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이면 주말 북리뷰들을 미리 훑어보는데, 대략 30분 정도면 네댓 일간지들의 리뷰를 일람할 수 있다. 보통은 일주일에 3권 안팎의 책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중 1-2권 정도를 실제로 구입하는 듯하다(물론 그렇게만 도서구입이 이루어진다면 매달 몇십 만원씩의 책값을 물고 있지는 않겠지만). 이번주도 사정은 비슷한데, 그 3-4권의 책 중 하나가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역으로>(이매진, 2007)이다. 책을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는 것은 예전에 <핀란드역까지>(실천문학사, 1987)로 출간된 바 있기 때문이다(다시 출간되었으면 하는 책으로 꼽은 적이 있다. http://blog.aladin.co.kr/mramor/1080104 참조.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근대혁명사상사>(을유문화사, 1962)로도 번역됐었다!).

보아하니 1940년에 나온 원서 자체가 영어권에서도 몇 년전 새로 출간되었고(2003년에 나온 듯하다) 이번에 나온 건 그걸 대본으로 한 새 번역이다. 간단히 말하면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역사를 만들어나간' 유럽의 혁명적 사상가/혁명가들의 발자취를 좇고 있는 책이다. 그 여정은 핀란드역으로 가는 철로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아래 사진의 배경으로 보이는 것이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이다. 전면에 있는 거대한 동상은 물론 레닌이고. 책은 지난주에 출간됐지만 리뷰는 이번주에 실리고 있다. 한겨레의 리뷰가 가장 자세하기에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1. 24) 역사를 새로 쓴 자와 새로 쓸 자 누구인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서른 살의 죄르지 루카치(1885~1971)가 <소설의 이론>(1915) 첫줄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시대의 영광을 떠올리며 이 영탄조의 문장을 내뱉었을 때, 거기에 회한만 깔려 있었던 건 아니다. 이 젊은 문예이론가의 가슴에는 희망도 살아 있었다. 역사에 대한 희망, 진보에 대한 희망이었다. 3년 뒤 루카치는 혁명 정당에 가입해 정열적인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인간이 역사를 만든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겼다.

루카치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산 미국 문필가 에드먼드 윌슨(1895~1972)도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윌슨은 인류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일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것이라는 진보적 견해를 평생 고수했다.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삶의 지침으로 삼았고 러시아 10월혁명에 마음으로 동참했다. 그의 젊은 시절 관심과 열정을 응축한 책이 <핀란드 역으로>다.

1935년 쓰기 시작해 5년 만에 펴낸 이 책은 역사의 기관차가 인간해방의 세상을 향해 난 철로를 달려간다는 신념을 펼쳐놓은 저작이다. 문체의 유려함, 묘사의 생동감, 신념의 절실함으로 인해 이 책은 현실 사회주의 실험이 파산한 뒤에도 여전히 역사교양서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이 대학시절 탐독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유명해진 이 책이 완역돼 나왔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 책은 역사의 기관차가 다다른 가장 중요한 지점이 ‘핀란드 역’ 곧 러시아혁명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어판 서문을 새로 쓴 루이스 메넌드(뉴욕시립대 교수)는 이 책의 가치가 ‘제목’이 아니라 ‘부제’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라는 부제는 역사를 창조하려고 분투했던 사람들의 감동어린 삶이야말로 이 책의 진정한 주제임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람들의 신념에 찬 투쟁을 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지은이 윌슨은 1789년 프랑스혁명 직후부터 1917년 혁명까지 역사의 기관차에 올라탔던 혁명가·사상가들을 독자 앞으로 불러들인다.

이 책이 그려 보이는 역사의 철로는 한 방향으로 놓인 단선 철로가 아니다. 철로는 두 방향으로 나 있다. 책의 앞부분에서 지은이는 프랑스혁명에서 출발한 두 철로 가운데 하나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부르주아 철로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에서 시작해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로 끝나는 이 철로는 희망과 믿음의 점진적 쇠퇴를 보여준다. 미슐레는 프랑스혁명의 감격적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인간의 가슴이 그렇게 활짝 열리고 훤히 트인 적이 일찍이 없었다. 계급·당파·재산의 구별이 그렇게 완전히 사라진 적도 없었다.” 이 역사가에겐 “민중이야말로 주연배우였다.” 그러나 미슐레의 낙관은 세대를 거치면서 힘을 잃었다. 두 세대 뒤의 아나톨 프랑스는 1871년 파리코뮌을 세운 민중을 두고 “쓰레기 같은 놈들, 흉측한 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부르주아의 혁명적 열정은 쇠락했고 이들이 세운 철로는 끊어져 전망을 잃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지은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다른 한 철로를 살핀다.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표어의 차원에서 실제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현실에 구현하려 한 사람들이 만든 철로다. 29살 때 혁명에 참여한 그라쿠스 바뵈프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이른바 ‘테르미도르 반동’이 개시됐을 때 바뵈프는 ‘평등협회’를 만들어 민중봉기를 조직하고 ‘평등선언’을 썼다. “프랑스 인민이여! 우리와 함께 평등의 공화국을 선포하자!”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이었던 셈인데, 그러나 바뵈프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뒤를 이어 생시몽·푸리에·오언과 같은 인도주의자들이 등장해 ‘사회주의 공동체’ 방안을 내놓고 그 방안을 실천했다. 이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머지않아 ‘공상’에 가까운 실험이었음이 드러났다.

지은이는 이 즈음에서 혁명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카를 마르크스(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2895)를 등장시킨다. 이 책에 서술된 혁명가 마르크스의 삶은 익히 알려진 대로 추방과 망명과 궁핍의 연속이다. 그러나 지은이의 펜은 마르크스의 반항적 정신을 묘사하는 데서 더 빛을 발한다. 스물세 살 마르크스가 쓴 시는 자기 내부의 들끓는 정열을 이렇게 묘사한다. “파도는 왜 으르렁거리는가? 우레와 같은 소리로 절벽에 부딪쳐 깨지기 위해서요.”

1845년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썼던 마르크스는 3년 뒤 역사적 문건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다. 이 팸플릿은 “시종일관 고성능 폭탄 같은 힘으로 가득 찬” ‘부르주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이었다. 1850년 런던으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무려 17년의 세월을 바쳐 <자본> 1권을 완성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진통에 진통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도구”, 역사를 바꾸고 창조하는 데 곧바로 쓰일 변혁의 도구였다. <자본>을 출간한 뒤 마르크스는 이 책을 쓰는 일이 “내 건강과 내 삶의 행복과 내 가족을 희생시킨 작업”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쓰는 동안 런던의 빈민굴에서 세 아이를 병으로 잃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전 저작을 통해 자본주의가 불러낸 지하의 힘, 곧 프롤레타리아가 서유럽을 뒤엎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도 한참 동안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1917년 4월 망명지에서 돌아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내려 곧바로 단상 위에 올라가 “동지들!”로 시작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그날로부터 일곱 달 뒤인 11월 6일(옛 러시아력 10월 24일)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꼭 90년 전에 터진 그 혁명은 인간이 역사를 창조한다는 신념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는 그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어른거린다.(고명섭 기자)

역사를 믿었던 트로츠키…인간을 믿었던 레닌

<핀란드 역으로>에서 지은이 에드먼드 윌슨은 러시아혁명의 두 주역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과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1879~1940)를 비교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레닌이나 트로츠키나 ‘역사를 자신과 동일시했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그 동일시의 방식은 달랐다고 윌슨은 말한다.

지은이의 트로츠키에 대한 평가는 다소 인색한 편이다. 그는 혁명 동지 루나차르스키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소중히 여겼으며, 인류의 기억 속에 진정한 혁명 지도자라는 영광된 인물로 남기 위해 어떤 개인적 희생도 달갑게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자기 목숨조차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관찰자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한다. “이 사람은 관중만 많으면 서슴지 않고 러시아를 위해 싸우다 죽을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트로츠키는 연극무대의 주인공처럼 역사의 무대에 섰던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에게 역사란 곧 섭리와 같은 것이었고, 자신은 그 섭리를 알고 그 섭리를 실현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다고 지은이는 평가한다. 볼셰비키의 승리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트로츠키는 경쟁상대 멘셰비키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당신들은 가련한 고립된 개인들이다. 당신들은 파산했으며, 이제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는 당신들의 자리로 돌아가라-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그러나 머잖아 그 자신도 스탈린에게 패배해 멘셰비키 신세가 됐다고 지은이는 씁쓸하게 말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비하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었다고 이 책은 평가한다. “레닌은 트로츠키와 달리 이론 속에서 살지 않는다. 언제나 실제 상황을 살피며, 자기 이야기의 조리가 맞는지는 괘념치 않은 채 가능한 한 상황을 정밀하게 포착한다.” 또 트로츠키와 달리 레닌에게 역사는 수호천사 노릇을 하지 않는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역사는 미적거리다가 승리를 놓친 혁명가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레닌은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역사와 자신을 동일시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태도가 더 분명했던 것이다. 그런 레닌조차도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의 전주곡인 2월혁명이 터지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변화는 때때로 불현듯 찾아오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민중임을 이 책의 지은이는 넌지시 보여준다.(고명섭 기자)

07. 11. 23.

P.S. 두어 가지 '주석'을 보탠다. 먼저, 책의 표지는 국역본보다 영어본이 훨씬 '현장감'이 있다. 윌슨이 1930년대 후반에 조명한 현실 사회주의로의 역사와 1991년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되돌아보게 되는 그 역사는 분명 다른 의미를 갖는다. 서평은 끄트머리에서 러시아 10월 혁명의 그 감격이 이 책에는 채 가시지 않은 채 어른거린다고 적었는데, 오늘날의 독자가 그 감격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동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새로 첨가된 루이스 메넌드의 서문은 이런 점을 짚어주고 있을 듯하다. 메넌드는 작년에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이 소개된 '미국철학' 전문가이다.  

기사의 한 대목: "1917년 4월 망명지에서 돌아온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내려 곧바로 단상 위에 올라가 “동지들!”로 시작하는 사자후를 토했다. 그날로부터 일곱 달 뒤인 11월 6일(옛 러시아력 10월 24일)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물론 오늘날의 지명으론 '상트페테르부르크'이지만 1917년 당시에는 '페트로그라드'였다. 1차대전 기간이라 러시아는 독일과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독일식의 '페테르부르크'란 이름을 '페트로그라드'로 개명했기 때문이다(레닌 사후에는 '레닌그라드'로 변경된다). 그리고 러시아 10혁명은 11월 7일(옛 러시아력 10월 25일)에 일어난다. 윌슨이 잘못 기재한 것인지 기자가 착오를 일으킨 것인지 모르겠지만.

덧붙이자면, 러시아의 역명은 종착역에 준하여 붙여진다. '핀란드역'이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인데, 핀란드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역이란 뜻이다(때문에 '레닌그라드역'은 모스크바에 있고 '모스크바역'은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식이다). 해서, 문제는 '핀란드역'이 종착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우리는 '핀란드'로 이제/다시 출발해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헬싱키역으로 가야 하는 건가?.. 

P.S.2. 2007년의 레닌은 어떤 모습일까? 사진작가 이상엽이 만난 '오늘의 러시아 풍경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레닌이 있는 풍경>(산책자, 2007)도 '핀란드역으로' 가는 길에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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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1-2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왜 '핀란드'일까 읽는 내내 궁금했었어요.좀 헷갈리겠는데..러시아사람들은 익숙해져서 괜찮겠지만.

로쟈 2007-11-24 11:20   좋아요 0 | URL
문화적 차이죠. 사실 차들이 좌행하는 나라와 우행하는 나라가 있는 것처럼요...

소경 2007-11-25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먼의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관련 대목들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정황도 모른 채 버먼의 묘사만 넋놓고 읽기만 했다는.....

로쟈 2007-11-25 19:03   좋아요 0 | URL
버먼의 책들은 저도 좋아하는데 기대만큼 읽히지는 않는 것 같네요...

turk182s 2007-11-2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그런뜻이..근데 궁금해서그러는데 로쟈님은 이많은 책들을 언제다읽어요? 전 회사 술자리에 모임에 도저히 안되던데..쉬는날에는 자기바쁘고,,어쩌다 연차휴가내는날 도서관가서 읽어봐야 100페이지남짓,,절망!! 님은 무슨 속독법공부하시나요?정말궁금,,^^

로쟈 2007-11-29 01:00   좋아요 0 | URL
책을 보는 것과 읽는 건 다르지요. 저는 많은 책을 보고 그보다 훨씬 적은 책을 읽습니다.^^;

jose78 2007-11-29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궁금했는데~^^ '본다'라는 구체적 방법은 뭔지 궁금궁금~~ㅋㅋㅋ

로쟈 2007-11-29 01:03   좋아요 0 | URL
대략 어떤 내용의 책이구나, 라는 윤곽을 보는 것이죠. 일종의 인상을 기록하는 것이고, 읽기는 같이 살림을 차리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