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책 가운데 '학출'이란 단어를 오랜만에 접하게 되어 낚아놓는다. 오하나 지음, <학출>(이매진, 2010). 학출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을 가리키던 은어다. 목차를 보니 내가 대학에 들어올 때쯤은 '지식인 비판과 학생 출신 노동자 운동의 위축'이란 제목으로 정리돼 있는데, 내 기억에도 그렇다. 나는 '학출 이후' 세대다. 물론 지금은 학출이란 말조차 생소한 시대가 됐지만. 내겐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와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 때문에 가끔씩 떠올리게 되는 단어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이매진, 2006)와 함께 노동운동사의 한 페이지로 기억됨직하다.
한국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학출’이라는 은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80년대는 대학 졸업장이 미래를 보장하던 시대였지만, 수많은 대학생들은 그 안락함을 내팽개치고 은밀히 공장행을 택했다. 이 사람들이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 바로 ‘학출’이다. 그때 그 대학생들을 이끈 동력은 사회의 모순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큰 ‘양심의 가책’과 시대의식, 그리고 투철한 신념과 의지였다. 그런데 그 많던 학출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게 저자의 문제의식인 듯싶고, 책의 의의는 이렇게 정리된다. 러시아에서 19세기 후반 인텔리겐치아의 '브나로드운동'(과 그 실패)과 견주어볼 만하다('실패'라곤 하지만 학출 가운데는 현재 국회의원이나 도지사가 된 이들도 있다).
공장에 들어간 학출들은 신분을 숨기려고 ‘먹물’의 흔적을 없애는 데 집착한 나머지, 노조 결성 등 현장에서 하려고 한 계획들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채 한 명의 평범한 노동자가 되는 데 그치거나, 공장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금방 그만두거나 여기저기 떠도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가방끈 긴 ‘학삐리’들은 노동현장과 유리되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학출들이 노동자의 위에 서려 하거나 노동운동 경험을 정계에 진출하는 경력 삼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다. 학출이 노사 협상이나 파업을 이끄는 지도자로 나아가지 못한 채 단순히 실무자로서 자기 활동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 결과 현재 노동운동에서는, 학출이라는 말이 저평가되어 ‘진짜 노동자’에 대비되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학출들의 생성 요인에서 그 사람들이 가진 고민들과 사후 평가까지 입체적으로 분석한 뒤 노동운동의 반지성주의 경향도 지적하고 있는 <학출 ― 80년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은, 학출과 80년대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요즘은 대학생이 아니라 기자들이 공장에 간다. 한겨레21의 '노동OTL' 기사를 묶어낸 <4천원 인생>(한겨레출판, 2010)은 네 명의 기자가 시급 4천원 노동 현장을 한달씩 체험하고 쓴 '노동일기'이다. 작년에 나온 <일어나라! 인권OTL>(한겨레출판, 2009)의 속편격이다. 책에 추천의 글을 쓴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의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한겨레출판, 2008)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단행본에 덧붙여진 맺음말에는 이런 대목이 포함돼 있다.
책 전체에서 소개되는 가슴 먹먹한 사연에, 가슴 답답한 현실에 “왜 이렇게 날 불편하게 하느냐” “그렇다면 도대체 대안이 뭐냐”라고 되묻는 독자들도 있다. 불편하고 막막하기는 저자들도 마찬가지다. 취재 이후, 임인택 기자는 말수가 줄었다. 임지선 기자는 식당 아줌마를 더 이상 재촉하지 않는다. 전종휘 기자는 엄지손가락에 못이 박히는 산재를 입고 수염이 덥수룩해져 돌아왔고, 안수찬 기자는 아직도 구운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된 취재 끝에 얻은 작은 성과라면 이제 통계수치나 정책의 대상이 아닌 체온이 있는 ‘사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적힌 노동은 숫자가 아니다. 복잡한 정책도 아니다. 강력한 구호는 더구나 아니다. 다만 글로 옮기는 것조차 불편한 현실이다. 가난한 노동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들의 부모와 자식은 왜 가난한 노동자인가. 그들은 왜 아무 말 없이 감정과 의견도 숨기고 닫힌 세계를 인내하는가. 노동의 문제를 구조와 제도로 치환하지 않고, 정책적 대안을 공연히 병렬하지도 않고, 오직 그들의 감정과 경험과 일상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만 애를 썼다.
연재기사를 찾아 한창 읽고 있는 중이다...
10. 04.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