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1670896)의 한권으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책세상, 2007)을 올려놓았었는데, 잠시 인사치레의 자료를 옮겨놓는다. <모나드론>은 지난봄 한겨레의 '고전 다시읽기'에서 다루어졌고 이 글은 단행본 <고전의 향연>(한겨레출판, 2007)에 재수록되었다.

한겨레(07. 03. 03) 내 안에 너 있고 네 안에 나 있다

현대의 철학은 근대 철학이 남긴 유산을 잇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직시하고 또 그 ‘말류’가 남긴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과 탈근대 사이에는 미묘한 연계선이 형성되고 있다. 우리는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거기에서 어떤 유산들을 길어 올릴 수 있다. 근대의 사유들은 전통을 뿌리 채 부정하곤 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근대와의 대결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는 현대 사유는 근대가 버렸던 전통을 새롭게 음미하고 거기에서 결코 버릴 수 없는 요소들을 새롭게 발굴하는데 일정한 노력을 바치고 있다.

‘전근대’와 ‘첨단’ 동시에 갖춘 철학
서구 철학사에 눈길을 맞출 경우, 우리는 그 ‘전통’의 마지막에서 라이프니츠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서구 전통 철학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형이상학자이다. 서구 형이상학은 헬라스(그리스)에서 꽃피었고 중세로 이어졌으며, 17세기에 이르러 다시 한번 꽃피게 된다. 그 후 ‘계몽사상’에 의해 매도되지만, 독일 관념론을 거쳐 니체, 베르그송을 시발점으로 다시 세 번째 아름답게 개화하기에 이른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라이프니츠는 서구 전통 형이상학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철학자라는 위상을 가진다.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시대를 분열의 시대로 보았다. 30년 전쟁으로 대변되는 종교전쟁이 전 유럽을 휩쓸었고, 갖가지의 분열상들이 팽배했다. 라이프니츠가 ‘종합’과 ‘조화’의 사유를 펼친 데에는 이런 유럽의 상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채로운 존재들을 포용할 수 있는 철학, 이질적인 존재들을 조화 속에 화해시킬 수 있는 철학을 모색했다. 그의 사유에는 논리학, 자연철학, 인식론, 정치철학 등등 여러 계기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모든 요소들이 종합과 조화/화해의 존재론으로 귀결된다.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그의 <모나드론>에 체계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주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소략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라이프니츠는 거대한 종합을 추구한 그의 사유 내용과는 상반되게 글 자체는 간략하게 쓰기를 즐겨했다. 그 자신이 너무나도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체계적인 저작들을 쓸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글들은 그 누구의 글들보다 논리적으로 정치하며 압축적이다. <모나드론>은 짧지만 그의 사유 전체를 조망해 주는 저작으로 손색이 없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한 개체를 규정해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개체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전통 철학은 ‘제작’을 모델로 한 경우가 많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고, 중세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7세기 철학 역시 세계를 제작 모델로 보는 사유를 벗어나지 못했다. 제작 모델이란 어떤 조물주가 있어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사상을 말한다. 라이프니츠 역시 이런 신학적 구도 아래에서 사유했으며, 모나드가 일종의 ‘설계도’로 이해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이프니츠는 낡아빠진 형이상학의 대명사이기도 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황당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생각들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낡아빠진 그 만큼이나 또한 참신한 철학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들은 ‘전근대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맥락을 달리 해서 읽으면 바로 그 만큼이나 ‘첨단의’ 얼굴을 띠기도 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신과 인간 사이에 설정한 관계를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로 이전함으로써 가능하다. 생명체들이 ‘설계되었다’는 신학적 구도에서 기계들이 ‘설계되었다’는 보다 설득력 있는 구도로 옮겨감으로써, 우리는 현대 문명을 읽어낼 수 있는 참신한 존재론으로서 라이프니츠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한 개체“의” 본질이다. 이 말은 서구의 전통 철학의 도식에 비추어볼 때 놀라운 면이 있다. 왜일까? ‘본질’이란 개체성을 넘어서는 보편자의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인간의 본질, 나무의 본질이라는 말은 써도 철수의 본질, “저” 나무의 본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철수의 곱슬머리, 거무스름한 피부, 유난히 명랑한 성격 등등은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 ‘본질’이라는 인간이라는 범주에 속한 모든 개인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성격에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철수의 본질, “저” 나무의 본질 등을 말한다. 본질을 나타내는 영어 표현인 “~ity”(우리 말의 ‘~성’에 해당)는 개체에는 붙지 않는다. “humanity”는 가능해도 “Jackity”라는 말은 불가능하다. 인간‘성’은 가능해도 철수‘성’은 이상한 표현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사유 구도에서는 바로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이 대목이 라이프니츠 철학의 가장 독창적인 측면들 중 하나이다.

관우 ‘모나드’, 유비·장비 전제로 가능
‘모나드’는 한 개체의 설계도이다. 이 설계도에는 한 개체의 성질들 및 사건들이 내장되어 있다. ‘제갈량’이라는 모나드는 몸을 갖기 이전의 제갈량의 설계도이다. 그것은 제갈량의 성질들(머리카락 색깔, 코 높이, 목소리, 눈빛, 성격 등등) 및 그의 사건들(“유비를 만나다”, “적벽에서 조조를 물리치다”, “오장원에서 죽다” 등등)을 내장하고 있다. 제갈량의 모나드는 이런 성질들과 사건들의 총 집합이다. 그리고 이 모나드가 바로 제갈량이라는 개인의 본질인 것이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조물주가 세계를 설계할 때 단 한 장의 설계도만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축가가 한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여러 도면들을 그려보듯이, 조물주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무수한 설계도들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설계도를 실현시킴으로써 지금 이 세계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관우의 모나드는 원래 한 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은 다 같은데 청룡언월도가 아닌 방천화극을 쓰는 관우, 다 같은데 수염이 짧은 관우, 다 같은데 적토마가 아닌 다른 말을 타는 관우 등등 현실의 관우와 조금씩 다른 관우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라이프니츠는 이런 관우들을 ‘모호한 관우’들이라고 부른다) 그 중 조물주는 가장 관우다운 관우를 창조한 것이다. 이런 생각이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이것은 기독교의 조물주가 세계를 만든 후 “좋았더라”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의 철학적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적으로 번역하고픈 충동 느껴
그런데 이런 모나드들은 하나하나 별도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모두 고려해서 만들 수밖에 없다. 예컨대 관우의 모나드만 만들고 유비나 장비의 모나드를 만들지 않는다면 ‘삼고초려’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세 사람의 어느 한 모나드는 당연히 다른 두 사람을 전제한다. 또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사람의 모나드가 있다면 필수적으로 패한 사람의 모나드도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세밀하게 내려갈 수 있다. 누군가가 칼로 베었다면 당연히 베인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각 모나드들의 관계는 모두 맞물려 있어야만 성립한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관계를 ‘공가능성(compossibility)’이라고 부른다. 관우의 모나드 안에 “유비를 만나다”가 있어야 하고 유비의 모나드 안에 “관우를 만나다”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두 사건이(사실상 하나의 사건)이 “함께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가능성 개념은 라이프니츠 사유의 심장부에 있는 개념이다. 흔히 라이프니츠 철학을 ‘예정조화’ 같은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다소 피상적인 설명이다. ‘예정조화’란 공가능성 개념의 결과로서 성립하는 것뿐이다.

라이프니츠의 사유를 읽다 보면 그의 사유를 컴퓨터, 로봇, 가상현실, 분자생물학 등등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맥락으로 번역하고 싶은 철학적 충동을 느끼게 된다. 모나드는 정보체계로, 그 성질들, 사건들 하나하나는 ‘비트’들로, 설계도들은 가상세계로… 번역할 수 없을까? 현대문명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라이프니츠는 가장 전근대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철학자로서 다가온다.(이정우_철학자)

07. 11. 22.

 

 

 

 

P.S. 그러한 '철학적 충동'의 산물이 서평자 자신이 쓴 <주름, 갈래, 울림>(거름, 2001)과 들뢰즈의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문학과지성사, 2004) 등일 테다. <모나드론>이 새로 번역된 김에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라고 <주름, 갈래, 울림>을 책장에서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하긴 책들이 하도 쌓여 있어서 무얼 찾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 '현대적 번역'을 음미하는 일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고, 다만 <모나드론>을 들춰보다가 새삼스레 생각난 번역어 문제에 대해 잠시 적는다. 그건 '우유'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의 모나드가 어떤 다른 피조물에 의해 질적으로 혹은 내적으로 변경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지 또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모나드 내부에서는 위치를 변경하거나 생산, 증가, 감소하는 운동을 지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합적인 것에는 부분과 부분의 변화가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나드에는 만물이 들락날락거릴 창(窓)이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감각 종(種)을 그렇게 취급했던 것처럼, 우유는 실체와 분리할 수도 없고, 실체와 별도로 외부에서 배회할 수도 없다. 따라서 실체나 우유는 모나드의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없다."(7항, 34쪽)

여기서 '우유'는 '창'이나 '종'과는 달리 한자가 따로 병기돼 있지 않은데, 그만큼 '친숙한' 용어라고 역자가 판단한 것인지 신기하다(그렇다고 앞부분에 미리 나왔던 용어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기에 '우유'는 '우연히 있음'이란 뜻으로 '우유(遇有)'라고 병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는 단어가 아니다. 순전히 철학용어이며 어떤 출처를 갖는지는 모르겠다. 이 7항 후반부의 영역은 이렇다.

The Monads have no windows, through which anything could come in or go out. Accidents cannot separate themselves from substances nor go about outside of them, as the ‘sensible species’ of the Scholastics used to do. Thus neither substance nor accident can come into a Monad from outside. 

대응시켜 보자면 '우유'는 'accident'와 같은 말이다. 문제는 그걸 꼭 우리말로, 아니 우리말이 아닌 '우유'라고 옮기는 것이 우리의 이해를 용이하게 하거나 혹은 증진시켜주느냐 하는 것이다. 일종의 '학술적 은어'로서 자주 입에 올리다보면 그 나름대로 익숙해지는지 모르겠지만(아마도 역자나 다른 전공자들처럼) 나로선 기껍지 않은 선택이다('우리말로 철학하기'는 이런 용어들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우유'와 짝이 될 만한 용어로 '분유'(!)가 있다.

 

 

 

 

'분유'는 중세 스콜라철학의 용어로 한 후배가 읽던 코플스턴의 <중세철학사>(서광사, 1989)에서 처음 본 듯하다. 라틴어 'participatio'의 번역인데 'ens'를 '유(有)'라고, 'ens contigence'를 '우연유'(이게 '우유'로도 옮겨지나?)라고 옮기는 식이라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어는 아니라는 얘기다. 비록 '분유(分有)'는 '나누어 가짐'이란 뜻으로 등재돼 있지만 나는 이게 일본어의 잔재가 아닌가 한다. 아무려나 '우유'건 '분유'건 너무도 고색창연한 중세틱한 번역어들이며 내게는 별로 연상시켜주는 바가 없는 용어들이다. 나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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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1-23 16:10   좋아요 0 | URL
그렇지않아도 요즘 플라톤책좀 뒤적이고 있는데 "분유"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분유는 그정도면 타먹을만하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우유"는 제가 생각해도 좀 배탈날수있을것 같습니다..^^ 우유accidents와 관련된 책들을 뒤적여보니 두개 다 중세철학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기긴 합니다만..그리스철학에서 먼저 사용된것으로 보이더군요..그런데 이러한 철학용어번역과 관련된 적절한 역자주는 찾기 힘들더요. 이런게 늘 아쉽게 느껴집니다. 한국어로 철학 공부할때마다 느끼는..

로쟈 2007-11-23 18:11   좋아요 0 | URL
문제는 '우유'보다 'accidents'라고 해야 더 이해하기 쉽다는 것이죠. '번역'의 효용에 대해서 의문을 갖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