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방문자 수가 갑자기 수백 명 늘었다. '체홉'에 관한 포스팅 때문이라면 의외이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라면 나도 모르는 이유다. 여하튼 그건 그렇다 치고, 서평원고에 또 매달리기 전에 잠시 한숨 돌리는 기분으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펴내는 월간지 '책&(책앤)'의 청탁을 받고 쓴 글을 옮겨놓는다. '2010년 책 읽는 한국'이라는 권두 에세이인데, 여러 가지 일에 쫓기던 터가 모스크바 체류 시절에 썼던 내용을 바탕삼아 급조해서 보낸 원고였다. 다시 읽어보니 약간 어색한 대목도 있는데, 사람의 표정이 언제나 자연스러운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라고 쳐둔다. 글도 자기 운명과 표정을 갖는 것이니까. 참고로 글의 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책&(10년 3월호) 가장 아름다운 양식의 창고 

대학 안팎에서 강의를 하고 ‘인터넷 서평꾼’ 노릇도 하는 내게 책읽기는 말 그대로 다반사(茶飯事)이고 습관이다. 매일 세 끼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듯이 책을 읽고 또 읽는다. 부지런히 읽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읽기도 하지만, 책과 멀어진 적은 거의 없는 듯싶다. 말하자면, 자신이 가장 한심해 보일 때는 곁에 아무런 읽을거리도 없어서 멍하니 앉아 있을 때라고 생각하는 축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인간을 가리켜 ‘자유에 처형된 존재’라고 부른 것에 견주면, 책벌레들은 ‘독서에 처형된 존재’라 부를 만하다. 그렇게 책이라면 차고 넘치는 내게도 책이 ‘고프던’ 시절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한국어 책’이 고프던 시절이었다.  

수년 전 러시아에 일념쯤 체류하던 시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책은 다 러시아어 책들이고, 들고 간 몇 권의 한국어 책마저 거덜 난 이후엔 외지에서 한국음식이 그리운 것처럼 한국어 책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비유컨대, 언제든 처형당할 준비가 돼 있었지만 단두대가 없었다고나 할까. 이런 시는 어떤가?  

나의 목을 단 일 초의 간격도 두지 않고 내려칠 수 있는  
튼튼한 단두대의 칼날을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오다 

스무 살에 적은 시의 첫 대목인데, 혹 ‘내 인생의 책’ 같은 것이 있다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준 책이 있다면, 그건 ‘단두대의 칼날’ 같은 책이어야 하리라.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굳이 어려운 자격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국어로만 돼 있으면 ‘단두대의 칼날’ 비슷한 것으로 용인될 수 있었다. 굳이 ‘내 인생의 책’까지 갈 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냥 한국어 책이라면 감사할 일이었다. 마치 서울에서 가져온 라면에 김치를 넣어먹을 때처럼. 그때 겪은 일 한 가지가 생각난다.

"책은 인류가 산출해낸 가장 위대한 정신들의 거처이자 가장 아름다운 양식들의 창고”라고 중얼거리며 매일같이 모스크바의 여러 서점에 들러 우리보다는 다소 저렴한 러시아 책들을 구경하고 수집하는 일을 반복하던 때였다.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을 앞두던 차여서 어느 날은 새로 출간된 <존재와 무>를 반갑게 손에 들기도 했다. 두 종의 한국어본에다 영어본, 그리고 러시아어본까지 갖추는 걸 나대로는 컬렉터의 ‘센스’라고 부른다. 정작 책을 완독해보진 못했으면서도 말이다. 그런 걸 책에 대한 ‘페티시즘’이라고 미심쩍게 바라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르트르의 데뷔작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대표작은 <구토>일 것이다. 단편집 <벽>, 대작 <자유의 길>과 함께 사르트르 소설의 트로이카를 구성하는 작품이다. 그가 <구토>를 쓴 건 최소한 31세(1936년) 이전이지만 처음엔 갈리마르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부당하는 바람에 1938년에서야 출간된다. 그래도 33세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때 그의 단편집을 읽고 또 대학에 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책들을 탐독한 이후로 작가이자 철학자로서 사르트르는 나의 ‘영웅’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많이 읽고 많이 떠들어대기도 했지만, 특이하게도 <구토>만큼은 읽지 않았다. 헤세의 <데미안>처럼 몇 번 읽다가 그만 두는 식이었다. 그건 소설에서 주인공 로캉탱이 롤르봉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계산이었고, <구토>는 굳이 다 읽지 않아도 이해되는 소설이라는 논리였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 자신이 주장하는 바이지만, 산문은 앙가주망의 장르이며 분명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제시한 6가지 언어 기능 중에서 ‘시적 기능’이 아니라 ‘지시적 기능’이다(물론 사르트르가 이 작품을 헌정한 보부아르와의 관계에서는 ‘친교적 기능’이 지배적이겠지만). 메시지의 언어적 구성 자체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상황에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산문이고 산문의 임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달’만 보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언어)은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안면이 있는 한국인 가정에 들렀을 때 서가에 한국어로 된 <구토>가 꽂혀 있는 걸 보고 며칠 빌려보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초반 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한국에서 많이 읽히는 판본은 아니었지만, 번역서는 갈리마르와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맺고 1999년에 초판이 나온 것이었다. 다른 출판사들에서 나온 <구토>의 판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일단 궁금했지만,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또 정식 판권계약을 맺고 나온 책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신뢰할 만한 번역서가 되는 것도 물론 아니고. 러시아어본과 대조해보니 유감스럽게도 번역서에는 셀린느로부터 따온 제사와 보부아르에게 바친다는 헌사부터가 빠져 있었다. 객지에서 같은 한국인을 만날 때 보통 ‘반갑거나 불편하거나’인데, 책은 후자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초장부터 역자나 출판사나 몰상식하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사시(斜視)로 책을 읽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다. 

아니나 다를까, 곧 사단(事端)이 벌어지고 만다. 드 롤르봉 후작의 행적과 관련한 대목들에서 번역서는 줄곧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를 들먹이고 있는데(가령, “그는 러시아에 모습을 나타내고 표트르 1세의 암살 사건에 약간 가담했다” 등), 1750년생인 롤르봉이 1725년에 죽은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암살 사건에 어떻게 가담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표트르 대제는 암살된 게 아니고 나름대로 장수하다가 죽었는데 말이다! 다시 러시아어본을 확인해보니, ‘파벨 1세’를 ‘표트르 1세’로 오역한 것이다. 파벨 1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로 1796년 제위에 오르지만 1801년에 암살당하며 그의 뒤를 잇는 이가 아들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이다. 참고로,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는 알렉산드르 1세의 별명은 ‘스핑크스’였다. 내심을 알 수 없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사실 파벨 1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룸메이트가 갖고 있던 <이야기 러시아사>를 참고한 것인데, 이 한국어 책은 러시아 인명들을 줄곧 영어식으로 표기한데다가 ‘파벨1세’를 ‘바벨1세’로 오기하고 있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책들이 하나같이 그 모양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롤르봉이 표트르 1세의 암살에 참가했는가 안했는가? 그것은 오늘의 문제다. 나는 여기까지는 처리해 왔으나 그것을 결정하지 않고서는 더 계속할 수가 없다.”는 대목에 이르면,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나는 아쉽지만 책을 덮었다. 그만한 사실 확인이나 상식 없이 작품을 번역한 역자라면 주인공 로캉탱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별로 관심이 없다는 얘기인데, 그런 그에게서 로캉탱 얘기를 듣는다는 것은 로캉탱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또 한 번 <구토>를 다 읽지 않았다. 아니 읽지 못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테마는 이미 읽었다. 시작부터 등장하니까. 시작부터 등장하는 건 ‘잉크병’에 대한 명상이다. “이제 생각이 난다. 지난날 내가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뚜렷하게 생각난다. 그것은 시크무레한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던가! 그런데 그것은 그 조약돌 탓이었다. 확실하다. 그것은 조약돌에서 손아귀로 옮겨졌었다. 그렇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손아귀에 담긴 일종의 구토증.”

이런 구토증이야말로 작품의 주제이자 핵심이 아니던가! 내게 로캉탱에게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조약돌에 해당하는 건 ‘엉터리 책’이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인가! 그런 책들은 독자를 화려한 ‘정신의 맨션’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맨땅에 헤딩’하게 만든다. 하여 “책은 인류가 산출해낸 가장 위대한 정신들의 거처이자 가장 아름다운 양식들의 창고”라고 한 발언은 사실이 아닌 당위에 대한 진술이다. 즉 모든 책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책이라면 모름지기 그러해야 한다는 취지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환기하고자 한 글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한 푸념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책에 대한 뒷담화도 결국은 책 얘기다. 읽지 않고도 이렇게 떠들어댈 수 있으니 정작 읽고 나면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거의 목을 매달고 싶은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하여 부러운 것은 책읽기가 ‘옵션’인 사람들의 여유로운 시간이다. 책만 읽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자자손손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책들이 아닌가. 앞에서 적은 시의 나머지 두 연을 마저 옮긴다. 

생명은 진실한 고백
하여 나의 머리카락 한 올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당신을 향한 나의 순수 

절대를 지키는 스핑크스의 비애로
하여 나는 튼튼한 단두대의 칼날을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오다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이런 시는 고등학교 때 카뮈와 사르트르를 읽은 ‘후유증’이라 할 만하다. 그리하여 스무 살이 됐을 때, ‘존재’ ‘무’ ‘부조리’ ‘구토’ ‘실존’ ‘책임’ 같은 유행어가 치어들처럼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나는 한참동안 ‘자유’니 ‘의미’니 하는 문제와 씨름했던 듯싶다. 그렇게 책은 사람을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직업을 갖겠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하고 내가 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도 어쩌면 ‘책’을 너무 읽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마냥 좋기만 하겠는가. 삶이 때로 싫증나는 것처럼 책도 물릴 때가 있다. 등짝을 발로 차주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하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두려웠을 때는 책에 짓눌려 있을 때가 아니라 책을 읽을 수 없을 때였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읽어도 머릿속에 한 글자도 남지 않을 때였다. 책장을 갉아먹고 사는 책벌레에게 책이 맛없어질 때보다 더 끔찍한 순간은 없지 않겠는가. 그럴 때마다 나는 ‘단두대’를 향한 나의 자세를 상기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책을 읽을 자유였다. 그리고 분명 책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나는 가끔 책이 인간보다 위대해 보인다.   

10.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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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3-11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곤 역 <구토>에도 표트르 1세로 되어 있는 걸 보면, 그 정식 계약본은 아마도 방곤 번역본을 표절한 모양입니다... 물론 이 책에도 제사와 헌사가 빠져있습니다. 언젠가 영미명작 번역본들에도 표절의 문제가 제기된 바 있는데 프랑스 명작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로쟈 2010-03-11 08:47   좋아요 0 | URL
<구토>에 대해선 5월에 강의가 있는데, 그때 자세히 검토해봐야겠어요...

비로그인 2010-03-12 10:43   좋아요 0 | URL
'로쟈의 인문학서재' 읽다가 사르트르도 다시 보고 있었어요.. 철학쪽 책은 혼자 읽어나가기가 좀 어려운데.. 문학작품은 선생님 강의를 따라가며 읽다보니 더 수월하고 재미있어요..

5월 강의가 구토라니 급! 흥분하게 됩니다.
어디서 하시는 거예요? 못봤는데...

2010-03-12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3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4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1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진 방곤 번역본(삼중당 문고)에는 폴1세로 나와 있군요.파벨의 프랑스어 표기법인 것 같습니다.

푸른바다 2010-03-11 23:15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진 판본은 중앙문화사에서 사르트르의 <구토/더러운 손>과 카뮈의 <이방인>을 실버세계문학전집 15번째 권으로 묶어 낸 판본입니다. 1988년 간행된 초판입니다. 방곤 교수의 <구토> 초역이 언제인지 모르겠군요. 삼중당 본이 더 빠르지 않을까 싶군요^^ 전 사르트르의 글들을 주로 방곤 교수의 번역으로 접했습니다. 방곤 교수가 번역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뒤에 사르트르와 카뮈 간의 논쟁 글들이 실려있는데 최근에 나온 <시대의 초상>에 새로 번역되어 있는 사르트르의 글과 비교해본 결과 방곤 교수의 번역이 문제가 많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12 17:23   좋아요 0 | URL
75년 초판,85년 중판 세로줄이군요.헌책방에서 300원인가 주고 10년전 무렵에 산 겁니다.

푸른바다 2010-03-12 21:28   좋아요 0 | URL
10년 전에 300원 주고 산 책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다니 놀라운 기억력입니다^^
 

이번달 예술의전당 소식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안톤 체홉의 삶과 문학에 대한 짧은 소개글이다(예술의 전당은 '체호프' 대신에 '체홉'이란 표기를 쓴다). 예술의전당에서는 오는 5월 러시아의 연출가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를 초청하여 국내 배우/스태프와 함께 <벚꽃동산>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체홉에 관한 기사는 그런 계기로 마련된 것이고, 이후에 작품 <벚꽃동산>과 연출가에 대한 글이 이어질 예정이다. 내가 맡은 건 아니고 이 작가 소개도 필자의 사정으로 '대타'로 쓴 것이다.  

  

예술의전당(10년 3월호) 체홉의 삶과 문학 - 소외된 삶들의 진실을 담아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은 1860년 러시아의 조그만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농노 출신이었지만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했고, 아버지도 잡화상을 운영했다. 하지만 가게가 파산하자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되고 막내인 체홉은 고학으로 중학교를 마친 후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한다. 이후 체홉은 의대에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유머 잡지들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한다. 이때 쓴 콩트와 단편들로 그는 인기를 끌었고, 안토샤 체혼테 등의 필명으로 400여 편 이상의 작품을 쓴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그는 개업을 하는 대신에 문학에 전력을 기울였다.    

단편작가로 확고한 명성을 얻던 1890년 체호프는 사할린 섬으로 긴 여행을 떠난다. 시베리아철도가 개설되기 이전이라 마차로 시베리아를 횡단해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그는 4월에 길을 떠나 7월에 사할린 섬에 도착하고 3개월간 체류하면서 당시 유형지였던 사할린 섬의 실태를 조사하고 주민들과 일일이 만나 면접카드를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이때 작성한 카드만 8,000장 이상이었다. 바닷길을 통해 다시 모스크바에 돌아온 것이 그해 12월이었고, 이후 그는 <시베리아 여행>이란 기행문과 <사할린 섬>이라는 객관적인 인류학적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 보고서는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도 언급된다.  

문학사가들은 이 여행을 통해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그의 작품에서 ‘코믹’과 ‘우수’는 여전했지만, 그것은 저울에 추를 단 것처럼 다소 무거워진 형태였다. 한 시골 자선병원 의사가 자신의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정신병동에서 유일하게 총명한 청년을 만나 자주 대화를 나누다가 미친 걸로 간주돼 감금되고 결국은 맞아 죽은 이야기를 그린 <6호실>. 자신을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보호방어하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허무한 죽음을 맞은 시골학교 교사를 그린 <상자 속의 사나이> 등이 그 예다.   

단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했지만, 정작 체홉이 좋아하고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쪽은 희곡이었다. 이미 1886년에 첫 완성희곡인 <이바노프>를 썼지만,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와 낙담의 시기를 거치게 되었고, 그가 극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갈매기>(1895)부터이다. 초연에는 실패했지만 <갈매기>는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세운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재공연되어 대성공을 거둔다. 새롭게 힘을 얻는 체홉은 이후에 <바냐아저씨>, <세 자매>, <벚꽃동산> 등의 걸작을 연이어 발표하고 모스크바예술극장의 무대에 올리게 된다. 이 작품들에 대해선 특히 영국의 비평가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 체홉은는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극작가’란 찬사를 얻는다.   

흔히 체홉의 드라마에는 주제도 플롯도 사건도 없다고 한다. 그것은 주로 작품의 중심에 놓인 주제가 ‘잘난 사람들’의 이념이나 행동이 아니라 ‘못난 사람들’의 무능력과 불가피한 회한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콩트에서 시작하여 단편과 중편을 썼지만 체홉이 장편소설로까지 자신의 집필을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장편을 지탱할 만한 이념이나 행동을 인물들에게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설교적인’ 작가가 아니었다. 단지 세상을 관찰하고 그가 보고 느낀 것을 정확하게 기록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체홉이 쓴 드라마들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드라마’라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의 주인공들은 모험에 나설 만한 용기도, 여자를 꼬여낼 만한 재간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사색가나 사상가도 아니다. 대학교수인 처남을 숭배하면서 25년간 뒷바라지를 하느라 ‘도스토예프스키’(잘난 소설가)도 ‘쇼펜하우어’(잘난 철학자)도 되지 못한 ‘바냐 아저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체홉의 인물들은 주로 삶의 결정적인 기회들을 두 눈 다 뜨고 놓쳐버린 가련한 ‘등신들’이다. 그걸 확인한 이상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면 ‘비극적’일 테지만, 이들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무런 희망 없이 담담한 회한만을 가슴에 안은 채 예전의 일상적 삶으로 되돌아간다. 그러한 인물들이 체홉이 남긴 전 작품 속에 무려 2,355명이나 등장한다. ‘러시아 전체’나 다름없는 인물 군상이다. 그러므로 작품이나 무대를 통해서 체홉을 읽고 감상하는 것은 주인공들의 나약함과 회한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핵을 지병으로 앓던 체홉은 1904년 6월에 의사의 권유에 따라 독일의 바덴바일러로 연극배우인 아내 올가 크니페르와 함께 요양을 떠났다. 건강이 약간 호전되는 듯했지만, 7월 2일 새벽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샴페인을 마시고 싶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10. 03. 10. 

P.S. 한편, 본문에는 편집자의 자잘한 손길이 묻어있는데, '잘난 놈들' '못난 놈들'이 '잘난 사람들' '못난 사람들'로 교정된 식이다. 서두의 한 문단은 아마도 분량상 편집됐는데, 하루키와 레이몬드 카버, 그리고 체홉의 커넥션을 다룬 대목이었다.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에 미국의 단편작가 레이몬드 카버가 있다. 하루키는 카버의 단편전집을 일본어로 직접 옮기고 작품해설까지 붙였다. 바로 그 카버가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작가”라고 경탄한 이가 있으니 바로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이다. 그 자신이 ‘아메리칸 체홉’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카버는 체홉을 자신의 모델로 삼았고, 문학적 유언이라 할 마지막 단편소설 <심부름>에는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까지 했다. 신병 치료차 독일의 한 휴양도시에 갔다가 숨을 거두게 되는 체홉의 임종 장면을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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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3-10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올려주신 삭제된 서두의 한 문단 중 무라카미 하루키'를'은 무라카미 하루키'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첫번째 문단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주하게 되고 막내인 체호프는"에서 '체호프'는 '체홉'으로 해야 일관성이 있지 않을까요?^^

로쟈 2010-03-10 08:28   좋아요 0 | URL
퇴고도 못하고 보낸 원고라 티가 나네요.^^;

푸른바다 2010-03-10 08:58   좋아요 0 | URL
편집자에게도 일을 주셔야죠^^ 안톤 체홉은 이름 외에는 잘 모르는 작가였는데, 그의 단편집과 희곡들을 최근 구매했고 앞으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연극도 관람하고 싶네요. 지난번 바냐 아저씨 공연에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가 갑자기 생긴 다른 일 때문에 결국은 못하고 말았네요^^

로쟈 2010-03-11 08:47   좋아요 0 | URL
이제부터 아셔도 충분합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2010-03-12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2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2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2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학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것인데, 흥미롭게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선정한 '2010년도 대학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 20종'에 포함돼 있다('대학원 신입생'을 위한 책이 아닐까?). 겸사겸사 추천도서의 리스트를 훑어보고, 분야별로 몇 권씩 묶어놓는다(작년에도 같은 리스트를 올려놓은 적이 있군. 목록을 비교해보도 좋겠다).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과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는 임의로 두 권씩을 덧붙였다. 

  

1. 문학 

 

2. 역사 

 

3. 철학 

 

4. 과학 

 

5. 예술 

 

6. 교양 

 

7. 경제 



8. 연애 

 

10. 03.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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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 2010-03-0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록 중에 절반은 대학 신입생이 쥐어들엇다가 독서 취미를 평생 잃어버리기 알맞은 책들이 아닌가 싶네요 -_-

로쟈 2010-03-08 20:12   좋아요 0 | URL
그래도 많이 나아진 듯해요. 절반은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니까요.^^

다크아이즈 2010-03-0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신입생 둔 엄만데요, 저 목록에 있는 책 울집에도 몇 권 있는데 안 읽던데요. 인문학적 소양과는 담 쌓고(이과 출신이라는 핑계로)그냥 싸이월드 죽순이로 지내는걸요. 전 그냥 일반교양인을 위한 추천서로 생각할래요. ㅋㅋ

로쟈 2010-03-08 20:12   좋아요 0 | URL
단골도 몇 권 있습니다. 그냥 참고하시란 거지요.^^

이진이 2010-03-0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생각이 좀 느린편이라 그런지 대학생때는 읽어도 책맛(?)을 잘 모르고 그저 읽은 책
편수만 늘이는 데 급급했던 것 같아요.
혹자는 젊은 시절 읽었던 책만으로도 인생의 좌표가 생기는 데 말이죠.저는 이제와서 다시 읽어보면 '아 이렇게 깊은 뜻이...'라고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빠지는 건지...

로쟈 2010-03-08 20:13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아직 늦지는 않은 것이죠.^^

보고사는 책방 2010-03-0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보고 찾아왔습니다. 매번 책을 보면서도 먼가 허전합을 느끼곤했는데, 알라딘에 이런 공간을 만드신 것을 보고 놀라웠습니다. 그동안 번역서를 보면서도 답답함을 느끼곤 하였는데,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몇몇 책들도 오역리스트에 올라있군요.(책값이 아까워집니다) 계속해서 멋진 활동 부탁드립니다... 위에 있는 책들중 정말 몇몇은 신입생이 보기에 버거울 수 있겠네요. 공부 좀 하라는 메세지로 전 받아들이겠습니다. ㅋㅋ

로쟈 2010-03-08 20:14   좋아요 0 | URL
멋진 활동은 아니어도 '꾸준한' 활동은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빵가게재습격 2010-03-10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 신입생이 가장 읽기 어려운 책'으로 <난중일기>를 꼽고 싶은데요. <난중일기>가 어떤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해도, 날씨와 사건의 나열로만 이루어진 책을 전후 맥락없이 '읽어볼만하다'고 내미는 건 너무 무리해 보여서요. -저는 책을 읽고 나니 '맑음, 망궐례 드렸다. 활 몇 순 쏘았다. 누구 곤장때렸다.' 밖에 기억나지 않더군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저열하기 때문이겠으나,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더군요.--; - 어짜피 고전을 추천해야 했다면 차라리 <열하일기>가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여기까지 쓰니까 아내가 옆에서 '그 긴 걸 언제 다 읽어?' 하네요.--;;;)

로쟈 2010-03-11 08:51   좋아요 0 | URL
<칼의 노래>와 같이 읽으면 되지 않을까요?^^;
 

지난주에 나온 놀라운 책 중의 하나는 마틴 켐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유문화사, 2010)이다. 저자는 옥스포드의 미술사학과 교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문가이고 국내에도 이미 그의 <레오나르도>(을유문화사, 2007)가 번역돼 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미술사에 관한 책이 아니라 '레오나르도에서 하블 망원경까지'란 부제대로 과학사까지 포괄한 책으로 '시각적인 것'의 역사와 '시각적 직관'의 의미에 대해서 두루 다루고 있다. 아직 마땅한 서평이 뜨지 않아서 책소개를 일부 참고하면 "르네상스 시대 초기 원근법부터 바늘구멍 사진기, 입자 가속기, 허블 망원경, 3차원 컴퓨터 모델까지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고안했던 도구를 다양하게 언급하는 이 책은 예술가로 레오나르도, 뒤러부터 사진 발명가, 현대 조각가까지 다루고 있으며. 과학자로 갈릴레오, 다윈에서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굴드, 에어빈 슈뢰딩거까지 소개하고 있다. 미술, 건축, 사진술, 천문학, 의학, 수학, 생물학 등 박학다식한 지식의 통섭을 지향하는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지은이는 시각적인 것을 바라보는 참신한 역사적 관점을 제시한다. 미술과 과학의 엄격한 경계와 구분에서 뒤로 물러섬으로써 공통 테마들을 끌어내어, 시각적인 것의 역사가 제공하는 자유와 통찰력을 누려 볼 것을 호소한다. “예술과 과학은 둘 다 지식이 무너지는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의 나의 강한 느낌이다. 시각적 직관은 미지의 세계 속을 더듬어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가진 가장 막강한 도구 중 하나다. ”레오나르도에서 허블 망원경까지 추적하는 이 탐사에서 지은이는 공간에 대한 처리와 공간 좌표의 지속성, 부분과 전체의 관계, 자연 속의 기하학, 질서와 카오스의 계, 임계성에서의 계, 카메라의 사용, 초기 사진의 신뢰성과 객관성 문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 작업-입자 궤도, 파인만 다이어그램, 의학 스캔-등을 생각해 본다.

   

제목 자체는 불가불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문선, 2004)을 같이 떠올리게 하는데, 비록 원제는 일치하지 않더라도 '시각적인 것'의 경험과 그 의미에 대해서 깊이 숙고해보고 싶은 욕구를 부추긴다. 책은 어제 구입했지만 독서는 좀 미뤄질 듯하다. 서평을 쓸 기회가 생기면 당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10. 03.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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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파브르만큼 친숙한 곤충학자의 이름은 없지만, 그가 쓴 <파브르 곤충기>를 다 읽은 독자는 거의 없다. 그건 기존에 나와 있는 책들이 모두 축약본이거나 각색본이기 때문인데, 이번에 드디어 제대로 된 완역본이 나왔다. 분량은 생각보다 방대하다. 10권짜리니까. 이 정도면 어린이용이라고만도 볼 수 없겠는데, '내집마련'을 하게 되면 서가 한쪽에 꽂아두고 싶다. 완역이라는 거대한 작업을 해낸 역자 김진일 교수와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3. 06) "왜 벌레냐고? 곤충 무게는 인류의 1만배” 

인터넷서점에서 <파브르 곤충기>를 검색하면, 200여권의 책이 좌르르 쏟아진다. 대부분 어린이물이거나 만화각색본, 또는 발췌축약본이다. 이도 아니면 일본어 축약본을 재번역한 것들이다. 이런 차에, 평생 곤충 연구에 매달려온 곤충학자 김진일(68·성신여대 명예교수)씨가 <파브르 곤충기> 열 권을 완역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10년쯤 전에 한 완역본이 있었으되, 오래전 절판된데다 비전공자의 번역이어서인지 내용 오류가 적잖았으니, 김진일판 <파브르 곤충기>는 명실공히 완역 정본이라 하겠다. 



<파브르 곤충기>를 쓴 장 앙리 파브르(1823~1915)는 아흔세 살까지 살았다. 박물학자이자 시인 겸 철학자였던 그가 생의 말년에, 그러니까 56살부터 86살까지 30년에 걸쳐 곤충(벌레) 관찰과 실험을 동시진행 해가며 집필한 책이 <파브르 곤충기>다.

파브르는 프랑스 남쪽 지중해안의 몽펠리에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옮긴이 김진일씨 역시 그 대학에서 지중해안 모래풍뎅이 연구로 197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 “파브르가 관찰하고 연구한 곳을 발품을 팔아 돌아다녔던” 그이기에 이번 완역본 출간은 30여년 묵은 소망을 비로소 이룬 셈이다.

3일 서울 사직동의 집필실을 찾았을 때 그는 오래도록 끌었던 일을 털어낸 듯 덤덤한 표정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파브르 곤충기>를 이미 교수 정년퇴임 한 해 전인 2006년 중반에 3년에 걸쳐 다 마친 상태였다고 말했다. 곤충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바삐 달려온 그는 만약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누가 번역할까 하는 절실함이 있었다고 했다.

“앞으로 저 원전을 번역할 사람 안 나와요. 왜냐, 연구 환경이 달라요. 저만 해도 초창기 사람이니 넓게 공부했거든요. 풍뎅이도, 나비도 이야기도. 그런데 요즘은 풍뎅이라도 모래풍뎅이 하나만 파요. 다른 풍뎅이는 몰라요. 사실 교수 말년이면 잡무도 없었고요.”

우리나라 곤충학의 권위자인 그는 국내 곤충학의 사정을 묻자 곤충 연구에 대한 세간의 무심함을 오래 감내해온 노학자답게 “도무지 한국 사람들은 ‘벌레’가 지구 생물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상상을 안 한다”며 외려 질문을 던졌다.

“이거 대답해봐요. 전세계 개미를 다 모아놓으면 무게가 얼마나 될까?” 눈만 멀뚱거리고 있는데, 그는 금세 답을 일러줬다. “어디까지나 추산이지만 개미 체중을 합치면 인간의 100배가 돼요. 개미는 전체 곤충의 100분의 1밖에 안돼요. 그러니 곤충 무게가 사람 종족의 1만배라는 얘기예요. 곤충들 기존 종명만 해도 150만개가 넘어요.”

<파브르 곤충기>에는 파브르가 곤충 관찰에 빠져 있다가 동네 아낙들에게 정신이 모자란 이 취급을 받는 일화가 나오는데, 그는 그게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했다. “젊은 시절 벌레를 잡으러 다닐 때 ‘하필이면 왜 벌레냐’는 눈길들이었어요. 흰불나방이 창궐하던 여름, 불광동 근처를 가다 번데기를 뒤지니까, 누군가 무슨 약에 쓰냐고 묻더라고. 연구라고 했더니 저 혼자만 쓰려 안 가르쳐준다고 화를 내더라고요.”

그는 파브르의 큰 업적으로 동물행동학의 선구적 역할을 꼽았다. “동물행동학이 생물학 정식 분과가 된 게 불과 30년인데, 파브르는 이미 100년 전에 이 책을 썼어요. 행동 관찰을 통해 종마다 다 특성이 있음을 드러냈죠.”

옮긴이 역시 국내 최초로 동물행동학을 개설했다. <파브르 곤충기> 열 권에는 권마다 초입에 옮긴이의 ‘맛보기’ 글이 실렸는데, 풍뎅이 등 국내 곤충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분류학자이기도 한 옮긴이가 분류학에 무지했던 파브르를 시종 비판하는 대목들도 흥미롭다. 파브르는 분류학자들에게 불평을 쏟아내며 기존 학명을 무시하고 종종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 썼다. 옮긴이는 “파브르가 학명을 써주었다면 혼란이 덜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사실 김진일판 번역본의 특징은 파브르가 오기한 숱한 학명을 바로잡고 그가 잘못 이해했던 생물학적 사실들도 알려준다는 데 있다. “파브르는 진화론을 부정했어요. 곤충들은 ‘본능’ 행동밖에 없다는 거야.”

그가 파브르에게 가장 감탄했던 것은 ‘관찰방법’이다. “아, 이 사람이 이런 걸 쉽게 풀어가는구나. 땅속 개미가 굴을 뚫어놨지, 어떻게 그 굴 속으로 들어갈까? 지푸라기를 집어넣고 파기 시작한 거라. 아주 쉽지, 그러나 그 방법을 생각해 실천한 건 누구냐 말이지. 그게 뛰어난 거죠. 장수금풍뎅이는 갈대를 꽂아놓고 따라 들어갔지. 그걸 꽂지 않으면, 굴이 어딨는지 모르잖아요. 그걸 팍 생각해 냈다는 거.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이겁니다. 이 책 안에는 콜럼버스의 달걀이 정말로 많단 얘기예요.”

첫 권을 낸 지 5년여 만에 완간된 김진일판 <파브르 곤충기>에는 갈피마다 파브르의 문학적 표현들이 살아 숨쉰다. 이를테면 10권에선 유럽장수금풍뎅이의 굴 파기를 관찰하며 크레타 미궁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붙잡고 빠져나온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신화 속 이야기와 그 벌레가 살아남는 방식이 얼추 닮은꼴임을 보여주는 식이다.

“파브르가 연구 결과를 놓고 책을 냈다면 쉬웠어요. 실은 실험·관찰을 진행하며 책을 썼거든. 그런데도 도입, 본론, 결론으로 순서가 정연하거든. 곤충들 제멋대로 행동하는데, 나는 이건 천재 아니곤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요.” (허미경기자) 

10. 03. 07.   

 

P.S. 올해 나올 과학서로 기대를 갖고 있는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드의 과학에세이집 등이다. <종의 기원>과 <사회생물학>은 새 번역본. 굴드의 에세이집은 세 권 가량이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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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0-03-07 19:34   좋아요 0 | URL
저도 언젠가는 10권 다 마련해서 꽂아 두고 싶네요(한권 한권이 가볍게 볼 가격은 아니지만...;). 어렸을때 축약본을 재미있게 보고는 했었는데요. 그래도 실제 벌레들은 싫더군요. 무서워요-.-

로쟈 2010-03-08 20:18   좋아요 0 | URL
보통은 발이 많고 기어다니는 동물에 대해선 혐오감을 갖기 마련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3-07 20:47   좋아요 0 | URL
시튼의 동물기와 파브르의 곤충기를 모두 외워버리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는데...좋아하는 곤충이 있나요?

로쟈 2010-03-08 20:16   좋아요 0 | URL
실제로 곤충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요.^^; 교과서에 나온 말똥구리 정도라면 모를까.

노이에자이트 2010-03-09 16:20   좋아요 0 | URL
저는 웬만한 곤충은 다 좋아해요.제일 귀여운 것은 배추벌레.여치도 좋아해요.날개를 떨면서 우는 모습은 정말 신비합니다.

비로그인 2010-03-08 14:32   좋아요 0 | URL
막내아들이 7살이고 이제 초등 1학년인데, 이녀석 꿈이 곤충학자예요. 이걸 사둬야 되는건지, 나중에 때가 되면 사는게 맞는건지...ㅠㅠ. 스물스물 지름신이 자꾸 고개를~~ㅋㅋ.

로쟈 2010-03-08 20:14   좋아요 0 | URL
곤충학자가 꿈이라면 바로 사주셔야겠는데요.^^

루체오페르 2010-03-08 16:15   좋아요 0 | URL
와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책이네요. 언젠가는...리스트에 올려놔야겠습니다.

로쟈 2010-03-08 20:14   좋아요 0 | URL
네, 소장해둘 만한 책입니다...

두리아재 2010-05-22 22:22   좋아요 0 | URL
10년전 이미 출간된 바 있는 1999년 완역본(탐구당)을 개작한 것인지? 진짜 김씨 스스로 번역한 것인지..? 곤충기 번역은 단순히 곤충전공자의 곤충 용어 지식 보다는 프랑스 어문학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불문학자들이 10년 넘어서야 완성한 원고지 2만장의 분량의 대작을 김씨는 3년만에 번역했다고 자랑을 하는데... 글쎄요? 무언가 검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10-05-22 22:36   좋아요 0 | URL
10년전 완역본이 탐구당본이군요. 찾아보니 소장하고 있는 대학도 6곳밖에 안됩니다.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 '검증'은 해주시면 좋을 텐데요...

두리아재 2010-05-22 23:57   좋아요 0 | URL
10년전 곤충이야기 10권 전체를 통독하고나서 느낀 점은 파브르는 곤충연구자라기 보다는 철학자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이었읍니다.특히 그의 백과전서적인 박식함과 어휘 구사력은 그야말로 서사시를 읽는 느낌이었지요. 프랑스어의 세밀한 뉘앙스를 우리 말로 옮기는일은 불문학을 전공한 역자들이라 해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그런데 번역에 있어서의 윤리적 기준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신중한 처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이미 기존 번역물이 존재하고 있을때는 말이지요.위의 기사를 보면 김진일씨도 곤충 전공자로서 과거의 탐구당본을 이미 숙독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인데 그렇다면 그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군요.자신의 것이 정본이라는 홍보성의 오만함보다는 보다 겸손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번역에 있어서 열화당과 예경출판사의 사례에서 보듯이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