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눈에 띈 기사 하나를 옮겨둔다. 매일신문에서 새롭게 연재하는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의 첫 꼭지 시인 이성복 편이다. 기자가 적은 연재의 취지는 이렇다: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용의 피를 뒤집어쓰고 철갑영웅이 된 지그프리드나 어떤 칼도 뚫을 수 없던 헤라클레스도 마음의 상처를 이길 수는 없었다. 살아 있기에 상처를 입는다. 독일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살아 있다는 것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상처는 인생의 보물이면서, 또 극약이다. 상처에 굴복하느냐, 상처를 딛고 이겨내느냐가 문제다. 특히 예술가들은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상처를 문학과 예술로 승화한 이들이다. 상처를 인생의 전기로, 또 삶의 또 다른 목적으로 이룬 문학·예술인들. 그들의 삶과 예술 속의 상처이야기를 격주로 소개한다."  

매일신문(07. 01. 19)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① 시인 이성복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시 ‘그날’ 중에서).

시인 이성복은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 들어가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있을까?’라고 했다. 상처를 얘기하면서 시인 이성복(56)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20대에 쓴 절절한 시편의 성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하 ‘뒹구는 돌’)는 벌겋게 곪아 벌어진 상처를 손톱으로 후벼 파는 듯한 시어로 가득 차 있다. ‘내 구두발에 짓이겨',‘엄마, 내 가려운 몸을 구워 줘, 두려워',‘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테야',‘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

사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상처 생산력의 극점을 달리던 1980년. 그의 시집은 현실의 폭력성과 일그러진 가족사를 칼 끝 같은 분노로 헤집으며 독자의 공감을 얻었다. 그의 이 지독한 아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 평 반 남짓한 작업실에서 만난 시인은 무척 고단해 보였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책이 머리맡에 놓여 있고, 작은 전기히터만 힘겹게 찬 공기를 데워주고 있었다. 그는 “시는 상처받은 것들에게 올리는 제사”라고 했다. 그렇게 보면 첫 시집 ‘뒹구는 돌’과 두 번째 ‘남해 금산’은 그 제사상의 헌주고 헌사이다. 그는 초기 시집의 상처 이미지는 “집단적 상처가 내면화된 것”일뿐, 나의 개인적 상처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면 아버지에게 쏟아내는 독설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 누이와 형에 대한 훼손된 감정은 뭐란 말인가.

시인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민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떼를 써 서울로 유학을 갔다. 가난해도 궁핍할 정도는 아니었고, 부모님도 사려 깊고 온화했다. 시 속에 보이는 폭력 이미지와는 판이했다. 실제 아버지는 시 속의 인물처럼 증오의 대상이거나, 상처를 준 장본인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적 폭력이 가족사로 구조화된 것”이라며 자신은 “사회를 투영하는 하나의 공명통일 뿐”이었다고 했다. 가족사로 사회의 폭력성을 은유했던 카프카적인 해석인 셈이다.

그의 시 때문에 아버지가 고통을 많이 받았다. ‘그해 가을’에는 ‘아버지, 아버지···X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라는 극단적 표현이 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에게 뱉는 욕설로 들리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중간에 끊어 줘야 되는데... 아버지한테 굉장히 미안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그의 상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상처야 많지. 겨울날 살얼음 낀 웅덩이의 물도, 추운 날 수족관 속 도다리도 상처라면 상처지”라고 입을 뗐다. 그는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것이 상처”라고 했다. 내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의 불가피성, 원죄에 대한 상처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잉크 삼아 시 한 줄 쓰는 시인의 결벽증이 엿보이는 해석이다. 우리가 갓 핀 미나리를 보면 저걸 솎아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마저 상처, “결국 생명을 해치며 살아가는 우리는 상처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그는 “육식과 초식은 오십보백보”라며 “나는 광합성이 제일 좋아”라며 웃었다. 그가 본 상처의 근원은 보들레르가 말하듯 인간이 근본적으로 어리석고 무감각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상처도 있지만, 스스로 미성숙해 일어나는 상처, 자기 상처보다 남에게 저지른 상처를 기억하는 자기정화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상처투성이로 보이는 그의 시 세계는 원죄를 안고 사는 인간의 생명 사이클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버지(‘뒹구는 돌’)->어머니(‘남해 금산’)->당신(‘그 여름의 끝’)->가족(‘호랑가시나무의 기억’)->사물(‘아, 입이 없는 것들’)로 이어지는 성장기는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라캉이 분석한 인간 성장과정과도 닮았다. 초기의 격동은 가라앉고, 성찰적 그리고 영성적 태도로 사물을 쓰다듬는다. 구조적 폭력에 대한 격한 반응도 ‘아, 입이 없는 것들’에선 아버지의 얼굴에 앉은 파리마저 연민의 대상이 된다.(‘파리도 꽤 이쁜 곤충이다’)

그럼에도 근원적 고통은 여전히 그를 옥죄고 있다. 문학적 창작의 고통이다. 문학은 시체공시실의 시체를 덮은 시트를 벗겨 보는 것이다. “누가 보고 싶겠어. 그러나 벗겨 볼 수밖에 없어. 내 눈알이 휙 돌아가더라도...”라고 했다. 상처는 감각의 깊이지, 상처의 중량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섰기 때문에 누구도 탐낼 수 없던 예수의 상처처럼, 그 상처를 기억하고, 껴안고, 곱씹는 것이 오히려 상처 치유의 지름길일 수 있다.”고 했다. 살아 있기에 상처를 받는다. ‘뒹구는 돌’에서 그는 “상처는 ‘살아 있음’의 동의어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 후기를 적었다.

논어 등 동양철학에 심취했던 시인이 최근 종교적인 성찰에 기대는 것도 상처를 껴안고, 그래서 ‘살아있음’을 확인하려는 과정은 아닐까. 아직 미발표된 시를 기자에게 음송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퍽 편안해 보였다. 손바닥만 하던 히터의 열기가 그제야 온 방을 가득 채웠다.(김중기 기자)        

07. 01. 22.

P.S. 이성복 시인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했던 듯하다. 한 독서대학에서 강의도 한 적이 있다(한데, 강의자료를 읽을 만한 글로 만든다는 계획은 몇 년째 창고에서 자고 있다). 개인적인 안면은 없지만, 언젠가 문학강연을 들은 적은 있다. 이런저런 자료들을 많이 읽어둔 탓에 기사의 내용은 새로울 게 없지만, '시체공시실'에 대한 비유는 다행히 처음 본다. 시가 씌어지지 않는다고 고통을 토로하던 시인에겐 '잔혹한' 주문이 되겠지만, 그의 새 시집이 나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상처와 물집 이후의 '시적 존재론'은 어디까지 이르게 되는지 시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참고로 시인의 '어머니론'을 덧붙여둔다. '어머니'는 이성복 시의 비밀 중 하나이다.  

주간동아(05. 02. 08) "한평생 자기희생의 삶 나에겐 언제나 완벽한 분”

시인 이성복 교수(계명대 문예창작과)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현은 “시집 전체가 하나의 통일적인 유기체를 이루고 있으며, 치밀한 계획 하에 잘 계산되고 제어된 풍경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 금산’ ‘그 해 여름의 끝’ 등 지금도 꾸준하게 읽히는 그의 시집들은 장인이 빚은 작품처럼 완결성을 갖췄다. 이성복은 스스로를 ‘1등을 하지 않으면 불편해하는 사람’ ‘완벽한 글이 아니라면 내 이름표를 달아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변에 그런 사람 있잖아요. 선두에 서지 않으면 불편해하는 사람. 제가 그래요. 근데 다행인 건 밖으로 드러내며 딴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음성치질처럼 안으로 끙끙대는 편이란 거죠.(웃음) 이건 제게 성장의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가로막는 벽이기도 했어요. 이런 성격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거예요.”

이 교수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완벽한 사람이었다. 학교는 문턱조차 넘어본 적 없는 어머니는 열여덟 살 나이에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월급쟁이에게 시집왔다. 그러나 2남3녀를 낳아 기르면서 단 한 번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자존심 세고 지기 싫어하며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 교수가 대여섯 살 무렵, 아버지가 병을 앓아 집안이 흔들릴 정도였으나 어머니는 꿋꿋하게 외풍을 막아내며 자식들을 챙겼다.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도 다섯 남매를 모두 대학 공부까지 시켰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성공해야겠다’는 욕심에 서울 유학을 가겠다며 울며 보채는 이 교수를 말없이 지원해준 이도 어머니였다.

“5학년 때 서울 성신여자고등학교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가했어요. 서울 아이들의 새하얀 교복 칼라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어요. 어떻게든 1등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향에서 삯바느질하며 고생하는 어머니 생각해서라도 장원 못 하면 고향에 못 내려간다’는 ‘앵벌이’식 산문을 써서 억지로 장원했어요. 그래도 어머니는 표정 변화 없이 ‘잘했다’ 한마디만 하시더군요.”

올해 여든아홉이 된 그의 어머니는 거동은 불편해도 기억력은 이 교수보다 정확할 정도로 정신력이 대단하다. 어머니는 대학에 간 손녀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는 “연애 안 해보면 시집도 못 간다”는 말로 손녀딸을 꾹꾹 찔러 결국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기억력이 가물가물한 여든일곱의 아버지를 홀로 수발하는 어머니 소원은 남편보다 먼저 세상 떠나지 않는 것. 이 교수는 “아버지는 어머니 기억 위에 사시는 분”이라 말한다.

이 교수의 작품에는 어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30대의 젊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언젠가 닥칠 어머니와의 이별은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 고통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을까, 젊은 아들은 그런 고민을 했다. 그러나 이제 쉰을 넘긴 아들은 어머니를 생로병사의 인생 과정에 선 하나의 생명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루고 머물다 파괴되고 텅 비는 것이 인생의 과정. 그 앞에 어머니가 있고 그 뒤를 아들이 걷는다. 그래서 더는 어머니와의 이별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아니다.

“지금도 제사 때마다 조상에게 ‘우리 아들 글 잘 쓰게 해달라’고 비는 어머니에게 깊은 사랑을 느낍니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제게 성모 마리아처럼 자기희생으로 아들을 위하는 분이셨어요. 지금은 원경에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월과 함께 어머니도 풍화해가고 있음을 사진 찍듯 시를 통해 이해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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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1-2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대해서 첫 리필을 다는 것이 너무 기쁜 수유네요. 그 마음을 아시지요?
베레모를 쓴 시인이 늙어보여서 아쉽습니다. 리플 달고 읽겠습니다.^^
매일신문도 사서 읽어야 되는가... 천병희 선생이 번역하신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아를 오늘에사 사들고 들왔습니다.

수유 2007-01-22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요것도 제가 옮겨가겠습니다.

로쟈 2007-01-22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마음 알지요.^^ 일리어드, 오딧세이아는 저도 아직 구입하지 못한 책들입니다(--;). 한데, 역자께서 계속 업그레드를 하고 계시기 때문에 좀 미뤄도 손해는 아니라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기인 2007-01-2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문지에서 나온 시집들만 페이퍼에 올려놓으셨네요. ㅎ

로쟈 2007-01-22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히는 기사에서 언급된 시집들만 올려놓았습니다...

나비80 2007-01-2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에 대한 온갖 편견도 이성복이라는 지점에 이르면 누그러지는 부분이 있듯이 그만큼 큰 시인이란 생각을 합니다. 저는 간혹 시인을 볼 때면 나와 같은 인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전지현과 김태희를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인 것 아시죠?^^) 이성복의 힘은 기댈 수 있는 넉넉함의 깊이가 다르달까요. 내려다 보는 게 아니라 멀리까지 내다보고 깊게 파고드는 그의 시를 신뢰합니다.

로쟈 2007-01-23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이성복의 시는 세상과의 불화, 혹은 치욕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시들입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는 그런 시들을 더 쓸 수가 없겠죠. 그게 이성복 시 변모의 궤적이기도 한데, 저로선 '어머니'가 삶의 모천이면서 그의 시의 아킬레스건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유 2007-01-2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전히 늘 세상과 불화하지만, 끝까지 치욕을 밀고 나가지도 못하는 저로선, 그의 소위 '연애시'들을 좋아합니다만, (그 시들을 연애시라고 규정하는 것엔 반감이 들지요만,) 나는 내가 그의 시와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는데, 저 위의 글 한 꼭지를 보고서 무릎을 칩니다. 그러나 그의 시가 어머니와 연결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수유 2007-01-23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이성복론을 한꼭지 정도는 읽었습니다만, 정리해서 보여주세요, 기형도론도 함께.

로쟈 2007-01-24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정리는 하겠지만 시간은 좀 걸릴 거 같습니다.^^; 다른 글빚들이 많아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레디앙'의 토요연재-책읽기에 월간 북매거진 <텍스트>의 필진들이 가세를 했다. 지난 11월부터의 일이다. 게스트 필자로 참여했던 잡지를 부분적으로 온라인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이게 '중복' 게재되는 기사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꼭지를 읽다가 어제 인디고와 관련해서 올린 페이퍼와도 연관되는 '인문학 위기'에 관한 기사 세 편을 연달아 옮겨놓는다(글이 뱀 꼬리를 물듯이 이어진 탓이지 나의 계산 탓은 아니다). 필자는 <텍스트>의 권희철 기자이다.  

레디앙(07. 01. 20)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자의 위기?

지난해 ‘페렐만’이라는 러시아 수학자 이름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수학사의 난제 ‘푸앵카레의 추측’을 푼 뒤 인터넷에 이를 올렸다(*페렐만에 대해서는 나도 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다). 학계는 응분의 보상을 하려 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최근에는 연구소 일도 그만두고 노모와 함께 은둔해 살고 있다. 이처럼 몇 안 되는 제한된 정보들이 페렐만에 대한 모든 것인데, 그럼에도 페렐만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가 유별난 삶을 살아서일까. 그런 기인의 풍모가 느껴질 만한 존재들을 학계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런 개인을, 그런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제도와 사회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학자는 모름지기 이래야 해’라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비 정신을 촉구해야 하기 때문일까. 황우석은 이런데, 페렐만은 저렇지 않느냐면서.

페렐만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잖으신 학자분들께선 ‘인문학 위기 이대로 둘 수 없다’며 일갈하고 나섰다. 실상 양치기 소년의 호소에 가깝게 들리기도 했다. 글자깨나 쓴다는 분들이라면 저마다 위기의 징후를 담지하고 분석한 지도 너무 오래된 일이니, ‘죽었다’ ‘위기다’ 소리는 지겹기도 하고 뒷북처럼 느껴져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강정구 교수 강의를 수강한 학생에 대한 재계의 공갈 협박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던 분들, 이건희 철학박사 학위 수여가 무산되자 매체를 빌려 읍소하거나 보직 사퇴를 결행하던 분들, 학생들이 좀 버릇없게 굴었다고 교문 밖으로 영구히 쫓아내신 분들과 이에 침묵으로 눈감아 주던 분들.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인문학 위기’는 ‘인문학자들만의 위기’라는 조롱을 받을 만도 하다.

다시 페렐만으로 돌아오자. 페렐만의 아래와 같은 발언은, 그가 단지 돈 키호테나 세상을 등지고 은둔해 사는 계룡산 도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다수의 수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정직하다고 해도, 정직하지 않은 ‘권력자들의 횡포’를 그냥 수용하는 순응주의자에 불과하다.”(박노자, 「페렐만이 괴짜라고?」에서 재인용)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흔히 학문의 위기, 좁게는 인문학의 위기를 말할 때면,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사리가 밝아 고전을 탐독하는 등의 행위를 수지타산 맞지 않는 것으로 몰아가는 사회를 탓하게 된다. 인문학 위기의 발언은 곧 문명 비판이 된다(싸잡아 다 욕할 수 있는). 좁게는 교육을 비롯한 관련 제도의 허점을 지적할 때도 있다. 넓게는 ‘삶의 무늬를 새기는’ 게 인문학의 본령이라며 그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기양양한 낙관론과 인문학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라며 비분강개의 목소리를 높이는 비관론이 묘하게 공존하기도 한다. 어느 하나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그러나 어느 하나로도 사태를 충분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페렐만에 대한 상상은 질문 하나를 덧붙인다. 인문학의 위기는 학문의 위기인가, 아니면 학문 권력의 위기인가. 몇 개의 글을 사례로 삼아 인문학 위기의 논의를 따라가 보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추적은 국지적일 수밖에 없고, 한편으로는 문제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다시 흩뜨려놓는 꼴이 될 것이다.

지난 겨울 복간된 『비평』 13호의 한 꼭지(‘인문학과 인간적인 것’)에는 한국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김우창과 이어령의 글이 실렸다. 먼저 김우창의 글을 본다. 그는 페렐만을 사례로 이야기를 풀어 간다.

“그가(페렐만이) 보여준 것은 간단히 말하여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각대로 선택하여 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동시에 거꾸로 우리가 그러한 자유 선택의 가능성을 얼마나 멀리하고 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p.94)

옳으신 말씀이다. 학문 차원까지 갈 것 없이, 뭣 하나 제 힘으로 제 의지대로 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좁게는 가족의 요구에 등 떠밀려 살아야 하고, 넓게는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조금 더 읽어보자.

“불편한 마음들이 이는 것은 학문 연구가 연구자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데 대한 사실적인 원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작은 일들에서 표현되고 있는, 근본적인 상황을 조성하는 오늘의 정세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학문의 자유와 가치의 쇠퇴에 대한 당연한 불행의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p.95)

김우창의 발언은 자유롭지 못한 개인 이전에 그것을 야기하는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즉,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오늘의 사회 조건이 어떻기에 페렐만 같은 경우가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흔히 신자유주의를 말한다. 많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 삼는 경우도 있다. 한국 현대사 특유의 굴절된 경험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우창의 답은 다르다.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존재를 위한 여유라는 관점에서 우리 사회는 극히 좁은 공간밖에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신자유주의 체제보다도 우리의 삶과 사고의 유일 체제적인 성향에 깊이 관계되어 있는 일일 것이다.”(p.98)

‘삶과 사고의 유일 체제적인 성향’이라면,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를 말하려는 것일까. 또는 그런 분위기 아래 도저하게 깔려 있는 거대한 ‘문화의 유산’을 언급하려는 것일까. 따라잡기 쉽지 않은 사색이다. 다만 김우창의 글을 읽으면서 인문학 위기를 대하는 그의 근본적인 태도를 보게 된다. 인문학의 위기와 사회 위기는 따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것이 있지 않을까, 독자는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억측해 보자면, 다양성을 수용할 수 없는 사회 또는 문화의 위기가 곧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의 장을 펼치게 된 것은 수돗물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벽 뒤에 그리고 땅속에 묻혀 있는 수도관을 통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인문학자들의 목소리는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온 각종 이익집단의 목소리와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p.85)

이어령 또한 인문학 위기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권유한다. 물이 말랐는데 다들 모여 수도꼭지만 바라보거나 그것만 고치면 죄다 해결될 것처럼 구는 건 옳은 해법이 아닐 것이다. 이어령에게 인문학이란 깊은 수원(水原)을 탐색케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문사철(文史哲)의 분야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밝히고 깨닫게 하는 학문입니다.”(p.86)

그렇다면 이어령에게 있어 인문학의 위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의 발언에서 단서를 찾아보자.

“단순하게 말해서 휴머니티라는 말 그대로 인문학의 힘은 시스템을 중시하는 다른 학문과 달리 수리(數理)나 기계가 할 수 없는 공감empathy의 능력을 길러주는 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공감’은 타자에 대한 ‘열림과 소통’의 기능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오늘날과 같이 글로벌화하는 세계 환경 속에서는 절대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p.88)

굳이 ‘절대’라는 단정적 화법을 쓰면서 ‘글로벌’까지 말해야 하는가 싶지만, 문장의 골자는 ‘공감’에 있음을 주지한다. 현 세태가 공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인문학의 처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인지, 인문학의 무능으로 개인과 사회의 공감 능력마저 상실되었다는 것인지, 인문학 내에서 서로 공감할 수 없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인지, 그 모두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여기서 인문학 위기를 대하는 또 하나의 접근법을 얻을 수 있다. 인문학의 문제는 소통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는 것. 김우창이 유일 체제의 문화를 언급했다면 이어령은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에 집중한다.

“우리는 그동안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사용하다가 인문학의 고립과 위기를 자초했는지도 모릅니다.”(p.84)

상식선에 그치는 분석이지만, 그 상식이 무서울 때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그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인문학을 멀리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인문학 고유의 난해한 어법과 문체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쉽게 쓰고 말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꽤 오래 전 일이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미 ‘쉬운’ 고전 읽기와 ‘쉬운’ 철학·역사 서적 등이 서가를 잠식했다.

아카데미 안에서는 파리 날리고 하품만 나와도, 바깥에서 열리는 각종 인문학 강좌들은 반응이 뜨겁다. 매체는 항상 인문학 위기와 위의 사례들을 대비하여 설명한다. 그것이 맞다면 인문학 위기는 그저 학계의 위기, 제도의 위기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적어도 출판계와 강단 바깥의 인문학이 건재하다면 인문학 위기의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어야 할 텐데 사태는 그렇지가 않다. 단지 강단만의 위기라고 단정 짓기엔 사태를 호도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인문학의 소통 능력은 해당 인문학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와 같은 것이 아닐까. 소통 문제를 위기의 본질로 삼기보다는 위기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유력한 시험이라고 보는 게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이 논의를 보충할 만한 책 한 권이 있다.('희망의 인문학'으로 이어짐) 

레디앙(07. 01. 20) 모두와의 소통 또는 낮은 곳을 향한 소통

“모든 사람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다양성과 보편성 그리고 옛것과 새것이 항상 공존하는 둥지의 알들이야말로 인문학의 희망입니다.”(p.91)

이어령의 ‘둥지의 알’로 충분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적어도 소통의 측면에서는 얼 쇼리스가 쓴 『희망의 인문학』이 꽤 적절한 사례가 될 듯싶다. 물론 이어령은 모두와의 소통을 말하지만, 얼 쇼리스는 누구와 소통할 것인지 묻는 데서 차이가 제법 크기는 하다. 얼 쇼리스의 소통은 싸잡아 모두가 아니라 낮은 곳과의 소통이다.

책이 처음 소개된 것은 2004년 8월의 일이다. KBS의 <가난한 자의 철학자 얼 쇼리스의 희망수업>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그것인데, 이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클레멘트 코스 이야기가 관련 당사자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던 모양이다(‘클레멘트’라 붙여졌지만, 이 말은 야구선수이자 선행의 대명사 ‘로베르토 클레멘테’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 안팎을 살피려 취재한 도중 만난 번역자와 어느 사회복지사 얘기에서도 그 충격적 경험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령 이런 사례들이다. 책이나 예술 근처에 가지도 못하던 가난한 사람들의 놀라울 만한 변화.

“1996년 12월, 헨리 존스는 바드대학 흑인학생회의 회장으로 추대됐다. …… 데이비드 이사코프는 자신의 생물학 수업에서 과일파리를 이종 교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 수산나는 그때까지도 화학자의 꿈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 아주 뛰어난 어느 교수의 수업을 듣고 난 다음에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었다.”(p.265~66)

더 나아가 정치적 각성에 이르게 된 가난한 학생들의 사례도 소개되고 있다. 책은 가난한 자가 가난한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다. 가난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들이 있다. ‘그 사람은 게으를 거야’, ‘타고난 성품이 그렇게 만들었을 거야’ 등 가난의 이데올로기라 불릴 만한 생각부터 적절한 동기 부여와 직업 교육과 알선이 뒤따른다면 빈곤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얼 쇼리스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난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기존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기존 관점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가난에 대한 기존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치더라도, 그런 관점이 대물림되는 가난 속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p.24)

가난이 선천적이라는 생각은 편견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이며 일반인과 빈자를 분리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직업 교육이나 훈련이 소득의 크기를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얼 쇼리스가 생각하는 가난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는 비니스라는 재소자에게 사람들은 왜 가난한 것 같냐고 묻는다. 비니스의 대답.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p.168)

이 대화는, 얼 쇼리스가 미국에서 클레멘트 코스를 기획하고 곧장 행동에 옮기게 만든 주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얼 쇼리스는 비니스의 언급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읽는다.

“비니스는 고대 고리스에서 정치가 탄생했던 과정과 똑같은 길을 걸어 왔다. 그녀는 성찰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은 이후 계속된 대화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는데, 그녀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은 바로 인문학을 의미했던 것이다. 인문학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 줄곧 세상 사람들의 성찰적 사고를 가능하도록 해준 근본적인 원천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p.173)

인용문에서 보듯, 얼 쇼리스 생각의 기본 모델은 고대 그리스의 교양과 덕성을 갖춘 시민에 있다. 그런 시민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단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가 든 사례들은 이러한 생각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얼 쇼리스의 실험은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성프란시스대학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책이 번역되자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그런데 “가난 벗어나는 열쇠, 인문학”, “빈자에게 적선 대신 인문학을”과 같은 기사 제목을 보게 되면 책의 내용을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얼 쇼리스 말마따나 인문학 교육이 자기를 성찰하게 하고 삶의 동기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야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곧 부富로 직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문학이 여전히 배고픈 학문이라는 건 우리의 상식이고 경험이니까. 마음의 부를 말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또 다른 우려 또한 든다. 요컨대 이런 논의는 한편으로는 (그 의도와 달리) 빈곤의 실제와 원인을 은폐하는 효과를 지닌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논지에서 벗어난 것이니 넘어가자. 언론의 과장된 홍보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한국에서 지금 펼쳐지고 있는 클레멘트 교육이 그것이다. 이런 비유를 들자. 빵과 장미가 있다. 세상은 지금까지 가난한 자들에게 줄 빵이 필요하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빵이 아니라 장미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미가 빵을 산출할 수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게다가 그것은 ‘경험적으로’ 옳(았)다. 사실상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곤란하다. 논리적 판단을 떠나 유의미한 사회적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며 어설픈 논리로 가늠할 수 없는, 책의 표현을 빌자면 ‘클레멘트의 기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의 질문은 가능할 것이다. ‘장미를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장미가 있기나 한 것인가. 혹여 그 장미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여기서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을 성토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쪽에서는 인문학의 위기와 죽음을 말하는데 한쪽에서는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인문학이라……. 의문에 대한 접근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런 장미는 없다는 것이 하나라면, 또 하나는 ‘낮은 데로 임할 수 없는’ 한국 인문학 자체의 문제이다.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주관한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 설립을 위한 실제’ 워크숍 자료집을 보며 우려는 거의 불신이 되었다.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에 참가한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 요약문은 이랬다(*이 자료는 처음 보는데, '저명한 교수들'답다).

“자기 의식은 자기 확신은 물론 타자로부터의 인정도 필요하다. …… 전자는 자립적 의식으로서의 주인Herr, 후자는 비자립적 의식으로서의 노예Knecht.” “페이디다스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런 논의가, 이런 교육이 어떻게 자기 성찰을 이끌어내고 삶의 의지를 북돋우며 정치적 삶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과문한 기자로서는 판단키 어렵다. 다만 적어도 위에서 이어령이 언급했던 ‘공감’의 문제를 상기해 본다면 이런 이야기는 거의 소통 불가능에 가까운 게 아닐까. 장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외로 하더라도, 장미를 전달하는 태도가 고압적이다. 게다가 이 장미 전달식 주최 측의 마인드를 알 수 있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인문학 강의를 위한 강사의 조건은 사회적 지명도, 강의 실력, 노숙인에 대한 애정 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회적 지명도는 참여자들의 자긍심을 세우기 위해서 중요하다.”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현실의 인문학은 어떠한지, 인문학이 죽음에 이르렀을 만큼 한심한 작태라면 그 대안적 인문학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 언사이다. 혹여 이들에게 인문학이란 ‘뽀대 나고’ ‘그럴싸한’ 게 아니던가. 물론 문제는 간단치 않다. 다음과 같은 노숙인 수강생들의 반응을 보자니 ‘환상의’ 허울 좋은 장미도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전달된 셈이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고, 생활하는 것이 점점 불편해지고, 나 혼자서 생각하는 공간이 없어서 불편하다. 내가 편안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과연 내가 인문학 과정을 마치고 난 뒤에, 내가 원하는 이상이 높아져서 내가 처한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철학 책이 말하는 자기 성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직접적인 그들만의 ‘성찰’.

이 책은 양면적인 문제작이다. 빈곤의 사회적 문제를 환기하고 그 해결책을 달리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선 긍정적이지만, 적어도 한국에서의 인문학 교육을 염두하고 읽노라면 황당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코스에서 교육 예술’이라는 문화예술 관계자 워크숍에서 몇몇 논자들의 지적도 기자의 이런 시선과 맥을 같이 한다.

“클레멘트 과정에 비록 비판적 글쓰기가 있지만, 대부분 과거의 원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확인되어야 합니다. 현재 하부구조 자체를 파고드는 직접성을 피하고 있습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목적은 언젠가는 그 직접성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얘기하고 싶습니다”라는 김지섭의 말이나 “텍스트 중심주의에 있는 아카데미 인문학은 정전 해석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세계와의 대화, 삶과의 대화, 현장과의 대화를 외면하는 인문학자 또는 예술가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한 인문학적 풍토에서 ‘대화’는 사교에만 필요할 뿐입니다”라는 이광준의 지적이 그렇다.

요컨대 문제는 클레멘트 코스의 한국적 적용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이미 노출된 인문학의 여러 문제들이 한참이나 선행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인문학 위기의 원인이고 진정 무엇이 문제냐는 질문에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저 여러 양상들을 보면서 문제가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간단치 않다는 것만 확인하게 된다. 다만 인문학 위기 이전에 인문학에 대한 편견과 이데올로기가 만만치 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본다.

어쩌면 그러한 편견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그것은 한국의 인문학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장정일의 공부』 서문은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으로 읽힌다.('장정일의 공부'로 이어짐)

레디앙(07. 01. 20) 중용, 사유도 고민도 없는 허위거나 기만

장정일은 평소 존경받던 원로들이나 지식인들의 엉뚱한 말들에 실망할 때가 있다고 한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늙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떤 동기에 의해 사상적 전향이 이루어지는 건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장정일은 그 원인을 잘못된 중용의 태도에서 찾는다.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 애쓰다 보면 현실과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발언을 할 수밖에 없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p.5)

그리고 이어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중용이 미덕인 우리 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나 역시 오랫동안 내면화해 왔다.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 모난 사람, 기설을 주장하는 사람, 극단으로 기피받는 인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p.4~5)

솔직하면서도 읽는 이를 뜨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심지어 중용의 태도와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조차 장정일의 고백을 듣노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중용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장정일의 고백이 날카로운 것은, 중용 비판으로 사회와 문명의 허위를 까발리는, 하나마나한 그럴싸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중용을 취하려는 태도를 앎(무지)의 문제와 연결한다. 이는 인문학 위기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한국에서 인문학이 잘 안 되는 건 다 이유가 있는데, 뼛속 깊이 스며든 우리의 ‘둥글게 둥글게’ 의식/무의식들 때문이다. 장정일을 응용하자면, ‘중용을 취하고 있으면 인문학의 허세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교양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인문학의 중용은 인문학의 결여였다.’ 책의 세부 내용은 물론 서문의 주장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저 꼼꼼한 텍스트 읽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장정일은 스스로에게 공부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은 그런 공부의 과정 자체란다.

공부하겠다 마음먹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고백은, 인문학에서 커다란 범위를 점하고 있는 문학 입장에선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무게를 지닌다. 허세와 허위에 빠진 철학도 문제라지만, 상서롭기 그지없고 세상에 태평하며 나오는 것마다 문제작 범주에 드는 문학 판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내 무지의 근거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결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한때 내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시인은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없는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 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의 열정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우표 수집가나 난을 치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존경할 수 없다. 시인의 참고서지는 오직 시집밖에 없으니, 시인이란 시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청춘을 그렇게 보냈다.”(p.5~6)

07. 01. 22.

P.S. 개인적으론 기사를 며칠 전에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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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1-22 16:13   좋아요 0 | URL
모두들 인문학의 위기를 걱정하고 있지만 사실 지난 10년은 수준높은 담론들도 많이 나오고 치열한 논쟁의 공방전이 펼쳐졌던 때가 아니었나 합니다. 인문학 위기의 근간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만 국한된다면 굳이 애써 그 위기를 과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인문학이야 말로 새롭고 거대한 시장을 창출할 새롭고 기막힌 창구가 되어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마는... ^^

로쟈 2007-01-22 16:24   좋아요 0 | URL
'위기 담론'이 바깥에서 보기엔 실상 '엄살 담론'이기도 하지요(물론 당하는 사람들에겐 '엄살'이 아니지만). 어느 분의 말씀을 들으니까 한국사회에선 또 이런 엄살이 통한다고 하네요. 특히 인문학의 엄살에 대해서는 그래도 관심을 가져준다고. 한데, 그런 식으로 '안주'해 온 게 아닌가란 반성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수준 높은 담론들'과 '치열의 논쟁의 공방전'이 얼마간 위안이 될 수도 있겠지만, 과연 기대치에 부응하는 것인지는 의문이고,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존경 자체가 과거와는 판이한 현실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나비80 2007-01-22 19:26   좋아요 0 | URL
네 그렇지요. 현실은 엄연한 자본주의 체제니까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따라 '사회적 존경'도 경중이 갈리는 국면을 무시할 수도 없는 형편이구요. 로쟈님께서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언급하신 대목도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다만 제가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논쟁의 장이 마련됐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논쟁과 담론의 질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경쟁력을 강화한다면 인문학의 위기란 말도 곧 사라질 수 있을 테지요. 저는 사실 인문학이야말로 우리가 파먹을 수 있는 마지막 양식이란 믿음엔 변함이 없습니다.

로쟈 2007-01-22 21:15   좋아요 0 | URL
저보다는 낙관적이시네요.^^ 여러 가지 도전과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현재의 인문학이 정말 갖고 있는 건지 좀 회의적입니다. 고작 '인문학 콘텐츠'나 '디지털 인문학' 정도에서 타협점을 찾으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어쩌면 그런 대응능력도 필요도 의지도 없는 건 아닌가 싶은 게 더 자주 갖게 되는 느낌입니다...
 

한국일보가 새로 기획한 '100℃ 인터뷰'에 지난번 소설가 공지영에 이어서 이문열이 '초빙'됐다(공지영 편은 '우리들의 행복한 공지영'이란 페이퍼에 정리돼 있다). 작년말 신작소설 <호모 엑세쿠탄스>(민음사, 2006)를 출간하면서 다시금 화제에 오른 '80년대 국민작가'의 입담을 옮겨놓는다. '참 멋진 보수'가 되고 싶다는 바람도 드러내는데, '참 못난 진보'보다야 그게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도 든다(물론 작가에게서 '참 멋진 보수'는 미래형이다). 인터뷰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두 가지 버전이 있는 듯한데, 여기서는 전문(온라인 버전)을 옮겨두도록 한다(정리된 지면기사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1/h2007012120155184290.htm.와는 지난번 공지영 편에서도 그랬지만 차이가 많이 난다).  말미엔 고종석 객원논설위원과의 '취중격론'도 같이 옮겨놓았다. '격론'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아서(이것도 '전문'을 띄워놓으면 안되나?) 왠지 바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것만 같지만...      

한국일보(07. 01. 21) 소설가 이문열 "참 멋진 보수 되고싶어"

한 작가가 이처럼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소비된 경우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소설가 이문열(59)씨. 언제부터인가 신문 문화면보다 정치면에 더 많이 등장하는 이 작가를 16일 오후 6시 서울 삼청동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새벽 1시를 훌쩍 넘겨서야 끝난 이 뜨거웠던 인터뷰는 그가 소통이 안 되는 존재가 아니라 소통이 부족했던 존재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인터뷰에 너무 흔쾌히 응해주셔서 의외였습니다.

“이거(100°C 인터뷰) 막 혼내키고 되게 무섭다카데요.(웃음) 그래서 예상문제도 만들고, 모범답안도 만들어 왔는데, 막상 만나니까 한 개도 생각이 안 나네. 사실 하도 고약한 경우를 많이 당해서 겁나요. 대충 세보니까 내가 안 한 말로 오해 받고 있는 게 19가지나 되더라고요.”

◆무슨 오해를 그렇게 받으셨다는 겁니까.

“몇 년 전 고약한 경우를 당했어요. 책 장례식 할 당시 11월 부산 해운대 모 호텔에 강연을 갔었어요. 10월 즈음부터 책 장례를 주동한 사람들이 부산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어릴 적에 부산서 5년간 살았거든요. 그래서 강연장에서 “이만 하면 저도 부산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물었더니 다들 “부산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아는 바로는 책 반환운동 하면서 책 모으고 있다는 사람들은 부산 사람 아닌 것 같다. 부산사람들은 아싸리해서 성질 나면 ‘사시미칼’ 들고 인나지 한 권씩 책 모아서 불태우고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책 장례식 주동격인 화덕헌씨가 찾아와서 “선생님, 그럼 내가 부산 사람 아니면 어디 사람입니까? 전라도 사람이란 말입니까?”하더라구요.

그때 내 실수가 “어느 지역이든지 간에”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한 게 실수예요. 그랬더니 화씨가 “내가 할아버지 때부터 함안서 살았고 아내도 전라도가 아니다” 하길래 내가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런데 화씨가 ‘내가 할아버지 때부터 3대가 부산에서 살았다’고 한 말이 ‘이문열이가 ‘너 전라도지? 3대를 몰살하겠다’고 말했다카드라’고 퍼진 거예요. 저는 “책은 내 정신적 자식인데 자식이 내 앞에서 장례식(죽음)을 당하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냐”는 뜻으로 말했을 뿐인데요.

이후 2004년 고종석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이걸 칼럼(‘당신이 바로 하류 지식인이다’)으로 쓰면서 내가 공식적인 모임에서 그런 말을 한 것처럼 알려졌고, 이걸 또 최근에 경향신문도 칼럼으로 썼더라구요. 그 때 이후로 내가 갑자기 지역주의자가 되어가지고 호남이라는 큰 시장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할 이유가 없어요. 호남 사람들도 나를 적으로 만들어서 생기는 이점이 하나도 없구요. 어떻게 보면 누군가의 이간질에 휘말릴 거예요. 고종석씨는 한겨레에서 기자 생활을 할 때, 내 작품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고 잘해줬어요. <시인>도 엄청나게 아름다운 평을 해 준 사람입니다. 내가 한겨레와 관계가 좋지 않을 때에도 고종석씨하고는 좋았어요.

2000년부터 이후 6년 동안 이런 자잘한 이야기들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하나 둘씩 모이니까 엄청난 데미지가 돼 버렸어요. 지역문제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소연하고 싶은 일은 19건이에요. 이것 가지고 책을 써도 되겠다는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지역 문제 관련한 것은 어쩌면 사소한 것이에요.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가 가장 큰 사건이었죠. 미국에서 강연을 했어요. 제목이 ‘한국 이념의 현주소’였나? 그런데 강연이 끝나고 청중 한 명이 다가와 묻더라고요. “효순이 미선이 장례식 때 10만 명이 모였다는데 다들 용공분자 아니오?”라고. 제가 웃으면서 “당신도 참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이군요. 용공분자라는 말은 ‘빨갱이’란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 같은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한국서 바보 취급당해요”라고 했어요. 저는 용공분자, 빨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명백하게 남한에게 불리하고 북한에 유리한 정보를 상시적으로 북한으로 보내는 사람을 이르는 것이라고 정의했어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체제에 호의적인 건전한 시민이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래도 용공분자가 있을 것 아니오?” 재차 물읍디다. 그래서 북한에 호의적인 것은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것이니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용공분자가 있다면) 오차범위를 생각해보면 전체에서 2~3%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미국에서 “(촛불집회) 당시 2,000~3,000명의 간첩이 내려왔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떠 있더라고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관련한 항의 칼럼을 중앙일보에 게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친일문제도 그래요. 그것도 2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90년대 초반에 유럽공동체다 나프타다 이런 것들이 생길 때, 베세토(베이징,서울, 도쿄를 잇는 한중일 3국의 연극제가 있어요. 그때 동아일보 인민일보 아사히신문이 함께 주최한 회의에서 한국 문학 파트를 맡아 회의를 한 적이 있었죠. 그 때 내가 웃으면서 “이게 바로 대동아 공영권이 아니냐. 이렇게 3국이 모여서 유럽이나 다른 지역공동체와 대응을 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지 않느냐. 80년 전 니들(일제)이 3국 관계를 잘못 다뤄서 실패해서 이 모양이 된 것이 아니냐?”고 질문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앞 뒤 관계를 다 자르고 이것도 “이문열이 대동아 공영권의 실패를 아쉬워했다”는 식으로 보도 되더라구요.

또 하나는 내가 일제 때 안 태어난 것이 참으로 고맙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태어나기도 전에 망한 나라를 조국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무리라고도 생각해요. 국민국가 이후의 제도 교육은 국민형성교육인데,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에게 친일파라고 하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거죠. 해방 이전 국제법의 보편원리는 ‘조약’이에요. 이게 가장 중요해요.

그리고 비엔나 회의의 원칙인 강자 위주의 원칙인 ‘관례’가 중요하죠. 당시 우리나라는 가쓰라-태프트 조약에 따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이 조약이니까. 내가 “그 조약 때문에 세계 국가들 중 어떤 나라도 우리를 위해 아무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발언한 적이 있었는데, 언론에는 “이문열은 한일합방이 합법이라고 말했다”는 식으로 보도가 됩디다. 친일 관련한 발언은 말을 하면 할수록 이야기가 더욱 커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서 참았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말을 해야 하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작가 중에는 이문열 팬이 많은데요. '안티조선운동'하는 이순원씨도 그렇고. 그런 사람들은 "공인 이문열을 가리고 있는 베일이 있다"고 말하던데요.

“오만하게 말해서 저는 그 베일이 나를 해치지 못할 거라 생각해 가만히 있었어요. 그런 것들에 이겨도 욕이 되고, 지면 손해라는 생각이었죠. 요즘 생각해보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또 다른 오해를 낳기도 해요. 진중권씨가 “이문열이 검도 5단이더라. … 그래서 보수더라”는 글도 봤어요. (손을 저으며) 난 검도 해 본 적도 없어요. 강준만씨도 여러 번 공격했어요. 6, 7번인가. 근데 그 사람도 “내가 이렇게 공격하는데 이문열은 왜 아무 말도 없느냐”고 비판을 하데요. 어떤 기자는 저더러 “왜 (비판에) 대응하지 않으세요?”라고 묻기까지 해요. 저는 대응한다는 것은 싸우겠다는 것인데 검도 5단이 검도 초단을 만나 싸우면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 같지만 팔 하나 내 줄 각오를 해야 해요. 그래서 난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인데요. 이렇게 말해서 내가 검도 5단이 된 것 같아….하하하”

◆그런 게 오해받는 데엔 작가의 책임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할 거에요. 가령, 내가 “누구는 개새끼가 아니다”고 했는데 옮기는 이가 “아니다”만 빼면 의미가 확실히 달라지잖아요. 아마 이문열이란 사람은 늘 지워져야 할 사람, 혐의를 만드는 사람일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워져야 할 문화권력이 된 것 같다. 제가 가끔 ‘홍위병’이란 비유를 쓰는데요. 홍위병은 죄는 비논리적이고 하찮지만 그에 대한 벌은 엄격한 게 특징이에요. 한 번 물리게 되면 그에게 가하는 죄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으로도 엉성하지만 그에 따르는 벌은 엄격하죠.”

◆상대가 자신의 목적이나 단체의 이익을 위해 이문열을 지우고자 한다는 식인가요?

“그건 나만 당한 게 아니에요. 이를 테면 ‘안티조선운동’ 같은 경우는 조선일보를 신문 중에 문화권력으로 생각하는 것 같고. 이렇게 비슷하게 고통당하는 경우가…. 아, 최진실. 그 분도 아마 그럴 거예요. 문화권력으로요. 제 기억에 저에게 <인물과 사상>을 구매해서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대상에 최진실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기억나요.”

◆담배를 끊으셨다죠?

“담배를 끊었어요. 제가 이렇게 뚱뚱해도 10년 전에는 혈압이나 당뇨가 없었어요. 근데 ‘책 장례식’ 이후 혈압이 300까지 오르고 당뇨도 생기고. 어느날 문득 떠오르데요. ‘내가 담배 피워서 혈압, 당뇨 생기면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건강하게 살아서 누가 이기든지 봐야겠다는 신념이 생겼어요. 5년 전부터 끊었죠.”

◆ 이후 논란의 중심으로 빠져들었다고 보는데요. 그 당시에도 무대응이 답이지 아니었을까요?

“내가 두 번 대응했죠. 전여옥이 하도 천방지축하기에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나”는 식의 글을 썼고요. 이후에는 “내가 그런 오해를 줬다면 유감이다”고 했는데, 그 쪽에서 “네가 일본 천황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말한 사람인데 무슨 유감이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더만요. (웃음)

저는 적대 핵심 세력이 없으면 운동이 탄력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당시 여성 운동이라는 것이 주목도 못 받은 상태에서 제가 먹잇감이 된 것이죠. 그 뒤 책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이들은 “(이문열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상업적인 생각으로 그런 것이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책이 한 번 논쟁에 휘말리면 잘 팔리거나 안 팔리거나 둘 중 하나에요. 그런데 저는 후자거든요. 전혀 모르는 작가가 그런다면 사람들은 “걔가 누구야? 책 속에 뭔가 있겠지”하면서 사 봐요. 근데 저는 신문에 나오게 되니까 대충 읽고 나서 아주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 식이죠.

영화도 마찬가지잖아요. 영화 촬영에 들어가는 소설은 끝이잖아요. 관객들이 영화를 본다면 소설을 다 봤다고 생각하니까요. 제 경우는 <선택> <변경> <아가> 등 3개가 가장 안 팔렸어요. 혹시 오해 살 수도 있는데 <변경>은 40만 부 팔린 것인데 이것을 안 팔려다고 하면 좀 그런가.(웃음)

◆<호모 엑세쿠탄스>는 얼마나 나갔습니까.

“이제까지 내가 당한 이야기 하소연만 했네요.(웃음) 전 이번에도 정치적 논란부터 터져가지고 ‘아이고, 틀렸구나’ 했는데 다행히 10만부 정도 나갔다고 하데요.”

◆시중에서 선생님을 말할 때 '보수꼴통' 점잖게는 '보수논객'이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보수꼴통’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제가 미국 버클리에 있는 동안 소설가 김연수가 같이 와 있었는데, 처음으로 만나 술을 마셨어요. 마시면서 제가 ‘니 내 실제 보니 어떻트나? P씨, C씨랑은 다르지?’물었어요. 그랬드니 김연수가 ‘그거나 그거나 다 그렇습니다’라는 거예요. 쇼크 먹었어요. 제 스스로도 조심한다고 했고, 난 속으로 그렇게까지 내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웃음)

◆그 낙차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보수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과거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미화하는 보수가 있어요. 그리고 과거를 미화하지는 앞선 사람들의 노력 중 인정할 건 인정하는 보수가 있죠. 전 후자입니다. 교육제도를 예를 들죠. 지금 바꾸려고 애를 쓰는 제도, 이건 국내 교육 전문가들이 고민한 것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3년 전에 이렇게 나쁜 제도를 만들려고 했겠어요? 그건 과실이지 고의가 아니라고요.

앞의 세계는 바보나 악당들이 만든 세계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 수 없으면서 말이죠. 제 생각에는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도 앞선 살았던 이들의 덕택이라고 봐요. 이를 보수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지금 우리의 보수라고 부르는 사람 중에는 현재의 완전성을 믿어버리거나 과거에 나쁜 짓을 해놓고도 잘했다고 말하는 보수도 있어요. 이것들이 혼재된 상황이죠.”

◆선생님은 '건강한 보수'이고자 하는데 많은 이들이 아니라고 해요. 선생님이 극우 보수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게 이유 아닐가요.

“그건 내 몫이 아니죠. 그것은 좌파들이 하고 있는데 굳이 제가 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까지 나에게 말하라면 균형에 안 맞아요. 주사파들은 한 때 선량한 시민을 프락치로 몰아서 죽이기도 했어요. 그들의 세상이 왔을 때에 그것에 대해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반성, 나는 하나도 못 봤어요. 하나도.” (고개를 저으며)

◆진보들의 극좌적 시도에 대한 반성은 있었다고 보는데요. 오히려 보수들이 하지 않았죠.

“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을 나한테만 강요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왕안석의 경우만 바도 반성이란 것은 항상 반대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겁니다.”

◆보수에도 급수가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같은 패거리로 묶여도 기분 나쁘지 않다 싶은 보수 인사가 있습니까? 복거일 선생님 정도요?

복거일 선생님도 참 좋은데 난감할 때가 있어요. 식민지 근대화론은 잘 이해가 안 됩디다. 사실 그것도 더 자세히 봐야겠지만 영어 공용어론도 다소 과격한 것같고. 구체적으로 개인은 말하기 어려운데, 굳이 말한다면 송호근 유석춘 교수 정도?(웃음) 농담입니다. 난 참 멋있는 보수가 되고 싶은데…, 그게 어렵네요. 인터넷 문화가 강화시킨 것 같은데, 한 번 (보수로) 찍히면 씻겨지지 않아요. 우리 시대는 주홍글씨를 벗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뉴라이트 운동 쪽에서 저한테 참여 제의를 했을 때 거절했어요. 새로 시작하는 일에 내가 가진 ‘과격우파, 보수꼴통’이미지가 부담으로 작용할까봐서요.”

◆<호모 엑세쿠탄스>를 쓰시면서 줄 획수까지 맞춰 진보와 보수를 똑같이 욕했다고 하셨는데.

“ 알리바이라고 생각해요. 이쪽 저쪽 모두 넉 줄씩. 한야대회가 100매, 그 반대편이 100매가 될 겁니다.”

◆두 놈을 때려도 한 놈은 세게, 한 놈은 세지 않게 때린다고 볼 수 있어요. 양적 비판이 같다는 것은 논리가 좀 허약한 것 아닌가요?

“맞은 자의 느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죠. 저도 면피용으로 비율을 맞춰놓은 셈이죠. 노무현을 럭비공으로 말한 것, 기득권 층에 대한 것이 더 나쁜 것이냐 하는 데는 기준이 없어요.”

◆그 같은 계량적인 비판은 작가로서의 자기 검열인가요?

“전 자기검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전 국가 검열이 강할 때는 어떤 경우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아서 피해 보는 경우가 많았어요.”

◆천하의 이문열도 자기 검열을 할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인데요. 그런데도 왜 굳이 그 얘기를 꺼내시는지요. 사회적 의무감인가요?

“설명이 긴데요. 하나는 자발적인 문학적 태도, 노선의 변화이고요. 하나는 속된 말로 중견작가로서 경험한, 뭐랄까 나의 공공성, 글쓰기의 공공성에 대한 인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손해를 보면서 자기 검열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은 그 부분을 보지 않는 것 같아요. 절 우파 논객이라 하는데 , 우파 작가라고 하기에는 제게 저와 (우파에서) 함께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80년대 후반 이후로 공식적인 우파 작가가 하나도 없어요. 술집에서는 나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이전부터 어용단체에서 활동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우파 작가라고 밝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전 생각나지 않아요. 예를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 문단이 그런 식으로 (좌파 일색으로) 통일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어요. 복거일 씨의 경우는 문학보다는 워낙 다른 활동이 많은 분이니까. (한 기자를 보며) 내 얼굴이 좀 벌개요? 내가 좀 흥분했나요? 하하하. 내상을 입어서 그래요.” (벌개진 얼굴로 웃음)

◆ 복거일씨가 '소설가는 악마의 편에 설 줄 알아야 한다' 즉, 다른 사람들이 다 악마라고 해도 그를 변호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요.

“전 그렇게까지 느끼지 않아요.”

◆<호모 엑스쿠탄스>를 비롯해 선생님의 소설이 너무 직정적이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상상의 여백을 주지 않고 직설적으로 작가의 얘기만 전달하는 것 같다고 생각되는데요.

“저도 그 말을 자주 들었어요. 요즘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예전 소설도 저의 정치적, 사회적 소설은 지금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어요. <영웅시대>는 운동권의 금서였고, <시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비슷했죠. 회색주의적 태도, 무기력한 지식인이라는 비판도 있었고요.”

◆저희는 그렇게까지는 생각지 않았는데요.

“87년 전남대로 송기숙 선생님을 만나러 갔었는데, 학생들이 제 얼굴을 알아보더라고요. 교정에서 떡 장사가 있기에 불러서 사 먹으면서 ‘내가 누군지 아나?’고 했더니 ‘안다’고 하대요. 그래서 제가 ‘내 책은 안 봤지?’?더니 ‘봤다’고 해요. 제가 ‘그런데 글을 읽고 그렇게 써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데요. (좌중 폭소)

그렇지만 전투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지금과 그 당시와 전혀 다르지 않아요. 내가 ‘시대와의 불화’라는 말을 그냥 만든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이 어디에 있든 문화적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쓴 말이에요. 87년을 전후로 적어도 문화사상적으로는 진보적, 과할지 모르겠지만 좌파적으로 기울었어요. 제대로 된 형태로의 우파, 보수 운동은 전혀 없었어요. “

◆<구로아리랑>이 86년 87년인가요?

“그 전에 깨진 소설로 <미로일기>가 있죠.”

◆그 때까지만 해도 작가 이문열이 어떤 편에 서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되는데요.

“<영웅시대> 외에는 색을 드러내지 않았죠. 대부분 철학 종교 고향 이야기들이죠.”

◆세상이 한 쪽으로 치우치니까 '나는 다른 쪽으로 간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그것 때문에 내가 규정되고 공격 당하니까 오기가 생기기도 하면서요 (웃음) ‘맛 좀 봐라’하는 생각도 있고. 이런 오기 외에도 제 믿음 중에 보수와 진보, 좌와 우 등 세상의 모든 관념이라는 것이 어둠과 밝음처럼 짝이 있잖아요. 정치사상과 세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만 남으면 문제죠. 나는 좌우로 나눌 때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너무 많이 가서 문제가 된 것은 2차 대전 시기이고, 사람들이 왼쪽에 너무 가서 문제가 된 것은 소비에트 혁명이라고 생각해요. 전 본능적으로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불안하고 겁이 나요. 때로는 다른 이들이 다 저기(좌파)에 가 있어서 스스로도 걱정되고 불안하고 불만스러워요. 나라도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87년 이전에는 한 가운데 있었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앞으로 모두 우측으로 간다면 다시 움직이실 건가요?

“글쎄요. 그럴 가능성은 없는 것 같아요. 당시 사람들이 좌측으로 가면서 저는 우측으로 밀려난 셈이죠. 운동이 과열화하면서 나에게 위해가 되는 사람에서 내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 된 것 같아요. 제가 오기를 부려서 이렇게 된 것도 있지만요.”

◆앞으로 우파 정권이 들어설 거란 예상이 높은데요. 기쁘시겠습니다. (웃음)

" 현재 여론 조사 결과는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50~60% 절대 다수를 확보해도 1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몰라. 제가 수십 번의 선거를 볼 때는 말이죠. 저는 사람들이 기억력이 좋고 이성적으로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그 때 가봐야 결정하지 지금 약간의 사회적 우위가 악수를 앞당기는 것 같은데요. 다시 (우측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당위적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개혁이라는 것이 정치적 과제로 떠오른 게 벌써 20년이 되었어요. 어찌 됐건 노태우도 헌법을 바꿔서 등장했고, 김영삼 "개핵개핵" (웃음) 얼마나 했어요. 현재에서 더 가면 다시 돌리지 못할 것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연애소설, 성장소설의 작가 이문열을 개인적으로 좋아했어요. 정치적인 것들은 칼럼을 써도 되고, 문학에서 잠시 언급하거나 완곡하게 말할 수 있는데요. 최근 너무 깊이 쓰니까 사람들의 식상함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아요. "그립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설의 시작과 끝이란 시차를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호모 엑세쿠탄스>는 2002년부터 시작한 작품인데 이미 시동을 걸어놓은 거라 지금 시기가 좀 바뀌었다고 변경할 수는 없죠. 사람이라는 존재도 자료가 무한정하지 않습니다. 이번에(정치적 주제에) 상당히 많이 소진해 버렸기 때문에 다른 작품을 이 정도 쓴다고 한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열정에는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에요.

<시인> <변경> <호모엑세탄쿠스>로 내가 구상한 것들을 쏟아냈어요. 아직 쏟아내지 않은 것에는 연애얘기가 있고, 나도 쏟아내고 싶은 게 있어요. 성애의 대상으로서의 여인과의 이별에 대해 잘 된 소설을 쓰고 싶죠. 마지막 여자를 보내는 순간 한 남자가 일생을 여성성과 만나고 감정의 축적을 쌓고 하는 것들을 써내고 싶거든요. 도대체 남자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지나가는지 통계를 곁들여 20세기 후반 풍속도도 함께 말이죠. <여인들을 보내며>라고 제목도 지어 놨습니다. 아마 구체적으로 쓸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사모님의 검열을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페미니스트들과도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웃음)

◆이문열의 문학성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흔들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이문열 소설의 매력은 주인공과 작가를 동일시 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촌스럽게 보이지 않는 묘한 매력이 있어요. <젊은이의 초상> <사람의 아들> 등에서 젊은 주인공의 고뇌는 이문열의 고뇌였죠. 근데 <호모 엑세쿠탄스>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제가 '찌꺼기 386'은 아니지만 386으로서 아쉬움이 커요.

"그때도 정치가 얇은 배경으로 나온 것들이에요. 정치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그럴 겁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미학적으로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걱정 안 해도 돼요. 대신 놓친 것은 <매의 노래>라는 번역이 나왔어요. 저도 그걸 번역하고 있었거든요. 10년 전에 못 나왔어요. 이젠 시기를 놓친 것 같아요."

◆요즘 신춘문예로는 밥 벌이 못한다는데 선생님은 얼마나 버시는지? 이문열은 한 달에 인세만 2,000만~3,000만원 받는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내가 처음 썼을 때 한 권에 1,500원 했는데 지금은 9,000원~만원 하죠. 제 책은 총 2,700만부 정도 팔았어요. <삼국지>가 1,500만부 정도. 그걸 제외하면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정도가 좀 팔렸지 아마. 제 책이 가장 많이 팔린 때는 83, 84년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위치를 옮긴 87년 이후부터에요. 그 후로는 완전히 대학가에서는 보수 반동으로 찍혔죠."

◆인세는 어떻게 받으십니까?

"대작가도 신인도 똑같아요. 달리 받는 것은 참 할 짓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같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잘 팔리는 작가는 책 많이 팔아서 많이 벌잖아요. 거기다 인세까지 더 높은 비율로 받는다는 건 안 될 말이지."

◆부악문원은 계속 운영하십니까?

"계속 있는 애들이 있어요. 4기에서 끝나고 2002년부터인가 그 후로는 제대로 된 기수가 아니에요. 문생과 객원이 있는데, 문생은 일정한 커리큘럼을 가진 이들, 임의적인 창작활동을 하는 이들이고 객원은 그 커리큘럼은 참가할 필요 없이 글을 쓰는 친구들이죠. 지금은 객원만 있죠."

◆(주변에서 영어가 들리자) 저 영어 다 들리시죠?

"네? 하나도 안 들립니다. 미국서도 저 멀리서 한국어 한 마디가 들리면 그것만 들립니다. 하하하하."

◆지난 <호모 엑세쿠탄스> 기자간담회 때 방송 카메라에 정치부 기자들에 난리도 아니었는데, 정작 작품 리뷰 기사는 한 건도 없었어요. 문학보다 정치적으로 더 많이 소비되고 있는데, 그 이유 중 가장 핵심적인 게 2004년 총선 때 한나라당 공천심사에 참여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후회 안 하십니까?

"양면성이 있어요. 공천심사에 대해 안이한 생각을 했죠. 그 땐 그게 정치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상당히 정치적인, 정치 중에서도 핵심적인 행동이었어요.(웃음) 손해도 있지만 소득도 있었습니다. 정치에 대한 핵심을 볼 수 있었어요. 안심과 한심을 경험했죠. 아주 구체적으로요.

◆이번 대선 때 그런 제안이 다시 들어온다면요.

"앞으로 제안이 있다 해도 다신 안 할 것입니다. 너무 소모적이었어요. 정치가 문학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성을 망치는 거죠. 지난 6~7년 간 문학적으로 생산활동을 하나도 못했어요. 이번 책 나오고, <초한지>도 나오면 대충 다 나온 셈이라 볼 수 있겠지만 <초한지>는 순수 창작이 아니라서 생산성이 80~90년대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 것이에요. 문학성이 떨어진 것이 아닌 생산성이 떨어진 것이죠."

◆<삼국지> <초한지> 모두 극단적으로 말해서 노벨문학상 작가가 50명이 달려든다고 해도 그건 <삼국지>일 뿐입니다. 그것을 왜 이문열이란 작가가 달려 들어 시간을 소비하는지요.

"우린 궁핍한 시대를 겪었어요. 전업작가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에요. 당시 최인호 선배 정도나 겨우 살 수 있을까? 우리가 문학 수업할 때는 살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거 아니면 신문연재로 살았어요. 박종화 선생도 그랬고, 박경리 선배도 조금 아닌 소설을 연재한 적도 있었어요. 당시 작가가 글쓰기 외의 부업을 가져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하다가 후지가와 에이지의 인터뷰를 보고 "자기가 쓴 모든 책보다 번역한 <삼국지>가 더 많이 팔렸다"는 말을 어디서 읽어서, 나도 해볼까 하는데 민음사 박맹호 사장이 "해라 해라"해서 일생의 부업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것이에요. <삼국지>의 작가는 제가 아니에요.

그런 말 들으면 전 펄쩍 뜁니다.(웃음) <초한지>는 좀 다른 것이, <삼국지>는 원래 구조를 그대로 썼어요. 하지만 <초한지>는 번역한 것이기보다 내가 꾸민 것이에요. 연의(演義)한 거죠. 그래서 이번 책에는 작(作)이란 말을 쓸 겁니다. 중국 고전이 아닌 역사 소설이에요. 번역은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 못지 않게 주고 받은 게 많은 일이었어요. 그래도 "이문열 작품 뭐 읽었어요?" 했는데 "<삼국지> 읽었다"하면 제일 황당합니다. 하하하하."

◆이런 질문 드려서 좀 그런데요. 연애소설인데도 보면 성적 표현이 너무 절제돼 있어요. 이유가 뭡니까?

"저는 절제하는 것으로 가려고요. 김주영 선생이 맨날 저만 보면 "여관에 가면 잠을 자야지 왜 글을 쓰고 철학을 하냐나?"고 혼내요.(웃음)

◆양반 가문의 제약이 있었나요?

"그런 것은 없고요. 양반들도 보면 얼마나 외설적인 책을 많이 썼는데. 거는 상상력의 생동감이란 거, 옷을 어떻게 벗기고 그런 것을 표현한 것보다 밤새 이불소리만 들렸다 캐도 되거든요.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제가 등장할 때 많이 나온 내용들 그래서 하기 싫어요. 성적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고, 그것에 대해 나도 식상했던 때에요. <영자의 전성시대> <별들의 고향>이 유행하던 시절이잖아요. "왜 나도 이걸 해야 해"란 생각도 했어요.

박범신 선생이 그런 소설을 잘 썼는데 등단 이전의 인연이 있어요. 제가 서울대 사대 다닐 때 문학회에 나갔는데, 그때 매주 너무 좋은 소설을 써오는 친구가 있는 거라. 그 친구의 친구가 박범신 형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다 박범신 소설이었어. 하여간에 그 양반이 당시 입주 교사를 구하려고 한국일보에 광고를 하려는데, 연락처가 없는 겁니다. "전직 교사, 입주 원함"이란 문구와 연락처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가정교사하는 집의 전화번호를 박범신 형한테 빌려 줬어요. 그때 지방에서 선생 하다가 때려치우고 올라와서 고생도 좀 했지.(웃음) 박범신씨가 책 장례식 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어 아쉽다는 말을 하더군요."

◆어떤 작가들과 친하십니까?

"일년에 서너번 정도 만나요. 김원우 같은 경우 대구에 대학에 가 있고. 윤후명, 유익서, 정종명씨 정도. 동인지를 3회 내면서 80년부터 매달 만났어요."

◆가장 애착 가는 작품은?

"글쎄요…. 제 공식 적인 대답은요 '가장 마지막 작품' 이카는 겁니다. 그건 다음 작품이 더 좋아지길 바라는 것이죠. 주관적인 만족도라든가 있는데 그건 4권 정도.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 <시인> <아가>. <호모 엑세탄쿠스>까지 넣어야 하나?(웃음) 좀 억울한 것은 지금 봐도 제대로 쓴 작품 같은데, <시인>의 경우도 외국에서도 평도 정말 좋아요. 이번에 11번째 나라로 독일판이 나오는데 프랑스는 8,000부 재판 들어갔고, 영국도 재판. 그리스, 네덜란드까지 간 작품이죠.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팔리지 않은 작품이에요. 주관적인 평가로서는 <시인>이 내가 하고 싶다는 것에 근접한 작품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이문열이란 작가를 각인시킨 작품으로 <황제를 위하여>를 꼽아요.

"저도 신나게 썼어요. 쓸 때부터 운이 상당히 좋았어요. 문예중앙에 연재를 했는데, 게라를 줘서 인쇄를 하던 시절인데 제 소설의 게라를 여섯 개를 찍었대요. 신문사, 논설위원실, 국장실, 교정부용 등 달라는 사람이 많았대요. 원고가 오는 날은 게라를 다 가져가니까 아예 여섯 개를 찍었다고 하데요. 여담인데 오늘 술까지 마시면서 인터뷰 하자고 해서 오늘 혼나는 날이구나 생각하고 왔어요. 오마이뉴스도 했는데, 소위 악명 높은 곳이잖아요. 주변에서 "왜 (오마이뉴스와) 하느냐"는 말도 있었어요. 고민도 많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꾸밀 게 뭐 있나'하고 인터뷰 했죠."

◆지난번 100℃ 인터뷰이였던 공지영씨 경우, "생활비에 연연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는데, 선생님이야말로 전업작가로서 후배들에게 "전업작가가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하는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후배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창작하길 바라죠. 신문연재료 100만 원 할 때, 200만원 높이고, 200만원 할 때 500만원 부른 게 저예요. 그때 저는 돈이 어려울 때 아니었지만 후배들을 위해 그랬어요. 인터뷰료 받는 것도 했어요. 저는 예전부터 그랬어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제가 안 챙기면 안 되겠더군요. 신문사는 괜찮은데, 방송사는 탤런트에게는 (인터뷰 비를) 주면서 왜 작가는 안 주냐 이말이지. 그게 큰 부분은 아니지만 제가 할 수 있을 때 확보하는 것은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젊은 작가들이 일상성에 너무 경도돼 있어서 서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잖아요. 선생님 하면 그 남성적 서사가 떠오르는데.

"실제 어떤 소설은 소설 시장을 축소한 것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요소가 문학이 겪는 위축을 다 책임져야 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가장 큰 원인은 사회전반의 변화죠. 문화의 중심이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갔잖아요. 서사 역시 연극, 영화, 오페라도 쓰고 다 쓰는데 누가 그 중심에 서느냐의 문제죠. 결국 영화가 중심에 섰다는 것이죠. 그 다음에는 독자들의 사회가 변한 것 같아요. 우리 시대의 민주화, 자유화와 연관된 것일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 전문성의 파열이 와서 이제는 문학적 전문성을 존중해 주지 않는 것 같지 않아요.

우리 집에서 작가 공부하는 애들을 보면, 저희 때 작가는 '작은 신'일 정도로 감동이었고, 신비스러운, 존경스러운 존재였어요. 근데 지금은 중견 작가들 보고"얘는 안 되겠어" 뭐 그러고 있습디다. 또 하나 있다면 글의 담론이 가진 전파력이 많이 차단된 것 같습디다. 제딴에 이번엔 이야기의 전통을 살리려 애를 쓰고 여러 수를 부렸어요."

◆젊은 작가들은 이런 얘기를 해요. 40년대생 작가들, 혈연적 의미의 아버지가 아닌 상징적 의미의 아버지. 결국 꼰대 세대가 된 건데(웃음), 그 가운데 남성적 서사를 구현한 이문열이 버티고 있는 셈이죠.

"이젠 그런가요? 우린 유복자 세대인데….(하하) 이젠 아버지가 됐구나. 어떤 것들은 우리 문학 작가들이 책임 져야 할 부분이 있고, 문화적 중심이 바뀌어서 생긴 문제도 있고. 아무튼 소설이 더 이상 밀려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지분을 가지고 문학 판에서 살아 남느냐의 문제가 되겠죠."

◆선생님의 정치담론이 그나마 '이문열'이라는 작가를 독자들로 하여금 피하도록 만드는 상황이 아닌가요. 위와 같은 문학의 위기 상황을 복구할 책임을 갖고 계신 것 아니에요?

"다른 반증을 들겠는데요. 80년대 어떤 책들은 문학적 완성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도 담고 있는 정치적 담론에 의해 폭발적인 독자를 가져온 것이 있어요. 노동문학이나 <남부군> 같은 작품들. 반대의 경우도 있죠. 그런데 왼쪽으로(진보 쪽으로) 엎어지면 괜찮은데 제가 오른쪽으로 엎어져서 문제가 된 것 같아요, 하하하. 헤게모니 싸움에서 지원군이 있어야 하는데 전 없으니까요.

◆조중동이 있잖아요.

"문학적인 지원군이 아니잖아요. 어떤 때는 내가 뭔가 (발언, 작품활동을) 해 놓고도 잘못된 지원이 들어올까 봐 걱정될 때도 있어요."

◆옛 작가 이문열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선생님에 대한 지원이 될 듯 한데요.

"제가 등장한 시기는 정치 과잉의 시대였죠. 그 당시 정치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은 별로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었어요. 현재도 정치 과잉의 시대라면, 그렇지 않은(정치적이지 않은)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어요. 천명관의 <고래>나 박민규 소설 같은 것은 현실 정치의 팍팍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생동감이 느껴져요. 그래도 판매에 실패하더군요."

◆그 소설들 잘 나가는 소설로 치는데요.

"아, 그래요? 요즘은 2, 3만 부면 잘 팔리는 거라죠? 10만부만 되고 사장이 좋아하고. 아무튼 그런 책들이 꾸준히 나와서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이죠."

◆진짜 소설을 끌어가는 힘 같은 건 다르지 않나?

"젊은 친구들의 상당히 활달한, 이야기적 상상력을 보았어요. 김영하 경우도 굉장히 자유로운 사상이 드러나요. <검은 꽃> 정말 잘 읽었어요. 외국 얘기만 나오면 우리 작가들은 상당히 위축 되는데, 김영하는 지명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각주도 달지 않고 주눅들지 않고 잖아엔?이웃동네 얘기처럼."

◆선생님 전 세대의 소설가에 대해서는요? 60대를 넘어서 주목을 받는 작가들이 없는데요. 그 근처에 있는 작가들이 있는데, 마르케스 같은 경우는 80세가 되어도 창작을 하잖아요.

"저도 늙어가니까 분석을 해봤는데. 그들의 오랜 작가적 체험이 주는 교훈이 있어요.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상당한 기획의 결과물입니다. 상당히 영악함을 드러내는 기획이라고 생각이 돼요. 저도 어떤 것은 좀 더 나이 들어서 써야지 하고 미뤄두는 것도 있고, 괴테의 <파우스트>는 1부가 30대 후반에 나오고 끝은 70대 후반에 나왔잖아요. 토마스 만 같은 경우도 70이 넘어 쓴 것도 읽을 만한 괜찮은 작품이 나온 경우도 있어요. 대다수는 우리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웃음)

오늘 나오면서, 내가 쓰겠다는 '책 중에 서문을 한 번 띄워보자'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명하는 자리로 만들고 싶었는데, 오늘 서문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변명을 자꾸 하려는 것을 보니 늙은 것 같아요. 제가 "이 나이에 외국에 왜 가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앞으로 살 날이 20년 정도 남았는데, 내가 젊은 날 읽은 책 갖고 여기까지 왔는데 앞으로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미국에 가는 2년이라도 앞으로의 밑천으로 만들려는 생각으로 가는 겁니다. 그게 약해진 거죠."

◆아니 오늘 모습은 강하게 보이는데요.

"혈압도 300 가까이 올라가고, 미국에 약도 지어가고 그런다니까요."

◆시대와의 불화라고 부른 그것을 앞으로도 피할 생각이 없나요?

"어떤 형태로든지 시대와의 불화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어요. 날 100% 받아주는 시대는 있을 수 없죠. 그러한 경우는 사기를 쳤거나 사람들이 이상한 경우죠. 예를 들어 한 마을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모든 이가 그를 "착하다"하면 그 사람은 결코 착한 게 아니에요. 마을에는 착한 사람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착한 사람은 "착하다", 나쁜 사람은 "착하지 않다"고 해야죠."

◆조금만 비굴해지면 행복할 수 있잖아요. 그런 유혹을 느낀 적 없나요?

"왜요, 당연히 느끼죠. 어떤 마을에 120살 먹은 노인이 있는데 귀신에게 나를 잡아가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젠 사회관계를 나눌 사람이 다 죽어버리고 자기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것을 처음 들었을 때는 "우화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부쩍 그 노인의 심정을 느껴요. 제가 젊은 세대와 (한글) 맞춤법도 같고 (비슷한) 교과서로 같은 내용을 배웠는데도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아요. 그런 마음이 들 때 겁이 나면서, 나를 버리고 그들에게 달려가서 아첨이라도 해봐야지 하는 유혹이 생겨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행동이야 말로 정직하지 않고 두 번 욕을 보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요.

시미다 마사히코라는 친구가 나카가미 겐지 얘기를 하면서 "나는 그의 제자가 아니라 학대 당했다. 겐지가 나의 독자를 질투하더라"고 했어요. 저도 후배들을 보면서 그들의 독자를 두고 질투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제가 모든 독자들을 가지고 가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게 돼요. 저에 대한 평론도 제 또래인 권영민 등의 평론가들이 많이 하고요(*<젊은 날의 초상> 해설을 썼다).

그들이 가장 저를 잘 이해하고, 김영하의 경우도 그 친구 또래의 평론가들이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죠. 그것을 두고 제가 질투해선 안 되죠. 문학을 정치화시켜 "문학성이 침해 당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고. 제가 넘어지는 방향이 생각한 대로 가지 않는 상황에 대해 말씀 드리는 겁니다."

◆저희는 작가 이문열과 같이 늙어가는 독자들이 낙오되고 줄어들게 되는 것을 우려해서 한 말인데요.

"제가 여기서 털어놓지 못하는 '본능적인 공포' '미래에 대한 비관' 같은 게 있어요. 지금 내가 "과거를 털어버리겠다. 비정치적, 무정치적이 되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불가회성'(不可回性)과 관계 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첨예한 현실정치와 관련되는 것이죠. 예를 들면 이번에 들어오자마자 조선일보에서 칼럼을 써 달라고 했어요. 제 생각에 제의를 수락하면 너무 정치적인 글을 쓸 것 같아 문화에 대해 썼는데요.

정작 쓰고 싶은 내용은 들어온 지 이틀째에 본 한 대담 프로그램이었어요. 북한의 대북정책에 대해 토론을 하는데 야당이 '퍼주기' 공격을 하니까, 여당 중진이 "그럼, 전쟁을 원하십니까?" 그러더군요. 야당의원이 당황해서 "우리는 전쟁세력이 아닙니다"하면서 쩔쩔매요. 제 생각에는 오히려 여당 의원에게 당당하게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당에서 북한에게 지원을 안 주면 전쟁이 난다고 했는데 "당신은 대체 어느 나라 여당의 각료요?"하고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근데 자신이 전쟁세력이 아님을 증명하느라 노력하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싫든지. "그럼, 이제껏 북한에게 준 것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그런 건가요?"라고 되묻고 싶었고 그것을 칼럼에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그 이유는 제 생각 뒤에 숨은 공포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방향으로 가더라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불가회성. 요새 시청 앞에서 70, 80 드신 노인들이 정부에 대한 비판을 외치곤 합니다. 언론의 카메라가 이상하게잡으면 굉장히 희극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실이 너무 슬퍼요. 숙연해지죠. 절대 희극이 아닙니다."

◆선생님 부친은 월북하셨는데, 부모에 대한 불만도 있을 테고, 당신의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요. 달리 생각하면 그런 배경에서는 오히려 사상적으로 좌파에 가까울 수 있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와 관련해서는 20대 초에 끝났어요. 20대 중반 되니까 두 가지로 정리되더군요.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격렬하고 비극적인 얘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는 아버지 살해 다룬 것인데, 저의 아버지 살해는 일찍 온 편이죠. 그 후로 그런 사실에 묻혀 사는 게 이상하게 생각이 되더라고요.

독립한 셈이죠. 그럼에도 아버지에 대한 동물적인 감정은 오래 가요. 친북, 반북과 연관짓자면 아버지의 삶이 보여준 실제 결과가 제 반북 정서를 자극했을 거에요. 당신(아버지)은 남한에서 많은 것을 버리고 갔어요. 좋은 집안 재산 일본유학 등 모든 것을 버리고 갔는데 알고 보니 1954년에 함북 종성에 있는 협동 농장에 있는 거야. 그곳은 아오지 탄광과 다를 바 없어. 거기서 15년 동안 그 일을 했어요.

겨우 15년 만에 조금 남쪽으로 내려와서 농업지도원이 돼요. 학벌 때문인지 볍씨를 개발해 훈장을 2개 받았대요. 그 후에 청진에 내려와 15년 살다가 그 후에 3년 정도 더 살아요. 그것을 제가 서른 넘어서 알았는데, "우리(가족)가 남한에서 서럽게 살았는데 당신이라도 거기서 잘 살아야지"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그 사실로 원시적인 의미에서 북한을 용서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80년대 이후 우리나라 젊은 세대들의 맹목이랄까, 재벌이 아들에게 600억원을 넘겨주는 것은 전세계 유래 없이 난리가 나는데, 김일성이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것에는 별 반응도 없고 당연히 여기고 해요. 오히려 저에게 "당신은 만약 지도자의 자질이 있는데 김일성 아들이란 것 때문에 (김정일이)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냐"고 물어보기도 하더군요."

◆그런 경도에 대한 좌파들의 반성은 많지 않았습니까.

"전 아직 그들의 솔직한 반성을 보지 못했고, 심도 있는 회개를 보지 못했어요. 그런 말들을 한 사람들이 이상한 쪽으로 빠져 이상하게 풀린 것은 봤어요. 또 정권의 핵심에 들어간 사람들 역시 (그것에 대한) 공식적인 반성도 없어요."

◆최근 젊은 보수, 젊은 세대의 보수화에 대한 우려도 많이 나오는데요.

"제가 최근 자신 없는 것 중 하나가요. 우리가 배운 게 민주주의인데, 대선에서 2.4%가 많아서 현재 대통령이 나온 거잖아요. 뒤에서 그 결과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을 보면 자괴심이 들어요. 다음 세대에 대한 것도 그래요. 그들이 앞으로 살 시간이 훨씬 길 텐데 말이죠. 나는 "나더러 (그들의) 눈물을 닦아 달라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럴 때 젊은이들이 하는 말이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됐다한들 뭐가 달라졌겠냐"는 거 아닙니까.

"그건 모르죠. 잘할 수 있고 못할 수 있고. 그건 내가 유리해. 왜냐, 확률은 반반이니까."(웃음)

◆소설 쓰고 나서 문중 어른에게 야단 맞은 적은 없나요?

"문중 어른을 모델로 써서 혼난 적이 있지. (문중) 여자에 대해 적나라한 연애 얘기를 썼는데 그 남편이 어떻게 알고 이혼을 하네 어쩌네 문제가 된 적이 있었어요. 그 친구는 모 대학 국문과를 나온 친구라고요. 보자고 해서 "이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술을 먹자고 해서 갔다고 하도 뭐라기에 "야 이눔의 새끼야, 니는 국문과 나왔다는 놈이 소설과 현실을 구분도 몬하나"라면서 술을 부어댔죠. 하하.

또 한 번은 문중 어른에 대해서 신문 기자와 르포기사를 쓰는데, 극존칭으로 쓸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늙은 주인은 없고 집은 비었다" 고 썼는데 자신을 늙은 주인이라고 했다고 난리가 났죠. 또 한번은 악역 없는 소설이 없잖아요. 문중 어른을 악역으로 두고 썼는데, 그 분이 어떻게 아시고, "그래, 내가 한 일에 대해 쓴 것은 좋은데 왜 안 한 것까지 (소설에) 썼냐"고 혼내시기도 했어요."

◆싸움 방식을 바꾸는 건 생각하시나요?

"아예 충돌의 기회를 없애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있어요. 죄를 지어도 봐 줄 때, 조선시대 '방귀전리' 처럼 유배보다 가벼운 형벌을 받을 수 있을 때 "나는 더 이상 그런(정치) 이야기 하지 않고 살겠다"고 생각도 들고 해서 불화의 기회를 없애려고 생각도 있죠."

◆미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시려고요.

"제가 허먼 멜빌의 <백경> 같은, 신비한 해석을 좋아해요. 모비딕은 희랍 비극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고. 나다니엘 호손도 함께 읽고 싶어요. 누구는 저더러 "그건 현대문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고 하더만요.(웃음) 전 패배할 줄 알지만 도전해서 깨지는 영웅을 좋아해요. 그리고 또 하나는 하버드 동아시아학이 10년 전부터 양명학에서 주자학 주류로 바뀌었답디다. 그래서 미제 주자학을 좀 배워볼고 합니다."

◆역시 보수 이문열은 주자학도 미제로 배운다고 욕먹는 거 아닐까요.

"하하하. 그랄라나?"

◆작가 이문열에 대한 기대에는 한 시절의 교양을 대표하는 소설에 대한 기대도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칼이 되어서 돌아오기도 해요. 내가 그래서 천박한 교양상업주의라고 직사게 욕을 먹은 거 아입니까.(웃음) 조금 점잖게 말하면 현학서. 찾아보면 금방 나와요.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얼마 전 보도를 보니까 우리 시대 과평가 된 작가로 이문열을 꼽았든데, 평단은 절 과평가해 준 적이 없습니다. 85년 이후 이문열에 대한 평론 가운데 저를 인정하는 것과 까고 부정하는 것은 2대8 정도예요."

◆비판도 평가니까요. (웃음).

"그런가요? (웃음). 통계 한 번 내 보세요. 87년 이후 것(평론)으로 내보세요."

◆선생님도 노벨문학상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선 가능성이 전혀 없고.(폭소) 그 쪽(노벨상)과 코드도 전혀 맞지 않아요. 그들이 말하기를, 그 상은 문학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문학을 통해서 인류의 자유 정신, 민주화에 이바지한 사람들한테 주는 것인데, 문학을 잘 해서 장사 잘한 사람들은 해당 없습니다.(하하) 그런 말을 들었고, 실제로 그랬고요. 또 내도 그거 달라칼 만한 염치도 없고. 내가 뭐 징역을 한 번 갔나, 자유화 민주화에 개입하길 했나, 난 전혀 해당 없어요. 대신 내한테 선택이 가능하다면 노벨상보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내는 겁니다. 영어로요. 번역해서."

◆노벨상 수상을 위해 뛰고 있는 작가들이 있는데요.

"네 있죠. 우리나라 작가들이 가능성도 있고, 현실성도 있는 겁니다. 한 번은 우리한테 올 때도 됐습니다. 코드와 근접해 있는, 말하자면 문학을 통해 인류의 자유 증진에 이바지한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누구라고 말을 몬하겠습니다."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누가 받는 게 나을까요.

"내는 선택도 몬하겠지만, 누가 받든지 중요한 게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주면, 한국에 주면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에 편입시켜준다는 의미일 거에요. 이제껏 받아본 데가 그렇거든요. 아시아에서는 인도, 중국, 일본권에서 탔잖아요. 타고르는 인도인이지만 영문학의 일부고요, 임어당과 가오싱젠도 모두 영어 불어로 썼어요. 자국 언어로 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일본이에요. 일본의 두 작가가 수상했지만 '그들이 당대 1등 작가였나' 하면 아니라잖아요. 한 때 '일본은 노벨상 때문에 2명이 죽었다'는 말이 있었어요. 야스나리는 수상의 중압감 때문에 자살, 미시마 유키오는 못 받아서 죽고. 받은 두 사람에 대해 1등이란 평가는 없는 것 같습디다.

그건 그 나라의 문학이 받은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한국문학이 길을 돈 거죠. 왜냐면 직접 세계문학으로 가기는 굉장히 힘듭니다. 그런데 노벨상을 받으면 세계화의 가장 빠른 지름길을 가는 거죠. 그렇지 않고 경제의 시장을 통해 갈라카면 굉장히 멀고 험합니다. 꼭 누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없지만 글쎄 꼭 말한다면은…."

◆(일동) 말한다면요?

"시비를 잠재우거나 애매함 속에 남겨두려면 시 쪽에 주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해요. 왜냐면 소설은 구체화되기 때문에, 근데 시는 좀 애매하거든요. 시비의 소재라거나 그런 걸 잠재우려면. 근데 이렇게 말하면 너무 노골적으로 한 쪽을 미는 것 같은데.(일동 폭소) 누구든지 관계없어요."

◆노벨상 수상도 좋지만 그것을 위한 노력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데요.

"그것도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상을 위해) 상당히 유효한 방법이었습니다. 5년간 맨날 기자들이 집 앞에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해요. 그게 위원회 쪽에 상당한 압박이 됐다고 합니다. 아, 한국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이고. 꼭 그것을 빈정거릴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하고 도와줄 수 있으면 기자들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념이나 진보를 자신을 팔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작가가 있는데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있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있고요. 미국 사회에서도 그런 게 힘을 발휘하는 것 같은데, 미국에서도 똑똑하게 튀려면 진보 쪽으로 튀어야지 네오콘 하고 자빠지면 이건 확 가는 거예요.(하하하) 그건 어디나 다 있는 문제입니다.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해 뭐라 할 말은 없지만요. 그런데 다만 이런 건 있습디다.

그 반대의 경우, 제가 미국서 살았던 곳 근처에 오클랜드라는 항구도시가 있어요. 항구에 잭 런던의 동상이 있는데, 그는 사실은 참 무식한 작가인데, 굉장히 철학적인 사람입니다. 수도 필로소피, 그 머라카나, '의사철학의 명수'라고도 하죠. 니체와 마르크스 사이를 종처럼, 진자처럼 왔가갔다 해서 욕을 먹기도 하죠. 근데 나는 그 사람 좋아합니다. 전 괜히 그게 반갑기도 하고 좋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그는 미국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게 소셜 리얼리스트가 돼가지고, 우리나라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죠. 80년대 후반 <강철군화>가 번역됐고 <야성의 외침> 같은 작품이 번역되기도 했지만요. 그런데 오히려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하나 말고는 없는데, 영화도 되고 잘 됐죠."

◆잭 런던은 나중에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었잖아요.

"그게 인제 바로 저거죠. '니체하고 마르크스 사이를 막 왔다 갔다 했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변절해 봤자 그거 별 큰 그런 우리가 생각하는 변절은 아니고(허허허)"

◆초기 추리 작품이 있었죠. 국내에도 잭 런던 책이 꽤 번역되어 나왔는데요.

"근데 말이죠. 내가 문학 수업할 때나 80년 이전엔 본적이 없어요. 그가 살던 오두막을 갖다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정말 사람 하나 길이더군요. 오두막이 우리나라에도 거런 오두막이 없겠더라고. 요 방보다 조금 더 큰 방 하나 있는 집이에요. 그걸 그대로 들어내 가지고 부두에 옮겨 놨는데 그렇게 가난한 자식 노릇하다가, 부두 노동하다가 그리 했는 모양인데.(웃음)"

◆<호모 엑세쿠탄스>를 대선과 연관지어 보는 시선도 있는데요.

"헛헛헛. 글쎄. 근데 선거가 있는 해에 나온 책에 대고 또 선거철이냐 카믄, 자 선거 해에도 못쓰지 내년에 국회의원선거 있으니 또 못쓰지. 뭐 우리 나라 작가들은 선거마다 피할라카겠네.(웃음) 참 근데 그게 그래요. 제일 고약한 게, 대응을 못합니다. 어이 해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냥 그리 꼼짝없이 당하고 있는 건데. 이게 오래 쌓이니까 나도 그게 화가 난 거에요. 왜 나라고 해서 계속 터져야 하냐 이거예요. 뭐 맷집 좋고 하니까 좀 맞으라 하는 건데. 맷집도 한계가 있고. 그리고 또 이런 게 있습디다. 예전에 우리 시대만 해도 문단에서 서로 이념적으로 사이가 나쁘다 해도 만나 가지고 인간적으로 나빠진 적은 거의 기억이 안 나요.

오히려 이럴 때가 있었는데. 나중에 우리 후배들이 드니까, 문학 모임에 가면 서평 하는 아무개가 갑자기 내하고 눈을 안 마주치려고 저쪽 구석에 가있고, 뭐 그렇게 피하고 해요. 그럼 좀 수상해. 그러면 물어봐요. 무슨 문제 있냐고. 그러면 지난번 제가 어디따 선생님 글 나쁘게 썼다고(그래요). 허허허. 이게 문인이에요.

그렇게 해놓고도 마음이 약해져 가지고. 그때 특히 김성동이 한 말이 있어요. 김성동이는 자기말로 네 판에서 놀아봤대요. 절판에서 이판사판 해봤고, 그 다음 사회 나와서 바둑판에서 놀아 봤고, 한국기원에 오래 있었으니까. 그 다음에 문학판에서 놀아봤다고요. 네 판 중에서 놀아보니까, 이 문학판의 제~일 못된 놈이 나머지 세 판의 제일 착한 놈 하고 비슷하더라, 그러더군요. ?하하하. 음 이렇게 기본적인 그 우리 정리, 요새는 그게 깨지는 것 같애. 그래 가지고 문학적으로 뭐 나쁘면 말이죠, 사람까지 그마 이상하게 되는. 그 참 아주 쓸쓸한 걸 경험해요.

예전에 지금 그렇게 욕을 먹는 김동리 선생이나 미당 선생 같은 경우에도, 특히 김동리 선생 같은 경우에는, 내가 그 뭔가를 본 풍경이 기억 나는데. 동리 선생은 집 벽을 다 미닫이를 했어요. 한 150명 정도는 같이 앉을 수 있게. 설이면 다 터 버려요. 거기 가면 태반은 창비 이런 쪽 사람이고. 그리고 이문구, 윤 누구야, 이희영(*이시영?), 뭐 다 제자들 아닙니까. 그런 날은 또 그래요.

이희영씨 하고 송기영(*송기원)씨하고 이문구씨하고 빙 둘러 앉아 가지고 김동리 선생이 대답하기 어려운 것만 골라서 묻곤 하는데. 어느 날 5, 6공 바뀔 때에요. 자꾸 김동리 선생보고 노태우가 나쁘냐 전두환이 나쁘냐 막 물은 거야. 아주 대답하기 어려운, 동리 선생 형편으로서는 아주 어려운 물음이죠. 이걸 제일 처음 이문구가 묻고 가더니, 잊을 만 하면 와서 하고, 또 잊을 만하면 '아까 그 저 송기원이가 물은 것 말입니다'라고 이희영(?)이 말하고. 암튼 오래 내내 그러더라고. 동리 선생은 또 기어이 대답을 안 해. '엉 그것은 말이야. 근데 어이 술 가져 온나' 읏허허허. 이러고 저녁 때까지 화투치고 술 먹고 그래요. 그리 했거든요. 요새는 그런 것도 없어지고. 문학적 입장이 달라지며는 앉은 자리도 달라져 버리는, 아주 이상한 상태가 돼버렸어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좋은 거라 생각하는데…."

◆옛날 게 좋은 거라는 이야기시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스… 뭐 그것도 있지마는. 아주 옛날에, 뭐 이런건 써도 될 거야 아마, 예전에 한번 대구에서 이상한 또 '한야대회' 현상이 벌어졌어요. 허허허. 80년도인데 반대 '한야대회'지. 어느 날 김지하 선생께서 누군가 꼬붕 하날 데리고 왔어요. 턱 전화를 하시더니 '내가 아무갠데 내 자네 <황제를 위하여>를 보고 기분이 좋아서 왔다. 함 보세'카더라고. 그러면 내가 안 나갈리가 없지. 뛰어 나가서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이문구 선배께서 오셔 가지고 '내가 누구누구를 데리고 왔다'하는거에요. 창비의 정해룡 사장하고 또 누구하고 누구하고 네 명을 데리고 왔어요. 그래 이게 끝인갑다 싶어서 자리를 합쳤어요. 둘이 서로 모르는 사람도 아니니까.

다섯 명을 모아놓고 있는 데 또 전(?) 왔어. 이번엔 진짜 팀이 온 거에요. 황석영 선배하고 이시영, 송기숙 선생하고. 송기숙 선생이 그날인가 그 전날 광주에서 풀려 나온 길이라. 이제 기고만장해서 술이 취하자 '대구 이제 내가 접수했어'하고 하던 날이에요. 조동일씨도 오고 여럿 왔는데, 김지하 선생께서 막 좌충우돌로 야단치더라고. '황석영 너 소설 그렇게 쓰면 맞는다. 조동일 넌 마 무슨 학자가 일년에 책을 몇 권 씩 쓰냐.' 헛헛헛. 마 이리 전부 다 야단을 치더라고요. 뭐 그(김지하)에게도 또 임자가 있어. 이승운씨라고 연대 역사학과 교수가 있고요. 보성에선가 나와서 국회의원 됐죠. 그 양반 참 상당히 김지하 선생한테 꼬장꼬장한 형님이야. 이렇게 모임을 갖고 있는데 뭔가가 잘못됐어요.

송기숙 선생이 너무 막 실언을 하더라고. '대구 내가 접수했어' 하고 '이 놈의 새끼들' 하고 그랬는데. 그날이 사실은 대구에 있던 고등법원에서 고은 선생 항소심 날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보니, 모두 우연히, 우연이 아니라 모두 재판을 보러 왔는데, 연락을 나한테 하다 보니 그렇게 모이게 된 거죠. 그런데 술을 먹다가 드디어 싸움이 벌어졌어요. 황석영 선배는 (저와는) 딴 걸로 기억하던데. 그 삼국사기 이야기 외에 이완용 명필론(때문에 싸움이 붙은 걸로 알더군요). 근데 그거 사실 내가 이야기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황 선배가 그걸 기억 하더라고요. 내가 '이완용이가 글은 잘 썼다. 명필이었다'카는 말을 했대요. 삼돌이가. 하하하. 말이 안 되는…. 그리 써 놓고는 (황석영이) 내한테 전화해 가지고 '야 그건 말이야 어이 쓰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이형이 이해 하소'그러더라고. 그 황석영 특유의 '아 엿도 쓰면 안 됩니다. 쓰면 안 되고 엿도 안 됩니다'는….

하여튼 황 선배도 시인하던데. (그런데 그날) 너무 술을 마셨는지, 내가 젊어 참지 못했는지, 아마 기억은 안 나지만 (황석영한테) 좀 앵긴 것 같애. 그래 송 선생님이 화가 되게 났어요. 그래 웃통을 벗고 마당에서 '내려와' 이래. 허허허. '이놈의 새꺄, 한 번 붙자'고. 그래 내가 철도 없고, 그래 가지고, 하여튼 거의 내려갈 폼을 취했다는 데. 근데 김지하 선생이 황석영 선배를 막 밀쳤던가 하면서 '너희들 제대로 운동할라 카머 얘 말 잘 들어야 해. 너 그래 운동하면 저거 없는 거야.' 그렇게 싸우고 난 뒤 집에 갔는데 굉장히 미안터라고. 송 선생님이 나이도 많고 선배인데, 더구나 내가 있는 대구로 왔는데, 그런 실례를 한 거야.

대단히 미안터라고. 그 다음 달에 책 인세를 받아가지고 송기숙 선생님을 만나서 사죄를 했죠. '죄송합니다' 글 카니 '뭘?'하더라꼬. 그냥 내가 '기억이 없는 것 같아서…'했더니 '그럼 기억도 못하면서 사과를 어떻게 하냐. 난 기억도 못한다'그러는 거에요. 하여튼 황 선배가 와 가지고 '왜 그러느냐고'해서 내가 '여차저차한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하니) (황석영이) '아 그렇다면 술을 사야지. 근데 내가 사야겠다' 그러더라고. 그래 술을 마시고 그랬는데. 그렇게 화해를 한 뒤부터는 송 선생님하고 87년에 지역감정 대담도 하고 그랬어요.

나도 좋아하지만 송 선생님도 좋아하는 것 같애. 언젠가 한 번 또 내가 광주에 들렀다가 갔는데, 송 선생님이 손에 분필 가득 묻혀 가지고 나한테 '어이 쪼금만 기다려 곧 끝나' 하는 거에요. 그러니 그 대학 애들이 그카더라고요. '송 선생님 아십니까'하고 말에요. 그래 내가 '안다'고 '송 선생님 보러 왔다'고 하니까 (학생들이)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고' 그러데. 헛헛허. 근데 그것이 우리 그거(문단 문화) 였는데. 요즘 이상해요."

◆90년대 이후로도 그분들하고 자주 만나십니까.

"근데 그것(많이 못 만나는 것)은 다른 간격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바쁘니까, 내가 더 친한 사람들도 아까 말했듯이 1년에 서너 번 만나면 잘 만나거든요. 예를 들어 김원일 형 같은 경우에도 참 친한 분인데도 내가 작년에 미국에 간다고 재작년 9월인가 한번 만나고 못 봤어요."

한국일보(07. 01. 21) 이문열-고종석 취중격론 벌이다

이문열씨는 올해 초 귀국하면서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본보의 고종석 객원논설위원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고 위원은 2002년 <정말 하기 싫은 ‘전라도’ 이야기>, 2004년 <당신이 바로 하류 지식인이다>라는 칼럼에서 이문열씨를 강하게 비판한 바 있다. ‘전라도 발언’에 대해 해명하고, 쌓인 앙금을 풀고 싶다는 이씨의 요청으로 고 위원과의 만남이 100°C 인터뷰 도중 성사됐다. 치열한 ‘취중격론’이 오갔음은 물론이다.

고종석 “저한테 이문열이라는 작가가 우익작가라는 건 사실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그건 이념이니까. 문제는 언제부턴가 이 작가가 자기의 욕망 때문에 우익의 기품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건데, 전 그게 안타까워요. 우익들은 품위가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아무리 짜증이 나도 돌려서 얘기하지 자기 몸 홀딱 드러내면서 막말을 하진 않아요.”

이문열 “내가 하지 않은 말에 대해 논란이 붙었을 때, 고형(兄) 쯤은 이해할 줄 알았는데 섭섭합디다. 나는 문단에 나올 때부터 대한민국 작가였지, 영남작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화가 나서 그런 말을 할 사람이면 오늘날의 이문열은 없습니다. 내도 낼모레면 60인데, 한없이 순해지고 착해져도 별로 남은 세월이 없는데 말이죠, 이렇게 분노와 원한을 안고 늙는다는 게 형벌이에요.”

“말씀은 늘 이렇게 우아하고 온화하신데, 글엔 늘 칼이 있어요. 말씀하시는 대로만 쓰면 될 텐데 글이 너무 표독스러워요.”

“그게 내뿐만 아이고, 문인들이 원래 그 전날 같이 술 먹고, 그 다음날 글로 잡을 땐 완전히 개 잡듯 합니다. 그게 말과 다른 글의 속성이죠.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하고 힘 있는 것은 다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글에서 가장 나쁜 부분이 드러나는 건지도 몰라요. 말로 할 때는 인격이라는 게 있으니까 드러나지 않는데, 평소 감정의 가장 뾰족한 부분이 글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다른 건 몰라도 ‘지역주의’카는 거는 내한테 실리가 없어요.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그건 아이라는 거, 그건 좀 알아주세요.”

“제가 만약에 선생님처럼 월북한 아버님 때문에 성장기가 힘들고 그랬다면 전라도 사람한테 환장할 거 같아요. 아, 이 사람도 불쌍하고 저 사람도 불쌍하구나. 근데 선생님은 이상하게 ‘아버지 때문에 인생 이렇게 됐네. 이거 다 복구해야지’ 하면서 어느 때부턴가 굉장히 공격적으로 됐어요. 소수자들 입장을 좀 배려해주세요.”

07. 01. 21-22.

P.S. 문득 80년대 후반인가 90년대 초반 대학의 강당에서 그의 초빙강연을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땐 취기가 없어서였는지 스스로도 답답해할 만큼 눌변이었는데, 글로 쓰면 몇 배는 잘 말할 수 있다는 얘기를 말미에 덧붙였다. 강연의 주제는 진작에 '보수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빗살무늬 토기로부터 진화돼 온 그릇처럼 모든 것이 진화/발전돼 온 만큼 '현재'의 제도나 문물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로 나는 들었다...

옮겨놓은 인터뷰를 정리하고 다시 확인해보니 한국일보 사이트에는 그 사이에 수정본이 떠 있다(중간에 확인이 안되는 글자나 인명들은 어쩔 수 없게 됐다). 인터뷰의 후반부(문단 얘기)가 대거 빠져 있다(덕분에 '희귀한' 인터뷰를 옮겨놓은 게 돼버렸군). '취중진담'이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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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인생. 2007-01-22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과의 불화 하면 전 먼저 김훈선생이 생각나는데 작가 이문열 선생도 그러셨군요. 그러나 그두분에 대해 제가 느끼는 차이점이라면 김훈선생을 보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한 사내한명이 생각나는데 이문열 선생을 보면 나이든 아저씨같거든요..^^
제가 이문열 선생을 보는 눈초리 선입견 가득함을 버려야 하겠지만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젊은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사람의 아들... 저 참좋아해요..

사마천 2007-01-22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이문열. 지역주의가 아니라고요?
80년대에 신동아에 논쟁 붙는 자리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더군요.
이문열, "지역차별 그런 것 없습니다. 경상도는 공장 많아서 오히려 오염때문에 고생하잖아요. 호남사람들 부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어쨌든 피해의식을 가지지 말라고 다독거리는 친절한 말씀에 많이 놀랐습니다.
영남이라는 요소는 아마 사대부집 마나님 강조한 대목에서도 나올 것 같고.
또 민중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두환 비판 앞에다가 내세웠죠. 매우 꾸준하게.
그런 기억들이 제 머리에는 하나 같이 또렷한데 오늘 이렇게 말하는 건 지나칠 정도로 위선적으로 보입니다.
본인 책시장 다시 키워보자 이런 의도인가요?
그래도 저는 안삽니다.

기인 2007-01-2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ㅋㅋ 황석영 '선배' 조동일 '씨' 김지하 '선생'이라니. 이런 분류는 참 기묘합니다. ^^; 조동일 선생이 김지하 시인보다 더 선배이고, 김지하 시인이 많이 존경했다고 하는데, 김지하 시인이 조동일 선생을 혼냈다는 것도 그럴수도 있겠지만 존칭에 따라 달라지는 인식-기억 같기도 해서 재미있네요. 오-수정! ^^;

나비80 2007-01-2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인터뷰도 이쯤 하면 페이퍼에 옮겨 실을만 하겠네요. ^^

로쟈 2007-01-2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도 그렇지만, 이문열 또한 단순히 한 작가의 차원을 넘어서 문학적/문화적 아이콘이 돼 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자 대명사. 두 작가에 대한 제 흥미는 그런 데 있습니다...

2007-01-22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22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아, 그게 비하인드 스토리군요.^^
 

어제는 '인문학 위기'에 대한 한 좌담회에 불려나가 몇 마디 거들 일이 있었다. 이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차고 넘치지만(화제에 오른 지 한 10년은 됐으니!) 지난주초에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 'TV, 책을 말하다' 코너에서 다루어진 걸 계기로 해서 과연 '인문학에 희망은 있는지' 혹은 '희망의 인문학'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끔 됐다. 이와 관련하여 연구공간 수유나 철학아카데미 등과 같은 재야 학술공간 외에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이 '인디고서원'이다. 그건 얼마전 이 고등학생들의 '독서토론교실'에서 내는 잡지 <인디고잉>에 지젝 등의 저명한 외국 학자들이 기고하여 화제가 됐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겸사겸사 관련자료들을 모아보았다. 

 

중앙일보(07. 01. 16) 인디고 혁명

16년 전 부산이다. 국문과 새내기 여대생 허아람이 거사를 감행한다. 고교 시절 내내 품어왔던 꿈이다. 중.고생 대상의 독서토론교실을 연 것이다. 영어.수학 과외에 열 올리던 친구들은 비웃었다. 지금처럼 논술 광풍이 불 때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뜬금없었겠나. 하지만 그저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살았고 그럴수록 좋은 책을 향한 목마름이 더했으며 읽고난 뒤 벅찬 감동을 나눌 상대가 없어 안타까웠던 기억들이 아람을 이끌었다.

그렇다고 자선사업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과외교습하며 받는 만큼 돈을 받았다. 비웃음 소리가 더 커졌다. 그 돈 내고 올 학생들이 있겠나. 하지만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수강생 수가 이내 40명이 됐다. 주말에만 하다 보니 그 이상 받을 여력도 없었다. 대학원 때까지 7년 동안 매주 그만큼의 학생들에게 책을 골라주고 함께 읽고 느낌을 나눴다.

잠시 고민을 했다. 박사학위를 따서 학교에 남느냐, 아니면 본격적인 독서교실을 운영하느냐. 선택은 후자였다. 박사과정에 등록할 돈으로 40평 정도 되는 공간을 구했다. 이제 독서토론을 위해 학생들 집을 전전할 필요가 없을 터다. 수강생 수를 80명으로 늘렸다. 업으로 나섰다 해도 역시 주말에만 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렇게 9년을 더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서토론교실 학생들은 '인디고 아이들'이라 불린다. 인디고(Indigo)의 쪽빛처럼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란 뜻이다. 그들은 '아람샘(아람 선생님)'과 매주 1~2권의 책을 읽고 토론한다. 문학.역사.사회.철학.교육.예술.생태.환경 등 편식 없이 고른 분야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저자를 직접 초청해 토론회를 연다. '주제와 변주'라는 제목으로 22회를 이어온 토론회에는 정재서 교수와 김용택 시인, 성석제 작가 등 인기 저자들이 참석해 학생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눴다. 토론 내용을 정리한 책도 벌써 두 권이나 냈다.



아람샘과 인디고 아이들은 지난해 또 한번 일을 저질렀다. 국내 최초의 청소년 인문교양지 '인디고잉(INDIGO+ing)'을 창간한 것이다.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와의 e-메일 인터뷰는 물론 '옥스포퍼드 철학 사전'으로 유명한 영국의 사이먼 블랙번(케임브리지대 철학과) 교수와 '동유럽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슬로베니아의 문화비평가 슬라보예 지젝 등 세계적 석학들의 글을 받아 실었다.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에 감동한 석학들이 무료 기고한 것이다.

이처럼 인디고 아이들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실천하며 국내외 저자들과 지적 교류를 하고 있다. 논술고사 원고지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 위해 프린트물로 요약된 명작을 읽고 뜻도 모르는 용어를 외우며 문장 기술을 배우고 있는 또래들과는 사뭇 다르다. 아람샘 교실에는 100여 명의 대기자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특강을 해야 할 정도다. 분명 수요가 있는 것이다. 독서마저 입시도구로 전락한 어긋난 교육제도 속에서도 철학과 교양이 용해된 실천적 삶을 원하는 학생들이 분명 있는 것이다.

아람샘은 그들을 위해 3년 전 책방을 하나 냈다. '인디고 서원'이다(www.indigoground.net). 그 흔한 베스트셀러나 참고서.학습교재는 팔지 않는다. 아람샘이 고르고 학생들과의 토론으로 검증된 책들뿐이다. 그러니 경제적 어려움은 쉽게 상상이 간다. 한 번 만드는 데 1000만원이 들어가는 격월간지 '인디고잉'도 아직은 크게 적자다. 하지만 아람샘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 자신의 일이 "'대안'이 아니라 훼손된 '본질'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누군가 망쳐 놓을 수 있지만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이 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 땅에서 꺼져가는 참교육과 인문학의 불씨는 이념의 기치를 든 전교조 교사나 인문학 위기를 외쳐대는 노교수들이 아니라 한 가냘픈 여성 혁명가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이훈범 논설위원)

국민일보(07. 01. 06) 13평 동네책방 ‘문화혁명+ing’

부산 남천동 부산KBS 맞은편. 골목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찻집처럼 예쁜 책방이 하나 나온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 문을 열면 13평 공간이 아늑하게 펼쳐진다. 철학,역사,문학,예술,교육,생태·환경 등 6개 코너로 구분된 서가에는 3000여권의 책들이 빼곡하다. 청소년들이 찾는 서점이라고 해도 참고서나 학습교재는 한 권도 없다. 만화책도 없다. 문구도 팔지 않는다.

서가를 훑어보니 ‘강의’ ‘빈곤의 종말’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 등 어느 책 하나 만만치 않다. 여기서 판매하는 책들은 모두 주인 허아람(37)씨가 적접 선정한다고 한다. 허씨는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광고를 철저히 무시한다. 십수년째 중·고생 대상의 독서토론교실을 운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책을 고르고 학생들의 검증을 거친 후 서점에 내놓는다.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이 서점의 도서목록을 신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디고 서원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저자 초청 독서토론회가 열린다. ‘주제와 변주’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22회를 이어왔다. 시사평론가 진중권,박홍규 영남대 교수, 시인 김용택, 장영희 서강대 교수,소설가 성석제 등 인기 저자들이 학생들과의 만남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방문자들은 하나같이 이 작은 서점에 매료돼 후원자가 되었다.

허씨가 청소년 서점을 시작한다고 할 때,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꿈 같은 짓”이라는 것이었다. 2년 반이 지난 지금 그 ‘꿈 같은 짓’은 ‘주목할만한 현실’이 되었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는 지방 중·소형 서점의 대안적 모델로,책을 읽고 자란 아이들의 경이로운 힘을 보여주는 증거로,이 서점을 거론하는 이들이 많다.

허씨는 지난해 또 하나의 ‘꿈 같은 짓’을 저질렀다. 청소년 인문교양지 ‘인디고잉(INDIGO+ing)’을 창간한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교양 잡지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잡지의 기자들은 인디고 서원을 자주 드나드는 중·고생과 대학생 10여명이다. 순수 아마추어들이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 아마추어들이 신년 초 ‘대형 사고’를 쳤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문화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사이먼 블랙번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이 잡지 신년호에 글을 기고한 것이다. 지젝은 한국 청소년들의 원고 청탁을 받고 ‘철학,아는 것을 모르는 것,그리고 이성의 사회적 사용’이란 제목을 단 A4용지 10장 분량의 글을 보내주었다.

인디고잉 기자로 활동하는 박용준(고려대 철학과 3)씨는 “슬로베니아에 있는 지젝에게 메일을 보내 인디고 서원을 소개하고 소통하길 원하는 우리의 마음을 전달했더니 흔쾌히 글을 주었다”면서 “노엄 촘스키 MIT 명예교수에게도 원고를 청탁했는데 이번엔 어렵고 다음 번에 꼭 글을 주겠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창간호(2006년 9월호)에는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하마드 유누스의 이메일 인터뷰가 실렸다. 유누스의 책을 읽고 감동한 학생기자들이 그와의 인터뷰를 기획해 성사시킨 것이다. 지난해 10월 노벨상을 받은 후 한국을 방문한 유누스는 이화여대 강연장에서 인디고잉 기자들과 포옹하기도 했다.

청소년 잡지,그것도 창간한 지 반 년밖에 안된,아마추어들이 만드는 잡지가 세계의 지성들과 직접 소통하는 모습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어떤 힘이 석학들을 움직였을까. 허씨는 “학생들의 진정성과 순수함,그리고 용기에 감동한 게 아닐까요. 그리고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런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격려하기 위한 게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인디고 서원이 보여주는 것은 책 읽는 아이들의 힘이다. 오는 3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는 이슬아(18·부산 분포고 3)양은 “독서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얕은 지식이 아니라 굉장히 깊은 지식,놓치면 안 되는 지식,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포용하는 방법 같은 것을 알게 한다”면서 “대학생이 돼서도 계속 잡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인디고 서원을 방문하고 나서 “미래를 위해 이렇게 하자고 떠들기만 하는 일이 인디고에서는 현실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동네에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서점의 모습을 제시했고,우리 아이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잡지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모두가 포기했던 책과 청소년들의 만남을 성사시켰고,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청소년 문화를 싹틔우고 있다.

이 유쾌한 문화혁명을 이끌어온 허씨는 “진실하고 정의롭고 순수한 꿈이 현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이 작은 공간에서 부지런히 새로운 길을 만들고 세상을 놀래킬만한 성공사례를 만들어갈 작정이다. “꿈이 이루어지는 사례를 보여줘야 사람들이 따라오고 사회가 변해요. 그걸 보고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꿈을 꿀 용기를 얻거든요. 인디고 서원이란 이름이 그런 희망의 상징이 되고 싶어요.”(김남중 기자) 

07. 01. 21.

 

 

 

 

P.S. 고등학교 이름은 아니지만, '인디고'는 왠지 '민사고'의 짝처럼도 들린다. <희망의 인문학>의 원제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인 것처럼 인디고 또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만큼이나 '인문학'도 필요한 것. 그런 인문학과 그런 은행이 좀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쇼리스의 표현을 빌면, "인문학이란 지적 동력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27쪽)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건 '87년 체제'니 '새로운 헌법'이니 하니 거창한 틀이 아니라 어쩌면 동네의 마땅한 청소년 서점 하나일 수도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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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07 00:53 
    엊저녁엔 저녁 강의가 있어서 저녁을 일찍 먹었더니 강의가 끝나곤 허기가 졌다. 자정이 다 돼 귀가해 라면을 끓여먹고 또 내일 강의 준비를 하기 전에(아직 책도 다 안 읽었다) 잠시 숨을 돌린다. 어제, 아니 그제 저녁 다지원 강의가 끝나고 인디고 유스 북페어 프로젝트팀이 만든 <가치를 다시 묻다>(궁리, 2010)을 뜻밖의 선물로 받았는데, 다시금 무릎에 놓는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는 그 부제다.   그
  2. 인문학 혁명가의 꿈꾸는 책방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30 08:58 
    4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또하나의 책읽기책은허아람의 <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읽다>(궁리, 2011)다. 저자의 이름이 생소하더라도 '인디고 서원'은 혹 들어보셨을지 모르겠다.부산에 있는 청소년 인문학서점이자 한국 청소년 인문학 활동의 메카이다. 그 인디고서원의 대표가 바로 '아람샘'이다. 책날개에 실린 소개에는 '매 순간 생의 혁명을 꿈꾸는 투사, 이 땅의 인문혁명을 도모하는 전사'라고 돼 있다(또 한 가지는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기인 2007-01-21 13:32   좋아요 0 | URL
예전에 마태우스님이 알라디너와 함께 만들고 싶어하신 서점과 비슷하네요. :)

아포지 2007-01-21 14:06   좋아요 0 | URL
한 방 크게 먹은 느낌입니다. "희망의 인문학"과 함께 여운이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클리오 2007-01-21 21:36   좋아요 0 | URL
꼭 중앙일보는 기사에 티를 내는군요.. 참교육이념 어쩌고 하면서...--; 그나저나 저분, 대단하십니다!!

3794 2007-01-22 00:58   좋아요 0 | URL
부산에 있으면서도 이런 서점이 있는것도 몰랐군요. 시간 나는데로 구경가봐야 겠습니다.

로쟈 2007-01-22 01:10   좋아요 0 | URL
기인님/ '알라고 서원'이요?^^
apouge님/ 글쎄, 동네마다 이런 서점이 하나씩 있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클리오님/ 인디고잉도 수익을 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3794님/ 몇 권 팔아주시길.^^
 

오전의 '행사'를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배달된 중국음식을 먹은 다음에 신문들 뒤적이는데 문득 한 책광고가 눈에 띄었다. 피터 앳킨스(1940- )의 <갈릴레오의 손가락>(이레, 2006). 내 딴에는 주야로 불침번을 선다고는 하지만 수시로 졸았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들통났다. 이 '과학책'도 그냥 무심히 지나쳤던 모양인데, 리뷰를 뒤져보니 일간지들 가운데서는 중앙일보 정도만 비중있게 다루었다. 해서, 리뷰들만 믿다가는 이런 식으로 간혹 구멍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리처드 도킨스의 추천사가 나를 혹하게 한다: "아직까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과학자는 없었지만 만약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피터 앳킨스는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그는 강력하면서도 신비로운 영어로 심원한 과학의 시를 창조하여 우리를 눈뜨게 해준다. 앳킨스의 문장들은 우리를 영감으로 가득 채우고, 완성시키며, 풍요롭게 만들어, 완전하게 살아 있도록 이끈다." 그러니까 문장만으로도 읽어볼 만한 책인 것이다. 마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철학자 베르그송의 책들을 읽듯이 말이다.

해서 도킨스 덕분에 앳킨스란 이름도 기억하게 됐다. 한데 다시 뒤져보니 그의 <원소의 왕국>(사이언스북스, 2005)은 나도 갖고 있는 책이 아닌가(물론 이전에 두산동아판으로 나온 책이 소장도서이다). 그 책을 유심히 읽어본 건 아니었지만 기억에 남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의 '문장력'이 본격적으로 발휘된 책은 아니었다 보다. 딱딱한 '물리화학' 교재들도 그의 저작들이니 그럴 만은 하겠다(그밖에 <사이언스북>(사이언스북, 2002)에도 그의 글이 포함돼 있다). 앳킨스라면 넌덜머리를 낼 독자들도 상당수 있지 않을까? 그럼, 문제는 오히려 어떻게 하다가 <갈릴레오의 손가락> 같은 '명문장'을 쓰게 되었는가, 이겠다.

책의 부제는 '과학의 10가지 위대한 착상들'이다. "현대 과학이 도달한 빛나는 성과와 발전의 원동력을 제공한 10가지 위대한 착상을 선정하고,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과학사적 의의, 착상의 근본 아이디어에 대한 상세한 과학적 설명을 통해, 그것이 인류의 역사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지를 손에 잡힐 듯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 소개돼 있다. 방점은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라는 데 놓여져야 하겠다.

요컨대 그가 꼽고 있는 열 가지 착상, 곧 "1. 진화는 자연선택을 통해 이뤄진다 2. DNA에 담긴 암호가 유전된다 3. 에너지는 보존된다 4. 엔트로피는 늘 증가한다 5.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6. 대칭하는 것은 아름답다 7. 파동과 입자는 같은 것이다 8. 우주는 팽창한다 9. 시공간은 물질에 의해 휘어진다 10. 산술적 추론에는 한계가 있다." 자체를 다룬 책들은 생각보다 많이 나와 있으니까. 문제는 그 착상들의 '위대성'을 어떻게 설명해내느냐, 혹은 연주해내느냐인 것. 

짐작엔 고등학생들의 교양서로도 읽을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하튼 내 관심은 그런 쪽이고 600쪽이 넘는 분량도 마음에 든다(2003년에 나온 원저는 392쪽 분량이다). 아, 교양과학서들만 읽어도 삼백 예순 날들이 날도 아니겠다. 더 위대한 착상들과 씨름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직 뭐가 더 남아있을까?..

07. 0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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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1-20 20:07   좋아요 0 | URL
정말 삼백예순날이 날도 아니겠죠. 책의 두께와 스트레스는 비례하는듯. 저로선.

에바 2007-01-20 23:13   좋아요 0 | URL
얼마전부터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를 읽고 있는데 다른 책들에 계속 밀리고 있습니다.^^;; 꼭 완독하고 싶은데...그리고 오늘 '비평고원'에서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조만간 번역/출간된다는 '댓글'을 봤는데 좋은 번역서가 나왔으면 합니다. 근데 출판사가 어딘지 혹시 아시나요??

로쟈 2007-01-20 23:57   좋아요 0 | URL
수유님/ 저는 그냥 꽂아둡니다.^^
에바님/ 어딘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나오면 알겠지요.^^

알케 2007-11-26 22:36   좋아요 0 | URL
소생은 어제서야 한겨레에 실린 정재승의 칼럼에서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쟈님도 저 같은 두꺼운 하드카바 북 페티쉬인가 보군요 ^^;;

로쟈 2007-11-26 22:48   좋아요 0 | URL
얄팍한 책은 왠지 믿음이 덜 가서요.^^; 앳킨스의 책은 잘 모셔두고 있습니다...

테레사 2008-07-28 10:06   좋아요 0 | URL
와우,,저도 한겨레 정재승 교수의 추천을 읽고 샀습니다. 역시 아름다운 책이더군요. 하지만 한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다시 읽으려고 합니다. 좋은 책을 알아본다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