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방문자 수가 갑자기 수백 명 늘었다. '체홉'에 관한 포스팅 때문이라면 의외이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거라면 나도 모르는 이유다. 여하튼 그건 그렇다 치고, 서평원고에 또 매달리기 전에 잠시 한숨 돌리는 기분으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펴내는 월간지 '책&(책앤)'의 청탁을 받고 쓴 글을 옮겨놓는다. '2010년 책 읽는 한국'이라는 권두 에세이인데, 여러 가지 일에 쫓기던 터가 모스크바 체류 시절에 썼던 내용을 바탕삼아 급조해서 보낸 원고였다. 다시 읽어보니 약간 어색한 대목도 있는데, 사람의 표정이 언제나 자연스러운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라고 쳐둔다. 글도 자기 운명과 표정을 갖는 것이니까. 참고로 글의 제목은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책&(10년 3월호) 가장 아름다운 양식의 창고 

대학 안팎에서 강의를 하고 ‘인터넷 서평꾼’ 노릇도 하는 내게 책읽기는 말 그대로 다반사(茶飯事)이고 습관이다. 매일 세 끼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듯이 책을 읽고 또 읽는다. 부지런히 읽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며 읽기도 하지만, 책과 멀어진 적은 거의 없는 듯싶다. 말하자면, 자신이 가장 한심해 보일 때는 곁에 아무런 읽을거리도 없어서 멍하니 앉아 있을 때라고 생각하는 축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인간을 가리켜 ‘자유에 처형된 존재’라고 부른 것에 견주면, 책벌레들은 ‘독서에 처형된 존재’라 부를 만하다. 그렇게 책이라면 차고 넘치는 내게도 책이 ‘고프던’ 시절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한국어 책’이 고프던 시절이었다.  

수년 전 러시아에 일념쯤 체류하던 시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책은 다 러시아어 책들이고, 들고 간 몇 권의 한국어 책마저 거덜 난 이후엔 외지에서 한국음식이 그리운 것처럼 한국어 책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비유컨대, 언제든 처형당할 준비가 돼 있었지만 단두대가 없었다고나 할까. 이런 시는 어떤가?  

나의 목을 단 일 초의 간격도 두지 않고 내려칠 수 있는  
튼튼한 단두대의 칼날을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오다 

스무 살에 적은 시의 첫 대목인데, 혹 ‘내 인생의 책’ 같은 것이 있다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준 책이 있다면, 그건 ‘단두대의 칼날’ 같은 책이어야 하리라.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굳이 어려운 자격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국어로만 돼 있으면 ‘단두대의 칼날’ 비슷한 것으로 용인될 수 있었다. 굳이 ‘내 인생의 책’까지 갈 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냥 한국어 책이라면 감사할 일이었다. 마치 서울에서 가져온 라면에 김치를 넣어먹을 때처럼. 그때 겪은 일 한 가지가 생각난다.

"책은 인류가 산출해낸 가장 위대한 정신들의 거처이자 가장 아름다운 양식들의 창고”라고 중얼거리며 매일같이 모스크바의 여러 서점에 들러 우리보다는 다소 저렴한 러시아 책들을 구경하고 수집하는 일을 반복하던 때였다.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을 앞두던 차여서 어느 날은 새로 출간된 <존재와 무>를 반갑게 손에 들기도 했다. 두 종의 한국어본에다 영어본, 그리고 러시아어본까지 갖추는 걸 나대로는 컬렉터의 ‘센스’라고 부른다. 정작 책을 완독해보진 못했으면서도 말이다. 그런 걸 책에 대한 ‘페티시즘’이라고 미심쩍게 바라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르트르의 데뷔작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대표작은 <구토>일 것이다. 단편집 <벽>, 대작 <자유의 길>과 함께 사르트르 소설의 트로이카를 구성하는 작품이다. 그가 <구토>를 쓴 건 최소한 31세(1936년) 이전이지만 처음엔 갈리마르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부당하는 바람에 1938년에서야 출간된다. 그래도 33세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때 그의 단편집을 읽고 또 대학에 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책들을 탐독한 이후로 작가이자 철학자로서 사르트르는 나의 ‘영웅’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많이 읽고 많이 떠들어대기도 했지만, 특이하게도 <구토>만큼은 읽지 않았다. 헤세의 <데미안>처럼 몇 번 읽다가 그만 두는 식이었다. 그건 소설에서 주인공 로캉탱이 롤르봉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계산이었고, <구토>는 굳이 다 읽지 않아도 이해되는 소설이라는 논리였다.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 자신이 주장하는 바이지만, 산문은 앙가주망의 장르이며 분명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제시한 6가지 언어 기능 중에서 ‘시적 기능’이 아니라 ‘지시적 기능’이다(물론 사르트르가 이 작품을 헌정한 보부아르와의 관계에서는 ‘친교적 기능’이 지배적이겠지만). 메시지의 언어적 구성 자체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상황에 주목하도록 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산문이고 산문의 임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달’만 보면 되는 것이지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언어)은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안면이 있는 한국인 가정에 들렀을 때 서가에 한국어로 된 <구토>가 꽂혀 있는 걸 보고 며칠 빌려보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초반 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한국에서 많이 읽히는 판본은 아니었지만, 번역서는 갈리마르와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맺고 1999년에 초판이 나온 것이었다. 다른 출판사들에서 나온 <구토>의 판권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일단 궁금했지만,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또 정식 판권계약을 맺고 나온 책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신뢰할 만한 번역서가 되는 것도 물론 아니고. 러시아어본과 대조해보니 유감스럽게도 번역서에는 셀린느로부터 따온 제사와 보부아르에게 바친다는 헌사부터가 빠져 있었다. 객지에서 같은 한국인을 만날 때 보통 ‘반갑거나 불편하거나’인데, 책은 후자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초장부터 역자나 출판사나 몰상식하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사시(斜視)로 책을 읽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이치다. 

아니나 다를까, 곧 사단(事端)이 벌어지고 만다. 드 롤르봉 후작의 행적과 관련한 대목들에서 번역서는 줄곧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를 들먹이고 있는데(가령, “그는 러시아에 모습을 나타내고 표트르 1세의 암살 사건에 약간 가담했다” 등), 1750년생인 롤르봉이 1725년에 죽은 표트르 대제(1672-1725)의 암살 사건에 어떻게 가담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표트르 대제는 암살된 게 아니고 나름대로 장수하다가 죽었는데 말이다! 다시 러시아어본을 확인해보니, ‘파벨 1세’를 ‘표트르 1세’로 오역한 것이다. 파벨 1세는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로 1796년 제위에 오르지만 1801년에 암살당하며 그의 뒤를 잇는 이가 아들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이다. 참고로,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는 알렉산드르 1세의 별명은 ‘스핑크스’였다. 내심을 알 수 없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사실 파벨 1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룸메이트가 갖고 있던 <이야기 러시아사>를 참고한 것인데, 이 한국어 책은 러시아 인명들을 줄곧 영어식으로 표기한데다가 ‘파벨1세’를 ‘바벨1세’로 오기하고 있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책들이 하나같이 그 모양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롤르봉이 표트르 1세의 암살에 참가했는가 안했는가? 그것은 오늘의 문제다. 나는 여기까지는 처리해 왔으나 그것을 결정하지 않고서는 더 계속할 수가 없다.”는 대목에 이르면,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나는 아쉽지만 책을 덮었다. 그만한 사실 확인이나 상식 없이 작품을 번역한 역자라면 주인공 로캉탱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별로 관심이 없다는 얘기인데, 그런 그에게서 로캉탱 얘기를 듣는다는 것은 로캉탱에 대해서도 예의가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또 한 번 <구토>를 다 읽지 않았다. 아니 읽지 못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테마는 이미 읽었다. 시작부터 등장하니까. 시작부터 등장하는 건 ‘잉크병’에 대한 명상이다. “이제 생각이 난다. 지난날 내가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뚜렷하게 생각난다. 그것은 시크무레한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던가! 그런데 그것은 그 조약돌 탓이었다. 확실하다. 그것은 조약돌에서 손아귀로 옮겨졌었다. 그렇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손아귀에 담긴 일종의 구토증.”

이런 구토증이야말로 작품의 주제이자 핵심이 아니던가! 내게 로캉탱에게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조약돌에 해당하는 건 ‘엉터리 책’이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인가! 그런 책들은 독자를 화려한 ‘정신의 맨션’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맨땅에 헤딩’하게 만든다. 하여 “책은 인류가 산출해낸 가장 위대한 정신들의 거처이자 가장 아름다운 양식들의 창고”라고 한 발언은 사실이 아닌 당위에 대한 진술이다. 즉 모든 책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책이라면 모름지기 그러해야 한다는 취지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환기하고자 한 글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한 푸념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책에 대한 뒷담화도 결국은 책 얘기다. 읽지 않고도 이렇게 떠들어댈 수 있으니 정작 읽고 나면 얼마나 할 말이 많겠는가. 거의 목을 매달고 싶은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하여 부러운 것은 책읽기가 ‘옵션’인 사람들의 여유로운 시간이다. 책만 읽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자자손손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책들이 아닌가. 앞에서 적은 시의 나머지 두 연을 마저 옮긴다. 

생명은 진실한 고백
하여 나의 머리카락 한 올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당신을 향한 나의 순수 

절대를 지키는 스핑크스의 비애로
하여 나는 튼튼한 단두대의 칼날을 얻기 위해
여기까지 오다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이, 이런 시는 고등학교 때 카뮈와 사르트르를 읽은 ‘후유증’이라 할 만하다. 그리하여 스무 살이 됐을 때, ‘존재’ ‘무’ ‘부조리’ ‘구토’ ‘실존’ ‘책임’ 같은 유행어가 치어들처럼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나는 한참동안 ‘자유’니 ‘의미’니 하는 문제와 씨름했던 듯싶다. 그렇게 책은 사람을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직업을 갖겠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하고 내가 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도 어쩌면 ‘책’을 너무 읽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마냥 좋기만 하겠는가. 삶이 때로 싫증나는 것처럼 책도 물릴 때가 있다. 등짝을 발로 차주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하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두려웠을 때는 책에 짓눌려 있을 때가 아니라 책을 읽을 수 없을 때였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읽어도 머릿속에 한 글자도 남지 않을 때였다. 책장을 갉아먹고 사는 책벌레에게 책이 맛없어질 때보다 더 끔찍한 순간은 없지 않겠는가. 그럴 때마다 나는 ‘단두대’를 향한 나의 자세를 상기한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책을 읽을 자유였다. 그리고 분명 책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나는 가끔 책이 인간보다 위대해 보인다.   

10.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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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3-11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곤 역 <구토>에도 표트르 1세로 되어 있는 걸 보면, 그 정식 계약본은 아마도 방곤 번역본을 표절한 모양입니다... 물론 이 책에도 제사와 헌사가 빠져있습니다. 언젠가 영미명작 번역본들에도 표절의 문제가 제기된 바 있는데 프랑스 명작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있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로쟈 2010-03-11 08:47   좋아요 0 | URL
<구토>에 대해선 5월에 강의가 있는데, 그때 자세히 검토해봐야겠어요...

비로그인 2010-03-12 10:43   좋아요 0 | URL
'로쟈의 인문학서재' 읽다가 사르트르도 다시 보고 있었어요.. 철학쪽 책은 혼자 읽어나가기가 좀 어려운데.. 문학작품은 선생님 강의를 따라가며 읽다보니 더 수월하고 재미있어요..

5월 강의가 구토라니 급! 흥분하게 됩니다.
어디서 하시는 거예요? 못봤는데...

2010-03-12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3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4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11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진 방곤 번역본(삼중당 문고)에는 폴1세로 나와 있군요.파벨의 프랑스어 표기법인 것 같습니다.

푸른바다 2010-03-11 23:15   좋아요 0 | URL
제가 가진 판본은 중앙문화사에서 사르트르의 <구토/더러운 손>과 카뮈의 <이방인>을 실버세계문학전집 15번째 권으로 묶어 낸 판본입니다. 1988년 간행된 초판입니다. 방곤 교수의 <구토> 초역이 언제인지 모르겠군요. 삼중당 본이 더 빠르지 않을까 싶군요^^ 전 사르트르의 글들을 주로 방곤 교수의 번역으로 접했습니다. 방곤 교수가 번역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뒤에 사르트르와 카뮈 간의 논쟁 글들이 실려있는데 최근에 나온 <시대의 초상>에 새로 번역되어 있는 사르트르의 글과 비교해본 결과 방곤 교수의 번역이 문제가 많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12 17:23   좋아요 0 | URL
75년 초판,85년 중판 세로줄이군요.헌책방에서 300원인가 주고 10년전 무렵에 산 겁니다.

푸른바다 2010-03-12 21:28   좋아요 0 | URL
10년 전에 300원 주고 산 책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다니 놀라운 기억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