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할 책이 있어서 동네 도서관에 갔다오다가 편의점에서 한겨레를 손에 들었다. 북리뷰보다 먼저 읽은 것이 황현산 교수의 칼럼인데,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란 제목이 눈에 들어서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인문학, 특히 어문계열 학과들의 통폐합(상투어론 '구조조정'이라고 한다) 문제가 분란거리가 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정작 이런 '생각'이 필요한 이들은 이런 칼럼도 읽지 않을 테고, 이런 서재에도 드나들지 않을 테지만. 아래 사진은 어제 학교측의 '구조조정'에 반대하여 중앙대 학생들이 삭발식을 하는 장면.
한겨레(10. 05. 01) 불문과에서는 무얼 하는가
우리 세대가 대학을 다닐 때 지방에서 상경한 학생들은 주로 두 사람이 방 하나를 같이 쓰는 하숙집에서 기거했다. 내가 만난 ‘룸메이트’ 가운데 법대생이 둘 있었다. 하나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상수 변호사다.
이 변호사는 학창시절 온갖 책을 가리지 않는 독서광이었고, 글을 잘 썼으며, 입을 열면 시정이 넘치는 말을 쏟아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또 한 사람은 오로지 고시공부에만 전념하는 학생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도서관에서 살았다. 나도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크게 뒤지지 않았지만 그에 비하면 내 공부는 늘 산만했다. 어느 날 그가 나한테 왜 고시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기도 그 질문이 뜬금없다고 느꼈던지 어조를 갑자기 힐난조로 바꾸었다.
불문과에서는 도대체 뭐 하는 거지? 나는 고작 이렇게 대답했다. 불문학과니까 불문학을 하지. 대답이 아니라 대답의 회피였다. 그러나 저 고시생의 확실하고 단단한 신념 앞에서 내 공부의 내용과 목표를 차근차근 이야기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너무나 아득한 일이었다. 문제는 내 생애에서 이렇게 질문해오는 사람이 그 사람으로 끝난 것이 아니란 점이다.
언젠가는 교육부의 관리가 프랑스의 불문학박사보다 한국의 불문학박사가 더 많다는 얼토당토않은 낭설을 티브이 방송으로 퍼뜨렸으며, 가끔은 대학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이제는 영어 하나면 어디서나 통하니까 프랑스어 교육은 필요 없지 않으냐고 넌지시 묻는다. 교육부 관리의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프랑스어 교육 불필요론 앞에서 나는 프랑스어가 무역이나 여행을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거나(실은 그런 일에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불어불문학과에서 프랑스어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데, 상대방은 이어질 말을 듣고 싶은 기색이 아니다.
프랑스의 역사가 현재 세계의 문화적·정치적 지형도의 형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프랑스어로 작성되었으며 지금도 작성되고 있는 많고도 중요한 문헌에 관해서는 말할 틈조차 없다. 그 질문은 처음부터 내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사회의 발전에서 앞으로 오게 될 세계의 그림을 문학이 항상 먼저 그려왔으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세계관에 적대할 사람들을 불어불문학과에서 기르고 있다고 아연 긴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불어불문학과를 비롯한 유럽어문학과는 졸업 후 취직이 특별히 어려운 학과도 아니다. 대기업에 무더기로 취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계에서 연예계까지 각종 문화산업의 미묘한 자리에는 유럽문학과 출신들이 어김없이 끼어 있다. 다양한 장르의 문필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문학으로 함양한 개성과 재능을 토대로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영화감독, 작곡가, 디자이너도 적지 않다. 외국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효과는 우리가 마시는 공기처럼 이 삶의 안팎에 퍼져 있으나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적다. 그 효과가 어디서 오는지 아는 사람은 더욱 적다. 불어불문학과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 설명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은 해두자. 어느 젊은 출판인이 교수신문에 칼럼을 기고하여, 근래 프랑스에서 발간된 인문학 서적들을 번역하는 일이 시급한데, 마땅한 번역자를 구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 그 까다로운 문장을 읽어내고, 그 의미를 깊이 파악하고, 그것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지어, 이 서적들을 번역해낼 만한 소수의 사람들은 저 모욕적인 질문을 자주 받으며, 제 공부의 터전에 위기까지 느끼면서 노력해온 사람들이다.(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10. 05. 01.
P.S. 그 '어느 젊은 출판인'의 칼럼은 얼마전에 나도 읽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교수신문(10. 04. 20) 번역자를 찾을 수 없는 이유
매년 엄청난 종수의 학술서들이 쏟아져 나온다. 출판 통계에 따르면, 그 가운데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율은 세계 선두권에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일본에서 번역된 학술서를 보고 기획을 했지만, 지금은 일본보다 빨리 학술서가 번역ㆍ출판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나의 현상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솔직히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반가운 현상으로 일단 생각해본다. 우리 학문의 자생성 문제를 떠나 이제 인문학은 ‘세계’의 문제에 대해 사유하는 단계로까지 우리의 시야를 넓혀놓았기 때문에 우리 바깥에서 논의되고 사유되는 문제들을 신속하게 ‘수입’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들어서는 학술 번역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문 출판인들이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책을 번역할 ‘전공자’가 점점 고갈돼 간다는 데 있다. 지난 20여 년간은 인문학술 번역 출판이 풍요를 누리던 시기였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출판인 입장에서는 어떤 한 책에 대해 1순위, 2순위 하는 식으로 번역자 레벨을 매기는 분야까지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전공자들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시대상의 반영이겠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순수’한 학문적 열정이 지금에 비해서는 훨씬 많았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푸코와 들뢰즈를 찾아 프랑스로, 하버마스를 찾아 독일로 떠나거나 또는 이 땅에 머물면서 최한기나 정약용을 공부했다. 물론 지금 이 시대에도 그런 연구자들이 많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분위기는 ‘순수’ 학문에 대한 열정이 많이 식어버린 것 같다는, 다시 말해 때로는 학문이 순수 학문으로서 존재해야 할 그 가치를 잃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른바 상아탑 같은 학문적 토대도 필요할 터인데, 지금 우리 시대는 기능적 지식인 양성에만 힘을 쏟는 것 같아 씁쓸하다. 물론 우리 사회에 기능인이 많아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기초과학 없는 응용공학이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사회적 인프라로서 튼실하게 축적된 인문학적 사유이다.
최근 고려대생 김예슬 씨의 사건이나 중앙대 사태는 그런 점에서 우리 대학 사회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될 터이다. 기능적 지식인 양성에만 몰두하는 대학 내에서 철학이니 역사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학문들은 ‘찬밥’ 신세가 돼버렸다.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도 별로 없고, 더 많은 공부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 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른바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대학의 분위기 속에서 고고한(?) 순수 인문학적 열정을 쏟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결국 전공자의 절대 빈곤 속에서 ‘다양성의 담론’이 생명인 인문학은 그 토대를 잃고 말았다. 지금도 우리 밖에서는 새로운 이론들과 사상들은 버거울 정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옥석을 가려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전공자와 인문 출판인의 임무일 텐데, 그 수가 절대적으로 빈곤하다 보니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새로운 이론과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적당한 번역자를 눈 씻고 찾아봐도 해당 전공자를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책을 이탈리아어 원어로 읽고 제대로 번역할 전공자가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의 철학이 일류냐 이류냐를 따지는 것은 이후의 일이고, 우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우리말화해 우리 사유 속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를 예로 든 것이 너무 협소할까. 조금 시야를 넓혀 프랑스 철학으로 눈을 돌려도 형편은 별반 나을 것이 없다.
출판인의 입장에서 학술 번역과 관련한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은 대학 밖의 시선이겠지만, 이미 대학 내부 구성원 사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현상은 그나마 기능적 지식인에 머무르고자 하는 데 대한 저항으로 읽혀 다행스럽다. 대학을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오직 취업과 국가경쟁력만을 향해 일방통행할 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문화적 근간은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칼 폴라니는 “우리 시대에서 이제 인간은 사회 실재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 체념하게 되었으며, 이는 인간이 예전에 믿었던 모습의 자유가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장 밑바닥의 체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가 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