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강의 때문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다시 읽었다. 거의 20년만에 읽은 셈이니 어렴풋한 인상 정도만을 갖고 있었을 따름이고, 세부적인 내용은 처음 읽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교재로 사용한 건 <인간실격/사양>(문예출판사, 2009[2003])인데,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잘못이었어요."
마담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우는 아주 정직하고 영리하고, 술만 그리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술을 마셔도, ... 천사같이 착한 아이였어요."(오유리)

이것만 읽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텐데(주인공 이름 '요우'는 다른 번역본들과 대조해보건대, '요조'라고 해야 맞다), <인간실격>(민음사, 2009[2004])도 같이 읽은 게 화근이었다. 이렇게 끝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김춘미)

일어에서는 그런 표현도 쓰는 모양인데, '하느님같이 착하다'란 게 말이 되는지 궁금했다. '천사같이 착하다'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도 같지만, 나의 직관으론 한국어에서는 가능하지 않거나 어색한 말이다. 다자이의 간략한 전기를 포함하고 있는 소개서 <자화상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살림출판사, 2008)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빠요."
태연스레,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짱은, 무척 얌전하고 아주 눈치 빠르고, 그냥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였습니다."(유숙자) 

짐작에 일어 원문은 '하느님같이'('하나님같이')로 옮겨질 수 있고, '천사같이'라고 옮기는 건 의역이 아닐까 싶다. 다른 번역본들을 조금 더 뒤져봤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빴어요."
그리고 마담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짱은 온순하고 재치 있는, 거기다가 술만 안 마신다면... 아니, 술을 마셔도 정말 훌륭한 좋은 사람이었지요."(을유문화사판)  

"그 사람의 아버님이 나빠요."
마암이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요조는, 정말로 착하고, 경우가 바르고,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아니, 마셨다 하더라도, 하느님같이 착한 사람이었어요."(웅진지식하우스판)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요짱은, 정말 순진하고, 또 남을 생각하고, 정말이지 술만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마셨어요,... 하느님같이 좋은 애였어요."(제이앤씨판) 

작품에서 '인간실격자'로 지목되는 주인공 오바 요조에 대한 마지막 인물평이기도 해서 음미해볼 만한 대목인데(요조는 다자이 자신의 자전적 분신이기도 해서 이 인물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 나로선 '천사같은 아이'와 '하느님같은 아이'의 의미가 동일하게 여겨지질 않아서 어떤 해석이 타당한지 궁금하다. 다들 일어라면 자신 있는 분들의 번역일 테지만, 이 번역만 갖고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혹 일어를 아시는 분이라면 댓글로 도움을 주셔도 좋겠다. 참고로, 오늘 팩스로 받아본 영역본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It's his father's fault," she said unemotionally. "The Yozo we knew was so easy-going and amusing. and if only he hadn't drunk - no, even though he did drink - he was a good boy, an angel." 

인용한 건 1958년에 나온 영역본인데,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의 영역본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걸로 보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여하튼 영역본은 "그는 천사와 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정도로 옮겼다. 사소한 문제에 과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학 전공자들은 원래 이런 문제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10. 04.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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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2234 2010-04-09 00:40   좋아요 0 | URL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저는 전공자도 아니고 일어도 잘 모릅니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몇 자 적어봅니다.

1. 오유리 선생님의 '요우'도 틀린 번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문에는 '요짱'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건 다들 아시다시피 요조의 애칭입니다. '요짱'이라고 번역하는 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요조'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고, '요'(요우)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므로 요조, 요(요우), 요짱 모두 가능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2. '하느님' '하나님' '천사'로 번역된 단어는 한국어로는 주로 '신(神)'으로 많이 번역되는 ’神様(kamisama)'라는 단어입니다. 원문대로라면 'kamisama 같은 착한 아이였어요(神様みたいないい子でした)'라고 번역되는데요. kamisama를 어떻게 번역해줄 것이냐가 여기서 문제가 되네요.

'하느님 같다' '신 같다'라는 말 자체에 이미 완전한 인격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이므로 '마치 하느님 같은 아이였어요'라고 '착한'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번역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네요...^^;; 아니면 '마치 천사 같은 애였어요'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로쟈 2010-04-09 00: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위키에는 이렇게 설명해놓았네요.
Kami-sama (神様) is the Japanese word for "deity". The word is used to indicate any sort of god, beings of a higher place or belonging to a different sphere of existence, or the Christian-Judeo God.
문화적 차이 같은데, 저는 '하나님같이 착한 아이' 같은 비유는 한국어 어법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pdf2234 2010-04-09 01:13   좋아요 0 | URL
하느님 같은 사람, 이라는 말은 어색하게 들리지 않고 천사 같은 사람, 천사 같은 아이, 라는 말도 그닥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하느님'과 '착하다'는 일종의 연어로서 사용하기 영 어색한 것 같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처음 일본어 성경을 봤을 때 꽤 충격적이었는데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대목이 '태초에 '신(神)-kamisama도 아니었습니다-'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이 '팔백만'이나 된다고 하니 절대자를 그 팔백만 신과 동등한 '글자'로 나타내는 듯해서 매우 재밌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했답니다.^^

로쟈 2010-04-09 09:07   좋아요 0 | URL
영어에서도 마찬가지 같아요. 'he was like an angel' 정도로밖에는 옮길 수 없을 듯하니까요

조선인 2010-04-09 08:37   좋아요 0 | URL
번역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일본엔 착한 여우신도 있고, 나쁜 여우신도 있잖아요. 카미사마는 그중에서도 착한 쪽... 우리나라로치면...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산신령 느낌이랄까?

로쟈 2010-04-09 09:08   좋아요 0 | URL
'착한 산신령 같은 애였어요'라고 하면 말이 되네요.^^

비로그인 2010-04-09 14:43   좋아요 0 | URL
원문은 이렇네요.
「あのひとのお父さんが悪いのですよ」
 何気なさそうに、そう言った。
「私たちの知っている葉ちゃんは、とても素直で、よく気がきいて、あれでお酒さえ飲まなければ、いいえ、飲んでも、……神様みたいないい子でした」

본문을 안 읽어봐서 맥락에 따라 인물의 성격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이 부분만 보면 성격묘사는 제이앤씨판이 가장 무난해 보여요. 하느님이든 천사든 굉장히 착해 빠진 인물과 호응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리고 역시 본문에 기독교적 편향이 나타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부처님같이 좋은/부처님 같은 애/이였어요"라고 하면 좀더 와닿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작가의 종교 소속과 무관하게 일본인이 쓰는 '신'이란 관념은 현대 한국인만큼 곧바로 기독교적인 뉘앙스를 연상시키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요.

이상은 모두 개인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일어도 잘 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09 16:3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일본인이 말하는 카미사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하느님-하나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다신교의 나라인 일본이니까요.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네, 이런 대목에선 문화적 차이가 확연합니다. 생사관에서도 그렇지만...

시고 2010-04-10 05:11   좋아요 0 | URL
제 일어 경험에 따르면, 神(kami)란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신령스런 존재에 해당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서라면 원시 무속 신앙에서의 '하늘'쯤 될까요. 보통 '하늘이 지켜본다' 라거나 '하늘이 노하셨다'같은 표현에서의 경외의 대상에 해당하는...
(게다가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신적 존재에 대한 표현이 상당히 많으니까요. 굳이 '인간에게 해가 되는 쪽'이라면 '怪'에 해당하는 '모노노케'나 '아야카시'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둘이 실제 일본에서 거의 항상 '惡'의 영역이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지요. 파고들면 재밌어요. 번역하기는 난감하지만. ^^;)
원문의 뉘앙스를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번역문의 호불호가 갈리는 경향도 있으니 섣불리 단정은 못하겠습니다만, 저 문장만 놓고 봤을 때 제겐 '문예판, 민음판, 웅진판'을 서로 참조하면 좋을 듯 하네요.

저는 윗분들 댓글 보면서 오히려 '마치 하느님같은 아이'라는 표현이 원문의 뉘앙스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느꼈어요. '하느님같은 아이'라고 하면 어쩐지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라서, 너무 고귀하달까요.

저는 대략...저 원문의 의미가 이렇다고 생각합니다.(어느 정도 의역해서)
"그이 아버지가 나쁜거예요. - 아무렇지 않은 양, 그리 말했다. - 저희가 알고 있는 요우는, 무척 솔직하지, 똑부러지게 야무지지, 거기에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죠, 마신다고 해도, ...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애였답니다."

'카미사마같이 착한 애'였다는 건 실제로 그가 어떤 완벽함(도덕성 혹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일부러 깍아내릴 필요가 없는 그라는 존재 자체로 있는 것이 허용된다는 류의 (상대적)절대성을 품고 있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뉘앙스로 치자면 말이죠. (이런 얘기엔 늘 조심스러워져서;;) 일본의 '카미'란 108신이라는 말처럼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서 '절대성'보다는 '일상성'을 근저로 하고 있으니까요.(그렇기에 '카미'는 언제든 선과 악을 오갈 수 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지요.)

마담에게 있어 요우짱은 똘똘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이미지가 강한 거겠죠, 분명. 그러니 남들이 뭐라든 그에겐 늘 좋은 아이로 남는 걸테구요.

비로그인 2010-04-11 09:42   좋아요 0 | URL
끼어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번역본에 대한 평가가 달라서 굳이 말씀을 붙이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의 의역이 그렇게까지 필요한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지만 위 번역본들보다는 성격해석에서 원 단어의 뉘앙스를 살리신 것 같아서 자연스럽네요.

다만 다른 분들을 위해 단어의 원 의미와 뉘앙스에 대해서 조금 보충하고 싶습니다.

素直는 양심에 따른 말과 행동을 한다는 일종의 윤리적 덕목을 내포할 수 있는 '정직'(일어에 '정직하다'란 단어도 따로 있고요)보다는 더 직접적인 성질을 가리키는 편이죠. 아이들의 성격을 가리키는 데도 잘 쓰이듯이. '솔직'(이것 역시 '솔직하다'란 단어가 따로 있긴 합니다)은 '정직'보다는 더 나아 보이지만 저는 솔직하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당돌함이나 당당함 따위의 느낌을 素直에서 결코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일어 단어는 '고분고분하다', '부드럽다' 등과 연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온순하다', '얌전하다'가 가까워 보이지만 그것만은 아닌 듯 싶고 '순수하다'도 그에 직접 상응하는 일본어가 있는데 본문 캐릭터 묘사에 따라 가능하겠지만 단어만을 놓고 보면 조금 튀는 감이 없지 않네요(素直를 일본사람들이 자주 쓰듯이, 인간에게 순수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이들에겐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지만).

気がきいて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야무지다'도 충분히 어울리지만 '야무지다'는 뭔가 자기 앞가름을 잘하는 식의 근면함(일종의 덕목)을 떠올리게 하는데, 과연 주인공이 그런 성격일까 궁금해지기도 하거니와, 気が利く는 '눈썰미가 있다', '세심하다' 따위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특히 '세심하다'의 의미일 때는 대개 자신의 일에 대해서라기보다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에 그렇게 할 때 술어로 잘 쓰는 것 같습니다. 위 번역들 중 '영리하다'는 利口だ와 혼동한 게 아닌가 싶고 '눈치 빠르다'는 약삭빠르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보태어지고(인물이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단어만으로는 그런 뉘앙스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마담의 언어생활이 홍상수적이면 몰라도), '재치있다'는 영어도 amusing으로 번역된 걸로 봐서는 본문의 캐릭터 묘사를 통해 조금 의역한 듯하고, '경우가 바르고' '남을 생각하고'는 (본문을 읽지 않고 단어에 대해서 느끼는)제 생각과 가장 가깝지만 조금 순화된 번역어인 듯 싶습니다.

아무튼 본문을 직접 읽고 주인공의 행적을 좇아봐야겠습니다. 아울러 마담의 너그러운 연민에 대해서도 공감을 해야겠고요. 그럼 인간을 더 사랑할 마음이 생길라나요? 로쟈님은 어떻든가요? ^^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시고 2010-04-13 13:12   좋아요 0 | URL
제레카폴님의 뉘앙스에 대한 설명에 동의합니다.
저도 저 문장에서 그 두가지 용어가 맘에 걸렸거든요. 참, 저는 '하느님같이'라는 표현이 일본 내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려고 하다보니 의역이 과해졌습니다.
(그나저나 다시 읽어보니 기존 번역본 전부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여 한 두가지로 꼽는 게 잘못된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네요.^^;)

단지 저는 '솔직하다'는 표현이 한국에서 당돌한 이미지로 굳혀진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선택했는데...이 부분은 개인에 따라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지는군요.

'気がきいて'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확실히 일본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에 좀 더 가까운 세심함과 꼼꼼함을 일컫는 말이지요. 저는 마담이 요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아줌마들이 아이들의 꼼꼼함을 칭찬할 때 쓰는 말로 '야무지다'를 골라봤습니다. 하지만 사실...불충분한 표현이죠. ^^; 제레카폴님 의견대로 '세심하다'가 사전적 의미로 걸맞으니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겠네요.

비로그인 2010-04-13 15:07   좋아요 0 | URL
리린님 댓글 위에 있는 제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어디까지나 본문을 안 읽고 주관적으로 느낀 판단이니까요, 아마 '솔직하다'를 비롯해 기존 번역본들의 술어가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하다에 당돌함 따위를 연관시키는(항상은 아니지만) 건 개인적인 경험에서 오는 편견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서재 주인께서 번역과 관련해서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말을 꺼내볼 수 있는 판을 가끔 열어주시는 바람에 제가 좀 오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양해하시리라 믿습니다. ^^

픽션들 2010-04-10 07:54   좋아요 0 | URL
리린님의 번역 제일 마음에 듭니다^^
 
인디고의 유쾌한 문화혁명

강의가 있어서 저녁을 일찍 먹었더니 끝나고 나서 허기가 졌다. 자정이 다 돼 귀가해 라면을 끓여먹고 또 내일 강의 준비를 하기 전에(아직 책도 다 안 읽었다) 잠시 숨을 돌린다. 어제, 아니 그제 저녁 다지원 강의가 끝나고 인디고 유스 북페어 프로젝트팀이 만든 <가치를 다시 묻다>(궁리, 2010)를 뜻밖의 선물로 받았는데, 다시금 무릎에 놓는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는 그 부제다.

 

그제 버스 안에서 서서 오면서도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영국 리즈 자택에서의 대담을 읽고 부듯해한 기억이 떠오른다(강의와도 연관이 있어서 하워드 진보다 바우만을 먼저 읽었다). 바우만 교수로선 한국인과의 만남이 아마도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 이후에 처음이 아닐까.    



한국의 청소년들이 세계적인 석학을 직접 찾아가서 만나고 질문을 던지고 성실한 답변을 받아오는 일련의 과정이 아름답고도 대견하게 그려져 있다. 인디고의 유스 북페어는 격년으로 열린다고 하는데, 지난 2008년에 펴낸 책은 <꿈을 살다>(궁리, 2008)이다. 인디고에 관한 기사를 두어 차례 옮겨놓은 적은 있지만 직접 '인디고 아이들'이 펴낸 책을 보니 기대 이상이다. 나머지 대담들을 마저 읽게 되면 소감을 적기로 하고 일단은 간단한 소개를 옮겨본다.  

이 책은 전세계 6대륙에 하나의 가치쌍을 연결하여 살펴보고 있다. 북아메리카-정의와 희망, 아시아-평등과 다양성, 유럽-자유와 자기실현, 아프리카-공동체와 민주주의, 오세아니아-생명과 자연, 남아메리카-사랑과 아름다움이다. 그 대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 그 대륙과 연결한 가치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하며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학자, 그리고 이러한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 또는 단체들 특히 청소년, 청년팀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했다. 

그 '실천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노엄 촘스키나 마서 누스바움, 그리고 올해 초에 타계한 하워드 진이 포함돼 있다. 몇 번 써먹은 사진을 한번 더 우려먹는다. 정말로 보기 좋지 아니한가. 그들이 꿈꾸는 '가치혁명'이 꼭 실현되기를 기원한다. 아니 이런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혁명이다...  

10. 04. 07.  

P.S. '인디고 아이들'이 펴낸 책을 몇 권 더 꼽아본다. 그들의 '행복한 책읽기'와 '꿈꾸기'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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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umanities Magazine for Young People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01 09:12 
    어제 중앙게르마니아 강연이 끝나고 뜻밖에도 인디고 팀원들에게 이번에 나온 국제판 <인디고>(2010년 봄호)를 선물로 받았다. 안 그래도 어제 오전에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이다. 지난번에 <가치를 다시 묻다>(궁리, 2010)도 나를 놀라게 한 책이었는데, 깔끔한 장정의 국제판은 한번 더 놀라게 한다. 다음 세대 인문학에 대한 걱정은 내 몫이 아닌 듯하다. 하긴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읽는 중학
 
 
2010-04-07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7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07 22:56   좋아요 0 | URL
저런 책을 읽는 청소년들의 부모나 교사가 모두 이해를 해줄까요...시험공부는 안 하고 쓸 데 없는 책 읽는다고 핀잔은 안 듣는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10-04-07 22:58   좋아요 0 | URL
부모나 교사도 여러 수준이 있으니까요...
 

이번 학기 아트앤스터디의 강좌 중에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라는 게 있다(http://blog.naver.com/artnstudy?Redirect=Log&logNo=110081840384). 문화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택광 교수의 강좌인데, 교재로 예고된 책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 2010)가 이번주에 출간됐다.   

 

두 가지가 키워드인데, 먼저 '가이드'에 대한 설명. 책소개를 참조하면 이렇다.  

‘가이드guide’라는 꼬리표가 붙은 다소 생뚱맞은 이 책은 ‘이론의 종언’에 맞서 ‘이론의 복원’을 요청하는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본격적인 이론적 퍼스펙티브가 담긴 저작이다. 지난 십 년 한국사회를 배회한 각종 패배주의와 냉소주의 중에서도 ‘이론 무기력증’이란 것이 있었다. 이것은 지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지성주의’와 지성과 이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먹고사니즘’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고 곧 전면화되었다. 저자는 이런 태도에 종지부를 찍고, 마르크스주의 비평과 정신분석 이론이 결합한 이론 공부와 이론적 글쓰기가 생산성과 비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저자는 푸코와 들뢰즈 이후 등장한 지젝과 랑시에르 같은 새로운 사상가들의 이론이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에 발을 디디고 있으며 그들이 과거의 이론과 오늘의 정치 지형 속에서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분석함으로써, 2000년대 후반 이후 다시 범람하기 시작한 유럽 발 이론의 백가쟁명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독자들에게 ‘거시적 안목’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리고 저자가 철학자 김영민과의 대화하던 중에 나왔다는 '인문좌파'라는 말(그러니까 김영민과 이택광이 '인문좌파'의 견본이다).   

“한국사회에서 ‘교환가치’를 갖는 고전적 인문학, 군주를 보필하고 관료를 양성하는 ‘동양적 인문학’의 유령이 느껴지는 이 인문학과 구분해서 나는 인문좌파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문좌파는 단순하게 ‘정치적 좌파’라고 규정할 수 없다. 기존의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역할이 인문좌파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개념은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개념을 창조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필연성에 붙잡혀 있는 우발성을 풀어놓는다는 말이다. 재현체계를 벗어나는 힘을 드러내는 것이 인문좌파의 일이다. 사유가 실천이라는 명제는 여기에서 정당성을 얻는다. 다르게 사유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규범을 거스르는 탈영토화를 의미한다. 이 메커니즘을 지배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백의 동요이다.”(11~12쪽)

몇 개의 규정이 중첩돼 있는데, 기존의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사유의 주체가 제3의 포지션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 하더라도 '인문좌파'란 말은 그 자체로 명명효과를 갖는다. 지시대상이 없어도 의미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유니콘처럼. 아무려나 여러 곳에서 '인문학 가이드' 노릇을 하는 처지에서 재미있게 읽어볼 만한 책이 출간돼 반갑다(개인적으론 한 술자리에서 저자와 함께한 적이 있는데, '이론적 만담'의 최고 수준을 경험할 수 있었다. 저자는 슬라보예 지젝과 직접 통화해보겠다고 하여 일행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인문좌파'란 말이 영어에도 있는지(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그 동네의 용어로 하자면 아마도 '라캉주의 좌파' 정도가 저자의 이론적 입장이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와 라캉(프로이트)이 그의 문화비평의 주된 이론적 바탕이니까.  

참고로, '라캉주의 좌파'와 그냥 '라캉주의'가 어떻게 다른지는 맹정현의 <리비돌로지>(문학과지성사, 2010) 같은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라캉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강조한 지젝(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을 전혀 경유하지 않은 라캉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현대철학자는 들뢰즈/가타리와 푸코 정도이고, 알튀세르와 지젝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란 말도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10.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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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의 인문학 위기와 강남좌파 한비야
    from 당신 덕분에 꽃이 핍니다♡ 2010-04-06 17:15 
    삶의 의미나 존재의 이유,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은 ‘넘사벽’이 되어 손가락질 당하고 있습니다. 넌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있냐면서 비아냥거림을 받아야 하는 시대죠. 경영학과를 복수전공하면서 조금이라도 취업에 유리하고자 아등바등해야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과 집값과 펀드, 자기 자녀가 무슨 대학 들어갔는지 열나게 이야기한 뒤 TV와 연예인 연애이야기밖에 할 게 없는 중년층들까지, 사회는 속되게 변해갔습니다.
  2. 인문좌파와 비가시적인 정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2 23:23 
    아침신문을 밤중에야 읽었다. 최근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 2010)를 펴냈을 뿐만 아니라 한겨레21('노 땡큐!'란)과 교수신문의 연재(격주로 '세계사상지도'를 다룬다)를 새로 시작하는 등 문화비평가로서 '시즌2' 활동에 나선 이택광 교수의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사실 낮에 한겨레21에서 드라마 <추노>에 대한 칼럼도 읽었기에 이런 정도의 활동 빈도라면 '기록'해두어야
 
 
구보 2010-04-06 12:47   좋아요 0 | URL
<이론적 만담의 최고 수준>에 호기심이 생깁니다.
넘치기 마련인 출판사 카피가 아니라서 더 궁금하네요.

로쟈 2010-04-07 01:09   좋아요 0 | URL
술자리 만담과 책은 또 다를 수 있는데, 여하튼 재미는 있을 거 같아요...

시몬느 2010-04-06 20:0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어제 다지원에서 인사드린 인디고 서원의 박용준입니다.
어제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왔습니다.
어제 하루종일 이사를 하고, 강의를 갔더니, 강의 중간에 졸음이 와서...죄송했습니다. ^^

강의 내용뿐 아니라 '이론 투쟁'에 관한 선생님의 언급이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의미를 둘러싼 투쟁.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선생님의 건승을 빕니다!
다음에 또 인연이 닿아 뵐 수 있기를... :)

로쟈 2010-04-07 01: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책은 뜻밖의 좋은 선물이었어요.^^

비로그인 2010-04-06 20:34   좋아요 0 | URL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역할이 인문좌파의 몫이기 때문이다." ... 그냥 '철학자'나 '지식인'의 기본덕목 아닐까요? 좀더 뚜렷한 상이나 규정이 있어야 저처럼 개념이나 실천이 짬뽕인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여간 저는 "The Left"부터 좀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10-04-07 01:10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지시대상이 모호하다고 적었는데, 사실 저자도 그냥 수사라고 했어요...

phrensy 2010-04-07 03:19   좋아요 0 | URL
좋은 소개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10-04-14 23:36   좋아요 0 | URL
^^

bplat 2010-04-14 17:52   좋아요 0 | URL
이거 추천하시는 거 맞죠? 로쟈님이 추천하시는 책이라면 믿고 질러봐야겠네요ㅎㅎ 그렇지 않아도 이제 한물간 취급을 받는 루카치를 다시 읽어보자는 문단 제목에 확 꽂혔었는데.. 이 책이 절 제대로 입문시켜 주면 좋겠네요. 물론 그전에 베이스가 어느 정도 있어야겠지만..

로쟈 2010-04-14 23:36   좋아요 0 | URL
가이드삼아 읽으셔면 될 거 같아요.^^
 
나루케 마코토-김훈-기타노 다케시

알라딘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마쓰오카 세이고의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추수밭, 2010)를 읽었다. 지난 금요일에 서점에 잠깐 들렀다가 무슨 책인가 싶어 펼쳐봤는데, 우연히도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다. 자신의 '링크를 늘리는 편집적 독서법'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니시다 기타로의 책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책과 오오시마 유키코의 만화책과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책과 롤랑 바르트의 철학책이 있다고 합시다. 제가 이 책들을 읽고 나면 거기에는 다양한 '메모' '강조' '내용 분류' '인용 대상'이 남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별도의 노트에 각 항목별로 옮겨놓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작업은 머릿속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해보면 알게 됩니다만, 니시다 기타로와 타르코프스키와 오오시마 유키코와 에도가와 란포와 롤랑 바르트의 일부 구절이나 문장은 놀랄 정도로 같은 항목에 속하거나 인접해 있습니다.(156쪽) 

이전에 읽은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 권을 동시에 읽어라>(뜨인돌, 2009)와는 종류가 좀 다른 책이란 생각이 들어서 수중에 넣기로 했다. 가령 나루케와 달리 마쓰오카는 문학을 존중한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꼭 읽었으면 하는 책'으로 추천하는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이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에피스드도 털어놓고 있다. 나도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읽은 소설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여하튼 타르코프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그날 버스 안에서 반쯤 읽고, 오늘 저녁을 먹고 나머지 반을 읽었다. '지의 거인'(나루케 마코토)이나 '독서의 신'이란 평판을 얻고 있는 저자의 독서법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유익했다. '책쟁이'나 '독서가'라면 다른 명망가의 서재를 한번쯤 엿보고 싶은 호기심도 갖고 있는 것이니까. 읽다 보니 '다독술'보다는 그의 '편집공학', 그러니까 저작술이 궁금해서 <만들어진 일본>(프로네시스, 2008)이나 <지의 편집공학>(지식의숲, 2006)도 읽어보려 한다. 다독술 자체는 크게 새로울 게 없지만, 요즘처럼 원고에 치일 때 도움을 받을 만한 뭔까 뾰족한 (편집공학적) 글쓰기 수단이 있을까 싶어서다. 그런 게 있다면 좀 알아두어야겠다(밀린 일들 때문에 휴일마다 '우울증'에 시달리느니!).  

이미 리뷰들이 많이 올라온 책이라 내용에 대해선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두 가지 생각할 거리와 오류에 대한 지적만 챙겨놓도록 한다. 생각할 거리란 건 독서문화와 관련된 것인데, 먼저 북클럽 얘기. 마쓰오카에 따르면 서양과 달리 일본에서도 별로 발달하지 못한 게 북클럽이다.  

"북클럽은 일종의 독자 조직입니다. 물론 책을 읽고 책을 사랑하기 위한 조직이나 모임입니다만, 여기에서 책을 공동 구입하거나 배포하는 행위가 일어납니다. 독일에서는 연간 2,000만 권 정도가 북클럽을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도 이런 북클럽 회원이 약 1,000만 명 이상 활동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258쪽)

일본에서는 왜 이런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는가란 원인을 분석하면서 마쓰오카는 그 중 한 가지로 교육 문제를 든다. "서양에서는 어린이 교육의 중심을 '다독'과 '토의'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260쪽)라는 게 그의 주장이고 나도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경쟁력 교육' 같은 헛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독서 교육'이나 제대로 하면 좋겠다.  

그리고 역자와의 대담에 나오는 것인데, 일본의 대형서점 마루젠 본점에 '마쓰마루' 서점을 오픈했다는 얘기. 마쓰오카의 '마쓰'와 마루젠의 '마루'를 결합한 이름으로 책의 분류나 배열을 모두 마쓰오카가 기획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일반서점의 도서 분류법 대신 새로운 방법으로 책을 배열하고 있습니다. 잡지나 단행본, 문고판, 고서, 수입서가 하나의 책장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책이 똑바로 꽂혀 있지 않고 일부러 옆으로 눕혀 놓은 책도 있고, 겹쳐서 꽂아 뒤의 책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같은 책이 여기저기에 여러 권 꽂혀 있기도 합니다."(293쪽) 

개인 서가라면 모를까 일반서점에서 이런 독창적인 분류/배열을 시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학로의 이음책방 정도가 떠오르는데, 규모가 너무 작다는 아쉬움이 있다. 서점마다 할인율이나 인테리어로 경쟁하기보다는 이런 개성적인 분류/배열 방식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오류라고 한 건 대단한 게 아니라 표기와 정보에 관한 것이다. 73쪽에서 니체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루 자로메'는 '루 살로메'가 우리의 통용 표기이고, 156쪽 각주에서 타르코프스키 소개에 나오는 <버찌 통조림>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작품이다. 무얼 잘못 읽어야 '버찌 통조림'이 되는 것인지? '벤야민'(73쪽)과 '베냐민'(214쪽) 표기에 혼동이 있고, 211쪽 각주에서 푸코의 책 <광기와 비이성>은 무얼 말하는지 모르겠다. <광기의 역사>라면 일본에서도 그렇게 번역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215쪽, 도나 해러웨이의 <원숭이와 여자와 사이보그>는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동문선, 2002)로 번역돼 있다.  

끝으로, 일본 출판계에 대한 부러움을 갖게 한 책 두 권. 사실 일본책을 종종 들여다보면서 얻는 수확은 서지정보이다. 때론 본문보다도 그러한 '디테일'에 더 이끌리기도 한다. 마쓰오카의 강점은 과학책도 열심히 많이 읽었다는 것인데(하지만 대학은 불문과에 진학하는 '바보짓'을 했다), 그건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다. 어떤 식으로 읽었나?  

"처음에는 이른바 명저라고 불리는 책을 구하거나 도서관에서 찾아 읽어야 할 목록을 만듭니다. 양자역학은 폴 디락이나 도모나가 신이치로입니다. 전자기학은 역시 파인만이고, 상대성이론이라면 아인슈타인이지요."(71쪽) 

 

이런 책들이 처음엔 '이빨'도 들어가지 않지만 다른 참고서나 비슷한 유형의 책으로 보충해나간다는 것.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1965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의 물리학자라 한다. 국내에도 <물리학이란 무엇인가>(사이언스북스, 2002),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범양사, 1994), <양자역학적 세계상>(전파과학사, 1974) 등이 소개돼 있다. 파인만이나 아인슈타인은 물론 국내에도 여러 책들이 나와 있다.    

  

문제는 폴 디락. 교양과학서에서 자주 이름을 접하지만 국내에 디락의 책이나 강의는 소개돼 있지 않다. 찾아보니 일본에서는 폴 디락의 <양자역학>이 1959년에 이와나미에서 번역돼 나왔다. 이게 현재의 '수준차'가 아닌가 싶다. 한 끝 차이일까? 사실을 말하면 두 끝 이상의 차이다. 자신의 독서일기 <센야센사쓰(千夜千冊)>(전7권과 부록으로 일단 간행됨)에 대해 소개하면서 마쓰오카가 다독술의 핵심인 '키북'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그리고 제3권의 10장 '이미지의 극장'에서는 발트루 사이티스의 <환상의 중세>, 루돌프 비트코베어의 <이미지와 상징>, 프란시스 예이츠의 <세계극장>, 그리고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파사주)와 스기우라 고헤이의 <형태의 탄생>이지요. 이 책들에서는 몇 백 권의 책이 연쇄적이고 중층적으로 연결됩니다."(214쪽)

  

거명된 책 중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형태의 탄생>은 우리에게도 소개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권은 먼 나라의 책들이다(비트코베어의 다른 책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원리>(대우출판사, 1997)는 검색이 된다).   

특히 '리투아니아의 상징주의 시인이자 번역가'로 소개되는 '발트루 사이티스Baltru Saitis'란 이름이 눈에 밟히는데, 일단 이름부터가 잘못 표기됐다. '요르기스 발트루사이티스Jorgis Baltrusaitis'다('발트루샤이티스'라고 읽는 게 발음에는 더 가깝다). 이름도 오기할 정도로 생소하니 소개됐을 리는 만무하다. 영어권에도 형태에 관한 에세이 한 권이 소개돼 있는 정도이고, 불어로나 책들이 좀 나와 있다. 아래가 불어본 <환상의 중세>. 이게 일어본으로는 있다는 얘기다.  

  

이런 것도 '격차'라면 앞으로 더 좁혀지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일본에서도 잘 안되고 있다는 북클럽을 좀 활성화해볼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고민들을 해보면 좋겠다... 

10. 04. 04. 

P.S. 독서가로서 마쓰오카 세이고가 떠올려주는 국내인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과 장석주 문학평론가다. 두 사람의 편집공학과 다독술을 결합하면 얼추 마쓰오카가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한기호 소장이 마쓰오카에 대해 소개한 칼럼이 있기에 참고삼아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8. 04)[한기호의 출판전망대] 매너리즘 사고를 뒤집고 싶다면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대학 4학년 때 아버지가 상당한 빚을 남겨놓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매달 대졸 초임 월급의 2.5배 정도를 갚아도 얼추 5년이 걸릴 정도의 거액이었다. 어머니는 울며불며 네가 빚을 갚아달라고 매달렸다. 순간 이것으로 인생 끝났구나 하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여러 방안을 모색하다 그는 광고대리점에 취직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대리점 사장은 급여는 높게 책정할 수 없지만 커미션(마진)은 나름대로 생각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광고 하나씩 따내서는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생각해낸 것이 두 개씩 한 쌍의 광고를 따내는 것이었다. 맥스 팬터와 전일본항공, 산토리위스키와 토라야, 대의류옥과 BIC볼펜, 학생 원호회와 게키단 사계 등의 조합이었다. 화장품(맥스 팬터)과 비행기 타기(전일본항공)에서 ‘나들이’라는 연결점을 찾아냈듯이 두 회사나 두 제품 사이의 ‘어떠한 관계’, 즉 한 쌍으로 묶을 만한 무언가를 찾아낸 것이다.

문제는 한 쌍을 어떻게 관계 설정하는가였다. 그래서 밤마다 타깃을 몇 개인가 선정해 놓고 한 쌍을 선택해서 기획안을 짰다. 그러자면 전체 스케치도 필요했고 때로는 가상 캐치프레이즈나 카피도 붙여야 했다. 매일 철야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밤을 새워가며 아침까지 준비했다. 준비가 끝나면 두 회사에 기획서와 전체 스케치를 갖고 찾아갔다. 절대 사적인 인맥은 사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주위의 소개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일은 상상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그렇게 즐기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5년보다 2년이나 빨리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돈보다 더 소중한, 인생 전체를 좌우할 무척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나아가 어떤 기업이나 상품(제품)은 모두 ‘새로운 관계의 상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실태와 책과 정보는 무언가와 연결되고 싶어서 좀이 쑤신 상태이다 보니 정보는 절대로 혼자서 존재할 수 없었다.

오늘날 하나의 업종은 종적 관계로, 시장은 철저히 세분화되어 있어 날개를 펼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날개를 달아도 어디로 날아가면 좋을지를 알기 어렵다. 기업과 상품뿐 아니라 학문과 기술도 무언가와 연결되고 싶어 하지만 좀처럼 연결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광고를 따낸 경험을 통해 이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어떤 질곡이 있음을 느꼈고 그것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어떤 것이든 ‘의미’를 갖고 있겠지만, 현실 사회와 경제에는 이러한 의미가 자유롭게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 어떤 영역의 어떠한 사물과 사정에도 적합한 ‘의미 확장 방법’을 생각해서 그 방법을 조금씩 형태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에디팅 프로세스(Editing Process)’라고 말할 만한 의미의 변용과정이 언제나 다이내믹하게, 또한 분류와 영역을 넘어서서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편집공학’(Editorial Engineering)이다. 이 사람은 <지知의 편집공학>(넥서스), <지식의 편집>(이학사) 등의 저서로 국내에서도 지명도를 얻고 있는 마쓰오카 세이고다. 녹슨 가슴과 매너리즘에 빠진 사고 습관을 확 뜯어고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여름에 한번 그의 책을 펼쳐보기를 강력하게 권한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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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4-05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 떠오르는 페이퍼네요. 경영할만한 지식도 없는데 무슨 소용에 닿을까 싶어 회의하면서도 각 장을 덮을 때마다 이 책의 가장 훌륭한 리뷰는 실천이라고 다짐했었는데 방법적인 면에서 '편집공학'과 비슷한 것 같아요. 로쟈님의 마지막 문장 특히 '강력하게'에 기대어 반드시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10-04-05 10: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산도 편집공학의 원조쯤 되겠네요. '강력하게'는 제 추천은 아니지만, 지식생산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해요...

2010-04-05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6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관내 시립도서관에서 대출한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레, 2008, 초판1쇄) 반납일이어서 부랴부랴 번역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적는다. 내가 읽은 건 <마음>(문예출판사, 2006, 5쇄)이고, 이레판과 웅진판 <마음>(웅진지식하우스, 2010, 재판9쇄)을 참고했다. 범우사판이 가장 먼저 나온 듯하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판본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히는 건 문예판-이레판-웅진판 순이다(적어도 알라딘에서는 그렇다). 

  

일본소설의 번역을 대조해서 읽은 건 기억에 처음이지 싶은데, 작가가 나쓰메 소세키 정도라면 그런 수고를 무릅쓸 만하다. 그래서 더 거창하게 '나쓰메 소세키를 읽기 위하여'란 페이퍼도 구상을 했었지만 3월엔 여유를 얻지 못했다. 몇몇 작품을 더 읽게 되면 나대로 정리를 해볼 계획이다.   

간단히 적으려고 하는 건 현재 가장 많이 읽히는 문예출판사판의 몇 가지 오역이다. 작품의 핵심이 되는 '선생님과 유서' 장은 번역본들마다 문체가 달라서 어느 것이 더 나은 번역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당장 문예판과 이레판에서 "나는 올 여름 자네로부터 두세 통의 편지를 받았네."라고 옮긴 첫 문장이 웅진판에서는 "나는 이번 여름에 당신에게서 두세 번 편지를 받았습니다."로 돼 있다. 그런 경어법이 원문의 뉘앙스에  더 가까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느낌은 상당히 달라진다. 거기에 '선생님'이 하숙집 여주인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나는 주인 아주머니를 늘 사모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여기서도 사모님이라 칭하겠네."(문예판)   
"나는 주인집의 미망인을 항상 사모님이라고 불렀으니, 이제부터는 사모님이라고 부르겠네."(이레판) 
"나는 미망인을 늘 아주머니라고 불렀으니까 이제부터는 아주머니라고 부르겠습니다."(웅진판)

한번 부르고 마는 거라면 별로 상관이 없지만, 이 작품에선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호칭이기 때문에, '사모님'과 '아주머니'는 작품의 색깔마저도 달라지게 한다.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아주머니'는 경어체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아주머니'는 높임말의 쓰임도 갖지만 요즘은 예삿말로 보통 사용되기 때문이다). 번역본은 그런 차이를 고려하여 선택하면 될 듯싶다. 다만, 문예판에서 몇 대목은 교정이 필요하다. 먼저 작품의 서두 부분.  

"나는 그분을 언제나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니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 칭하고 본명은 밝히지 않겠다.(...) 나는 그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곧바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된다. 붓을 쥐고 글을 쓸 때에도 마음은 한결같다. 나에게조차 낯선 이름으로는 도무지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문예, 8쪽) 

"나는 그분을 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 쓰고 본명은 밝히지 않겠다.(...) 나는 그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금방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펜을 들어도 그 마음은 마찬갖지다. 어색한 머리글자 따위는 도무지 사용하고 싶지 않다."(이레, 8쪽) 

"나는 그분을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쓰고 본명은 밝히지 않겠다.(...) 나는 그분의 기억을 되새길 때마다 금세 '선생님' 하고 부르고 싶어진다. 펜을 들어도 마찬가지 기분이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니셜 따위는 쓸 생각이 전혀 없다."(웅진, 9쪽)   

'나'는 그를 항상 '선생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에 관해 쓰면서도 이름 대신에 '선생님'이라고 부르겠다는 것. 이름(본명)을 밝히지 않는 방법으론 이니셜을 쓰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다는 것. 뭔가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이유에서다. '선생님과 유서' 장에서 선생님은 자신의 친구를 K라는 이니셜로 부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나'와 '선생님'과의 차이도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니셜을 쓰고 싶진 않다"는 내용으로 옮겨져야 하는데, 문예판은 "나에게조차 낯선 이름으로는 부르고 싶지 않다"라고 다소 모호하게 옮겼다(이름과 이니셜의 차이가 지워졌다).  

그리고 사소한 것으로 "친구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어느 자본가의 아들로 경제적으로 별 부족함이 없었지만 같은 학교에 나이도 나이니만큼 생활하는 수준은 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문예, 9쪽)라고 한 대목. 다른 번역본을 보면 여기서 '중국(中國)'은 '주고쿠 지방'을 가리킨다. 중부지역의 5개 현을 일컫는 말이라고(당시 중국은 '지나'라고 썼겠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어느 자본가"는 "주고쿠 지방의 한 자산가의 아들"(이레)이나 "주고쿠 지방의 부잣집 아들"(웅진)이라고 옮기는 게 맞겠다.   

부주의에서 빚어진 오역으론 이런 대목도 있다. '내'가 선생님 댁에서 술을 마시게 된 상황에서 선생님과 사모님이 나누는 대화 장면이다.  

"오늘 웬일이세요. 저한테 잔을 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요."
"내가 당신 싫어하잖아. 그래도 가끔씩은 마셔도 되지. 기분이 좋아진다구."(문예, 30쪽)

"웬일이세요. 좀처럼 저한테 술을 권하지 않으시는 분이." 
"당신이 싫어하잖아. 그래도 가끔씩은 마셔도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다니까."(이레, 29쪽) 

"별일이 다 있네요. 나한테 마시라고 한 적은 웬만해서 없었는데."
"당신이 싫어하니까 그랬지. 하지만 가끔씩은 마셔 보라구.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웅진, 27쪽)
 

문예판에선 원문에도 없을 법한 '내가'가 왜 삽입됐는지 모르겠다.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은 '나의 아버지'가 천황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하며 매일 아침 신문 기사를 챙겨 읽다가 하는 말이다.  

"이것 좀 봐라. 오늘도 임금님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왔다."
아버지는 천황을 늘 임금님이라고 부르셨다. "안됐지만 말이야, 임금님의 병환도 선친이 앓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야."(문예, 129쪽) 

"이것 봐라, 오늘도 천자님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구나."
아버지는 천황을 항상 천자님이라고 불렀다.  
"황송한 얘기지만 천자님의 병환도 내 병하고 비슷한 모양이야."(이레, 124쪽) 

"이거 봐라, 오늘도 천자님 일이 자세히 나와 있다."
"아버지는 폐하를 항상 천자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송구스럽게도 천자님 병도 아버지 병과 비슷한 거 같구나."(웅진, 105쪽)  

'임금님'이란 번역도 아무래도 좀 과한 듯싶고 '천자님'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문제는 당시 메이지 천황이 앓고 있던 병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당뇨병'이었다는 것(메이지 천황은 당뇨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황송한 일이긴 하지만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미천한 자신도 아직 살아있으니까 천황도 괜찮을 거라는 얘기를 '아버지'는 덧붙인다. 그런 문맥에서 보면 "임금님의 병환도 선친이 앓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야"라고 옮긴 것은 부정확하다.  

그리고 '장모님'의 병환에 관한 대목도 "그러는 동안에 장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셨네.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도전히 완치할 수 없는 병이라 했네. 나는 정성스럽게 간호해드렸네."(문예, 333쪽)라고 돼 있는데, 다른 번역본에서 "그러던 중 장모님이 병에 걸렸네."(이레, 307쪽), "그러던 중에 아내의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되었습니다.(웅진, 265쪽)라고 옮겨졌다. 결과적으론 병으로 돌아가신 게 맞지만, 논리상 진찰도 받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 건 너무 앞지른 것이고, 다른 번역본을 보더라도 "병으로 누우셨네."정도가 맞겠다.   

참고로, <마음>을 읽는 데 참고할 만한 자료로는 윤상인 교수의 <문학과 근대와 일본>(문학과지성사, 2009)에 실린 '국민 속의 <마음> -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와 정전'과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2004)에 수록된 '소세키의 다양성 - <마음>을 둘러싸고' 등이 있다. 국내 전공자들의 논문집도 나와 있지만, 학회용 성격의 책이다.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데는 고모리 요이치의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이매진, 2006)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세한 작품론은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소세키론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단행본을 쓴 건 아니지만 가라타니는 여러 편의 소세키론을 쓴 바 있다)...  

10.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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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겨보아야할 죽음의 의미
    from 창조를 위한 검은 잉크의 망치 2010-04-27 12:23 
      주인공 나는 방학 중 가마쿠라 해변에서 처음 선생님을 만난다. 도쿄에 돌아와서도 정기적으로 선생님을 방문하며 선생님과 꽤 친해졌다. 그러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간 사이 선생님은 나에게 두툼한 편지를 남겨놓고 자살을 한다. 선생님의 유서에는 자서전이라 할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쓰여 있다. 외아들인 선생님은 스무 살 무렵 장티푸스로 거의 동시에 부모님을 잃는다. 부모님이 남긴 유산을 맡아 관리하던 작
 
 
반딧불이 2010-04-04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유리와 박유하를 놓고 어떤 것을 읽을 것이냐 망설이다가 박유하 번역을 선택했어요. 이렇게 비교해주시니 도움이 많이 되네요. <언어와 비극>에 실린 글은 전혀 몰랐었는데 참고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로쟈님. 일본인에게 아버지와 천황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요?

로쟈 2010-04-04 11:22   좋아요 0 | URL
그렇게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어렵구요,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엔 알다시피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진 않았습니다. 그의 문학에 나타난 가족관계에 대해선 국내에도 연구서가 나와 있습니다. 그의 천황론은 의견이 분분하던데, 윤상인 교수의 책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론 <마음>에서 선생이 말한 '메이지 정신'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가라타니 고진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는 메이지 10년대와 20년대를 구분하고 메이지 10년대의 시대저정신을 소세키가 말하는 '메이지 정신'이라고 봅니다...

2010-04-27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7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