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뜨인돌, 2009)를 보면, 끄트머리에 저자가 책에 관한 자신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책은 버리지 않는다, 빌리지 않는다, 빌려주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자칭 '애서가'라고 해도 버린 책들이 몇 박스쯤 되고, 빌려주었다가 분실하거나 돌려받지 못한 책들도 꽤 되는 형편인지라 그의 '원칙주의'가 일면 부럽다. 책을 내버리지 않아도 좋을 만한 소장 공간을 확보하고 있고, 책을 빌리지 않아도 좋을 만한 재력도 갖고 있다는 얘기이니까. 그는 집에 1만 5천 권 가량을 소장하고 있고, 별장에도 그 두 배를 소장하고 있다니까 대략 장서수가 4만 5천 권은 되는 모양이다. 일본에서 장서가의 기준이 어찌 되는지 모르지만, 그 정도면 도서관 규모이고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에 견줄 만하다.
그런 나루케가 수만 권의 장서 가운데 손꼽는 책이라면 분야에 관계없이 눈길이 갈 만한데, 역사서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 이야기>, 그리고 이와나미 서점에서 나온 <일본역사> 시리즈 등이고 경제서로는 노나카 이쿠지로의 <실패의 본질>, 마이클 포터의 <국가 경쟁 우위>가 필독서라고(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도 이들 경영서와 나란히 언급되고 있어서 이채롭다). 그렇듯 특별히 필독서로 거명되고 있어서 노나카 이쿠지로와 마이클 포터의 책을 검색해봤다. 내가 경영학에 과문해서 그렇지 세계적인 경영학자로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는 인물들이다.
노나카는 '지식경영', '지식창조경영'을 주창한 경영학자로 이름이 높은 모양인데, 찾아보니 개인적으론 레스터 서로 등과 공저한 <지식사회의 미래>(매일경제신문사, 2001)에서 한번 대면해봤을 가능성이 있다. 예전에 '지식'이란 주제로 자료조사를 하면서 읽었던 책이다. <지식경영의 시대>(시그마프레스, 2003), <노나카의 지식경영>(21세기북스, 2009) 등 다수의 책이 국내엔 소개돼 있다. 나중에 다시 그런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손에 들어봄 직하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경영석학'이라는 마이클 포터의 책도 나루케가 언급한 <국가 경쟁 우위>(21세기북스, 2009)를 비롯하여 '전략 3부작'이 모두 소개돼 있다. <국가 경쟁 우위>는 1135쪽 분량에 액면가가 6만원인 책이다. 이런 별세계도 있었구나란 생각이 들지만, 세일즈포인트로 봐서는 알라디너들과 거의 무관한 책인 듯싶다.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마이클 포터는 ‘현대 글로벌 경제에서 지속적인 번영의 원천은 무엇인가’ ‘왜 어떤 국가의 특정 산업은 성공하고 다른 국가의 특정 산업은 실패하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미국, 독일, 일본, 한국(!) 등 주요 10개국을 대상으로 4년여의 기간 동안 해당 10개국의 책임 연구자 40명 이상과 함께 100개가 넘는 산업을 면밀히 연구 조사했다. 이 결과를 토대로, 특정 산업에서 경쟁우위를 촉진하는 국가의 특징을 갈무리하고, 그 연구결과가 기업과 정부에 주는 시사점을 담았다.
나는 별로 읽을 일이 없지만, 한국의 관료들은 이런 정도의 책은 읽어주는지 문득 궁금하다(국민의 권익보다 미국 쇠고기 회사의 이익을 먼저 고려하는 관료들 말이다).
나루케의 책 덕분에 일본의 대표적 독서가인 다치바나가 생각이 나서 낮에 동네 도서관에 들렀다가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살도 안되는 100권>(청어람미디어, 2008)도 대출해볼까 했지만 소장도서가 아니었다. 대신에 들고 온 건 기타노 다케시의 책 두 권,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북스코프, 2009)와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씨네21북스, 2009). 기타노 다케시의 일본론을 읽고 나면 다치바나 다케시의 일본론 <멸망하는 국가>(열대림, 2006)를 읽고 비교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루케는 책을 빌려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의 책을 비롯해서 일본 저자들의 책은 대출해서 읽기에 딱 좋다(가라타니 고진이 예외적이다). 어렵지 않고 명쾌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술서 범주에 드는 것도 아니기에 오래 품고 있지 않아도 된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가서 읽은 책은 기타노의 <생각노트>인데, 내가 알고 있는 비트 다케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좋은 책이다. 특히 "노력해도 안되는 놈은 안된다"(좋게 말하면,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꿈도 있다")고 말하는 그의 교육론은 오타쿠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과 맞물려 제값을 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결과보다도 과정이 중요하다'는 사회적 통념에 불편해 한다("시민 마라톤 같은 데서 간신히 완주한 정도를 가지고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고 말하는 건 오버라고 생각한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것도 아니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동네 마라톤 수준의 기록만 나오는데 요란하게 칭찬하는 것도 꼴사납다."). 가령, 그가 오타쿠의 본질이 무엇인지 지적하는 내용은 음미해볼 만하다.
"어찌된 일인지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세상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됐다, 그래서 포기한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자신을 칭찬하고 오히려 자기만족을 함께 끝을 내다니! 넘버원이 아니라도 좋으니 온리원을 지향하라고 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상당히 묘한 논리다. 온리원이 되라는 것은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일, 즉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귀찮고 번거롭게 경쟁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즉 '온리원'이라는 생각은 '경쟁상대가 아무도 없는 세계를 찾아내면 당신도 최고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최고를 좋아한다. 하지만 경쟁이 없는 세계에서 최고란 건 있을 수 없다. 정말로 의미 있는 일에서 오직 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지는 놈이 있으니까 이기는 놈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기는 싫으니까, 자기 자식에게 지는 걸 인정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노력하는 것에 가치가 있다느니 하면서 아이들에게 온리원이 될 수 있는 세계를 찾으라고 말한다. 경쟁을 부정하면서 한편으로는 최고라는 것에 연연한다. 그러니 오타쿠가 늘어나는 것이다. 경쟁 상대가 적은 세계에 틀어박혀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사람이 오타쿠다. 제대로 된 세계의 제대로 된 경쟁은 한심하다고 하면서 부정한다. 사실은 지는 것이 싫고, 상처 입는 게 싫은 것뿐이면서."(81-82쪽)
인용한 대목에서 기타노 다케시다운 보수적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경우엔 '진짜 보수'다(손을 써서 아들의 병역을 면제시켜주는 게 아니라 일부러 해병대에 보내는 보수 말이다). 김훈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나란히 비교해봄 직하다. 기회가 되면 '김훈과 기타노 다케시'에 대해서도 써보고 싶지만, 일단 힌트만 주자면 둘다 자연사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태어나서 서로 경쟁하며 먹고 살고 짝짓기하다가 죽는 것이 자연사적 삶이고 인간의 삶이라는 것. 그런 생각이 잘 피력돼 있는 김훈의 에세이집 <풍경과 상처>(문학동네, 2009)가 이번에 재출간됐지만, 기타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스레 김훈을 떠올렸다.
"연어나 철새, 고래 등은 출산을 하기 위해 무지하게 가혹한 여행을 하는 종이다. 인간에 이르기까지 긴 진화과정 어느 쯤에 인간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을지 모른다. 언젠가 플로리다 앞바다의 해저를 끝없이 헤엄치는 새우들의 행렬을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산란기의 새우들이 엄청나게 떼을 지어 밤을 틈타 일제히 여행을 하는 것이다. 이를 안 물고기들이 새우들의 대열을 덮친다. 새우들은 동료들이 잇따라 죽어나가고, 물어뜯긴 다리가 너덜너덜해져도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갔다. 마치 죽음의 행진 같지만, 그래도 새우들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목적은 단 하나,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느라면 논리를 떠나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도 저렇게 힘든 시절이 있었지 하는 옛 생각이 들어서다."(80-81쪽)
그런 관점에서 기타노는 편하게 얻을 수 있는 안락과 행복에 대해서 근심한다(<로쟈의 인문학 서재>에서 다룬 바 있지만,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표현을 쓰자면 인간은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의 단골식당 주인 구마 씨가 요즘 아이들은 "뭘 먹고 싶니?"하고 물어도 "아무 거나요"라고 대답하는 게 고작이라고 하자, 기타노는 이런 의문을 던진다.
"'지혜열'이라는 말도 있는데, 과연 요즘 아이들을 열이 날 만큼 생각하는 일이 있기나 할까? 무엇이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손에 넣을 수 있다. 떼를 쓰면 좋아하는 반찬이 나온다. 이렇게 천국 같은 생활에서는 생각이란 걸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 천국이라고 해봐야 고작 다베호다이(무한 리필식당) 정도의 천국이다. 하지만 먹을 게 넘쳐나는 다베호다이에서는 오히려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 먹는 기쁨도 덜하다."(84-85쪽)
그와는 반대되는 그의 어린시절(우리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했겠다). "내가 어렸을 때는 부족한 것투성이였다.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무엇인가를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내 어린시절의 기쁨은 이런 식으로 거의 포기에 가까운 동경과 그렇게 동경했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 아이들도 그렇게 동경하는 게 있을까? 신형 휴대전화나 손에 넣지 못한 컴퓨터 게임? (...) 요즘 아이들도 내가 어렸을 때 느꼈던 것처럼 세상이 새하얗게 반짝이는 듯한 기쁨을 맛보는 일이 있기는 할까?"(61-62쪽)
부유한 젊은 부모들은 간혹 "내 아이는 고생을 모르고 자라게 해주겠어." "내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건 뭐든지 사줘야지."라는 생각도 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의 능력'을 보여주는 거라고 믿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진화적 본성은 단순하게도, 쉽게 얻은 것에 대해서는 큰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끔 돼 있다. 결핍과 동경이 없다면, 만족과 행복도 없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지만, 고통과 굴욕이 없다면, '나'라는 정체성도 없다. 아빠가 잘해주는 것도 없다고 아이가 불평을 터뜨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말한다. '그게 아빠의 사랑이란다.' 사실 기타노 다케시의 충고는 한걸음 더 나간다.
"'마이홈 파파'가 아니더라도 아이들 기분은 어른이라면 누구나 안다. 어른들도 누구나 옛날에는 아이였으니. 알고는 있지만, 안되는 건 안되는 거라고 아버지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것은 가르쳐주지도 않고 뭐든 잘 이해해주는 아버지가 너무 많다. 아버지가 아이에게 아양을 떨어서 어쩌자는 건가. 결국은 자기한테만 귀여울 뿐이지 않은가. 아버지는 아이가 최초로 만나는 인생의 방해꾼이어도 좋다. 아이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된다."(57쪽)
그러니 나도 좀더 분발해야겠다!..
09. 10. 18.
P.S. 독서광인 나루케 마코토도 독서에 길잡이가 되는 '책의 달인들'이 있다고 한다. 일본 최대 오프라인 서점이라는 기노쿠니야서점의 '북웹'을 주로 활용한다는 그가 평론가들 가운데는 세 사람을 지목하는데, 그 중 일본의 저명한 편집자이자 저술가라는 마쓰오카 세이고는 국내에도 소개돼 있다. <지의 편집공학>(지식의숲, 2006)과 <만들어진 나라 일본>(프로네시스, 2008)이 그의 책이다. 그리고 <자 놀아보세>(토향, 2008)라는 책에는 '한국과 일본의 제사(祭祀)감각과 샤머니즘'이라는 그의 글이 포함돼 있다. 나루케는 그를 일컬어 '지(知)의 거인'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