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강의 때문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다시 읽었다. 거의 20년만에 읽은 셈이니 어렴풋한 인상 정도만을 갖고 있었을 따름이고, 세부적인 내용은 처음 읽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교재로 사용한 건 <인간실격/사양>(문예출판사, 2009[2003])인데,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잘못이었어요."
마담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우는 아주 정직하고 영리하고, 술만 그리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술을 마셔도, ... 천사같이 착한 아이였어요."(오유리)

이것만 읽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텐데(주인공 이름 '요우'는 다른 번역본들과 대조해보건대, '요조'라고 해야 맞다), <인간실격>(민음사, 2009[2004])도 같이 읽은 게 화근이었다. 이렇게 끝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김춘미)

일어에서는 그런 표현도 쓰는 모양인데, '하느님같이 착하다'란 게 말이 되는지 궁금했다. '천사같이 착하다'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도 같지만, 나의 직관으론 한국어에서는 가능하지 않거나 어색한 말이다. 다자이의 간략한 전기를 포함하고 있는 소개서 <자화상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살림출판사, 2008)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빠요."
태연스레,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짱은, 무척 얌전하고 아주 눈치 빠르고, 그냥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였습니다."(유숙자) 

짐작에 일어 원문은 '하느님같이'('하나님같이')로 옮겨질 수 있고, '천사같이'라고 옮기는 건 의역이 아닐까 싶다. 다른 번역본들을 조금 더 뒤져봤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빴어요."
그리고 마담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짱은 온순하고 재치 있는, 거기다가 술만 안 마신다면... 아니, 술을 마셔도 정말 훌륭한 좋은 사람이었지요."(을유문화사판)  

"그 사람의 아버님이 나빠요."
마암이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요조는, 정말로 착하고, 경우가 바르고,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아니, 마셨다 하더라도, 하느님같이 착한 사람이었어요."(웅진지식하우스판)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요짱은, 정말 순진하고, 또 남을 생각하고, 정말이지 술만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마셨어요,... 하느님같이 좋은 애였어요."(제이앤씨판) 

작품에서 '인간실격자'로 지목되는 주인공 오바 요조에 대한 마지막 인물평이기도 해서 음미해볼 만한 대목인데(요조는 다자이 자신의 자전적 분신이기도 해서 이 인물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 나로선 '천사같은 아이'와 '하느님같은 아이'의 의미가 동일하게 여겨지질 않아서 어떤 해석이 타당한지 궁금하다. 다들 일어라면 자신 있는 분들의 번역일 테지만, 이 번역만 갖고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혹 일어를 아시는 분이라면 댓글로 도움을 주셔도 좋겠다. 참고로, 오늘 팩스로 받아본 영역본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It's his father's fault," she said unemotionally. "The Yozo we knew was so easy-going and amusing. and if only he hadn't drunk - no, even though he did drink - he was a good boy, an angel." 

인용한 건 1958년에 나온 영역본인데,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의 영역본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걸로 보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여하튼 영역본은 "그는 천사와 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정도로 옮겼다. 사소한 문제에 과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학 전공자들은 원래 이런 문제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10. 04.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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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정원 2010-04-09 00:40   좋아요 0 | URL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저는 전공자도 아니고 일어도 잘 모릅니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몇 자 적어봅니다.

1. 오유리 선생님의 '요우'도 틀린 번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문에는 '요짱'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건 다들 아시다시피 요조의 애칭입니다. '요짱'이라고 번역하는 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요조'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고, '요'(요우)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므로 요조, 요(요우), 요짱 모두 가능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2. '하느님' '하나님' '천사'로 번역된 단어는 한국어로는 주로 '신(神)'으로 많이 번역되는 ’神様(kamisama)'라는 단어입니다. 원문대로라면 'kamisama 같은 착한 아이였어요(神様みたいないい子でした)'라고 번역되는데요. kamisama를 어떻게 번역해줄 것이냐가 여기서 문제가 되네요.

'하느님 같다' '신 같다'라는 말 자체에 이미 완전한 인격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이므로 '마치 하느님 같은 아이였어요'라고 '착한'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번역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네요...^^;; 아니면 '마치 천사 같은 애였어요'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로쟈 2010-04-09 00: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위키에는 이렇게 설명해놓았네요.
Kami-sama (神様) is the Japanese word for "deity". The word is used to indicate any sort of god, beings of a higher place or belonging to a different sphere of existence, or the Christian-Judeo God.
문화적 차이 같은데, 저는 '하나님같이 착한 아이' 같은 비유는 한국어 어법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종이정원 2010-04-09 01:13   좋아요 0 | URL
하느님 같은 사람, 이라는 말은 어색하게 들리지 않고 천사 같은 사람, 천사 같은 아이, 라는 말도 그닥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하느님'과 '착하다'는 일종의 연어로서 사용하기 영 어색한 것 같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처음 일본어 성경을 봤을 때 꽤 충격적이었는데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대목이 '태초에 '신(神)-kamisama도 아니었습니다-'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이 '팔백만'이나 된다고 하니 절대자를 그 팔백만 신과 동등한 '글자'로 나타내는 듯해서 매우 재밌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했답니다.^^

로쟈 2010-04-09 09:07   좋아요 0 | URL
영어에서도 마찬가지 같아요. 'he was like an angel' 정도로밖에는 옮길 수 없을 듯하니까요

조선인 2010-04-09 08:37   좋아요 0 | URL
번역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일본엔 착한 여우신도 있고, 나쁜 여우신도 있잖아요. 카미사마는 그중에서도 착한 쪽... 우리나라로치면...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산신령 느낌이랄까?

로쟈 2010-04-09 09:08   좋아요 0 | URL
'착한 산신령 같은 애였어요'라고 하면 말이 되네요.^^

비로그인 2010-04-09 14:43   좋아요 0 | URL
원문은 이렇네요.
「あのひとのお父さんが悪いのですよ」
 何気なさそうに、そう言った。
「私たちの知っている葉ちゃんは、とても素直で、よく気がきいて、あれでお酒さえ飲まなければ、いいえ、飲んでも、……神様みたいないい子でした」

본문을 안 읽어봐서 맥락에 따라 인물의 성격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이 부분만 보면 성격묘사는 제이앤씨판이 가장 무난해 보여요. 하느님이든 천사든 굉장히 착해 빠진 인물과 호응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리고 역시 본문에 기독교적 편향이 나타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부처님같이 좋은/부처님 같은 애/이였어요"라고 하면 좀더 와닿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작가의 종교 소속과 무관하게 일본인이 쓰는 '신'이란 관념은 현대 한국인만큼 곧바로 기독교적인 뉘앙스를 연상시키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요.

이상은 모두 개인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일어도 잘 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09 16:3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일본인이 말하는 카미사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하느님-하나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다신교의 나라인 일본이니까요.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네, 이런 대목에선 문화적 차이가 확연합니다. 생사관에서도 그렇지만...

시고 2010-04-10 05:11   좋아요 0 | URL
제 일어 경험에 따르면, 神(kami)란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신령스런 존재에 해당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서라면 원시 무속 신앙에서의 '하늘'쯤 될까요. 보통 '하늘이 지켜본다' 라거나 '하늘이 노하셨다'같은 표현에서의 경외의 대상에 해당하는...
(게다가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신적 존재에 대한 표현이 상당히 많으니까요. 굳이 '인간에게 해가 되는 쪽'이라면 '怪'에 해당하는 '모노노케'나 '아야카시'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둘이 실제 일본에서 거의 항상 '惡'의 영역이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지요. 파고들면 재밌어요. 번역하기는 난감하지만. ^^;)
원문의 뉘앙스를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번역문의 호불호가 갈리는 경향도 있으니 섣불리 단정은 못하겠습니다만, 저 문장만 놓고 봤을 때 제겐 '문예판, 민음판, 웅진판'을 서로 참조하면 좋을 듯 하네요.

저는 윗분들 댓글 보면서 오히려 '마치 하느님같은 아이'라는 표현이 원문의 뉘앙스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느꼈어요. '하느님같은 아이'라고 하면 어쩐지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라서, 너무 고귀하달까요.

저는 대략...저 원문의 의미가 이렇다고 생각합니다.(어느 정도 의역해서)
"그이 아버지가 나쁜거예요. - 아무렇지 않은 양, 그리 말했다. - 저희가 알고 있는 요우는, 무척 솔직하지, 똑부러지게 야무지지, 거기에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죠, 마신다고 해도, ...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애였답니다."

'카미사마같이 착한 애'였다는 건 실제로 그가 어떤 완벽함(도덕성 혹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일부러 깍아내릴 필요가 없는 그라는 존재 자체로 있는 것이 허용된다는 류의 (상대적)절대성을 품고 있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뉘앙스로 치자면 말이죠. (이런 얘기엔 늘 조심스러워져서;;) 일본의 '카미'란 108신이라는 말처럼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서 '절대성'보다는 '일상성'을 근저로 하고 있으니까요.(그렇기에 '카미'는 언제든 선과 악을 오갈 수 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지요.)

마담에게 있어 요우짱은 똘똘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이미지가 강한 거겠죠, 분명. 그러니 남들이 뭐라든 그에겐 늘 좋은 아이로 남는 걸테구요.

비로그인 2010-04-11 09:42   좋아요 0 | URL
끼어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번역본에 대한 평가가 달라서 굳이 말씀을 붙이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의 의역이 그렇게까지 필요한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지만 위 번역본들보다는 성격해석에서 원 단어의 뉘앙스를 살리신 것 같아서 자연스럽네요.

다만 다른 분들을 위해 단어의 원 의미와 뉘앙스에 대해서 조금 보충하고 싶습니다.

素直는 양심에 따른 말과 행동을 한다는 일종의 윤리적 덕목을 내포할 수 있는 '정직'(일어에 '정직하다'란 단어도 따로 있고요)보다는 더 직접적인 성질을 가리키는 편이죠. 아이들의 성격을 가리키는 데도 잘 쓰이듯이. '솔직'(이것 역시 '솔직하다'란 단어가 따로 있긴 합니다)은 '정직'보다는 더 나아 보이지만 저는 솔직하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당돌함이나 당당함 따위의 느낌을 素直에서 결코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일어 단어는 '고분고분하다', '부드럽다' 등과 연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온순하다', '얌전하다'가 가까워 보이지만 그것만은 아닌 듯 싶고 '순수하다'도 그에 직접 상응하는 일본어가 있는데 본문 캐릭터 묘사에 따라 가능하겠지만 단어만을 놓고 보면 조금 튀는 감이 없지 않네요(素直를 일본사람들이 자주 쓰듯이, 인간에게 순수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이들에겐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지만).

気がきいて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야무지다'도 충분히 어울리지만 '야무지다'는 뭔가 자기 앞가름을 잘하는 식의 근면함(일종의 덕목)을 떠올리게 하는데, 과연 주인공이 그런 성격일까 궁금해지기도 하거니와, 気が利く는 '눈썰미가 있다', '세심하다' 따위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특히 '세심하다'의 의미일 때는 대개 자신의 일에 대해서라기보다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에 그렇게 할 때 술어로 잘 쓰는 것 같습니다. 위 번역들 중 '영리하다'는 利口だ와 혼동한 게 아닌가 싶고 '눈치 빠르다'는 약삭빠르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보태어지고(인물이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단어만으로는 그런 뉘앙스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마담의 언어생활이 홍상수적이면 몰라도), '재치있다'는 영어도 amusing으로 번역된 걸로 봐서는 본문의 캐릭터 묘사를 통해 조금 의역한 듯하고, '경우가 바르고' '남을 생각하고'는 (본문을 읽지 않고 단어에 대해서 느끼는)제 생각과 가장 가깝지만 조금 순화된 번역어인 듯 싶습니다.

아무튼 본문을 직접 읽고 주인공의 행적을 좇아봐야겠습니다. 아울러 마담의 너그러운 연민에 대해서도 공감을 해야겠고요. 그럼 인간을 더 사랑할 마음이 생길라나요? 로쟈님은 어떻든가요? ^^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시고 2010-04-13 13:12   좋아요 0 | URL
제레카폴님의 뉘앙스에 대한 설명에 동의합니다.
저도 저 문장에서 그 두가지 용어가 맘에 걸렸거든요. 참, 저는 '하느님같이'라는 표현이 일본 내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려고 하다보니 의역이 과해졌습니다.
(그나저나 다시 읽어보니 기존 번역본 전부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여 한 두가지로 꼽는 게 잘못된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네요.^^;)

단지 저는 '솔직하다'는 표현이 한국에서 당돌한 이미지로 굳혀진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선택했는데...이 부분은 개인에 따라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지는군요.

'気がきいて'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확실히 일본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에 좀 더 가까운 세심함과 꼼꼼함을 일컫는 말이지요. 저는 마담이 요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아줌마들이 아이들의 꼼꼼함을 칭찬할 때 쓰는 말로 '야무지다'를 골라봤습니다. 하지만 사실...불충분한 표현이죠. ^^; 제레카폴님 의견대로 '세심하다'가 사전적 의미로 걸맞으니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겠네요.

비로그인 2010-04-13 15:07   좋아요 0 | URL
리린님 댓글 위에 있는 제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어디까지나 본문을 안 읽고 주관적으로 느낀 판단이니까요, 아마 '솔직하다'를 비롯해 기존 번역본들의 술어가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하다에 당돌함 따위를 연관시키는(항상은 아니지만) 건 개인적인 경험에서 오는 편견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서재 주인께서 번역과 관련해서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말을 꺼내볼 수 있는 판을 가끔 열어주시는 바람에 제가 좀 오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양해하시리라 믿습니다. ^^

픽션들 2010-04-10 07:54   좋아요 0 | URL
리린님의 번역 제일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