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 일정
엊저녁에 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의 발표가 있었다. '21세기 담론의 지형'이란 전체 주제에서 내가 맡은 건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였다. '슬라보예 지젝과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옹호'라는 발표문 가운데, 마지막 절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에 실린 지젝의 글 가운데 후반부를 발췌한 거였다. 따로 주석을 붙일 만한 시간이 없었지만, 그냥 읽어도 대충 지젝의 주장을 따라갈 수 있다. 아이티의 지도자 아리스티드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한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지젝은 바로 아리스티드를 꼽은 바 있다. 왜 그런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도 읽을 수 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주석은 따로 붙여볼 작정이다. 발표문에서는 '지젝과 민주주의'란 제목을 달았지만, 여기서는 책의 실린 제목을 붙여둔다.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아이티의 혁명과 수난의 역사 혁명,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개관은 177-180쪽을 참조할 수 있고, 아래는 186-196쪽의 발췌이다.
[이제 아이티로 가보면] 라발라스[당]의 투쟁은 원칙주의적인 영웅주의, 그리고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 투쟁은 국가권력의 틈새로 물러나 거기서 ‘저항’하지 않고 영웅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또한 탈근대적 좌파의 모든 경향이 자신들에게 맞설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불리할 상황에서 집권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필수적인 구조조정’을 법제화하기 위해 미국과 IMF에 의해 부과한 조치들에 제약당하면서도 아리스티드는 몇가지 정확하고 실용적인 조치를 취하는 정책(학교와 병원 건설, 사회기반시설 확충, 최저임금 인상 등)을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대중들의 폭력과 결합시킴으로써 군부 패거리들에 맞섰다.
아리스티드는 간혹 ‘페르 르 브뢴’(대중이 행하는 일종의 자기방어로서, 불타는 타이어를 목에 걸어둬 경찰의 암살자나 정보원을 죽이는 행위이다. 얄궂게도 이것은 포르토프랭스의 타이어 판매업자 이름이었는데, 나중에는 모든 대중의 폭력행사 형태를 뜻하게 됐다)을 묵과하기도 했다.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사안으로 인해 아리스티드는 센데로루미노소나 폴포트와 동급 취급을 당했다. 1991년 8월 4일 연설에서 아리스티드는 열광하는 군중에게 “언제, 그리고 어디서 폭력을 사용할지”를 기억하라고 조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라발라스의 대중적인 자경단 조직(키메라Chimeres)과 악명 높은 뒤발리에 독재정권의 암살조직(통통마쿠트tonton macoutes)를 비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늘 좌파와 우파를 ‘근본주의자’라고 동급 취급하는 전략을 선호한다. [하지만] 아리스티드는 이 자경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이름[키메라]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자경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 심각한 위험상태에서, 그리고 만성적인 실업상태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조적 불의, 체계적인 사회폭력의 희생자들이죠... 그들이 언제나 이 동일한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이득을 얻은 사람들에 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 일상의 도덕의식에 비춰보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행위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국가와 경제가 수년, 수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자행한 폭력과 착취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헤겔 역시 이와 동일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사회(기성의 사회질서)가 어떻게 주체가 자신의 실체적 내용과 인정을 찾게 만드는 궁극의 공간이 되는지, 다시 말해서 어떻게 주관적 자유가 보편적인 윤리의 질서의 합리성 속에서만 스스로를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강조할 때, 헤겔은 (명시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사태의 이면, 즉 이런 인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봉기할 권리 역시 갖는다는 사실을 암시했던 것이다. 만일 일군의 사람들에게서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권리, 인격적 존엄성이 박탈당한다면,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또한 사회질서에 대한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질서는 더 이상 그들의 윤리적 실체가 아니니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거나(그것은 우리가 맞서 싸우던 적과 우리를 똑같게 만든다)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는 저항을 위해 후퇴한다”라는 식의 양자택일은 거짓된 것이다. 양자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가정을 공유한다. 즉 국가형태는 우리가 알듯이 여기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장악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뿐이다. 이때 우리는 레닌의 <국가의 혁명>이 주는 교훈을 당당하게 되풀이해야 한다. 즉, 혁명의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그 교훈을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종의 (필연적) 모순어법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이 되는 국가형태도 아니다. 민중의 새로운 참여형태에 근거해 국가 자체가 근본적으로 뒤바뀔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제로 갖게 된다. 숙청으로 사회의 전체 구조가 풍비박산 난 스탈린주의의 절정기에 새로운 헌법이 소비에트 권력의 ‘계급적’ 성격이 끝났음을 선포하고(과거에 배제됐던 계급 구성원들에게 다시 투표권이 주어졌다), 사회주의 정권들이 ‘인민민주주의’(이로써 사회주의 정권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다)라고 불렸던 사실이 꼭 위선이었던 것만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듯 민주주의가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는 피대표자에 대한 대표의 구성적 과잉이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는 소외를 최소화할 것을 전제로 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과 민중 사이에 재-현을 위한 공간이 최소화될 때에만 민중에게 책임을 질 수 있다. ‘전체주의’에서는 이 거리가 제거되고, 지도자가 민중의 의지를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물론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민중은 훨씬 더 그들의 지도자에게서 소외된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결코 민주주의를 위하는, 그리고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단순한 이유를 시사해주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궁극적인 문제는 “권력이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갖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 성격의 (비)민주성 여부와 무관하게, 주권권력 자체와 간련된 ‘전체주의적 과잉’의 특정한 성격(‘사회적 내용’)이 무엇이냐?”라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은 바로 이 수준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권력의 ‘전체주의적 과잉’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의 편에 서 있는 것이지 위계적 사회질서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터놓고 말하면, 그 용어의 완전히 주권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몫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몫 없는 자들’이 국가적 대표의 공간 자체를 자기들 방식으로 ‘비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주주의가 서로 다른 정치 주체에 의해 활용될 수 있는 텅 빈 틀(아돌프 히틀러 또한 어느 정도는 자유선거로 집권한 것이었다)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이 텅 빈 (절차적) 틀 자체에 ‘계급적 편향’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규칙 변경,’ 즉 선거를 비롯한 여타의 국가기제들뿐만 아니라 정치공간의 논리 전체를 바꾸려는 그들의 움직임이 선거로 집권한 급진좌파를 좌파로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기반인 헤게모니를 보장받으려면 그들은 민주적 형태의 ‘계급적 편향’을 올바르게 직관해 그에 따라야 한다.
10. 05. 01.
P.S. 아이티 혁명에 관한 책이 더 출간되면 좋겠다. 현재 소개된 건 <블랙 자코뱅>(필맥, 2007) 정도다. 아리스티드의 책도 더 나오면 좋겠고, 수잔 벅 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도 소개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