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에서 주인공 친구인 루스는 우리는 부랑자나 인간쓰레기, 창녀,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 정신병자나 죄수들로부터 복제된 거예요. 그게 우리 근원이에요.” 라고 말한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부유하지만 질병이 있는 사람들이 근원자가 되어 자신에게 장기를 기증해줄 기증자를 만들었을 것'이라 설정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가정이었다.
정자은행에 정자를 기증하고 돈을 받는 것처럼, 근원자가 되어 세포핵을 기증하면 분명 돈을 받을 것이다. 생명의 근원을 기증하는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빈곤계층이 돈만을 목적으로 근원자가 될 것이라는 가정은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일하기 싫어하고 불로소득을 좋아하는 나는 근원자가 될 수 있었을까? 만약 나와 같은 유전자를 가지는 인간이 기증자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면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살아갈까?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고집이 있으며, 원치 않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그녀는 결코 간병사와 기증자의 운명에 적응할 수 없을 것이다. 간병사 직업이 적성에 맞는다 하더라도, 그녀 자신이 선택한 길이 아니기에 즐길 수 없을 것이다. 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의 선택지에는 오직 희생항목만 주어져있는 상황 하에서 그녀가 느낄 좌절감과 낮은 자존감, 생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선택의 자유가 없는 상황을 상상한 후, 나는 결코 근원자가 되어 한 생명의 삶에 그렇게 깊은 상처를 주지는 않겠다고, 있지도 않을 일을 다짐한다 

작가의 천재성은 소설 배경과 사건의 인과성에 대한 상상력에 있다.
헤일셤에서 학생들이 갈망하는 것들이나 그들이 어기려고 하는 사소한 규칙들은 모두 그들이 사는 환경의 특이성에서 나온다. 태어나면서부터 지내왔던 공동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친구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터득하는데 예민하며, 성교를 나눌 사적 공간이 없기 때문에 출입금지 지역을 범하는 규칙위반이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진다.
작가가 직접 이러한 세상에 살며 경험한 것은 물론 아니고, 타인의 삶을 관찰할 수조차 없었으며, 심지어는 당사자 혹은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여 그 우물과 같은 곳에서 자신들만의 우주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을 꼼꼼히 그린다
 
헤일셤이 아닌 곳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사육 당하고 있는지, 학생들이 자신들의 운명이 기증자임에 반항할 시도조차 않을 정도로 얼마나 많은 세뇌과정이 이루어져왔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작가가 이것들을 다루지 않은 이유가 독자들이 알기에 별로 대단치 않은 뒷이야기이기 때문인지, ‘너무나도 끔찍하여 그 현실은 외면하고 그나마 약간은 인간다운헤일셤의 이야기에서 끝내자는 의도에서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는 에밀리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에 사실을 약간 은폐한 것처럼, 일반인들이 자신들의 클론의 사육과정과 자신의 친지들이 이식 받는 장기의 기증자가 결국 어떤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는지를 깊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적나라하게 모든 실상을 밝히는 대신 약간의 공백을 남겨 그곳을 우리의 가치판단으로 채우길 바라는 마음에 조금은 의도적으로 감추어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 반전이 없다고?
반전은 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절망적인 그 순간이 바로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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