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대학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를 선정해 발표했다. 취지는 이렇다. "문학, 역사 등 각 분야 12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좋은책선정위원회는 대학 입학을 앞둔 신입생들의 기본 소양 형성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매년‘대학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를 선정, 발표하고 있다." 20권의 책이 추천됐는데, 목록에 대한 소감을 그때 적어두려다가 미뤘었다. 오늘 보니 대학도서관 홈피에도 떠 있고 하기에 다시 생각이 나서 목록과 함께 몇 마디 보탠다. 일단 리스트는 이렇다.
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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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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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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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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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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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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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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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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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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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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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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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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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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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스(Ⅰ,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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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 조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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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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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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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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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김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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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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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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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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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진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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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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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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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세미나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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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알랭 밀레 편/ 맹정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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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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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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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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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박미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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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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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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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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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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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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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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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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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와이너/ 김승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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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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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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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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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레빗 외/ 안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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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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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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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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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정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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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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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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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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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메 앤터니 애피아/ 실천철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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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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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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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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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 최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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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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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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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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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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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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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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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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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왓슨/ 최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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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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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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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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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S. 쿤/ 김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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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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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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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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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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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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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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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풀린 현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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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준 아파두라이/ 차원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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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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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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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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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홉스/ 신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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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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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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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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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 김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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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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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선정위원회'는 '이달의 읽을 만한 책' 선정위원회이기도 해서, 리스트를 보면 대략 누가 어떤 책을 추천했는가 짐작해볼 수 있다. 가령, 철학 분야의 책들인 <광기의 역사>, <마르크스의 유령들>, <자크 라캉 세미나 11> 등은 김상환 교수(서울대 철학과)의 추천작일 것이다(한데, 이건 대학 신입생이 아니라 대학원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가 아닌지?). 특기할 만한 것은 국내서가 두 권의 한국 소설을 포함해서 네 권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광기의 역사>와 <리바이어던>은 완역본이 있음에도 발췌역본이 선정됐다는 점(실무자들의 착오가 아니라면 의아한 일이다. 고등학교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도 아닌데 말이다). 몇 가지 분야로 나누어 나대로의 추천도서도 보태본다.
1. 문학


최인훈의 <광장>(문학과지성사)는 얼마전에 새 전집판이 나왔고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문학과지성사판 외에 열림원판이 나와 있다. 국내서가 두 권이므로 국외서를 하나 덧붙이자면, 내가 주로 추천하는 책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그러고 보니 세 권 모두 이념과 삶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2. 철학


푸코의 책 <광기의 역사>는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추천한 인간사랑판 외에 완역본인 나남판이 있다(내가 알기에 인간사랑판은 중역본이 번역도 더 낫다는 얘기를 들어본 바 없다).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일단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정도는 읽은 다음에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자크 라캉 세미나 11>도 마찬가지다. 프로이트의 책을 한 권이라도 먼저 읽는 게 순서일 것이다. 나도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김덕영의 <프로이트, 영혼의 해방을 위하여>(인물과사상사, 2009) 같은 책을 조감도 삼아 미리 읽어보는 게 낫겠다. 개인적으론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가 가장 무난한 책이다. 물론 동양철학은 다루지 않기에, '서양철학 이야기'가 보다 적합한 제목이긴 하지만(국내엔 서너 종의 번역이 나와 있다).
3. 역사


역사분야의 책은 두 종의 '20세기사'다. 역사서는 비교적 난이도에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읽어봄 직하다(분량은 좀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 한국현대사 쪽으로는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전18권)을 필요할 때 참고할 수 있겠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2001)도 원서와 함께 읽어봄 직하다(내가 신입생이라면 그러고 싶다).


4. 정치


정치분야의 책은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인데, 이 또한 신입생에겐 좀 부담스러운 책일 듯싶다. 이왕 부담스러운 김에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까지 더 얹어놓는다.
5. 경제


경제학 책으로 추천된 것은 스티븐 레빗 등의 <괴짜 경제학>인데,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와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등도 같이 읽어봄 직하다. 입장은 조금 다르더라도, 세계경제와 한국경제를 바라보는 조금 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겠다. 물론 <88만원 세대> 같은 화제작도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관심을 가져볼 수 있겠고.
6. 사회


사회분야의 책으론 인도 출신의 문화인류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의 <고삐 풀린 현대성>이 추천되었다. 나는 갖고 있지 않은 책인데, "국민국가의 종말, 탈영토화, 탈식민주의 등을 탐구한 평론. 지난 20년간 진행된 세계화가 국가의 경계를 흐리고 있다고 진단하며 ‘탈국가론’을 제시하고, 곧 초국가주의가 도래할 것이라 말한다." 아프리카계 학자인 콰메 앤터니 애피아의 <세계시민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겠다. 나는 거기에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으를 덧붙이고 싶다. 저자가 고등학생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책이므로 대학 신입생이라면 거뜬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7. 과학


과학책으론 왓슨의 <이중나선>과 홍성욱의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이 선정됐다. 생물학 책이 빠진 듯해서 보태자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젠 '고전'의 지위를 얻고 있는 책이 아닐까. 다윈과 다윈주의에 대한 입문서로서도 유력하다.


장회익, 최종덕 교수의 대담집 <이분법을 넘어서>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그리고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은 과학철학자의 저작이란 공통점이 있다. 과학과 역사, 그리고 시 사이의 크로스오버를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실제로 읽는 건 만만찮은 일이어서 <이분법을 넘어서>를 제외하면 책장을 몇 장 못 넘길 우려도 있다.
8. 예술



흥미롭게도 예술분야의 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공간의 시학>이 이 범주로 고려됐던 것일까? 여긴 뭐 무주공산이므로 그냥 세 권을 채워넣는다. 대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아마도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일 텐데, 최근엔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쪽으로 쏠리는 듯하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누구나 추천하는 책이지만, 그냥 돈 모아서 소장해두는 책이라고 해두자. 나는 러시아문학이 전공이기에 <러시아 미술사>도 필독서로 넣고 싶다.
9. 교양


에릭 와이너의 <행복의 지도>와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그리고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교양서로 묶는다(카슨의 책은 이미 '고전'이기도 하지만). 이중 가장 의외의 책은 <행복의 지도>. 지난 가을에 나왔으니까 출간된 지 아직 반년밖에 되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란 부제를 고려해보건대,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 않을까 싶다(나도 읽어보고 싶다!). 소개를 보니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을 찾겠다는 기상천외한 여행기"라 한다. <불안>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수상록이고, <침묵의 봄>은 환경운동의 모태가 된 책. '행복'과 '불안', '침묵' 중에서 자신과 가까운 쪽을 택해 교양으로의 여정을 시작하면 되겠다.
10. 고전


신입생들이 읽을 만한 고전으론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추천됐다. 한데, 서해문집판은 지적했다시피 발췌본이다. 완역본은 나남에서 두 권짜리로 출간된 바 있다. 가격에서나 분량에서나 모두 부담스러운 책.


정 부담스럽다면, <리바이어던>에 대한 해제서를 읽거나 유사 <리바이어던>을 읽는 것도 좋겠다. 폴 오스터와 보리스 아쿠닌 소설의 제목이 <리바이어던>이다...
09. 03. 07.



P.S. 대략 대학 신입생을 위한 간행물윤리위원회 추천도서를 따라갔는데, 이런 목록이야 '일람'의 용도 이상의 의미는 갖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뭔가 '잔소리'처럼 덧붙이는 것은 "내가 대학 신입생이었을 때 이런 책들을 읽었더라면" 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을 토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맘대로 그런 바람을 더 보태자면, 서경식의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 등을 꼽고 싶다. 모두가 '국가' '국민' '국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한국어'와 '한국인'의 운명에 관한 책이다.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얼핏 자명해 보이는 그러한 '조건'에 대해서, 나의 삶과 언어의 '테두리'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는 뜻이다. 가져도 좋다는 뜻이다. 물론 '나'에 대한 물음은 청소년기에 먼저 떼고 와야 하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