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냐 행복이냐'란 물음은 '돈이냐 사랑이냐'란 물음만큼이나 구닥다리이지만, 연말정산의 시즌이 돌아오면 직장인들은 한번쯤 생각해보는 주제일 법하다. 평소 연소득이라는 게 별로 의미가 없었던지라 '연말정산'을 해본 적이 없지만 올해엔 한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까닭에 몇 가지 서류들을 떼고 정보/자료를 입력하고 하는 일들을 해야 하게 생겼다. 그게 오늘의 일과 중 하나이다. 때마침 지난주에 출간된 <행복경제학>(미래의창, 2007)에 대한 리뷰들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고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본다(책의 출간일자는 2007년 1월 15일로 돼 있다. 이맘때면 '미래의 책'들을 앞당겨 보게 되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새롭다. 2007년의 책들!). '돈이냐 행복이냐'란 제목의 '게으른' 리뷰를 쓰면 왜 안되는지에 대해서. 책의 부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얼마가 필요한가'이다.
이데일리(06. 12. 27) 돈이냐 행복이냐
돈이 없는 사람은 항상 돈을 생각한다. 돈이 있는 사람은 오로지 돈만 생각한다." 억만장자로 유명한 폴 게티의 말이다. 우디 앨런은 "돈은 가난보다 좋다. 오로지 재정적인 이유뿐이라고 해도.."라고 말했다. 돈의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있으면 좋은 게 바로 돈이다. 이미 돈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하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다.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해 애쓰고, 쓰는 데서 희열을 느끼며, 벌어놓은 돈을 더 불리는데 집중한다.
실제로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도, 노후를 위해 들어놓은 보험이나 연금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돈이 있다면 이런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일종의 안도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보다 두배를 번다고 반드시 두배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다. 이처럼 당연하지만 아주 진부한 명제를 저자는 다양한 연구통계와 사례, 맛깔스런 언어로 버무려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겨우 이 정도라면 책은 읽으나 마나한 것 아닌가?).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의 400대 갑부들 중 설문에 응한 억만자들의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소 몇 마리가 전부인 동아프리카의 마사이족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 백만장자 보도 셰퍼와 행복하기 위해 돈과 저축, 의료보험, 사회보장 혜택 마저 버린 하리데마리 슈베르머의 대조적인 삶이 던져주는 의미도 크다.
미국의 노숙자가 인도의 노숙자보다 열배나 부유하지만 덜 행복한 이유도 흥미롭다. 미국의 노숙자들의 경우 배우자나 자식이 없거나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이유도 있지만 인도의 노숙자들이 더 가난한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난하게 느끼지 않고, 그만큼 행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빌 게이츠의 재산이 매년 자동적으로 몇 억 달러씩 늘어난다고 해도 줄곧 행복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혹여 큰 실수로 증가하는 흐름이 역전된다면 빌게이츠 역시 신년 보너스가 취소된 직장인처럼 우울해질 수도 있다.
그럴듯한 말의 조합으로 여겨질 법한 `행복경제학`이란 이 책의 제목은 실제 학문이다. 행복경제학의 개척자인 리처드 이스털린은 1930년대 혁명적인 논문을 통해 돈과 행복의 관계를 제시했고, 최근 행복경제학자들에 의해 속속 입증되고 있다. 저자인 하랄드 빌렌브록(1967- )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언론인으로 일하고 있다. 유력 잡지에 경재관련 현장 보고서를 게재해 여러차례 상을 수상한바 있으며 독일 최고의 경제 언론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양미영 기자)
문화일보(06. 12. 22) 무소유와 백만장자 사이 행복과 돈의 난해한 함수
행복과 돈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돈만 있으면 무조건 행복할까. 아니면 돈이 없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까. 현실론자들은 당연히 돈이 있어야, 그것도 충분히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낭만적 또는 관념적인 이들은 돈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행복이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책은, 돈과 행복 간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고들고 있다. 결코 과도한 현실론이나 관념론에 빠지지 않고,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례들을 통해 돈과 행복이 어떤 함수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행복경제학’이란, 단순히 행복에 관한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기만 하는 분야가 아니다. 소득과 재산이 삶 속에서 실제로 느끼는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다. 물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지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이를 전공으로 하는 학자들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점차 주목받고 있는 학문 분야다.
책은, 두 가지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 행복과 돈의 상관 관계를 살핀다. 우선,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한 ‘머니 코치’ 보도 섀퍼다. 그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가난은 잘못된 생각의 결과다. 사는 동안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은 자기 잘못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메시지로 섀퍼는 수백만명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스스로 백만장자가 됐다. 하지만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또 다른 예는, 행복하기 위해 돈 없는 삶을 선택한 하이데마리 슈베르머다. 그녀는 돈, 신용카드, 저축, 의료보험, 사회보장 혜택 등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선택한다. 단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필요한 일을 해준 대가로 충당할 뿐이다. 또는 상대방의 호의에 기대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같은 삶을 택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책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돈이 필수불가결함을 보여준다. 행복경제학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은 부자들 중에 있다’는 주장에 강하게 긍정한다. 하지만 ‘재정적인 자유를 얻는다면 누구나 행복해진다’는 명제엔 확실하게 부정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돈은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국민 1인당 연간 소득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엔 소득이 올라갈 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지만, 연간 소득 1만달러가 넘어서면 소득의 증가가 곧 행복감의 고취와 연결되지는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마디로 돈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돈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책은 증명하고 있다.(김영번 기자)
06. 12. 28.
P.S. 그러니까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돈이냐 행복이냐' 따위가 아니다. 정리하자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선 돈이 필수불가결하며, 다만 이때의 행복은 상대적이어서 1인당 연간 소득 1만달러에 이르기까지엔 소득이 올라갈 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지만, 연간 소득 1만달러가 넘어서면 소득의 증가가 곧 행복감의 고취와 연결되지는 않는다(인도의 노숙자가 미국의 노숙자보다 행복하다!). '가난한 날의 행복'도 있는 것이지만 가난 때문에 더 행복할 리는 없는 것이다. 그게 일상적 삶의 감각이다.
김소운의 수필 '가난한 날의 행복'은 과거에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런 '교과서적' 내용과 무관하게 내가 기억하는 행복은 돈과 관련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덜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내가 초등학교때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께서 어느 해 연말인가 보너스를 포함해서 50만원의 월급을 받아오신 적이 있었다. 사상 '최고액'을 봉투에 두둑히 담아 들고 오신 아버지나 그걸 받아드신 어머니나 그날만큼은 더없이 행복해 하셨다. 아마도 그날 아버지는 북어 안주에 한잔 하셨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돈 자체가 행복을 대신해주는 건 아니다. 그 돈으로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걸 장만해줄 수 있다는 부듯함이 행복의 원천이었던 것. 적어도 '소득 1만달러'가 되기 전까지는(사실 이 '1만 달러'는 민주주의의 경제적/심정적 토대이기도 하다).
그 '1만 달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3인 가족을 기준으로 하면 연소득 3000만원 이상의 소득을 가리킬텐데, 얼마전에 신문을 보니까 그 정도 소득이면 60억 세계 인구 가운데 상위 6% 부근이라고 한다. 좀 넉넉하게 잡아서 10%라 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90%는 아직도 소득이 올라갈수록 행복지수도 비례하는 계층에 속한다. 하므로 '돈이냐 행복이냐' 같은 '배부른' 소리는 자제하는 게 옳겠다.
내 생각에 '근대소설'은 그 90%를 위한 문학 형식이었다(먹고살 만한 10%에게 필요한 건 엔터테인먼트이다). 우리가 1인당 연평균소득 3만불 시대로 진입한다면 '소설'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가난'이 빠진 문학은 김 빠진 사이다만큼이나 밋밋하다. 물론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을 고민할 수도 있고, 우아 떠는 소설들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걸로 '문학정신'을 운운하는 일은 삼가하는 게 좋겠다.
어쩌다 이야기가 문학으로 번진 김에 나로선 미스테리하게 여겨지는 시 한편을 인용해본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인가에도 실렸(었)고 수능 문제로도 한번 출제된 바 있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이다. 얼마전 북데일리에 실린 인터뷰를 읽어보니까 이 시는 시인이 "남을 위해 쓴 유일한 시"라고 한다.
"작품의 주인공은 시인이 자주 드나들던 동네 술집의 딸과 그의 애인. 남자가 도피중인 노동운동가라 결혼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신경림이 직접 식을 준비해 주례를 섰다. 그 때 선물한 축시가 바로 ‘가난한 사랑 노래’다. 지금 부부는 인천에서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나도 젊을 때 그런 사랑을 한 경험이 있어요. 실패한 첫사랑이 다른 사람의 성공에 오버랩된 거지. 남을 위해 썼지만, 결국 담은 정서는 내 거였어.” 일화를 알고 나서 읊는 시는 더욱 애잔하다.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이 가슴까지 전해온다. 이것이 신경림이 말한 ‘제 맛’인가 보다. 깊은 울림을 독자와 나누기 위해, ‘가난한 사랑 노래’ 전문을 싣는다."(06. 12. 08)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두 점을 치는 소리 /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란 마지막 구절만을 놓고 보아도 이게 어떻게 '결혼식 축시'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실패한 첫사랑의 시'가 말이다!). 언젠가 중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히고 시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물어보기도 했는데, 당신이라면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움, 사랑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라는 게 이 시의 메시지라면 말이다(이 시의 '깊은 울림'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시를 읽히면서 '자발적 가난'을 운운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시가 희망을 노래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가난의 울분과 한을 노래한 시를 굳이 모든 학생들이 읽고 음미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