힘은 전자기력, 중력, 약한 상호작용, 강한 상호작용 4가지 힘이다. 이 가운데 인간이 현재 가장 잘 알고 있는 힘은 전자기력이다. 19세기 맥스웰이 전자기현상을 네 개의 식으로 기술하는 데 성공한 이래 현재 가장 작은 세계에서의 전자기적 현상을 양자전기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됐다.

그 다음이 중력이다. 17세기 뉴턴이 발견해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해 새롭게 해석됐지만 전자기력과는 달리 아주 미세한 세계에서는 아직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약한 상호작용은 1896년 앙리 베크렐이 발견한 방사성 붕괴, 즉 약한 핵력이고, 마지막 강한 상호작용은 원자핵이 왜 분해되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우주의 발생과 함께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네 가지 힘은 고집 센 형제들처럼 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네 개가 한데 모이면 현재의 4차원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 ‘더 그레이트 비욘드’를 도입하면 거짓말처럼 설명이 된다. 이것이 20세기초 독일의 수학자 데오도르 칼루차와 스웨덴의 물리학자 오스카 클라인이 제시한 ‘칼루차-클라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과 관련 3년 가까이 고민하다가 1919년 “이론의 형식적 일치에 놀라울 뿐”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실험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신비주의의 영역으로 흘러가면서 무관심해졌다가 최근 초끈이론, M이론 등 다차원 이론을 통해 새로운 힘을 받고 있다. 또 새로운 강입자가속기 등의 개발은 실험적 입증을 가능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과연 미지의 새로운 차원이 밝혀질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모든 것을 새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김승현 기자)

경향신문(06. 12. 23) 재미있고 쉬운 ‘최첨단 물리학’

이론물리학의 묘미는 사람의 생각만으로 자연의 숨은 비밀을 밝히는 데 있다. 즉, 비싼 실험장비 없이도 펜과 종이만으로도 우주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데 그 묘미가 있다. 순수이론물리학에서는 매우 기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 질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왜 공간에는 가로·세로·높이만 있는지, 왜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있고, 시간을 나타내는 데는 하나의 숫자만 있으면 되는지 등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란 매우 어렵다.

다행히 이론물리학에선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직관적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가 간혹 있다. 이러한 것을 경험한 이론물리학자는 매우 운이 좋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운이 따른 물리학자들이 칼루차와 클라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가로, 세로, 높이라는 세 개의 공간 차원을 뛰어넘는 여분의 차원을 도입함으로써 여러 가지 자연의 기본 상호작용을 통합하는 ‘통일장 이론’을 제안했다.

자연의 기본 힘을 설명하는 방법 중 가장 우아한 것은 중력을 4차원의 시공간이 굽어진 것으로 설명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이다. 중력 외에도 자연의 기본 힘에는 세 가지가 더 있다.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이다. 이 힘들을 설명하는 이론은 일반상대론과는 판이하게 달라 보인다.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다양한 기본 힘을 설명하고 있음은 무언가 현재까지의 물리학이 덜 발전해서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물리학자들은 더 큰 이론적 체계에서는 네 가지의 기본 힘들이 하나의 통일된 언어로 적힐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칼루차와 클라인은 4차원 이상의 여분의 차원이 있는 시공간에서의 중력이 4차원에 투영될 경우 중력 이외의 힘들로 나타남을 계산을 통해 보였다.

20세기 초에 발표된 이러한 칼루차와 클라인의 아이디어는 1970년대 들어와 11차원의 초중력이론(supergravity)으로 발전했으며 11차원이 모든 힘이 들어갈 수 있기에 적합하다는 주장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10차원의 초끈이론(물질의 근원이 점입자가 아닌 작은 진동하는 끈으로 되어있다는 이론)이 대두되어 지금까지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된 이론의 강력한 후보로 논의되고 있다.

사실 이론물리학에서는 아이디어의 부침이 심하다. 그러나 칼루차와 클라인의 여분의 차원의 아이디어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론물리학의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사용되고 있다. 폴 핼펀은 20세기 물리학 중에서도 우주와 통일장 이론에 관해 일반인들에게 많은 책을 써오고 있는 저자이다. 이번에 출간된 ‘그레이트 비욘드’에서 핼펀은 최첨단 물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재미있는 글 솜씨를 잘 조합해 매우 읽기 쉬운 책을 만들어냈다. 보기 드문 책이다. 이러한 책을 접하는 사람은 제목만 들어도 어렵게만 다가오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최신 과학이론에 대한 과학사라고 볼 수 있다. 과학사라 해서 우리가 직접 만날 수 없는 과거의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등장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앞부분에는 물론 과거 물리학자들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모아놓았지만-어떻게 이렇게 좋은 자료를 많이 수집하였는지 감탄할 만하다- 뒷부분에는 아직도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는 물리학자들의 산 증언이 많이 기록돼 있다. 특히 반가운 것은 필자가 미국에 막 유학 갔을 당시 칼루차와 클라인 이론으로 예일대학이 유명했는데 책에 지도교수 초도스의 일화가 잘 담겨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책의 8할 정도를 할애해 칼루차와 클라인의 기하학을 통한 통일장 이론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학사에 흥미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에서는 1980년대 이후의 이론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제12장에서는 현재 물리학계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여분의 차원이 크다는 ‘브레인 월드이론’ 등을 제안하고 실험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이론에서는 우리의 우주와 아주 가까우면서도 보이지 않는 평행한 우주가 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다른 차원과 다른 우주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면, 인간이 지구만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닌 이 우주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분야에 대한 책을 몇 권 이미 섭렵한 독자에게는 물리학 자체에 대해서는 새로운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낳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즉, 물리를 공부했건 안했건 간에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또한 이론물리학자들 간의 대화와 상호 교류에 관한 증언은 이 책만의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몇몇 물리학자의 이름이 잘못 적혀 있어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다. 또 아쉬운 점은 이와 같은 훌륭한 책이 한국사람에 의해서 직접 집필된 적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그런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남순건|경희대교수·물리학)

06.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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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12-27 00:20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비로그인 2006-12-27 02:12   좋아요 0 | URL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는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브라이언 그린의 신작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몹시 기대됩니다..

로쟈 2006-12-28 16:2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책은 갖고 있는데, '명퇴'라도 해야 읽을 수 있을런지...
 

이번 주중에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앤디 워홀 그래픽전'을 관람할 예정이다. 전시는 지난 2일부터 시작됐는데, 까맣게 잊고 있다가 기회가 닿았다(따지고 보면 어려운 걸음도 아니지만). 지나간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그 중 하나를 옮겨놓는다. 전시에 관한 안내는 미술관의 홈피(http://www.snumoa.org/Exhibition/view.asp?sType=c)를 참조할 수 있다.

경향신문(06. 12. 04) 언제봐도 새로운 도발 ‘앤디 워홀’

“돈을 버는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오늘날 순수미술에 대한 도전은 기실 팝아트의 대표작가 앤디 워홀(1928~1987)로부터 시작됐다. 여러 도발적인 선언을 통해 스스로 상업예술가임을 드러내고 미술 역시 상품이라고 당당히 떠들고 다녔던 예술가.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조차도 상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공장(Factory)’이라고 이름붙였다. 조수를 쓰는 일 또한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돈과 명성, 권력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다.



그래서 앤디 워홀은 현대 작가들에게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면서 동시에 모범이다. 또한 요즘 화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성에 기반한 소재를 그린 작품들은 실은 워홀의 팝아트 작품과 일견 닮아 있다. 정형민 서울대 미술관장은 이러한 요즘 작품들에서 풍기는 ‘네오팝’적인 성향의 연원은 바로 워홀에 있다고 말한다. 정관장은 “일본과 한국 작가들이 요즘 다시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미술작품을 제작하고 있고 중국의 정치적 팝아트 작품 역시 워홀의 스타일로 정치상황을 풍자한 것”이라며 이 때문에 다시 앤디 워홀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미술관이 지난 2일 시작해 내년 2월10일까지 여는 ‘앤디워홀 그래픽전’은 초기 상업 광고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시기의 구두작업에서 이제는 워홀의 상징이 된 캠벨 스프캔, 사진 연작, 전기의자 연작, 꽃 연작과 위장 연작 등 그의 전 생애를 망라하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이 전시는 미국 뉴욕시립대학(CUNY)의 부속기관인 QCC 아트 갤러리와의 교류전으로 미국과 스페인의 개인 소장가의 컬렉션 60여점으로 구성됐다.

그래픽전이라는 제목은 워홀의 작품이 기본적으로 판화기법에 기반하는 데서 따왔다. 워홀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고 늘 기존의 이미지를 변형하고 가공했다. 1960년대 전후 코카콜라 병과 캠벨스프캔, 브릴로 박스 등 일상의 상품 이미지를 평면으로 옮겨온 작품은 워홀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평생을 거쳐 몰두한 작업은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제작한 초상작업이다.



워홀은 실크스크린을 이용해 원형을 복제하면서도 여러가지 색상을 사용하고 이미지의 배치, 인쇄 상태를 달리했다. 언뜻 인쇄상의 실수처럼 보이는 실크스크린 작품들은 기계적인 작업에 손맛을 더하고 순수미술가로서 독창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의도적인 기법이었다. 전시에는 유명인에 대한 워홀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재키’ ‘리즈’ 등이 전시 중이다.



워홀은 1960년대 중반부터 죽음의 이미지가 강하게 드리워져 있는 ‘전기의자’ 연작, 존 F 케네디를 모델로한 ‘플래쉬’ 연작(이상은 전시 중), ‘자살’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서려있는 이들 작품은 고객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래서 밝고 경쾌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동경을 읽어내고 돈을 벌기 위해 제작한 것이 바로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감이 살아있는 ‘꽃’ 연작이다.



관람동선을 따라 돌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작품은 위장을 위한 알록달록한 군복 이미지에서 따온 ‘카모플라지’ 연작이다. 평생 자신의 작품 이면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며 표면만 봐달라고 주문하던 워홀의 마지막 작품이다. 온갖 화려한 색깔로 변형된 ‘카모플라지’는 세상의 관심을 즐기면서도 철저히 자신을 감추려했던 워홀 자신을 반영한 일종의 추상적 자화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윤민용 기자)

06. 12. 25.

 

 

 

 

P.S. 워홀에 관한 책들은 가장 최근에 나온 클라우스 호네프의 <앤디 워홀>(마로니에북스, 2006)를 비롯해서 여러 권이 나와 있다. '상식'이 필요하다면, <30분에 읽는 앤디 워홀>(랜덤하우스코리아, 2005)을 손에 들면 되겠고, 한 작품이라도 소장해보고픈 꿈을 키우고 싶다면 <앤디 워홀 손안에 넣기>(마음산책, 2006)를 먼저 손안에 넣으면 됬다. 워홀 이야기들은 미술비평가 김광우의 책 등을 훑어볼 수 있겠다. 나는 (예전에 20분 읽어두었기에) 10분만 더 읽고 전시장에 가볼 예정이다. 특별히 관심이 끄는 건 '전기의자' 시리즈인데, 죽음에 대한 워홀의 강박관념을 드러내준다고 하니까 흥미가 생긴다(게다가 대중으로부터 가장 외면받은 시리즈!). 사실 워홀은 한 채권자의 권총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지 않았나? 농담삼아 말하자면, 전기의자가 그보단 낫다고 생각했을까?.. 

P.S.2. 전시회를 오늘 관람할 수 있었다. 앞에 적은 마지막 멘트는 수정되어야 하는데, 워홀이 '전기의자' 시리즈를 제작한 건 1967년이고, 그가 피격당한 건 이듬해인 1968년이다. 10점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의 포트폴리오가 모두 전시돼 있어서 반가웠다. 이 시리즈 외에 눈길을 끈 작품은 '그림자'. 워홀 자신의 초상화를 재료로 한 시리즈이다(전시된 건 아래의 한 작품). '캠벨 수프'보다야 이런 작품이 보다 '전통적'이고 보다 흥미롭다.

06.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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