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리뷰만을 보자면 이번주의 화제작은 단연 필립 짐바르도의 <루시퍼 이펙트>(웅진지식하우스, 2007)이다. 엊그제 서점에서 잠깐 봤을 때는 '대단한 두께'라는 것 말고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었는데('무슨무슨 이펙트'란 제목을 단 책들은 그저그런 책들이 아닌가란 편견 때문에)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니 책은 두께 이상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심리학' 책이다. 소위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모의 교도소 실험'의 결과가 책의 포인트이다(이 유명한 실험 자체는 다른 책들에서도 읽어볼 수 있는데, 이번에 번역된 저자 짐바르도가 그 '저작권자'라고 한다). 두 개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1. 24) 악마는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2004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자행된 미군의 만행이 내부 고발자에 의해 적나라한 사진들과 함께 외부에 공개되자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해 9월 만행의 중심인물 칩 프레더릭 하사를 만난 필립 짐바르도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는 당시 37살의 그가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2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침례교 교회에 나갔으며, 스스로를 도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프레더릭은 아부그라이브 학대 만행에 가담한 뒤에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심리학자들은 모범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던 그가 자신의 근무환경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학대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정신병적 성향의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정신분열증·우울증·히스테리를 비롯해 주요 심리학적 병리학과 관련해 그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범위”에 속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런 ‘악마’로 돌변했을까? 짐바르도 교수의 <루시퍼 이펙트>(웅진지식하우스)는 바로 그 문제,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를 구체적 실험을 통해 추적해가는 방대한 저작이다. 루시퍼(Lucifer)’는 원래 하느님이 가장 사랑한 천사였으나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사탄이다. 그러니까 ‘루시퍼 이펙트’는 멀쩡한 사람이 악마로 돌변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지은이는 본장 첫머리에 네덜란드 화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의 그림 <서클 리미트 Ⅳ>를 보여준다. 둥근 구 표면에 날개를 편 천사들이 셋씩 짝을 이뤄 나뭇잎처럼 촘촘히 그려져 있는데 묘하게도 초점을 천사한테서 그들 옆 빈공간으로 옮기는 순간 뿔달린 박쥐모양의 악마들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구도로 변한다.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심리학적 진실은 이렇다. 세계는 선과 악으로 가득하다.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고 불완전하다. 천사가 악마로 될 수도 있고, 악마가 천사로 될 수도 있다.

지은이는 오랫동안 이웃으로, 친척으로 함께 오손도손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날 살인마로 돌변해 1백만 이상을 죽인 르완다의 후투족-투치족 비극,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영국군의 미국독립전쟁 당시 주민학살 등의 예를 들면서 만행 당사자들이 칩 프레더릭처럼 평소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이었음에 주목한다. 그 ‘정상’ 뒤 깊숙한 곳엔 악마가 도사리고 있었을까?

<루시퍼 이펙트>의 핵심 주제는 ‘인간의 악행은 개개인의 기질 탓인가, 아니면 그가 놓여 있는 상황 탓인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상자 안의 사과가 썩는 것은 사과 자체가 먼저 썩었기 때문이냐, 사과는 원래 멀쩡했는데 썩은 상자가 썩게 만들었기 때문이냐? 여기서 짐바르도의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SPE)’이 등장한다. 이 실험이 책의 뼈대다.

아부그라이브 만행이 자행되기 33년 전인 1971년 8월14일 짐바르도는 하루 15달러씩 주기로 하고 실험참가자를 모집해 그들 중 24명의 ‘지극히 정상적인’ 대학생들을 뽑았다. 실험은 스탠퍼드 대학 지하실에 모의 교도소를 만들어 놓고 모집학생들을 교도관과 수감자 두 그룹으로 나눠 2주간 일반 교도소와 같은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해 그들 사이에 어떤 심리·행동 양식상의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었다.

경찰에 부탁해 일반적 절차에 따라 그들을 체포한 뒤 3 × 3. 크기의 방 3개에 각각 세 명씩 수감자를 넣고 1개조 3명씩의 교도관 3개조와 지원근무자, 교도소장이 배치됐다. 두 그룹으로 나뉜 학생들은 그것이 실험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여차하면 실험을 포기할 수도 있으며, 부모들도 사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험 시작 첫날 점호시간부터 상황은 그들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교도관 역을 맡은 학생들은 진짜 교도관처럼 행세하기 시작했고 그들 정체성마저 거기에 맞춰 변해갔다. 수감자들 역시 저항도 하고 일부 탈락하기도 했으나 심리상태는 일반 교도소 수감자들을 닮아갔다. 책은 그런 변화과정을 매우 자세하게 보여주는데, 실험의 전모를 완전히 드러내기는 이 책이 처음이라 한다.

실험은 사태가 매우 우려할 만한 지경으로 번져가던 제6일째 중단되고 말았다. 교도관과 수감자, 그리고 관찰자, 외부방문자들의 시선을 교차편집해 실험 당시의 사건과 참가자들의 심리상태, 종료 뒤의 평가, 회고 등이 종합적으로 제시돼 있다. 참가자들은 왜 실험인 줄 알면서도 극한상황으로 빨려들어갔는가. 왜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 실험은 33년 뒤 아부그라이브 비극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일어났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루시퍼 이펙트는 개인 기질보다는 상황, 상황을 조성하는 시스템, 곧 썩은 사과보다는 썩은 상자 탓이 더 크다는 게 결론이다. ‘밴두라 실험’ ‘깨진 유리창’ 이론 등도 등장한다. 물론 그것이 개인의 비도덕적, 불법적 악행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고 책임을 면제해주지도 않는다는 걸 짐바르도는 거듭 강조한다. 그는 누구든 악마로 전락할 수 있지만 누구든 영웅이 될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악에 맞서 싸우면서 루시퍼 이펙트에서 벗어나기 위한 영웅적 노력을 보통 사람들에게 촉구한다.(한승동 선임기자)

세계일보(07. 11. 24) 무엇이 인간을 악마로 변하게 하는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은 주로 긍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부정적인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특별히 악한 ‘상황’ 또는 ‘시스템’에서는 얼마든지, 끝없이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가학행위를 하고 사진을 찍은 미군 헌병들은 원래부터 변태성욕자에 가학적인 성향을 가진 정신병자들이었을까?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건을 일으킨 조승희는 태어날 때부터 살인을 즐기고 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런 유혈사태를 일으켰을까? 답은 ‘아니다’.

1971년 평범한 대학생들에게 교도관과 죄수 역할을 행하게 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Stanford Prison Experiment, 이하 SPE)의 결과를 발표해 심리학계는 물론 전 세계적인 충격을 가져왔던 필립 짐바르도 박사는 이를 ‘루시퍼 이펙트’, 즉 악마효과라 명명했다. 스탠퍼드 대학 지하실에 임시로 설치한 감옥에 자원자인 대학생 24명을 임의로 교도관과 죄수로 나눠 2주 동안 생활하도록 한 이 실험은, 저자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악몽 같은 실험이 되고 만다. 교도관 역을 맡은 학생들은 손에 쥐어진 권력에 심취돼 엄청난 가학행위를 끝없이 저질렀고, 죄수 역할의 학생들은 신경쇠약과 정신질환에 시달렸으며, 실험은 6일 만에 종결됐다.  

 

이 실험 결과는 짐바르도 박사의 학회 발표와 다큐멘터리·영화(‘엑스페리먼트’) 등을 통해 수없이 알려졌고 심리학은 물론 사회학·정치학 등 관련서적에 빼놓지 않고 실릴 정도로 유명한 실험이 됐다. 그런데 36년이 지난 SPE의 내용을 다시 책으로 엮어낸 저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촉매제는 2004년의 아부그라이브 사건이었다.

이라크 아부그라이브에서 미군 헌병들은 이라크 포로들의 옷을 벗기고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가학행위를 저질렀으며, 심지어 이를 활짝 웃으며 사진으로 찍어 기록을 남겼다. 짐바르도 박사는 전 세계를 경악시킨 이 사건을 지켜보며 놀라기는커녕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헌병들은 포로들의 머리에 두건을 씌우고 옷을 벗기고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게 했다. SPE의 교도관들이 저지른 행동과 유사했던 것이다. 이들은 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이런 일을 웃으며 할 정도의 정신이상자라면 미국 군인으로 참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스탠퍼드대에서 명예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다시 한 번 루시퍼 이펙트에 대해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수십년이 지난 SPE의 자료를 모두 모아 정리하면서, 교사가 학생에게 끝없이 심한 체벌을 가하는 ‘밀그램 실험’ 등 심리학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관련 실험들을 함께 분석한다. 르완다와 난징의 학살과 강간사건 등 집단광기를 보인 역사적 사건들도 조명한다.

한국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내용도 있다. 이 책을 마무리하던 지난 4월, 저자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건을 접한다. 이 사건 역시 그는 루시퍼 이펙트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미디어가 조승희의 ‘왕따’현상을 집중 조명하고, 한국에서는 그의 가족들이 머리숙여 사죄했다. 그러나 짐바르도 박사는 이 같은 분석이 잘못된 접근이라고 본다. 그 사건이 미국 학교에서 처음 일어난 총기난사사건이라면 범인의 성장배경과 인간성 등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겠지만, 미국 학교의 총기사건은 벌써 11번째다. 루시퍼 이펙트는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시스템 안에 들어가면 사람은 악해질 수 있다고 저자는 믿는다.

그러면 악한 상황이 생기면 악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루시퍼 이펙트 벗어나기’에 초점을 맞춘다. 집단 광기를 보이는 상황에서도 시스템에 저항하고 선을 추구하는 ‘작은 영웅’은 항상 있었다. 저자는 루시퍼 이펙트에서 벗어나는 10단계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감을 갖고, 정체성을 인식하고, 부당한 권위에는 반항하며, 집단 내에서도 나의 독립성을 소중하게 여기고,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것 등이다.

루시퍼는 악마를 뜻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던 것은 아니다. 원래 천사였으나 신에게 반기를 들고 악마로 변한 장본인이다. 이 책의 제목이 ‘데빌(devil) 이펙트’가 아닌 루시퍼 이펙트인 이유다. 루시퍼는 악마의 수장이지만, 얼마든지 악마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악한 시스템은 항상 우리를 위협하지만, 이를 당당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7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의 결론이다.(권세진 기자)

07. 11. 24.

P.S. 몇 가지 생각을 덧붙이자면, 먼저 원저 자체가 올봄에 출간된 신간이라는 것. 576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불과 6개월만에 국역본이 나왔다는 건 놀라운 순발력이다. 아마도 원저가 출간되지 이전에 판권 교섭이 이루어진 게 아닌가 짐작해본다(이 경우에도 작년 조승희 사건이 기획의 모티브가 된 거라면 기획으로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번주에 소개된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천 개의 빛나는 태양> 또한 원작이 올해 나온 소설이니 그 정도면 거의 '동시 출판' 시대로 접어드는 거 아닐까 싶다(굼뜨디 굼뜬 인문/이론서들의 경우와 대조된다). 

 

 

 

 

아부그라이브에 대해서는 당대비평 특별호로 나왔었던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생각의나무, 2004)를 참조할 수 있다(나는 물론 슬라보예 지젝의 글을 주목해서 읽었다). 그리고 '악의 평범성'과 관련하여 바로 떠오르는 책은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 2006)이고. 리뷰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오랫동안 이웃으로, 친척으로 함께 오손도손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날 살인마로 돌변해 1백만 이상을 죽인 르완다의 후투족-투치족 비극"과 관련해서는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의 <내 이름은 임마꿀레>(섬돌, 2007)를,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는 작년에 여러 차례 언급했던 책 아이리스 장의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미다스북스, 2006)를 더 참조할 수 있다. '르완다 대학살'을 다룬 영화로는 <호텔 르완다>가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946292). 그리고 '난징 대학살'을 다룬 새 영화들이 올해 개봉예정으로 돼 있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007817), 어찌된 영문인지 '조용하게' 한 해가 지나고 있다(1937년 소련에서의 대숙청에 대해서도 별다른 조명 없이 올해가 저물 것 같다). 이 또한 무슨 '음모'의 결과일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유 2007-11-24 19:18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서점에 나갔다가 좀 들춰보았습니다. 내가 지금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에 놓았습니다.
대신 <대단한 책>을 들고왔습니다. 미술책 몇 권하고.

로쟈 2007-11-24 19:40   좋아요 0 | URL
<대단한 책>은 저도 지난주에 '거금'을 주고 구입했죠...

읽는기계 2007-11-24 23:10   좋아요 0 | URL
이주에 나온 가장 '비싸고 대단한' 책은 아렌트 전기인 것 같습니다. 서점에 갔다가 들었다 놨다 팔운동만 하고 왔습니다. ㅠㅠ

로쟈 2007-11-24 23:26   좋아요 0 | URL
아, 영-브륄의 책이 번역됐군요! 955쪽이라... 하긴 원서만 거의 600쪽에 육박하는 책이니. 한데 역자의 <혁명론> 번역이 좀 실망스러웠던지라 구입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2007-11-25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25 00:19   좋아요 0 | URL
엄청난 작업을 하셨군요(아니 하고 계시군요).^^
 

이번주의 소설이라고 할 만한 책은 아프간 출신의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현대문학, 2007)이다.  책은 지난달에 나온 논픽션 <카불 미용학교>(길산, 2007)을 바로 떠올리게 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607006), 두 책의 공통점은 최근 미국 출판시장의 베스트셀러라는 것. 그러니까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 말해주는 책들이 아닌가 한다. 조선과 중앙에서 크게 다루고 있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작품 자체로도 흥미를 끄는 소설이다.  

중앙일보(07. 11. 24) 그녀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여기 두 여자가 있다. 태어난 곳도, 살아온 환경도 다르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중심 도시 카불 한구석에 지붕을 맞대고 살아온 두 여자가 있다.

# 마리암
부잣집 하녀인 어머니는 주인의 아이를 가졌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라미(후레자식)’란 이름으로 배척받는 사생아. 그것이 나였다. 어머니는 혼자 나를 낳아야 했다. 가족에 편입되지 못하고 평생 좌절감에 몸부림치던 어머니는 내가 열다섯 되던 해 자살했다. 혼자가 된 나는 아버지와 그의 세 부인들에게 의지해야 했지만 그들에게 나는 망신스런 존재일 뿐이었다. 그들의 종용에 못이긴 나는 서른 살 많은 홀아비의 후처가 됐다. 남편의 이름은 ‘라시드’. 아들을 몹시 바라던 남편은 내가 유산을 거듭하자 개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끝도 없이 계속됐고 도시는 폐허로 변해갔다. 어느 날 앞집에 로켓탄이 떨어졌다. 그 집에 살던 부부는 죽고 딸아이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나는 심하게 상처 입은 소녀를 집으로 들이고 치료해줬다. 못난 나와 달리 예쁜 소녀. 남편은 소녀를 두 번째 부인으로 삼았다. 죽어가는 것을 거뒀더니 소녀는 내 남편을 뺏고 이내 아이까지 임신했다. 소녀가 죽도록 미웠다.

# 라일라
내가 나고 자란 카불은 아름답고 자유로운 도시였다. 여자들은 공부하고, 직장을 가졌다. 부르카(몸 전체를 가리고 눈만 망사로 돼 있는 아프간 여성 전통의상)를 입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빠의 지론대로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우등생으로 인정받았다. 지하드(聖戰)에 참전하기 위해 집을 떠난 두 오빠 대신 나를 돌봐주던 사람은 옆집에 사는 ‘타리크’ 오빠였다. 우리는 함께 자라면서 연인이 됐다. 내가 열 네 살이 되던 92년 전쟁은 극심해졌고 단짝친구 기티가 거리에서 폭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해 여름 타리크 가족은 파키스탄으로 피난을 떠났다. 헤어지기 전날 타리크와 나는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서로를 안았다. 며칠 뒤 우리 집은 폭격을 당했고 나 혼자 살아남았다. 다친 나를 돌봐준 것은 앞집 라시드 부부였다. 정신 차린 지 얼마 안 돼 타리크가 피난길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절망한 내게 라시드는 자신의 두 번째 부인이 되든, 거리로 나가든 선택을 하라고 말했다. 거리는 강간과 살육이 범람하는 지옥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나는 그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였다. 내 몸 깊은 곳에서 내가 지켜야 할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새 생명의 태동이었다.

평행선을 그려온 두 여자의 삶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맞물리며 포개진다. 왕이 축출되고,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하고, 반군의 게릴라전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그들은 살아간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바미안 석불이 파괴되는 모습과 뉴욕 중심부에 우뚝 선 두 개의 빌딩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본다. 탈레반의 억압에도 카불에 남은 사람들은 영화 ‘타이타닉’을 몰래 보며 눈물을 흘린다. 생생한 역사의 흐름을 토대로 하기에 등장인물들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 숨쉬는 듯하다. 탄탄한 구성과 마지막 장까지 긴장을 잃지 않는 진행으로 읽는 내내 코 끝을 알싸하게 만들던 책은 희망으로 끝을 맺는다.



책 제목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17세기 페르시아의 유명한 시인 사이브 에 타브리지(Saib-e-tabrizi)가 카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붕 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었네’ 어쩌면 시인은 아름다운 도시가 아닌 그곳에 사는 빛나는 사람들을 그리고자 했는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 쉬고 있는 수천, 수만 개의 태양들 말이다.

놀랍게도 이번 작품은 저자 할레드 호세이니(42)의 두 번째 소설이다. 그는 소련의 침공을 피해 80년 미국으로 망명한 아프간인이다. 4년 전 그는 첫 작품 『연을 쫓는 아이』(열림원)에서 자신의 체험을 녹여 아프간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소년들의 사투를 그렸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전쟁의 포화 속에 남겨진 여성들의 ‘찬란한’ 비극을 안고 돌아온 것이다. 미국에서 출간 6주 만에 140만 부가 팔려나가고, 반년 가까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 1위를 지킨 화제작이다.(이에스더 기자)

조선일보(07. 11. 24) 아내엔 부르카 입히고 남편들 포르노잡지 읽었다

2007년 한 해 중무장한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장악하고 있는 사이 지구 반대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이방인 작가의 소설이 미국 독서계를 지배했다. 지난 5월 출간된 이 소설은 24주 연속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질주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이 편집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해 최근 발표한 ‘2007 최고의 책’ 설문조사에서도 이 소설은 ‘해리포터’ 시리즈 최종편을 누르고 1위에 올랐다.

소설을 쓴 할레드 호세이니(Khaled Hosseini·42)가 미국에서 주목 받는 이유는 또 있다. 그가 2003년 발표한 첫 소설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는 4년이 지난 지금도 뉴욕타임스 페이퍼백 소설 분야 4위를 지키며 500만 부가 넘는 기록적인 판매를 자랑하고 있다. 인터넷 야후에서 ‘할레드 호세이니’라는 이름을 치면 170개가 넘는 관련 문서가 쏟아져 나온다. 파라마운트 영화사가 만든 동명의 영화가 12월에 개봉되고, 호세이니의 작품을 읽는 독서클럽이 미국 전역에서 1200개 이상 생겨나 활동하고 있다.

작가 호세이니는 소설 ‘천 개의 찬란한 태양’(A Thousand Splendid Suns)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이자 오랜 내전으로 찌든 국가로만 알려진 조국 아프가니스탄의 구석구석 실제 삶과 역사를 바로 현장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현실감 있게 소개하고 있다. 작가는 1959년부터 2003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끔찍했던 현대사를 관통해 온 두 여자의 삶을 그리고 있다. 가끔 나타나는 아빠에게서 선물을 받을 때마다 철모르고 좋아하기만 했던 사생아 소녀 마리암은 자라면서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다. 아빠에게는 이미 세 명의 부인이 있었고, 자신은 아빠가 그 집 가정부와 혼외정사로 낳은 딸이었다. 마리암이 아빠와 함께 살겠다며 집을 나간 날, 엄마는 스스로 목을 멘다. 15세가 되던 어느 날, 마리암은 아빠에 의해 자기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구두 수선공 라시드와 억지로 결혼해 고향을 떠나 카불로 간다.

그러나 라시드는 마리암이 아이를 갖지 못하자 두 번째 부인 라일라를 맞이한다. 마리암은 가난하게 자랐고 얼굴도 못생긴 자신과 달리, 교육을 강조하는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났고 얼굴도 예쁜 라일라를 질투한다. 작가는 두 여인의 삶을 한 남자의 집에 겹쳐 놓음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덮친 비극의 덫을 드러내 보인다. 마리암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처지의 라일라는 어느 날 집안에 날아든 로켓포 한 방에 부모를 잃었던 상처를 갖고 있다. 그녀의 뱃속에는 내전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달아나버린 남자친구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 꽃다운 15세 소녀 라일라는 장차 태어날 아기에게 집을 주기 위해 환갑을 넘긴 노인 라시드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마리암은 질투를 벗고 라일라에게 동료의식을 갖기 시작한다.

소설은 개인의 삶을 관통하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문화적 배경과 함께 능란하게 버무려 낸다.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마리암조차 시를 흥얼거릴 만큼 이 나라는 시인들의 천국이었다. 라일라의 남자친구가 파키스탄 난민촌에서 겪어낸 겨울의 풍경은 한때 600만 명이 넘었다는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의 고난에 찬 삶을 대변한다. 왕정붕괴와 소련의 침공, 공산화와 탈레반 정권의 수립으로 이어지는 역사도 생생하게 묘사된다. 1974년 남편을 따라 카불에 온 마리암은 도시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여자들은 한결같이 핸드백을 들고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어떤 여자들은 자동차 핸들을 잡고 담배를 피우기까지 했다.(…) 그들이 지나가면 향수냄새가 났다’(106쪽)

반면, 보수적인 파슈툰족 출신의 남편은 그녀에게 부르카를 입으라고 명령하며 이렇게 경고한다. “내 고향에서는 눈길 한 번 잘못 던져도, 말 한 마디 잘못해도 칼부림이 나. 내가 태어난 곳에서는 여자의 얼굴을 남편만 볼 수 있어.”(100쪽)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때릴 때마다 엄마가 죽기 전 했던 “단 하나의 기술만 있다. 그것은 타하물(참는 것)이다”(30쪽)라는 말을 떠올린다. 소련군을 몰아낸 뒤 적이 없어진 무자히딘은 과녁을 알 수 없는 총부리를 겨누면서 내전에 돌입한다. 소련과의 지하드(성전)에 아들 둘의 목숨을 바친 라일라의 엄마는 “무자히딘이 승리하여 카불로 돌아오는 날을 보고 싶다”(195쪽)고 했지만 바로 그 무자히딘이 쏜 로켓포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내전을 끝내고 정권을 장악한 탈레반 치하의 카불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은 근본주의 국가의 허위에 찬 일상을 고발한다. 탈레반 병사들은 ‘남자는 수염을 길러야 한다’는 포고령을 내린 뒤 도요타 트럭을 타고 다니며 면도한 사람을 찾아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든다. 타이타닉의 해적판 비디오가 나돌자 도시의 좌판에는 타이타닉 치약, 타이타닉 카페트, 타이타닉 탈취제가 등장했다. 심지어 타이타닉 상표가 달린 부르카까지 팔렸다. 아내에게 부르카를 입혀놓고 남자들은 금발의 여자들이 나체로 등장하는 도색잡지를 읽었다. 진통을 시작한 라일라가 남자병원과 여자병원을 분리한 탈레반 때문에 양수가 터진 배를 부여잡고 여자병원을 찾아 도시를 헤맨다. 마취제도 없이 그녀의 배를 가르는 산부인과 의사는 부르카를 뒤집어 쓴 채 수술칼을 들도록 강요 당한다.

미국의 요청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병하고, 인질극 사태까지 겪은 우리에게 이 소설은 미국인과는 다른 각도에서 관심을 불러 일으킬 부분이 있다. 소설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바라보는 현지인의 시각을 전달한다. ‘고국에 다시 폭탄이 떨어지고 있다. 이번에는 미국의 폭탄이다’(523쪽) 소설의 끝부분에서 라일라는 이것이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어쩌면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면서도 ‘아프간 아이들이 자신처럼 로켓탄에 의해 고아가 되는 상황’(523~524쪽)이라고 걱정한다. 소설은 이 대목에서 아무 감정 없이 ‘테러’와 ‘탈레반’을 입에 올려온 독자의 마음에 새로운 파문을 불러 일으킨다. 소설 속의 두 여인은 아프가니스탄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으며, 우리가 그들의 안위를 함께 염려해야 한다는, 보편적 인류애를 촉구하고 있다.



◆할레드 호세이니
1965년 카불에서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1980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했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이때부터 정부의 극빈자 지원금에 의지해 살아간다. 캘리포니아 주립대(샌디에이고)에서 의학을 공부한 것은 장남으로서 장차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작가는 “졸업 후 의사로 활동했지만 늘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2003년 첫 장편 ‘연을 쫓는 아이’로 단번에 미국인이 주목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두번째 소설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의료계를 떠나 현재 유엔난민국에서 세계 난민을 돕는 NGO 활동을 하고 있다.(김태훈 기자)

07. 11. 24.

P.S. 우리에게도 '아프가니스탄'은 파병 및 지난번 인질사태와 관련하여 올해의 화두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읽어볼 만한 작가이고 작품이 아닐까 싶다. 문학이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한 가지 대답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금요일이면 주말 북리뷰들을 미리 훑어보는데, 대략 30분 정도면 네댓 일간지들의 리뷰를 일람할 수 있다. 보통은 일주일에 3권 안팎의 책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중 1-2권 정도를 실제로 구입하는 듯하다(물론 그렇게만 도서구입이 이루어진다면 매달 몇십 만원씩의 책값을 물고 있지는 않겠지만). 이번주도 사정은 비슷한데, 그 3-4권의 책 중 하나가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역으로>(이매진, 2007)이다. 책을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는 것은 예전에 <핀란드역까지>(실천문학사, 1987)로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다시 출간되었으면 하는 책으로 꼽은 적이 있다. http://blog.aladin.co.kr/mramor/1080104 참조.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근대혁명사상사>(을유문화사, 1962)로도 번역됐었다!).

보아하니 1940년에 나온 원서 자체가 영어권에서도 몇 년전 새로 출간되었고(2003년에 나온 듯하다) 이번에 나온 건 그걸 대본으로 한 새 번역이다. 간단히 말하면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역사를 만들어나간' 유럽의 혁명적 사상가/혁명가들의 발자취를 좇고 있는 책이다. 그 여정은 핀란드역으로 가는 철로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아래 사진의 배경으로 보이는 것이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이다. 전면에 있는 거대한 동상은 물론 레닌이고. 책은 지난주에 출간됐지만 리뷰는 이번주에 실리고 있다. 한겨레의 리뷰가 가장 자세하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1. 24) 역사를 새로 쓴 자와 새로 쓸 자 누구인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서른 살의 죄르지 루카치(1885~1971)가 <소설의 이론>(1915) 첫줄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시대의 영광을 떠올리며 이 영탄조의 문장을 내뱉었을 때, 거기에 회한만 깔려 있었던 건 아니다. 이 젊은 문예이론가의 가슴에는 희망도 살아 있었다. 역사에 대한 희망, 진보에 대한 희망이었다. 3년 뒤 루카치는 혁명 정당에 가입해 정열적인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겼다.

루카치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산 미국 문필가 에드먼드 윌슨(1895~1972)도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윌슨은 인류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일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이라는 진보적 견해를 평생 고수했다.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고 러시아 10월혁명에 마음으로 동참했다. 그의 젊은 시절 관심과 열정을 응축한 책이 <핀란드 역으로>다.

1935년 쓰기 시작해 5년 만에 펴낸 이 책은 역사의 기관차가 인간해방의 세상을 향해 난 철로를 달려간다는 신념을 펼쳐놓은 저작이다. 문체의 유려함, 묘사의 생동감, 신념의 절실함으로 인해 이 책은 현실 사회주의 실험이 파산한 뒤에도 여전히 역사교양서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이 대학시절 탐독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유명해진 이 책이 완역돼 나왔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역사의 기관차가 다다른 가장 중요한 지점이 ‘핀란드 역’ 곧 러시아혁명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어판 서문을 새로 쓴 루이스 메넌드(뉴욕시립대 교수)는 이 책의 가치가 ‘제목’이 아니라 ‘부제’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라는 부제는 역사를 창조하려고 분투했던 사람들의 감동어린 삶이야말로 이 책의 진정한 주제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람들의 신념에 찬 투쟁을 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지은이 윌슨은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부터 1917년 혁명까지 역사의 기관차에 올라탔던 혁명가·사상가들을 독자 앞으로 불러들인다.

이 책이 그려 보이는 역사의 철로는 한 방향으로 놓인 단선 철로가 아니다. 철로는 두 방향으로 나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 지은이는 프랑스혁명에서 출발한 두 철로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철로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에서 시작해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로 끝나는 이 철로는 희망과 믿음의 점진적 쇠퇴를 보여준다. 미슐레는 프랑스혁명의 감격적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인간의 가슴이 그렇게 활짝 열리고 훤히 트인 적이 일찍이 없었다. 계급·당파·재산의 구별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진 적도 없었다.” 이 역사가에겐 “민중이야말로 주연배우였다.” 그러나 미슐레의 낙관은 세대를 거치면서 힘을 잃었다. 두 세대 뒤의 아나톨 프랑스는 1871년 파리코뮌을 세운 민중을 두고 “쓰레기 같은 놈들, 흉측한 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부르주아의 혁명적 열정은 쇠락했고 이들이 세운 철로는 끊어져 전망을 잃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지은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다른 한 철로를 살핀다.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표어의 차원에서 실제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현실에 구현하려 한 사람들이 만든 철로다. 29살 때 혁명에 참여한 그라쿠스 바뵈프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이른바 ‘테르미도르 반동’이 개시됐을 때 바뵈프는 ‘평등협회’를 만들어 민중봉기를 조직하고 ‘평등선언’을 썼다. “프랑스 인민이여! 우리와 함께 평등의 공화국을 선포하자!”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이었던 셈인데, 그러나 바뵈프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뒤를 이어 생시몽·푸리에·오언과 같은 인도주의자들이 등장해 ‘사회주의 공동체’ 방안을 내놓고 그 방안을 실천했다. 이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머지않아 ‘공상’에 가까운 실험이었음이 드러났다.

지은이는 이 즈음에서 혁명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2895)를 등장시킨다. 이 책에 서술된 혁명가 마르크스의 삶은 익히 알려진 대로 추방과 망명과 궁핍의 연속이다. 그러나 지은이의 펜은 마르크스의 반항적 정신을 묘사하는 데서 더 빛을 발한다. 스물세 살 마르크스가 쓴 시는 자기 내부의 들끓는 정열을 이렇게 묘사한다. “파도는 왜 으르렁거리는가? 우레와 같은 소리로 절벽에 부딪쳐 깨지기 위해서요.”

1845년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썼던 마르크스는 3년 뒤 역사적 문건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다. 이 팸플릿은 “시종일관 고성능 폭탄 같은 힘으로 가득 찬” ‘부르주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이었다. 1850년 런던으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무려 17년의 세월을 바쳐 <자본> 1권을 완성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진통에 진통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도구”, 역사를 바꾸고 창조하는 데 곧바로 쓰일 변혁의 도구였다. <자본>을 출간한 뒤 마르크스는 이 책을 쓰는 일이 “내 건강과 내 삶의 행복과 내 가족을 희생시킨 작업”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쓰는 동안 런던의 빈민굴에서 세 아이를 병으로 잃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전 저작을 통해 자본주의가 불러낸 지하의 힘, 곧 프롤레타리아가 서유럽을 뒤엎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도 한참 동안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1917년 4월 망명지에서 돌아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내려 곧바로 단상 위에 올라가 “동지들!”로 시작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그날로부터 일곱 달 뒤인 11월 6일(옛 러시아력 10월 24일)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꼭 90년 전에 터진 그 혁명은 인간이 역사를 창조한다는 신념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는 그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어른거린다.(고명섭 기자)

역사를 믿었던 트로츠키…인간을 믿었던 레닌

<핀란드 역으로>에서 지은이 에드먼드 윌슨은 러시아혁명의 두 주역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과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1879~1940)를 비교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레닌이나 트로츠키나 ‘역사를 자신과 동일시했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그 동일시의 방식은 달랐다고 윌슨은 말한다.

지은이의 트로츠키에 대한 평가는 다소 인색한 편이다. 그는 혁명 동지 루나차르스키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소중히 여겼으며, 인류의 기억 속에 진정한 혁명 지도자라는 영광된 인물로 남기 위해 어떤 개인적 희생도 달갑게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자기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관찰자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한다. “이 사람은 관중만 많으면 서슴지 않고 러시아를 위해 싸우다 죽을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트로츠키는 연극무대의 주인공처럼 역사의 무대에 섰던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에게 역사란 곧 섭리와 같은 것이었고, 자신은 그 섭리를 알고 그 섭리를 실현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다고 지은이는 평가한다. 볼셰비키의 승리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트로츠키는 경쟁상대 멘셰비키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당신들은 가련한 고립된 개인들이다. 당신들은 파산했으며, 이제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는 당신들의 자리로 돌아가라-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그러나 머잖아 그 자신도 스탈린에게 패배해 멘셰비키 신세가 됐다고 지은이는 씁쓸하게 말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비하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었다고 이 책은 평가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와 달리 이론 속에서 살지 않는다. 언제나 실제 상황을 살피며, 자기 이야기의 조리가 맞는지는 괘념치 않은 채 가능한 한 상황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또 트로츠키와 달리 레닌에게 역사는 수호천사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역사는 미적거리다가 승리를 놓친 혁명가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레닌은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역사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태도가 더 분명했던 것이다. 그런 레닌조차도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의 전주곡인 2월혁명이 터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변화는 때때로 불현듯 찾아오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민중임을 이 책의 지은이는 넌지시 보여준다.(고명섭 기자)

07. 11. 23.

P.S. 두어 가지 '주석'을 보탠다. 먼저, 책의 표지는 국역본보다 영어본이 훨씬 '현장감'이 있다. 윌슨이 1930년대 후반에 조명한 현실 사회주의로의 역사와 1991년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되돌아보게 되는 그 역사는 분명 다른 의미를 갖는다. 서평은 끄트머리에서 러시아 10월 혁명의 그 감격이 이 책에는 채 가시지 않은 채 어른거린다고 적었는데, 오늘날의 독자가 그 감격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동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새로 첨가된 루이스 메넌드의 서문은 이런 점을 짚어주고 있을 듯하다. 메넌드는 작년에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이 소개된 '미국철학' 전문가이다.  

기사의 한 대목: "1917년 4월 망명지에서 돌아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내려 곧바로 단상 위에 올라가 “동지들!”로 시작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그날로부터 일곱 달 뒤인 11월 6일(옛 러시아력 10월 24일)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오늘날의 지명으론 '상트페테르부르크'이지만 1917년 당시에는 '페트로그라드'였다. 1차대전 기간이라 러시아는 독일과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독일식의 '페테르부르크'란 이름을 '페트로그라드'로 개명했기 때문이다(레닌 사후에는 '레닌그라드'로 변경된다). 그리고 러시아 10혁명은 11월 7일(옛 러시아력 10월 25일)에 일어난다. 윌슨이 잘못 기재한 것인지 기자가 착오를 일으킨 것인지 모르겠지만.

덧붙이자면, 러시아의 역명은 종착역에 준하여 붙여진다. '핀란드역'이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인데, 핀란드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역이란 뜻이다(때문에 '레닌그라드역'은 모스크바에 있고 '모스크바역'은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식이다). 해서, 문제는 '핀란드역'이 종착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우리는 '핀란드'로 이제/다시 출발해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헬싱키역으로 가야 하는 건가?.. 

P.S.2. 2007년의 레닌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작가 이상엽이 만난 '오늘의 러시아 풍경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레닌이 있는 풍경>(산책자, 2007)도 '핀란드역으로' 가는 길에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드팀전 2007-11-2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왜 '핀란드'일까 읽는 내내 궁금했었어요.좀 헷갈리겠는데..러시아사람들은 익숙해져서 괜찮겠지만.

로쟈 2007-11-24 11:20   좋아요 0 | URL
문화적 차이죠. 사실 차들이 좌행하는 나라와 우행하는 나라가 있는 것처럼요...

소경 2007-11-25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관련 대목들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정황도 모른 채 버먼의 묘사만 넋놓고 읽기만 했다는.....

로쟈 2007-11-25 19:03   좋아요 0 | URL
버먼의 책들은 저도 좋아하는데 기대만큼 읽히지는 않는 것 같네요...

turk182s 2007-11-2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그런뜻이..근데 궁금해서그러는데 로쟈님은 이많은 책들을 언제다읽어요? 전 회사 술자리에 모임에 도저히 안되던데..쉬는날에는 자기바쁘고,,어쩌다 연차휴가내는날 도서관가서 읽어봐야 100페이지남짓,,절망!! 님은 무슨 속독법공부하시나요?정말궁금,,^^

로쟈 2007-11-29 01:00   좋아요 0 | URL
책을 보는 것과 읽는 건 다르지요. 저는 많은 책을 보고 그보다 훨씬 적은 책을 읽습니다.^^;

jose78 2007-11-29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궁금했는데~^^ '본다'라는 구체적 방법은 뭔지 궁금궁금~~ㅋㅋㅋ

로쟈 2007-11-29 01:03   좋아요 0 | URL
대략 어떤 내용의 책이구나, 라는 윤곽을 보는 것이죠. 일종의 인상을 기록하는 것이고, 읽기는 같이 살림을 차리는 것이죠...
 

'11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1670896)의 한권으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책세상, 2007)을 올려놓았었는데, 잠시 인사치레의 자료를 옮겨놓는다. <모나드론>은 지난봄 한겨레의 '고전 다시읽기'에서 다루어졌고 이 글은 단행본 <고전의 향연>(한겨레출판, 2007)에 재수록되었다.

한겨레(07. 03. 03) 내 안에 너 있고 네 안에 나 있다

현대의 철학은 근대 철학이 남긴 유산을 잇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직시하고 또 그 ‘말류’가 남긴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과 탈근대 사이에는 미묘한 연계선이 형성되고 있다. 우리는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거기에서 어떤 유산들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근대의 사유들은 전통을 뿌리 채 부정하곤 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근대와의 대결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는 현대 사유는 근대가 버렸던 전통을 새롭게 음미하고 거기에서 결코 버릴 수 없는 요소들을 새롭게 발굴하는데 일정한 노력을 바치고 있다.

‘전근대’와 ‘첨단’ 동시에 갖춘 철학
서구 철학사에 눈길을 맞출 경우, 우리는 그 ‘전통’의 마지막에서 라이프니츠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서구 전통 철학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형이상학자이다. 서구 형이상학은 헬라스(그리스)에서 꽃피었고 중세로 이어졌으며, 17세기에 이르러 다시 한번 꽃피게 된다. 그 후 ‘계몽사상’에 의해 매도되지만, 독일 관념론을 거쳐 니체, 베르그송을 시발점으로 다시 세 번째 아름답게 개화하기에 이른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라이프니츠는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철학자라는 위상을 가진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시대를 분열의 시대로 보았다. 30년 전쟁으로 대변되는 종교전쟁이 전 유럽을 휩쓸었고, 갖가지의 분열상들이 팽배했다. 라이프니츠가 ‘종합’과 ‘조화’의 사유를 펼친 데에는 이런 유럽의 상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채로운 존재들을 포용할 수 있는 철학, 이질적인 존재들을 조화 속에 화해시킬 수 있는 철학을 모색했다. 그의 사유에는 논리학, 자연철학, 인식론, 정치철학 등등 여러 계기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모든 요소들이 종합과 조화/화해의 존재론으로 귀결된다.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그의 <모나드론>에 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주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략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라이프니츠는 거대한 종합을 추구한 그의 사유 내용과는 상반되게 글 자체는 간략하게 쓰기를 즐겨했다. 그 자신이 너무나도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저작들을 쓸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그 누구의 글들보다 논리적으로 정치하며 압축적이다. <모나드론>은 짧지만 그의 사유 전체를 조망해 주는 저작으로 손색이 없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한 개체를 규정해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개체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전통 철학은 ‘제작’을 모델로 한 경우가 많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고, 중세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7세기 철학 역시 세계를 제작 모델로 보는 사유를 벗어나지 못했다. 제작 모델이란 어떤 조물주가 있어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사상을 말한다. 라이프니츠 역시 이런 신학적 구도 아래에서 사유했으며, 모나드가 일종의 ‘설계도’로 이해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이프니츠는 낡아빠진 형이상학의 대명사이기도 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생각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낡아빠진 그 만큼이나 또한 참신한 철학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들은 ‘전근대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맥락을 달리 해서 읽으면 바로 그 만큼이나 ‘첨단의’ 얼굴을 띠기도 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설정한 관계를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로 이전함으로써 가능하다. 생명체들이 ‘설계되었다’는 신학적 구도에서 기계들이 ‘설계되었다’는 보다 설득력 있는 구도로 옮겨감으로써, 우리는 현대 문명을 읽어낼 수 있는 참신한 존재론으로서 라이프니츠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한 개체“의” 본질이다. 이 말은 서구의 전통 철학의 도식에 비추어볼 때 놀라운 면이 있다. 왜일까? ‘본질’이란 개체성을 넘어서는 보편자의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인간의 본질, 나무의 본질이라는 말은 써도 철수의 본질, “저” 나무의 본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철수의 곱슬머리, 거무스름한 피부, 유난히 명랑한 성격 등등은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본질’이라는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한 모든 개인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성격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철수의 본질, “저” 나무의 본질 등을 말한다. 본질을 나타내는 영어 표현인 “~ity”(우리 말의 ‘~성’에 해당)는 개체에는 붙지 않는다. “humanity”는 가능해도 “Jackity”라는 말은 불가능하다. 인간‘성’은 가능해도 철수‘성’은 이상한 표현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사유 구도에서는 바로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이 대목이 라이프니츠 철학의 가장 독창적인 측면들 중 하나이다.

관우 ‘모나드’, 유비·장비 전제로 가능
‘모나드’는 한 개체의 설계도이다. 이 설계도에는 한 개체의 성질들 및 사건들이 내장되어 있다. ‘제갈량’이라는 모나드는 몸을 갖기 이전의 제갈량의 설계도이다. 그것은 제갈량의 성질들(머리카락 색깔, 코 높이, 목소리, 눈빛, 성격 등등) 및 그의 사건들(“유비를 만나다”, “적벽에서 조조를 물리치다”, “오장원에서 죽다” 등등)을 내장하고 있다. 제갈량의 모나드는 이런 성질들과 사건들의 총 집합이다. 그리고 이 모나드가 바로 제갈량이라는 개인의 본질인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조물주가 세계를 설계할 때 단 한 장의 설계도만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축가가 한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여러 도면들을 그려보듯이, 조물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무수한 설계도들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설계도를 실현시킴으로써 지금 이 세계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관우의 모나드는 원래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은 다 같은데 청룡언월도가 아닌 방천화극을 쓰는 관우, 다 같은데 수염이 짧은 관우, 다 같은데 적토마가 아닌 다른 말을 타는 관우 등등 현실의 관우와 조금씩 다른 관우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라이프니츠는 이런 관우들을 ‘모호한 관우’들이라고 부른다) 그 중 조물주는 가장 관우다운 관우를 창조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이것은 기독교의 조물주가 세계를 만든 후 “좋았더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의 철학적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적으로 번역하고픈 충동 느껴
그런데 이런 모나드들은 하나하나 별도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모두 고려해서 만들 수밖에 없다. 예컨대 관우의 모나드만 만들고 유비나 장비의 모나드를 만들지 않는다면 ‘삼고초려’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 사람의 어느 한 모나드는 당연히 다른 두 사람을 전제한다. 또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사람의 모나드가 있다면 필수적으로 패한 사람의 모나드도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세밀하게 내려갈 수 있다. 누군가가 칼로 베었다면 당연히 베인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각 모나드들의 관계는 모두 맞물려 있어야만 성립한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관계를 ‘공가능성(compossibility)’이라고 부른다. 관우의 모나드 안에 “유비를 만나다”가 있어야 하고 유비의 모나드 안에 “관우를 만나다”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두 사건이(사실상 하나의 사건)이 “함께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가능성 개념은 라이프니츠 사유의 심장부에 있는 개념이다. 흔히 라이프니츠 철학을 ‘예정조화’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다소 피상적인 설명이다. ‘예정조화’란 공가능성 개념의 결과로서 성립하는 것뿐이다.

라이프니츠의 사유를 읽다 보면 그의 사유를 컴퓨터, 로봇, 가상현실, 분자생물학 등등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맥락으로 번역하고 싶은 철학적 충동을 느끼게 된다. 모나드는 정보체계로, 그 성질들, 사건들 하나하나는 ‘비트’들로, 설계도들은 가상세계로… 번역할 수 없을까? 현대문명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라이프니츠는 가장 전근대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철학자로서 다가온다.(이정우_철학자)

07. 11. 22.

 

 

 

 

P.S. 그러한 '철학적 충동'의 산물이 서평자 자신이 쓴 <주름, 갈래, 울림>(거름, 2001)과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문학과지성사, 2004) 등일 테다. <모나드론>이 새로 번역된 김에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라고 <주름, 갈래, 울림>을 책장에서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하긴 책들이 하도 쌓여 있어서 무얼 찾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현대적 번역'을 음미하는 일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고, 다만 <모나드론>을 들춰보다가 새삼스레 생각난 번역어 문제에 대해 잠시 적는다. 그건 '우유'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모나드가 어떤 다른 피조물에 의해 질적으로 혹은 내적으로 변경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지 또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모나드 내부에서는 위치를 변경하거나 생산, 증가, 감소하는 운동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합적인 것에는 부분과 부분의 변화가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나드에는 만물이 들락날락거릴 창(窓)이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감각 종(種)을 그렇게 취급했던 것처럼, 우유는 실체와 분리할 수도 없고, 실체와 별도로 외부에서 배회할 수도 없다. 따라서 실체나 우유는 모나드의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7항, 34쪽)

여기서 '우유'는 '창'이나 '종'과는 달리 한자가 따로 병기돼 있지 않은데, 그만큼 '친숙한' 용어라고 역자가 판단한 것인지 신기하다(그렇다고 앞부분에 미리 나왔던 용어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기에 '우유'는 '우연히 있음'이란 뜻으로 '우유(遇有)'라고 병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는 단어가 아니다. 순전히 철학용어이며 어떤 출처를 갖는지는 모르겠다. 이 7항 후반부의 영역은 이렇다.

The Monads have no windows, through which anything could come in or go out. Accidents cannot separate themselves from substances nor go about outside of them, as the ‘sensible species’ of the Scholastics used to do. Thus neither substance nor accident can come into a Monad from outside. 

대응시켜 보자면 '우유'는 'accident'와 같은 말이다. 문제는 그걸 꼭 우리말로, 아니 우리말이 아닌 '우유'라고 옮기는 것이 우리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거나 혹은 증진시켜주느냐 하는 것이다. 일종의 '학술적 은어'로서 자주 입에 올리다보면 그 나름대로 익숙해지는지 모르겠지만(아마도 역자나 다른 전공자들처럼) 나로선 기껍지 않은 선택이다('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이런 용어들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우유'와 짝이 될 만한 용어로 '분유'(!)가 있다.

 

 

 

 

'분유'는 중세 스콜라철학의 용어로 한 후배가 읽던 코플스턴의 <중세철학사>(서광사, 1989)에서 처음 본 듯하다. 라틴어 'participatio'의 번역인데 'ens'를 '유(有)'라고, 'ens contigence'를 '우연유'(이게 '우유'로도 옮겨지나?)라고 옮기는 식이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아니라는 얘기다. 비록 '분유(分有)'는 '나누어 가짐'이란 뜻으로 등재돼 있지만 나는 이게 일본어의 잔재가 아닌가 한다. 아무려나 '우유'건 '분유'건 너무도 고색창연한 중세틱한 번역어들이며 내게는 별로 연상시켜주는 바가 없는 용어들이다. 나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oonta 2007-11-23 16:10   좋아요 0 | URL
그렇지않아도 요즘 플라톤책좀 뒤적이고 있는데 "분유"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분유는 그정도면 타먹을만하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우유"는 제가 생각해도 좀 배탈날수있을것 같습니다..^^ 우유accidents와 관련된 책들을 뒤적여보니 두개 다 중세철학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기긴 합니다만..그리스철학에서 먼저 사용된것으로 보이더군요..그런데 이러한 철학용어번역과 관련된 적절한 역자주는 찾기 힘들더요. 이런게 늘 아쉽게 느껴집니다. 한국어로 철학 공부할때마다 느끼는..

로쟈 2007-11-23 18:11   좋아요 0 | URL
문제는 '우유'보다 'accidents'라고 해야 더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죠. '번역'의 효용에 대해서 의문을 갖습니다...
 

페이퍼를 적다가 문득 서재가 너무 조용하다는 느낌이 들어서(방문자수는 적은 편이 아니지만 다들 뒤꿈치를 들고 다니는 듯하다) 떠올린 시를 옮겨놓는다. '물위의 암스테르담'이란 제목인데, 시구절을 인용하면 '물위의 도시를 사랑했던 어느 암담한 물고기' 얘기다(나대로의 말장난에 좀 익숙한 분이라면 '암담-암스테르담'의 유운 효과가 지겨울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눈을 뜨면 간장에 물 탄 듯이 아침은 온다" 같은 구절이 마음에 든다.   

물위의 암스테르담


태엽이 풀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눈이 감긴다 눈을
뜬다, 눈을 뜨면 간장에 물 탄 듯이 아침은 온다 

2  
나는 점점 더 나빠져 가는 그이들의 예절을 얘기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런 얘기나 반나절 동안 주절거리고 있는 거야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제대로 듣고 있냐고?
나는 한 나무의 변두리에 주저앉아 눈에 익은 그림자들을 보고 있어
나는 이때쯤 살갗에 모이는 소금들을 부끄러워하지 
나는 이젠 더 참을 수 없는 그이들의 예절을 얘기하고 싶어
나는 등나무 꽃 그늘 아래로 옮겨갈 테야

눈물보다도 맑은 물위에 눈꽃들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가려무나, 날아가려무나, 공손한 비둘기들이여 앉은뱅이 비둘기들이여
날개의 페달을 밟으며 긴 아치를 그리며 이 물위의 도시를 떠나가려무나 
아침이면 그대 햇살 아래 예언처럼 떠오르는 도시를……  

4
나는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어느 물고기의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러니까 물위의 도시를 사랑했던 어느 암담한 물고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러니까 그런 얘기나 태엽 풀린 소리로 주절거리고 있는 거야 
지금 그러니까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제대로 듣고 있는 거냐고? 

07. 11. 22.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07-11-23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 위의 암스테르담이라는 영화도 있는데...

로쟈 2007-11-23 08:49   좋아요 0 | URL
원제도 그런가요? <암스테르담>을 타이틀로 한 영화는 여러 편 되는군요. 얼마전 '물위의 암스테르담'이란 기타연주곡으로 유명한 끌로드 치아리도 내한공연을 가졌군요...

섬나무 2007-11-23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시는 아닌듯한데 누구의 신가요.

로쟈 2007-11-23 15:38   좋아요 0 | URL
흠, 제가 쓴 건데요.^^;

섬나무 2007-11-24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위기는 로쟈님인데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싯구절 운운에서 그럼 다른 이 건가? 했습니다.
로쟈님 그거 아십니까? 로쟈님 시는 가을 볕 아래 좌판에 놓인 열매들 같습니다.

로쟈 2007-11-24 12:38   좋아요 0 | URL
게다가 공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