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할 책이 있어서 동네 도서관에 갔다오다가 편의점에서 한겨레를 손에 들었다. 북리뷰보다 먼저 읽은 것이 황현산 교수의 칼럼인데,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란 제목이 눈에 들어서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인문학, 특히 어문계열 학과들의 통폐합(상투어론 '구조조정'이라고 한다) 문제가 분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정작 이런 '생각'이 필요한 이들은 이런 칼럼도 읽지 않을 테고, 이런 서재에도 드나들지 않을 테지만. 아래 사진은 어제 학교측의 '구조조정'에 반대하여 중앙대 학생들이 삭발식을 하는 장면.  

한겨레(10. 05. 01)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   

우리 세대가 대학을 다닐 때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은 주로 두 사람이 방 하나를 같이 쓰는 하숙집에서 기거했다. 내가 만난 ‘룸메이트’ 가운데 법대생이 둘 있었다.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상수 변호사다.

이 변호사는 학창시절 온갖 책을 가리지 않는 독서광이었고, 글을 잘 썼으며, 입을 열면 시정이 넘치는 말을 쏟아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또 한 사람은 오로지 고시공부에만 전념하는 학생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도서관에서 살았다. 나도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크게 뒤지지 않았지만 그에 비하면 내 공부는 늘 산만했다. 어느 날 그가 나한테 왜 고시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기도 그 질문이 뜬금없다고 느꼈던지 어조를 갑자기 힐난조로 바꾸었다.

불문과에서는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나는 고작 이렇게 대답했다. 불문학과니까 불문학을 하지. 대답이 아니라 대답의 회피였다. 그러나 저 고시생의 확실하고 단단한 신념 앞에서 내 공부의 내용과 목표를 차근차근 이야기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너무나 아득한 일이었다. 문제는 내 생애에서 이렇게 질문해오는 사람이 그 사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언젠가는 교육부의 관리가 프랑스의 불문학박사보다 한국의 불문학박사가 더 많다는 얼토당토않은 낭설을 티브이 방송으로 퍼뜨렸으며, 가끔은 대학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이제는 영어 하나면 어디서나 통하니까 프랑스어 교육은 필요 없지 않으냐고 넌지시 묻는다. 교육부 관리의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프랑스어 교육 불필요론 앞에서 나는 프랑스어가 무역이나 여행을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거나(실은 그런 일에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불어불문학과에서 프랑스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데, 상대방은 이어질 말을 듣고 싶은 기색이 아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현재 세계의 문화적·정치적 지형도의 형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프랑스어로 작성되었으며 지금도 작성되고 있는 많고도 중요한 문헌에 관해서는 말할 틈조차 없다. 그 질문은 처음부터 내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사회의 발전에서 앞으로 오게 될 세계의 그림을 문학이 항상 먼저 그려왔으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세계관에 적대할 사람들을 불어불문학과에서 기르고 있다고 아연 긴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불어불문학과를 비롯한 유럽어문학과는 졸업 후 취직이 특별히 어려운 학과도 아니다. 대기업에 무더기로 취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계에서 연예계까지 각종 문화산업의 미묘한 자리에는 유럽문학과 출신들이 어김없이 끼어 있다. 다양한 장르의 문필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문학으로 함양한 개성과 재능을 토대로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영화감독, 작곡가, 디자이너도 적지 않다. 외국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효과는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이 삶의 안팎에 퍼져 있으나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적다. 그 효과가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적다. 불어불문학과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 설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은 해두자. 어느 젊은 출판인이 교수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여, 근래 프랑스에서 발간된 인문학 서적들을 번역하는 일이 시급한데, 마땅한 번역자를 구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그 까다로운 문장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깊이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지어, 이 서적들을 번역해낼 만한 소수의 사람들은 저 모욕적인 질문을 자주 받으며, 제 공부의 터전에 위기까지 느끼면서 노력해온 사람들이다.(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10. 05. 01. 

P.S. 그 '어느 젊은 출판인'의 칼럼은 얼마전에 나도 읽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교수신문(10. 04. 20) 번역자를 찾을 수 없는 이유

매년 엄청난 종수의 학술서들이 쏟아져 나온다. 출판 통계에 따르면, 그 가운데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율은 세계 선두권에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일본에서 번역된 학술서를 보고 기획을 했지만, 지금은 일본보다 빨리 학술서가 번역ㆍ출판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나의 현상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솔직히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반가운 현상으로 일단 생각해본다. 우리 학문의 자생성 문제를 떠나 이제 인문학은 ‘세계’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단계로까지 우리의 시야를 넓혀놓았기 때문에 우리 바깥에서 논의되고 사유되는 문제들을 신속하게 ‘수입’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들어서는 학술 번역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문 출판인들이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책을 번역할 ‘전공자’가 점점 고갈돼 간다는 데 있다. 지난 20여 년간은 인문학술 번역 출판이 풍요를 누리던 시기였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출판인 입장에서는 어떤 한 책에 대해 1순위, 2순위 하는 식으로 번역자 레벨을 매기는 분야까지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전공자들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시대상의 반영이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순수’한 학문적 열정이 지금에 비해서는 훨씬 많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푸코와 들뢰즈를 찾아 프랑스로, 하버마스를 찾아 독일로 떠나거나 또는 이 땅에 머물면서 최한기나 정약용을 공부했다. 물론 지금 이 시대에도 그런 연구자들이 많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분위기는 ‘순수’ 학문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어버린 것 같다는, 다시 말해 때로는 학문이 순수 학문으로서 존재해야 할 그 가치를 잃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른바 상아탑 같은 학문적 토대도 필요할 터인데, 지금 우리 시대는 기능적 지식인 양성에만 힘을 쏟는 것 같아 씁쓸하다. 물론 우리 사회에 기능인이 많아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초과학 없는 응용공학이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사회적 인프라로서 튼실하게 축적된 인문학적 사유이다.

최근 고려대생 김예슬 씨의 사건이나 중앙대 사태는 그런 점에서 우리 대학 사회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될 터이다. 기능적 지식인 양성에만 몰두하는 대학 내에서 철학이니 역사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학문들은 ‘찬밥’ 신세가 돼버렸다.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도 별로 없고, 더 많은 공부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 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른바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대학의 분위기 속에서 고고한(?) 순수 인문학적 열정을 쏟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결국 전공자의 절대 빈곤 속에서 ‘다양성의 담론’이 생명인 인문학은 그 토대를 잃고 말았다. 지금도 우리 밖에서는 새로운 이론들과 사상들은 버거울 정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옥석을 가려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전공자와 인문 출판인의 임무일 텐데, 그 수가 절대적으로 빈곤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새로운 이론과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적당한 번역자를 눈 씻고 찾아봐도 해당 전공자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책을 이탈리아어 원어로 읽고 제대로 번역할 전공자가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의 철학이 일류냐 이류냐를 따지는 것은 이후의 일이고, 우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우리말화해 우리 사유 속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를 예로 든 것이 너무 협소할까. 조금 시야를 넓혀 프랑스 철학으로 눈을 돌려도 형편은 별반 나을 것이 없다.
 
출판인의 입장에서 학술 번역과 관련한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은 대학 밖의 시선이겠지만, 이미 대학 내부 구성원 사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현상은 그나마 기능적 지식인에 머무르고자 하는 데 대한 저항으로 읽혀 다행스럽다. 대학을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오직 취업과 국가경쟁력만을 향해 일방통행할 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문화적 근간은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칼 폴라니는 “우리 시대에서 이제 인간은 사회 실재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 체념하게 되었으며, 이는 인간이 예전에 믿었던 모습의 자유가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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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부는 여가가 아니다
    from 라무레트의 입맞춤 2010-05-01 22:32 
    가끔 연구실 울타리를 벗어나, 직장인이 된 학부시절 친구들을 만나거나, 혹은 술에 취해 택시 아저씨와 예상하지 않았던 친밀한 사담을 나눌 때, 나오는 초반부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oo야, 너 지금 전공이 뭐라고?", "학교는? 그럼 전공은?" 그럼 나는 머릿속에 조금 계산을 해야 한다. 내 전공명을 미리 밝히자면, "영상커뮤니케이션"이다.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 그럼 뭐 영화 이런거 공부하나?"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대부분 "
 
 
푸른바다 2010-05-02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침 황현산 교수님의 컬럼을 읽었고 '교수신문의 칼럼'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마침 올려주셨군요. 한마디로 말해서 本을 망각하고 末의 花만 쫓고 있는게 한국의 자칭 주류세력의 불행입니다. '崇本息末'의 의미를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5-02 16:54   좋아요 0 | URL
이심전심이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5-0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이라면 미국만 있는 줄아는 사람들...아...답이 안 나오네요.

로쟈 2010-05-02 23:29   좋아요 0 | URL
소위 '주류'죠...

사과나무 2010-05-26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

어제 중앙게르마니아 강연이 끝나고 뜻밖에도 인디고 팀원들에게 이번에 나온 국제판 <인디고>(2010년 봄호)를 선물로 받았다. 안 그래도 어제 오전에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이다. 지난번에 <가치를 다시 묻다>(궁리, 2010)도 나를 놀라게 한 책이었는데, 깔끔한 장정의 국제판은 한번 더 놀라게 한다. 다음 세대 인문학에 대한 걱정은 내 몫이 아닌 듯하다. 하긴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읽는 중학생도 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 잡지 창간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10. 04. 30) 부산 청소년들이 만드는 국제 인문학잡지 '인디고' 창간 

부산의 인디고서원은 국내 하나뿐인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이다. 수영구 남천동 학원가에 자리잡은 이 책방은 2004년 8월 문을 연 이래 놀라운 실험들을 해왔다. 참고서나 상업적 베스트셀러는 팔지 않는다. 서가는 온통 인문학 책 차지다. 더 좋은 세상과 참된 삶을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청소년들에게 정신적 양분이 될 책들만 엄선해 꽂아놓았다.

그동안 해온 활동은 더 인상적이다. 저자를 초청해 대화를 나누는 '주제와 변주', 주말의 독서 토론 모임, 자유ㆍ저항ㆍ진실 등 인문학적 가치를 주제로 토론하는 '정세청세' 등은 중고생이 주축이다. 23호를 낸 격월간 인문 교양지 '인디고잉(INDIGO+ing)'도 인디고 아이들이 직접 만든다. 입시 지옥에서 점수의 노예로 사는 한국 청소년의 현실을 생각하면 꿈만 같은 일이다.

인디고서원이 또 한 번 혁명적 발걸음을 내딛었다. 인디고 아이들이 전세계 지성들과 함께 만드는 국제판 인문학 잡지 '인디고(INDIGO)' 를 창간, 29일 1호를 선보인 것이다. 전세계로 보내는 영어판 계간지다.

잡지를 통해 인문학적 가치와 실천을 위한 국제적 담론을 펼치고 공유하려는 연대의 장에 편집위원장을 맡은 철학자 겸 평화운동가 브라이언 파머(스웨덴 웁살라대 교수)를 비롯해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등 6대륙에서 11명의 지성인과 실천가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메일 교류와 인터뷰 등을 통해 인디고서원의 활동을 알고 적극 응원하게 된 이들은 창간호에 무보수로 글을 썼다. 한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 등 청소년들의 글이 나란히 실렸다.

이 잡지 발행인은 인디고서원 대표 허아람(39)씨. 그는 부산 지역에서 올해로 21년째 청소년 독서 지도를 통해 인문학 운동을 하고 있다.

국제판 '인디고'의 한국인 편집진은 편집장 박용준(27)씨를 포함해 3명이다. 박씨는중학생 시절부터 허씨가 이끄는 모임에서 인문학 책을 읽으며 성장한 청년이다. 그는 "국제판 '인디고'는 전지구적 변화를 꿈꾸는 새로운 인문적 연대의 시작이자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려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파머 교수는 국제판 '인디고' 창간호에 기고한 글에서 "병 속에 담긴 편지나 풍선에 달린 편지처럼 이 잡지가 전세계로 전달되어 대의와 희망을 향한 소통의 장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인디고 아이들이 세계의 지성들과 교류하게 된 데에는 파머 교수의 역할이 컸다. 세계 지식인 16명과 하버드 대학생들의 대화를 정리한 <오늘의 세계적 가치>가 2007년 1월 국내 번역 출간되자, 인디고 아이들이 거기 참여한 파머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내 책 내용을 비판하며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적해줘서 고맙다며 오라고 했다. 그해 4월 인디고 아이들은 스웨덴으로 가서 파머 교수를 만났다. 인디고의 대의와 활동에 감탄한 그는 노엄 촘스키 등 세계의 지성과 실천가들을 소개해줬다.

창간호 특집은 '가치를 다시 묻다'. 인디고서원이 8월에 여는 제2회 인디고 유스 북페어의 주제이기도 하다. 올바른 가치는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책을 중심에 놓고 토론과 강연, 공연 등으로 풀어가는 행사다. 외국에서 40여명의 지성들이 와서 인디고 아이들을 만날 예정이다. 



이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인디고 아이들과 청년들은 세계의 지성과 실천가들을 찾아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최근 나온 단행본 <가치를 다시 묻다>는 그들을 인터뷰하고 책을 읽으며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국제판 '인디고' 창간호는 당시 만났던 미국의 진보적 지성 하워드 진을 표지인물로 실었다. 그는 올해 1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인디고 팀과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인디고서원 허 대표는 " 국제판 '인디고' 창간은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놀라운 게릴라전이 아니라 인디고서원이 지난 6년 간 걸어온 길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자본의 세계화를 뛰어넘는 인간적 가치를 공유하며 전지구적 변화를 일으키는 공론의 장으로서 이런 잡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요즘같은 인터넷시대에 웹진으로 만들지 않고 굳이 종이책으로 내는 것은 더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한국 인구의 75%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반면, 아프리카에서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0.5%밖에 안 된다고 그는 부연했다. "쓰레기더미에서 먹을 것을 뒤지다가 발견한 잡지 한 권으로 인생이 바뀐 아프리카 소년의 이야기처럼, 우리 잡지가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삶의 변화를 이끄는 매체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오미환기자) 

10. 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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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5-01 10:40   좋아요 0 | URL
시차적 관점을 읽는 중학생이라. 와 ^^. 정신이 번쩍 드네요.

로쟈 2010-05-01 10:50   좋아요 0 | URL
네, 지젝을 읽는 고등학생까지는 제가 아는데, 갈수록 청출어람입니다.^^

아포지 2010-05-01 12:51   좋아요 0 | URL
중학생에게 "너나 잘 하세요..."라고 한 마디 들은 것 같습니다.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로쟈 2010-05-02 16:56   좋아요 0 | URL
요샌 외국어를 잘하는 초등학생도 많고, 인문서를 읽는 중학생도 많다네요. 편차가 크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요...

미지 2010-05-01 18:55   좋아요 0 | URL
우리 중학교 때, 그러니까 70년대에 사르트르나 까뮈를 읽었거든요... 근데 요즘 너무 암울한 상황과 경쟁 논리에 몰리다 보니, 그때 우리 나이의 요즘 아이들이 그런 책을 당연히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는 불구 상태에 제가 빠져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오네요.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인디고 이끄시는 허선생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비판 정신과 함께 긍정적 실천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머리를 한 대 꽝 맞은 느낌입니다.

로쟈 2010-05-02 16:57   좋아요 0 | URL
네, 인디고 같은 성공사례가 더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 일정

엊저녁에 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의 발표가 있었다. '21세기 담론의 지형'이란 전체 주제에서 내가 맡은 건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였다. '슬라보예 지젝과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옹호'라는 발표문 가운데, 마지막 절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에 실린 지젝의 글 가운데 후반부를 발췌한 거였다. 따로 주석을 붙일 만한 시간이 없었지만, 그냥 읽어도 대충 지젝의 주장을 따라갈 수 있다. 아이티의 지도자 아리스티드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한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지젝은 바로 아리스티드를 꼽은 바 있다. 왜 그런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도 읽을 수 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주석은 따로 붙여볼 작정이다. 발표문에서는 '지젝과 민주주의'란 제목을 달았지만, 여기서는 책의 실린 제목을 붙여둔다.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아이티의 혁명과 수난의 역사 혁명,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개관은 177-180쪽을 참조할 수 있고, 아래는 186-196쪽의 발췌이다.

 

[이제 아이티로 가보면] 라발라스[당]의 투쟁은 원칙주의적인 영웅주의, 그리고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 투쟁은 국가권력의 틈새로 물러나 거기서 ‘저항’하지 않고 영웅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또한 탈근대적 좌파의 모든 경향이 자신들에게 맞설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불리할 상황에서 집권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필수적인 구조조정’을 법제화하기 위해 미국과 IMF에 의해 부과한 조치들에 제약당하면서도 아리스티드는 몇가지 정확하고 실용적인 조치를 취하는 정책(학교와 병원 건설, 사회기반시설 확충, 최저임금 인상 등)을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대중들의 폭력과 결합시킴으로써 군부 패거리들에 맞섰다.  



아리스티드는 간혹 ‘페르 르 브뢴’(대중이 행하는 일종의 자기방어로서, 불타는 타이어를 목에 걸어둬 경찰의 암살자나 정보원을 죽이는 행위이다. 얄궂게도 이것은 포르토프랭스의 타이어 판매업자 이름이었는데, 나중에는 모든 대중의 폭력행사 형태를 뜻하게 됐다)을 묵과하기도 했다.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사안으로 인해 아리스티드는 센데로루미노소나 폴포트와 동급 취급을 당했다. 1991년 8월 4일 연설에서 아리스티드는 열광하는 군중에게 “언제, 그리고 어디서 폭력을 사용할지”를 기억하라고 조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라발라스의 대중적인 자경단 조직(키메라Chimeres)과 악명 높은 뒤발리에 독재정권의 암살조직(통통마쿠트tonton macoutes)를 비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늘 좌파와 우파를 ‘근본주의자’라고 동급 취급하는 전략을 선호한다. [하지만] 아리스티드는 이 자경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이름[키메라]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자경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 심각한 위험상태에서, 그리고 만성적인 실업상태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조적 불의, 체계적인 사회폭력의 희생자들이죠... 그들이 언제나 이 동일한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이득을 얻은 사람들에 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 일상의 도덕의식에 비춰보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행위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국가와 경제가 수년, 수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자행한 폭력과 착취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헤겔 역시 이와 동일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사회(기성의 사회질서)가 어떻게 주체가 자신의 실체적 내용과 인정을 찾게 만드는 궁극의 공간이 되는지, 다시 말해서 어떻게 주관적 자유가 보편적인 윤리의 질서의 합리성 속에서만 스스로를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강조할 때, 헤겔은 (명시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사태의 이면, 즉 이런 인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봉기할 권리 역시 갖는다는 사실을 암시했던 것이다. 만일 일군의 사람들에게서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권리, 인격적 존엄성이 박탈당한다면,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또한 사회질서에 대한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질서는 더 이상 그들의 윤리적 실체가 아니니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거나(그것은 우리가 맞서 싸우던 적과 우리를 똑같게 만든다)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는 저항을 위해 후퇴한다”라는 식의 양자택일은 거짓된 것이다. 양자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가정을 공유한다. 즉 국가형태는 우리가 알듯이 여기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장악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뿐이다. 이때 우리는 레닌의 <국가의 혁명>이 주는 교훈을 당당하게 되풀이해야 한다. 즉, 혁명의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그 교훈을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종의 (필연적) 모순어법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이 되는 국가형태도 아니다. 민중의 새로운 참여형태에 근거해 국가 자체가 근본적으로 뒤바뀔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제로 갖게 된다. 숙청으로 사회의 전체 구조가 풍비박산 난 스탈린주의의 절정기에 새로운 헌법이 소비에트 권력의 ‘계급적’ 성격이 끝났음을 선포하고(과거에 배제됐던 계급 구성원들에게 다시 투표권이 주어졌다), 사회주의 정권들이 ‘인민민주주의’(이로써 사회주의 정권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다)라고 불렸던 사실이 꼭 위선이었던 것만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듯 민주주의가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는 피대표자에 대한 대표의 구성적 과잉이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는 소외를 최소화할 것을 전제로 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과 민중 사이에 재-현을 위한 공간이 최소화될 때에만 민중에게 책임을 질 수 있다. ‘전체주의’에서는 이 거리가 제거되고, 지도자가 민중의 의지를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물론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민중은 훨씬 더 그들의 지도자에게서 소외된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결코 민주주의를 위하는, 그리고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단순한 이유를 시사해주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궁극적인 문제는 “권력이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갖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 성격의 (비)민주성 여부와 무관하게, 주권권력 자체와 간련된 ‘전체주의적 과잉’의 특정한 성격(‘사회적 내용’)이 무엇이냐?”라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은 바로 이 수준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권력의 ‘전체주의적 과잉’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의 편에 서 있는 것이지 위계적 사회질서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터놓고 말하면, 그 용어의 완전히 주권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몫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몫 없는 자들’이 국가적 대표의 공간 자체를 자기들 방식으로 ‘비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주주의가 서로 다른 정치 주체에 의해 활용될 수 있는 텅 빈 틀(아돌프 히틀러 또한 어느 정도는 자유선거로 집권한 것이었다)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이 텅 빈 (절차적) 틀 자체에 ‘계급적 편향’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규칙 변경,’ 즉 선거를 비롯한 여타의 국가기제들뿐만 아니라 정치공간의 논리 전체를 바꾸려는 그들의 움직임이 선거로 집권한 급진좌파를 좌파로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기반인 헤게모니를 보장받으려면 그들은 민주적 형태의 ‘계급적 편향’을 올바르게 직관해 그에 따라야 한다.  

10. 05. 01. 

P.S. 아이티 혁명에 관한 책이 더 출간되면 좋겠다. 현재 소개된 건 <블랙 자코뱅>(필맥, 2007) 정도다. 아리스티드의 책도 더 나오면 좋겠고, 수잔 벅 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도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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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5-02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 자코뱅의 저자인 제임스에 대해서는 앨릭스 갤리니코스<트로츠키주의의 역사>에 나오니 한번 참고하십시오.제임스 외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로쟈 2010-05-02 23:2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덧붙여, 아리스티드가 해제를 쓴 투생의 혁명론까지 '레볼루션' 시리즈에서 나왔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2024-04-04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장 얘기가 나온 김에 오래전에 쓴 자작시를 한 편 옮겨놓는다. 공장에 대한 기억은 오지 않을 미래처럼 아득하고 아련했다. 꽃나무 공장들, 그런 얘기를 써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멀리 공장들이 보인다 

꽃나무에 꽃이 핀다
동정 없는 세상에 굴뚝같은 마음으로 꽃이 핀다 

공장들, 멀리 공장들이 보인다 그것들은 단단한 벽돌로 세워졌다
낮에도 밤에도 공장으로 가는 길은 복잡하다 공장으로 가는 길은 막다른  
골목이다 비둘기들은 한쪽 눈을 가리고 공장으로 간다
한때는 나도 공장에 가고 싶었다 

꽃잎이 눈처럼 쌓인다 폐차장에 버려지는 낡은 타이어처럼
꽃잎이 눈처럼 쌓인다 주인 없는 사진 속 시간의 먼지처럼

공장들, 멀리 공장들이 보인다 연기에 가려 희끄무레하다
아버지는 내게 기름때 묻은 행복을 가르쳤다 너는 물위에 뜬 기름이다 너는  
이 세상 아름다운 빛이다 나는 구역질이 났다
그후 간간이 내겐 희끄무레한 일들이 일어났다

공장들, 멀리 공장들이 보인다 어렴풋이 공장들만 보인다
아름드리 벚꽃나무 아래에서 네모 반듯하게 나는 반생을 살았다
이젠 고백한다 곧게 뻗은 전깃줄만 보면 나는 자꾸 매달리고 싶어진다
그때마다 감정의 소켓에서 전구를 갈아끼운다

한때는 나도 공장에 가고 싶었다……

꽃나무에 꽃이 핀다 굴뚝같은 마음으로 꽃이 핀다
낮에도 밤에도 공장으로 가는 길은 복잡하다 공장으로 가는 마음은   
막다른 마음이다 비둘기들은 오늘도 절뚝거리며 공장으로 간다  



10.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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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30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30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4-30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비바람 지나가는 봄날밤, 비장하고도 비장한 시로군요...
로쟈님의 서재에서 많은 도움 받으면서, 새롭게 정신의 긴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겁고 단조로운 북소리에 맞춰 꽃들이 굴뚝들로 세워지는 밤의 시대...


로쟈 2010-04-30 08:19   좋아요 0 | URL
너무 비장하게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온새벽 2010-04-30 0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사진의 공장(?)은 어디있는건가요?

로쟈 2010-04-30 08:17   좋아요 0 | URL
Abandoned Mill, Ripley, Michigan 1997, photo by Bill Schwab. 입니다.

펠릭스 2010-05-01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다른 마음','절뚝거리며','비둘기'->'공장'은 대량생산(공급),속도, 닫힌 공간,,,,낮은 산에 올라보면 강줄기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강둑 주위 논에 비닐하우스(식물공장,도시인에게 공급)가 많아 들판이 물에 잠긴듯 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전자제품 생산라인을 견학적이 있었는데, 쉴틈이 없었습니다. 소음하며 일정한 작업시간 등 개인의 생각은 없는듯 했습니다.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꼈지요. 대량생산용 공장이 없던 시대의 지식인들이 조금은 이해되던데요. 시어중에 '막다른 마음'이 제게 들어옵니다.

로쟈 2010-05-01 10:07   좋아요 0 | URL
생산(production)공장과 생식(reproduction)공장을 둘다 암시하기 위해서 '꽃나무'와 '공장'을 병치시켰습니다. '막다른 마음'은 공통적이지요.^^;
 

새로 나온 책 가운데 '학출'이란 단어를 오랜만에 접하게 되어 낚아놓는다. 오하나 지음, <학출>(이매진, 2010). 학출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을 가리키던 은어다. 목차를 보니 내가 대학에 들어올 때쯤은 '지식인 비판과 학생 출신 노동자 운동의 위축'이란 제목으로 정리돼 있는데, 내 기억에도 그렇다. 나는 '학출 이후' 세대다. 물론 지금은 학출이란 말조차 생소한 시대가 됐지만. 내겐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와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 때문에 가끔씩 떠올리게 되는 단어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이매진, 2006)와 함께 노동운동사의 한 페이지로 기억됨직하다.

한국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학출’이라는 은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80년대는 대학 졸업장이 미래를 보장하던 시대였지만, 수많은 대학생들은 그 안락함을 내팽개치고 은밀히 공장행을 택했다. 이 사람들이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 바로 ‘학출’이다. 그때 그 대학생들을 이끈 동력은 사회의 모순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큰 ‘양심의 가책’과 시대의식, 그리고 투철한 신념과 의지였다. 그런데 그 많던 학출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게 저자의 문제의식인 듯싶고, 책의 의의는 이렇게 정리된다. 러시아에서 19세기 후반 인텔리겐치아의 '브나로드운동'(과 그 실패)과 견주어볼 만하다('실패'라곤 하지만 학출 가운데는 현재 국회의원이나 도지사가 된 이들도 있다).   

공장에 들어간 학출들은 신분을 숨기려고 ‘먹물’의 흔적을 없애는 데 집착한 나머지, 노조 결성 등 현장에서 하려고 한 계획들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채 한 명의 평범한 노동자가 되는 데 그치거나, 공장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금방 그만두거나 여기저기 떠도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가방끈 긴 ‘학삐리’들은 노동현장과 유리되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학출들이 노동자의 위에 서려 하거나 노동운동 경험을 정계에 진출하는 경력 삼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다. 학출이 노사 협상이나 파업을 이끄는 지도자로 나아가지 못한 채 단순히 실무자로서 자기 활동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 결과 현재 노동운동에서는, 학출이라는 말이 저평가되어 ‘진짜 노동자’에 대비되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학출들의 생성 요인에서 그 사람들이 가진 고민들과 사후 평가까지 입체적으로 분석한 뒤 노동운동의 반지성주의 경향도 지적하고 있는 <학출 ― 80년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은, 학출과 80년대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요즘은 대학생이 아니라 기자들이 공장에 간다. 한겨레21의 '노동OTL' 기사를 묶어낸 <4천원 인생>(한겨레출판, 2010)은 네 명의 기자가 시급 4천원 노동 현장을 한달씩 체험하고 쓴 '노동일기'이다. 작년에 나온 <일어나라! 인권OTL>(한겨레출판, 2009)의 속편격이다. 책에 추천의 글을 쓴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의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한겨레출판, 2008)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단행본에 덧붙여진 맺음말에는 이런 대목이 포함돼 있다.  

책 전체에서 소개되는 가슴 먹먹한 사연에, 가슴 답답한 현실에 “왜 이렇게 날 불편하게 하느냐” “그렇다면 도대체 대안이 뭐냐”라고 되묻는 독자들도 있다. 불편하고 막막하기는 저자들도 마찬가지다. 취재 이후, 임인택 기자는 말수가 줄었다. 임지선 기자는 식당 아줌마를 더 이상 재촉하지 않는다. 전종휘 기자는 엄지손가락에 못이 박히는 산재를 입고 수염이 덥수룩해져 돌아왔고, 안수찬 기자는 아직도 구운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된 취재 끝에 얻은 작은 성과라면 이제 통계수치나 정책의 대상이 아닌 체온이 있는 ‘사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적힌 노동은 숫자가 아니다. 복잡한 정책도 아니다. 강력한 구호는 더구나 아니다. 다만 글로 옮기는 것조차 불편한 현실이다. 가난한 노동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들의 부모와 자식은 왜 가난한 노동자인가. 그들은 왜 아무 말 없이 감정과 의견도 숨기고 닫힌 세계를 인내하는가. 노동의 문제를 구조와 제도로 치환하지 않고, 정책적 대안을 공연히 병렬하지도 않고, 오직 그들의 감정과 경험과 일상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만 애를 썼다.

연재기사를 찾아 한창 읽고 있는 중이다... 

10.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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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4-29 12:57   좋아요 0 | URL
비슷한 범주의 책인,김원 선생님의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전희경 선생님의 <오빠는 필요없다>을 소장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두 권 다 읽으면서 불끈불끈하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이 책도 그런 느낌을 줄 것 같네요. 한윤형이나 박가분 같은 친구들이 '활동가 시대의 종언'에 대한 의견을 넌지시 내놓은 걸 봤는데, 알라디너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주제를 던져줄 수 있는 책인 것 같아, 조용히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로쟈 2010-04-30 00:32   좋아요 0 | URL
<오빠는 필요없다>는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2010-04-29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30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0-04-29 19:00   좋아요 0 | URL
학출... 오랜만이네요.
활동가들이라고 모두 훌륭한 인생을 산 건 아니죠.
그 당시 치열하게 살았던 과거를 이용해 한나라당에서 열라 뛰는 아그들 보면... 학출의 쪽팔림이 전해집니다. 이재오, 김문수... 그리고 박종철이 죽어가면서 지켰던 이름의 개새끼...

로쟈 2010-04-30 00:3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여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죠...

루체오페르 2010-04-30 00:36   좋아요 0 | URL
왜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하는가...그렇다면 대안은 뭔가...
정말 대안은 뭘까요. 특별히 없는것 같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못한다고 이미 개인의 의지,노력 차원은 떠난것 같거든요. 그래도 살아야지 이거인것 같습니다.

ps ; 뜬금없지만 로쟈님은 혹시 속독법 같은것 배우신적 있으신가요? 읽어내시는 책,기사 합해 텍스트의 양이 어마어마한것 같은데 그걸 다 읽고 이해해서 출력하실려며 상당히 빨라야 할것 같거든요. 요즘 글 읽는 속도와 양에 대한 생각이 좀 들어서 궁금합니다.^^;

로쟈 2010-04-30 00:40   좋아요 0 | URL
초등학교 때 조금 독학하다가 말았습니다. 속독'법'은 아니고, 피치못할 때 발췌독은 하지요. 그래도 허겁지겁 읽는 것보다는 느리게 읽는 걸 선호합니다. 그리고 서평기사를 읽는 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