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인문학 위기'에 대한 한 좌담회에 불려나가 몇 마디 거들 일이 있었다. 이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차고 넘치지만(화제에 오른 지 한 10년은 됐으니!) 지난주초에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 'TV, 책을 말하다' 코너에서 다루어진 걸 계기로 해서 과연 '인문학에 희망은 있는지' 혹은 '희망의 인문학'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끔 됐다. 이와 관련하여 연구공간 수유나 철학아카데미 등과 같은 재야 학술공간 외에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 것이 '인디고서원'이다. 그건 얼마전 이 고등학생들의 '독서토론교실'에서 내는 잡지 <인디고잉>에 지젝 등의 저명한 외국 학자들이 기고하여 화제가 됐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겸사겸사 관련자료들을 모아보았다. 

 

중앙일보(07. 01. 16) 인디고 혁명

16년 전 부산이다. 국문과 새내기 여대생 허아람이 거사를 감행한다. 고교 시절 내내 품어왔던 꿈이다. 중.고생 대상의 독서토론교실을 연 것이다. 영어.수학 과외에 열 올리던 친구들은 비웃었다. 지금처럼 논술 광풍이 불 때도 아니었으니 얼마나 뜬금없었겠나. 하지만 그저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살았고 그럴수록 좋은 책을 향한 목마름이 더했으며 읽고난 뒤 벅찬 감동을 나눌 상대가 없어 안타까웠던 기억들이 아람을 이끌었다.

그렇다고 자선사업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과외교습하며 받는 만큼 돈을 받았다. 비웃음 소리가 더 커졌다. 그 돈 내고 올 학생들이 있겠나. 하지만 알음알음으로 찾아온 수강생 수가 이내 40명이 됐다. 주말에만 하다 보니 그 이상 받을 여력도 없었다. 대학원 때까지 7년 동안 매주 그만큼의 학생들에게 책을 골라주고 함께 읽고 느낌을 나눴다.

잠시 고민을 했다. 박사학위를 따서 학교에 남느냐, 아니면 본격적인 독서교실을 운영하느냐. 선택은 후자였다. 박사과정에 등록할 돈으로 40평 정도 되는 공간을 구했다. 이제 독서토론을 위해 학생들 집을 전전할 필요가 없을 터다. 수강생 수를 80명으로 늘렸다. 업으로 나섰다 해도 역시 주말에만 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렇게 9년을 더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서토론교실 학생들은 '인디고 아이들'이라 불린다. 인디고(Indigo)의 쪽빛처럼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란 뜻이다. 그들은 '아람샘(아람 선생님)'과 매주 1~2권의 책을 읽고 토론한다. 문학.역사.사회.철학.교육.예술.생태.환경 등 편식 없이 고른 분야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저자를 직접 초청해 토론회를 연다. '주제와 변주'라는 제목으로 22회를 이어온 토론회에는 정재서 교수와 김용택 시인, 성석제 작가 등 인기 저자들이 참석해 학생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눴다. 토론 내용을 정리한 책도 벌써 두 권이나 냈다.



아람샘과 인디고 아이들은 지난해 또 한번 일을 저질렀다. 국내 최초의 청소년 인문교양지 '인디고잉(INDIGO+ing)'을 창간한 것이다.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와의 e-메일 인터뷰는 물론 '옥스포퍼드 철학 사전'으로 유명한 영국의 사이먼 블랙번(케임브리지대 철학과) 교수와 '동유럽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슬로베니아의 문화비평가 슬라보예 지젝 등 세계적 석학들의 글을 받아 실었다.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에 감동한 석학들이 무료 기고한 것이다.

이처럼 인디고 아이들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실천하며 국내외 저자들과 지적 교류를 하고 있다. 논술고사 원고지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 위해 프린트물로 요약된 명작을 읽고 뜻도 모르는 용어를 외우며 문장 기술을 배우고 있는 또래들과는 사뭇 다르다. 아람샘 교실에는 100여 명의 대기자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특강을 해야 할 정도다. 분명 수요가 있는 것이다. 독서마저 입시도구로 전락한 어긋난 교육제도 속에서도 철학과 교양이 용해된 실천적 삶을 원하는 학생들이 분명 있는 것이다.

아람샘은 그들을 위해 3년 전 책방을 하나 냈다. '인디고 서원'이다(www.indigoground.net). 그 흔한 베스트셀러나 참고서.학습교재는 팔지 않는다. 아람샘이 고르고 학생들과의 토론으로 검증된 책들뿐이다. 그러니 경제적 어려움은 쉽게 상상이 간다. 한 번 만드는 데 1000만원이 들어가는 격월간지 '인디고잉'도 아직은 크게 적자다. 하지만 아람샘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 자신의 일이 "'대안'이 아니라 훼손된 '본질'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 칼 포퍼는 "누군가 망쳐 놓을 수 있지만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이 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 땅에서 꺼져가는 참교육과 인문학의 불씨는 이념의 기치를 든 전교조 교사나 인문학 위기를 외쳐대는 노교수들이 아니라 한 가냘픈 여성 혁명가에 의해 지켜지고 있다.(이훈범 논설위원)

국민일보(07. 01. 06) 13평 동네책방 ‘문화혁명+ing’

부산 남천동 부산KBS 맞은편. 골목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찻집처럼 예쁜 책방이 하나 나온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 ‘인디고 서원’. 문을 열면 13평 공간이 아늑하게 펼쳐진다. 철학,역사,문학,예술,교육,생태·환경 등 6개 코너로 구분된 서가에는 3000여권의 책들이 빼곡하다. 청소년들이 찾는 서점이라고 해도 참고서나 학습교재는 한 권도 없다. 만화책도 없다. 문구도 팔지 않는다.

서가를 훑어보니 ‘강의’ ‘빈곤의 종말’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 등 어느 책 하나 만만치 않다. 여기서 판매하는 책들은 모두 주인 허아람(37)씨가 적접 선정한다고 한다. 허씨는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광고를 철저히 무시한다. 십수년째 중·고생 대상의 독서토론교실을 운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책을 고르고 학생들의 검증을 거친 후 서점에 내놓는다.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이 서점의 도서목록을 신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디고 서원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저자 초청 독서토론회가 열린다. ‘주제와 변주’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22회를 이어왔다. 시사평론가 진중권,박홍규 영남대 교수, 시인 김용택, 장영희 서강대 교수,소설가 성석제 등 인기 저자들이 학생들과의 만남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방문자들은 하나같이 이 작은 서점에 매료돼 후원자가 되었다.

허씨가 청소년 서점을 시작한다고 할 때,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꿈 같은 짓”이라는 것이었다. 2년 반이 지난 지금 그 ‘꿈 같은 짓’은 ‘주목할만한 현실’이 되었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가는 지방 중·소형 서점의 대안적 모델로,책을 읽고 자란 아이들의 경이로운 힘을 보여주는 증거로,이 서점을 거론하는 이들이 많다.

허씨는 지난해 또 하나의 ‘꿈 같은 짓’을 저질렀다. 청소년 인문교양지 ‘인디고잉(INDIGO+ing)’을 창간한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인문교양 잡지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잡지의 기자들은 인디고 서원을 자주 드나드는 중·고생과 대학생 10여명이다. 순수 아마추어들이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이 아마추어들이 신년 초 ‘대형 사고’를 쳤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문화이론가 슬라보예 지젝,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사이먼 블랙번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이 잡지 신년호에 글을 기고한 것이다. 지젝은 한국 청소년들의 원고 청탁을 받고 ‘철학,아는 것을 모르는 것,그리고 이성의 사회적 사용’이란 제목을 단 A4용지 10장 분량의 글을 보내주었다.

인디고잉 기자로 활동하는 박용준(고려대 철학과 3)씨는 “슬로베니아에 있는 지젝에게 메일을 보내 인디고 서원을 소개하고 소통하길 원하는 우리의 마음을 전달했더니 흔쾌히 글을 주었다”면서 “노엄 촘스키 MIT 명예교수에게도 원고를 청탁했는데 이번엔 어렵고 다음 번에 꼭 글을 주겠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말했다.

창간호(2006년 9월호)에는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하마드 유누스의 이메일 인터뷰가 실렸다. 유누스의 책을 읽고 감동한 학생기자들이 그와의 인터뷰를 기획해 성사시킨 것이다. 지난해 10월 노벨상을 받은 후 한국을 방문한 유누스는 이화여대 강연장에서 인디고잉 기자들과 포옹하기도 했다.

청소년 잡지,그것도 창간한 지 반 년밖에 안된,아마추어들이 만드는 잡지가 세계의 지성들과 직접 소통하는 모습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어떤 힘이 석학들을 움직였을까. 허씨는 “학생들의 진정성과 순수함,그리고 용기에 감동한 게 아닐까요. 그리고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런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격려하기 위한 게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인디고 서원이 보여주는 것은 책 읽는 아이들의 힘이다. 오는 3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는 이슬아(18·부산 분포고 3)양은 “독서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얕은 지식이 아니라 굉장히 깊은 지식,놓치면 안 되는 지식,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포용하는 방법 같은 것을 알게 한다”면서 “대학생이 돼서도 계속 잡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인디고 서원을 방문하고 나서 “미래를 위해 이렇게 하자고 떠들기만 하는 일이 인디고에서는 현실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동네에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서점의 모습을 제시했고,우리 아이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잡지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모두가 포기했던 책과 청소년들의 만남을 성사시켰고,책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청소년 문화를 싹틔우고 있다.

이 유쾌한 문화혁명을 이끌어온 허씨는 “진실하고 정의롭고 순수한 꿈이 현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이 작은 공간에서 부지런히 새로운 길을 만들고 세상을 놀래킬만한 성공사례를 만들어갈 작정이다. “꿈이 이루어지는 사례를 보여줘야 사람들이 따라오고 사회가 변해요. 그걸 보고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꿈을 꿀 용기를 얻거든요. 인디고 서원이란 이름이 그런 희망의 상징이 되고 싶어요.”(김남중 기자) 

07. 01. 21.

 

 

 

 

P.S. 고등학교 이름은 아니지만, '인디고'는 왠지 '민사고'의 짝처럼도 들린다. <희망의 인문학>의 원제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인 것처럼 인디고 또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만큼이나 '인문학'도 필요한 것. 그런 인문학과 그런 은행이 좀더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쇼리스의 표현을 빌면, "인문학이란 지적 동력 없이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실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27쪽)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건 '87년 체제'니 '새로운 헌법'이니 하니 거창한 틀이 아니라 어쩌면 동네의 마땅한 청소년 서점 하나일 수도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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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07 00:53 
    엊저녁엔 저녁 강의가 있어서 저녁을 일찍 먹었더니 강의가 끝나곤 허기가 졌다. 자정이 다 돼 귀가해 라면을 끓여먹고 또 내일 강의 준비를 하기 전에(아직 책도 다 안 읽었다) 잠시 숨을 돌린다. 어제, 아니 그제 저녁 다지원 강의가 끝나고 인디고 유스 북페어 프로젝트팀이 만든 <가치를 다시 묻다>(궁리, 2010)을 뜻밖의 선물로 받았는데, 다시금 무릎에 놓는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는 그 부제다.   그
  2. 인문학 혁명가의 꿈꾸는 책방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30 08:58 
    4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또하나의 책읽기책은허아람의 <사랑하다, 책을 펼쳐놓고읽다>(궁리, 2011)다. 저자의 이름이 생소하더라도 '인디고 서원'은 혹 들어보셨을지 모르겠다.부산에 있는 청소년 인문학서점이자 한국 청소년 인문학 활동의 메카이다. 그 인디고서원의 대표가 바로 '아람샘'이다. 책날개에 실린 소개에는 '매 순간 생의 혁명을 꿈꾸는 투사, 이 땅의 인문혁명을 도모하는 전사'라고 돼 있다(또 한 가지는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기인 2007-01-21 13:32   좋아요 0 | URL
예전에 마태우스님이 알라디너와 함께 만들고 싶어하신 서점과 비슷하네요. :)

아포지 2007-01-21 14:06   좋아요 0 | URL
한 방 크게 먹은 느낌입니다. "희망의 인문학"과 함께 여운이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클리오 2007-01-21 21:36   좋아요 0 | URL
꼭 중앙일보는 기사에 티를 내는군요.. 참교육이념 어쩌고 하면서...--; 그나저나 저분, 대단하십니다!!

3794 2007-01-22 00:58   좋아요 0 | URL
부산에 있으면서도 이런 서점이 있는것도 몰랐군요. 시간 나는데로 구경가봐야 겠습니다.

로쟈 2007-01-22 01:10   좋아요 0 | URL
기인님/ '알라고 서원'이요?^^
apouge님/ 글쎄, 동네마다 이런 서점이 하나씩 있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클리오님/ 인디고잉도 수익을 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3794님/ 몇 권 팔아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