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드 만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놓았던 김에 <독서의 알레고리>(문학과지성사, 2010)에 대한 리뷰기사도 옮겨놓는다. 드 만식 읽기 혹은 드 만식 해체론이 어떤 것인지 잘 정리해주고 있다.  

한겨레(10. 05. 22) “책은 언제나 의도와 다르게 이해된다” 

폴 드 만(1919~1983·사진)은 덴마크에서 태어나 벨기에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예일대에서 학문적 전성기를 보낸 문학이론가이다. 그는 이른바 ‘예일학파’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이력을 요약하면, 프랑스에서 출현한 ‘해체주의 사상’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 퍼뜨렸다는 한 줄의 문장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번역자이고 전파자였는데, 뛰어난 전파자들이 그러하듯 원본을 재해석해 새로운 사유를 덧붙였음은 물론이다. 드 만의 목소리는 특히 문학이론, 문학비평에서 크게 울렸고, 그 울림이 퍼져 사상 일반에까지 미쳤다. 



드 만은 평생 65편이라는 적지 않은 에세이와 평문을 썼지만, 생전에 펴낸 책은 두 권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의 알레고리>는 그중에서 두 번째로 낸 책이다. 이 책의 출간 연도는 1979년이지만, 실린 글들은 대부분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썼다. 해체주의의 대명사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인데, 드 만은 데리다를 1966년 처음 만난 뒤 해체주의 사상 활동의 동지가 됐다. <독서의 알레고리>에 묶인 글들은 이 해체주의가 드 만의 언어로 옮겨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그대로 해체주의가 영어권에 번져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드 만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 책의 대부분은 ‘해체’가 불화의 씨가 되기 이전에 쓰였다”고 밝힌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 해체주의는 ‘이론 전쟁’으로 불린 격한 논란의 한가운데로 진입한 상태였다. 그 전쟁을 더욱 격렬하게 만든 것이 이 책인 셈인데, 드 만은 그 머리말에서 해체주의가 그동안 오해받아 왔음을 강조한다. 한쪽에서는 해체주의가 아무런 현실적 불온성도 없는 대학 강단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체주의가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지적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한다. 드 만은 둘 다 틀렸다고 말한다. ‘해체’는 단순한 지적 유희도 아니고 허무주의적인 지적 테러도 아니다.

그렇다면 드 만이 생각하는 ‘해체’는 무엇인가. <독서의 알레고리>는 해체에 관한 드 만의 생각을 드 만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릴케·프루스트·니체, 그리고 특히 루소의 저작들에 대한 분석이다. 그 저작들을 읽어 추출해낸 결정체가 제목으로 쓰인 ‘독서의 알레고리’다. 여기서 ‘독서’(reading)란 말 그대로 ‘책을 읽는 행위’를 말하는바, 책 속의 기호(글자)를 매개로 삼아 저자가 말하는 것을 실제 사태와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쉽게 말해, 책을 읽고 사태를 이해하는 것이 독서다. ‘독서의 알레고리’는 그 독서가 곧 ‘알레고리’(allegory)라는 말인데, 여기서 알레고리는 ‘(어떤 것으로써) 다른 것을 말하다’라는 어원적 의미로 새겨야 한다. 비둘기로 평화를 나타내고, 왕관으로 권력을 암시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그렇다면 알레고리는 일종의 은유(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데, 은유가 보통 단어나 문장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 기교라면, 알레고리는 통상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 구실을 한다.

여기서 요점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라는 알레고리의 그 본질에 있다.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독서란 저자가 말하는 것을 독자가 그대로 읽어내는 행위다. 그러나 실제의 독서는 저자가 말하려는 것을 언제나 다르게 이해한다는 것이 드 만의 논점이다. 기표와 기의의 일치, 단어나 문장이나 책 전체가 가리키는 것과 그 가리킴의 대상 사이의 일치, 요컨대 책이 말하려는 것과 독자가 이해한 것의 일치가 독서의 이상적 상태일 터인데, 이런 완결된 독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 만의 발상이다. 독서는 언제나 기표와 기의 사이의 차이를 내장하고 있다. 글이 의도하는 바와 실제로 이해되는 바 사이에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독서는 번번이 오독·오해·오인을 포함한다는 것, 저자가 진짜 의도한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것, 이것이 드 만의 주장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독서 곧 읽기가 책을 넘어 삶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삶 자체가 읽기의 과정이다. 우리 삶은 끊임없이 읽고 해석해야 할 것들의 연속체다. 사람들의 눈빛, 표정, 몸짓을 읽어야 하고, 책을 읽듯 사람의 말을 읽고 속뜻을 이해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읽기가 언제나 완결된 읽기에 도달할 수 없고 궁극적 읽기에 성공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인식이란 언제나 굴절과 착란과 오해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투명한 인식,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 세워진 근대 학문은 그 토대를,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객관적인 총체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근대적 믿음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드 만의 ‘완결된 독서의 불가능성’이라는 테제가 말 그대로 해체적임을 실감할 수 있다. <독서의 알레고리> 이후의 작업은 드 만 사후에 <이론에 대한 저항> <미학적 이데올로기> 같은 책으로 묶여 나왔는데, 거기에서 그의 해체 사상은 정치적·사회적 이념으로 확장된다.(고명섭기자) 

10. 05. 22.  

P.S. '독서의 알레고리'가 비단 고급 텍스트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매직'으로 쓰인 간단한 글씨도 '필자'(혹은 '조작자')가 진짜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의도를 '배반'하는 것이 '독서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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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ocris 2010-05-22 13:21   좋아요 0 | URL
"'매직'으로 쓰인 간단한 글씨도 '필자'(혹은 '조작자')가 진짜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의도를 '배반'하는 것이 '독서의 윤리'다."에 접붙인 만화 꼬라지라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한심한 쓰레기 글이다. 내가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식으로 수만의 책을 읽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의미냐고? 그런데, 댁이 어리석다고 보는 국민의 독서 윤리는 댁과는 전혀 다른 배반도 가능함을 잊지 마시길...

로쟈 2010-05-22 13:39   좋아요 0 | URL
'쓰레기'라서 쓰레기 댓글이 올라오나 보군요. '어리석은 국민'이 꽤나 고마우신가요? 아시겠지만, 권력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mediocris 2010-05-22 14:01   좋아요 0 | URL
나는 어리석다고 보지 읺지만 댁은 어리석다고 보는 쪽인가? 권력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일반론과 천안함과 현정권이 무슨 연관이 있나요?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명제를 너무 다의적으로 사용하셨고, 게다가 권력이라는 매개념을 부당하게 주연시키고 있습니다. 화가 나시더라도 웬만하면 쓰레기 만평은 접붙이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로쟈 2010-05-22 14:09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가 다수결이라고 하지만 소위 '다수'가 항상 옳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죠. 그게 다수의 두 얼굴 아닌가요? '쓰레기 만평'이라고 하셨는데, 무성의하면서도 노골적인 북풍 몰이라는 '쓰레기 전략'이 없다면 쓰레기 만평도 없겠지요...

mediocris 2010-05-22 13:33   좋아요 0 | URL
댁이 읽지 않은, 아니 읽고 싶지 않을 책의 내용 중에 이런 장면이 있지. 위대한 수령께서 고압 송전선을 주체적으로 지하매설하라는 지시를 하셔서 고압선을 플라스틱 파이프에 넣어 지하 매설을 했지. 그래서 북한의 누전율이 거의 70% 이상이지. 금강산 가보셨나? 고압선 전주 꼬라지 보셨어? 그게 천안함 폭파 어뢰에 매직으로 쓰인, 댁이 남조선을 비꼬고 싶어하는 ‘1번’과 아주 연관이 깊은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나? 그 잘난 송전선으로 남한의 고급 전기를 보내겠다던 대통령 되겠다는 어느 놈하고 댁과 다른 것 같지?

로쟈 2010-05-22 13:49   좋아요 0 | URL
국방부 주장대로 이번 사건에서 북한이 '대단한' 군사력을 보여준 것이라면 '감탄'이라도 하겠습니다(저는 나름대로 북한을 얕잡아보는 쪽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건 너무도 무성의한 '증거들'이네요('1번'도 녹 위에 쓴 거라는 의혹은 아시겠지요?). 송전선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나라의 잠수정이 작전 중인 한미 해군을 농락하다니요...

mediocris 2010-05-22 14:06   좋아요 0 | URL
누군가의 말대로 댁은 '권력의 어리석음'과 '권력의 전지전능'을 동치시키고 있군요. 책을 많이 읽으시니까 나폴레옹의 러시아 전선에서의 패퇴가 프랑스군의 군복 단추 때문이라는 내용도 아시겠군요. 역사적 계기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무성의'하게 보이거나 '의혹'이 있다고 증거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게다가 '열 사람이 한 도둑 못잡는다'는 속담도 있어요.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로쟈 2010-05-22 14:02   좋아요 0 | URL
참고로, '천안함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어느 분이 제기한 의혹을 옮겨놓는다.
1. 절단면도 보안상 비공개라고 하더니 선거기간되니깐 공개~
2. 선체의 스크레치 자국이 선거기간이 되니 지워진다.
3. 침몰 원인도 모르고 두 달 넘게 질질 끌더니 선거기간 며칠 남겨놓고 갑자기 북한 어뢰 공격이라고 발표
4. 선거 4 일 남겨놓고 대통령이 3개 방송 생방송으로 북한 공격이라고 대국민 간담회 발표
5. 없던 어뢰가 선거 기간 되니까 갑자기 발견된다. 그것도 어부가 건졌단다.
6. 어선 어부에게 어디서 건졌냐고 물어보니 우물쭈물하다 해군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7. 천안함을 충격파만으로 두동강낸 가공할만한 어뢰가 멀쩡하게 건져졌다.
8. 어뢰는 마치 몇십년은 된 것처럼 부식되어있는데 매직으로 쓴 한글은 마치 방금 쓴 것 같다.
9. 아예 건지는 김에 조중동이 말했던 어뢰 조종 잠수부 시체도 건저내지?
10.잠수함에서 발사된 어뢰가 주무기였다고 발표했으면 조중동이 주장한 인간조종어뢰설도 유언비어아녀? 이 놈들도 유언비어 날조로 족쳐봐야지 안나?
11. 잘 녹화되던 TOD가 폭발당시에만 안찍혀있다는 건 뭐 다 아는 사실..
그 사병 지금쯤 영창 가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에 대한 이야긴 없네?
12. 버블제트 어뢰가 터져서 충격파만으로 배를 두 동강 냈는데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뇌진탕은 커녕 피한방울 안흘리고... 사망자들은 전부 익사로 인한 사망. 무슨 물기둥이 레이저냐?
13. 어뢰 폭발로 100m의 엄청난 물기둥이 솟아올랐는데 갑판위의 사람들은 물방울이 얼굴만 살포시 적셨다.
14. 갑판 위에 있던 여러명의 군인들은 100m 짜리 거대한 물기둥을 못보고 야간에 몇 Km 떨어진 곳에서 한 엄청난 시력을 가진 군인 단 한명만 물기둥을 목격했다네?
15. 한미연합 훈련으로 이지스함까지 있었다는데 잠수함과 어뢰는 탐지도 안되고 천안함만 격추시키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리고 천안함에 대잠수함, 어뢰 탐지능력이 있는데 전혀 탐지도 되지 않았다는 것...

mediocris 2010-05-22 14:08   좋아요 0 | URL
서프라이즈가 인터넷 여론장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신다면 서프라이즈 대표나 부르킹스연구소 연구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깝군요.

로쟈 2010-05-22 14:10   좋아요 0 | URL
안타깝게도 인터넷 여론장에서 더 바닥을 기고 있는 건 국방부 주장입니다...

mediocris 2010-05-22 14:14   좋아요 0 | URL
그렇게 생각하세요? 답이 없군요. 댓글 이만 접겠습니다.

qualia 2010-05-22 15:42   좋아요 0 | URL
mediocris 님, 걍, 가마니나 짜고 앉아 계시면 “중간”쯤은 갈 수 있을 텐데요. 아쉽네요. 그럼, mediocris 님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 어뢰 공격 때문이라는 남한 군부의 일방 발표를 철석같이 믿으신다는 겁니까? 증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참, 내원, 무뇌아 인증도 그런 무뇌아 돌빡 인증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합리적 · 논리적 반박이 궁해지니까, 꼬랑지 내리고 내빼는 건 정말 비겁해 보입니다. 자기 소신이 철석 같다고 믿는다면, 논리정연하게 반박하셔야지요. “명제”니 “매개념”이니 “주연”이니, 한 논리 하시는 분이 내빼긴요.

[주인장 님께 실례인 줄 압니다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어서요. 질 낮은 댓글 죄송합니다.]

mediocris 2010-05-29 19:43   좋아요 0 | URL
"가마니나 짜고 앉아 계시면 중간쯤은 갈 수 있을 텐데요. mediocris 님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 어뢰 공격 때문이라는 남한 군부의 일방 발표를 철석같이 믿으신다는 겁니까? 무뇌아 인증도 그런 무뇌아 돌빡 인증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합리적, 논리적 반박이 궁해지니까 꼬랑지 내리고 내빼는 건 정말 비겁해 보입니다." 오랫만에 들어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로쟈스키들의 댓글이 달렸다. 가마니는 아니로되 어릴 때 새끼는 꼬아봤지만, 정작 이 친구의 속셈은 나를 수구꼴통 노인네로 만들고 싶은 건데 전형적인 ‘우물에 독타기’다.

천안함 사건에 관한 한 뒤레퓌스 재판의 프랑스 우익 군부를 연상케 하는 로쟈스키들의 인식은 ‘증거’나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다. 그들의 굳센(?) 믿음과 만나면 어떤 합리적 논쟁도 교점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물러났더니 “명제니 매개념이니 주연이니, 한 논리 하시는 분이 내빼긴요.”라고 나무란다. 전투함의 중심 부분 20m가 아예 날라가버렸는데도 굳세게 좌초설을 믿는 이들에게는 차라리 “꼬랑지 내리고 내빼는 무뇌아”가 되는 게 낫지, 뭣하러 없는 TOD 영상 만드는 따위의 헛심 빼겠는가?

nanasi 2010-05-22 16:03   좋아요 0 | URL
댓글은 본문의 주내용과 별 상관없이 먼 산으로 가는군요.
mediocris님이 저 만평에 동의하든 동의하지않든 시의적절한 예제같습니다만.

2010-05-23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10-05-23 16:07   좋아요 0 | URL
미꾸라지 한마리가 기어들어와서 분탕질을 쳐놨군요.
폴드만 책의 서평글에 "1번"을 연계시킨 로쟈님의 센스에는 무릎을 치지 않을수 없네요..^^

펠릭스 2010-05-23 17:22   좋아요 0 | URL
영화(소설)을 보는(읽는) 재미는 극적 반전이나 인물의 갈등구조를 보(읽)는 재미입니다. 모두가 당신이 옮다는 찬사보다는 의도적인(?) 미꾸라지일지 모르지만 헤집고 돌아가는 이단아도 필요합니다. 막아내는듯(?)한 주인장도 애쓰기는 마찮가지입니다. 좀 더 자신의 의문이나 주장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면밀함(공감대)과 지구력 그리고 예절이 필요합니다. 로쟈님과 mediocris님 감사합니다.

오감독 2010-05-27 02:24   좋아요 0 | URL
누가 로쟈님 서재에서 열폭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해서 들어왔는데, 이미 정리분위기군요..^^ 좋은 글 항상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국방부의 주장을 이처럼 '열렬히' 옹호해 주시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대타자는 '항상 이미' 죽어 있다"는 지젝의 명제가 떠오릅니다. 대타자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주체는 죄의식을 떠맡고 희생의 제스쳐를 취함으로써 대타자의 동일성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아이구 맙소사.. 이 양반들아 지킬 게 따로 있지... 싶네요. 쩝!

mediocris 2010-05-29 20:32   좋아요 0 | URL
대타자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주체는 죄의식을 떠맡고 희생의 제스쳐를 취함으로써 대타자의 동일성을 지킨다? 지젝을 제대로 이해하던 말던 개의하지 않기로 하고, 어쨌든, 하여간, 좌우간, 자신들은 선군정치의 타자가 아니라는 로쟈스키들의 뱃보는 알아줘야 한다.

오감독 2010-06-03 21:55   좋아요 0 | URL
껄껄껄 "배포" 하나는 크다는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선군정치니 타자니 무슨 말인지 복잡해서 찾아봤더니, 뭐 별말 아니고 빨갱이라고 욕하는 거였군요. 맙소사 요즘 같은 세상에 ^^.. 님의 "뱃보"도 알아줄만 합니다.
 
인간생태와 어머니, 그리고 종교라는 주문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동녘사이언스, 2010)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친절한 박스기사도 곁들여져 있다). 나도 조금 읽어보고 있는데, 일단 '데닛은 읽기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주는 책이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비슷한 난이도라고 보여진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모처럼 '즐독'할 수 있는 교양서이다.  

 

한국일보(10. 05. 22) 종교를 진화론적 관점으로 해체… '금기의 장막' 깨기 

과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을까. 각각이 '겹쳐지지 않는 교도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평화공존파가 있긴 하지만, 최근 과학계에서 부상하고 있는 이들은 맹렬한 우상 파괴 과학자들이다. 과학계의 '신(新) 무신론' 운동을 주도하는 최전선의 전사가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69)라면, 대니얼 데닛(68)은 이를 종합하는 철학적인 버팀목 같은 인물이다. 이 양대 거두의 대부는 물론 찰스 다윈이다. 



인지과학 및 심리철학의 거장인 대니얼 데닛 미국 터프츠대 교수의 <주문을 깨다>는 2006년에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함께 나란히 출간된 종교 비판서다. 생물학뿐만 아니라 인지과학, 인류학, 경제학 등으로 퍼져가고 있는 현대 진화론의 성과를 집적, 종교 현상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분석한 논쟁적 저작이다.

데닛이 책 제목에서 직접 겨냥하고 있는 '주문'은 종교를 솔직하고 전면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막는 금기다. 주문 깨기는 곧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종교를 둘러싸고 있는 거짓과 신화, 위선의 장막을 걷어내려는 시도다. "나는 금기 깨기를 두려워하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놓으시오! 놓으시오! 추락하는 걸 느끼지도 못할 겁니다!"(47쪽)

데닛의 작업은 먼저 종교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 뒤 애니미즘, 샤머니즘 등의 민속종교가 체계적인 종교로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그가 종교적 관념의 뿌리로 꼽는 것은 '활동이 있는 곳에 행위자를 찾으려는 과잉 경향'(예컨대 바람이 분다면 바람을 일으킨 행위자를 찾는 것)이다. 이는 원래 포식자를 탐지하고 추론하는 능력으로서, 자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인류가 진화시킨 능력이다(먹고 먹히는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선 바스락거리는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이 인지능력에서 나온 부산물이 바로 나무, 바람, 구름 등에 각각의 행위자들이 있다는 물활론(物活論) 등의 초기 종교형태라는 것이다.

이런 종교관념들이 무익한 것만은 아닌데, 인간에게 '책임 회피' '건강 유지' 등에 도움을 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데닛은 이로써 종교 관념이 자연선택 과정에서 살아남아 복제와 변이 등을 거치면서 진화를 거듭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데닛이 줄기차게 던지는 질문은 '누가 이익을 보느냐'다. 초기 종교 형태에서 '비밀주의'와 '반증에 대한 방어' 등이 출현한 데에는 종교적 사제들의 이기적 동기가 개입했으며 사제와 정치권력의 동맹도 한몫했다는 것이다. 종교는 이후 '믿음에 대한 믿음'이라는 만능의 패를 개발해 합리적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들며 영속성을 획득하게 됐다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지옥불이 채찍이라면 신비는 당근이다. 믿음을 요구하는 명제는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301쪽)

여기서 궁극적 수혜자는 누구인가? 데닛에 따르면, 바로 종교 그 자체다. 종교 스스로가 독자적 단위로 자율성을 획득해 숙주(인간)들의 충성을 이용해 복제하고 번식한다는 결론이다. 이는 곧 도킨스가 제기한 '밈 이론'과 같은 맥락이다. 도킨스가 종교를 해악만 끼치는 '바이러스'로 본다면, 데닛은 종교를 야성에서 순화된 '길들여진 밈'으로 보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종교인들이라면 소름 끼칠 정도로 경악스런 주장이다.

종교적 실체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종교는 도덕성을 함양하고 삶의 의미를 주는 긍정적측면이 있지 않는가? 이에 대한 데닛의 대답은 "확인된 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신앙의 절대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종교의 특성상 관용의 제스처는 위선이며 언제든지 광신과 배타성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위선의 함정에 빠졌고, 빠져나갈 길은 없다… 엄숙한 종교의 세계에서 급진파는 자신의 신앙을 내세워 비타협을 고집하고 중간파는 위협을 느끼고 침묵을 지키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믿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377쪽)

물론 진화론자들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생물학적 환원주의'라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진화론자들이 무기로 삼는 '누가 이득을 보느냐'는 질문 자체가 환원주의적 요소를 깔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데닛이 이 책에서 설명한 종교의 진화 과정 역시, 그 스스로 인정하듯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하지만 각종 종교 현상을 둘러싼 무수한 호기심에 대해서 그냥 얼버무리거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지 않으려 한다면, 종교와 과학의 최전선의 대척점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데닛의 이 저작은 피해갈 수 없는 책이다. 56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에는 종교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이 쏟아지며, 거기 답하기 위한 진화론자들의 현대적 연구 성과가 결집돼 있다.(송용창기자)  



●종교 진화론 진영內서도 시각차 

진화론 진영 내부에서도 종교 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은 학자들마다 조금씩 달라 논쟁이 한창 진행중이다. 초월자를 믿는 행위가 독 있는 음식을 피하는 행위처럼 진화적 적응의 직접적 산물이라고 보는 '종교 적응주의론'의 대표적 학자는 에드워드 윌슨 하버드대 명예교수와 데이비드 슬론 윌슨 뉴욕 주립대 교수다. 에드워드 윌슨은 종교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고, 사후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며 불확실한 상황에서 판단을 도와주기 때문에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즉 종교가 개인의 생존과 번식에 직접적 이득을 줬기 때문에 선택됐다는 것이다. <사회생물학> <인간본성에 대하여> <통섭> 등의 여러 저서가 번역돼 있다.

데이비드 슬론 윌슨 교수도 종교를 적응의 산물로 보지만, 개인이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에드워드 윌슨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집단의 협동심을 증진시키는 이점 등으로 집단선택으로 종교가 진화했다는 것이다. 종교 행위를 통해 '누가 이득을 보느냐'는 질문에서 에드워드 윌슨은 개인이, 데이비드 윌슨은 집단이 이득을 봤다는 설명이다. 데이비드 윌슨의 주저 <종교는 진화한다><진화론의 유혹> 등도 국내에 번역돼 있다.

이에 맞선 것이 종교를 적응의 산물이 아닌 부산물로 보는 견해다. 종교 행위는 행위자 탐지 능력 등의 인지 능력에서 따라 나온 부산물로 인류의 적응에 직접적 이득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 '밈 이론'으로, 부산물이었던 종교가 자율성을 획득해 스스로 복제 번식하며 진화했다는 이론이다. 리처드 도킨스와 대니얼 데닛이 대표적인 학자다. '누가 이득을 보느냐'는 관점에서 보면 수혜자는 종교 그 자체라는 것으로 종교 비판으로서는 가장 과격한 입장이다. 다만 도킨스는 종교를 박멸해야할 대상으로 보는 반면, 데닛은 '야생 밈'과 '길들여진 밈'으로 구분해 종교를 박멸이 아닌, 순화시켜야할 대상으로 본다.

10. 05. 20.  

P.S. 데닛의 기본 아이디어는 본문의 첫 문단에서 제시된다. 번역본 표지의 컨셉이기도 한데, 바로 개미와 개미의 행동을 조종하는 창형흡충이란 기생충 얘기다. <자유는 진화한다>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고, 기억엔 도킨스 또한 <이기적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에서 언급하고 있는 유명한 사례다.   

초원에서 개미 한 마리가 풀잎을 타고 열심히 기어오른다. 개미는 높이 더 높이 오르다 결국 떨어지고,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매번 꼭대기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오르고 또 오른다. 개미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개미는 이 고되고 헛된 행위를 통해 무슨 이익을 찾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지금 개미는 예를 들어 영토를 더 잘 굽어보거나, 먹이를 찾거나, 잠재적 배우자에게 과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개미의 뇌는 창형흡충이라는 작은 기생충에게 점령당했고, 그 기생충은 번식주기를 완성하기 위해 어떻게든 양이나 소의 뱃속에 들어가야 한다. 이 작은 뇌 기생충이 개미의 자손이 아닌 자기 자손에게 이득이 되는 위치로 개미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미에게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물고기와 생쥐를 비롯한 다른 생물 종들도 이처럼 행위를 조작하는 기생생물에 감염된다. 이 편승자들은 자신의 기주생물로 하여금 엉뚱한 행동을 하게 만들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게 만드는데, 이는 전적으로 기주생물이 아니라 기생생물의 이익을 위해서다.

요컨대, 데닛의 인간과 종교와의 관계를 개미와 창형흡충의 관계로 바라본다. '누가 이득을 보느냐'는 관점에서 보면 수혜자는 기주생물인 인간이 아니라(인간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호하다) 기생생물에 견줄 수 있는 종교 그 자체다. 곧 종교라는 문화적 복제자(밈)이다. 신의 말씀을 '창형흡충'에 비유하는 것이 언짢을지 모르지만, 데닛이 적시한 대로 이것은 성경에서의 비유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곧 마태복음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은 씨앗이고, 그리스도는 씨 뿌리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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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5-22 13:53 
    [책] 데닛은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via 로쟈

이번 주엔 주목할 만한 책들이 여럿 등장했는데, 교양과학서도 예외가 아니다. 일단 한나 홈스의 <인간생태보고서>(웅진지식하우스, 2010). 원제는 '옷 입은 원숭이(The Well-Dressed Ape)'이고,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문예춘추, 2006; 정신세계사, 1991)를 바로 연상케 한다.  

 

2008년에 출간됐으니까 '털없는 원숭이'의 최신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부제대로 '먹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동물학적 관찰기'로 읽어봄직하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나의 유쾌한 동물 이야기>(한얼미디어, 2006)로 나온 모리스의 자서전이 원래는 <옷을 입은 원숭이>(자유문고, 1987)라고 출간된 적이 있다.   

그리고 또 한권은 세라 블래퍼 허디의 <어머니의 탄생>(사이언스북스, 2010). 저자가 생소하다 싶었는데, '사라 블래퍼 홀디'라고 먼저 소개됐던 영장류학자이자 인류학자.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서해문집, 2006; 서운관 1994)가 그녀의 대표작이다. 이번에 나온 책은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란 부제대로 모성의 본질을 파헤친 책. 원서로 752쪽, 번역본으로론 1016쪽에 이르는 대저다.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모성의 역사를 다룬 새리 엘 서러의 <어머니의 신화>(까치글방, 1995)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그리고 세번째 책은 독서 우선순위로는 제일 첫머리에 놓고 싶은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동녘사이언스, 2010)이다. 이때 주문은 '종교라는 주문'을 가리킨다. 국내에서 화제가 됐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의 원제와 나란히 놓으면, '종교라는 주문, 신이라는 망상'이 된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철학적으로 대변하는 책"이라는 게 압축적인 소개다. 해설을 쓴 최종덕 교수에 따르면, "데닛의 <주문을 깨다>는 종교 비판서 중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억엔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알마, 2008)도 비슷한 시기에 출간되어 '3인방'을 구축했더랬다. 데닛의 책이 제일 나중에 소개된 셈. 그래도 만들자면 '3종 세트'다.  

   

데닛의 책은 <자유는 진화한다>(동녘사이언스, 2009)가 작년에 나왔고, 이제 남은 책으로 내가 기대하는 건 <다윈의 위험한 생각>이다. 데닛의 책으론 <내용과 의식>(2010)이 최신간으로 뜬다(1969년에 나온 첫 저작을 다시 펴낸 것이다). 한 저자를 제때 따라가는 것도 이렇듯 쉽지가 않다... 

10. 0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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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데닛은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22 09:41 
    대니얼 데닛의 <주문을 깨다>(동녘사이언스, 2010)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친절한 박스기사도 곁들여져 있다). 나도 조금 읽어보고 있는데, 일단 '데닛은 읽기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주는 책이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비슷한 난이도라고 보여진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얘기다. 모처럼 '즐독'할 수 있는 교양서이다.     한국일보(10. 05. 22) 종교를 진화론적 관
 
 
starla 2010-05-21 07:00   좋아요 0 | URL
주문을 깨다, 가 나와줘서 저도 만세! 부르고 있습니다. 하핫.
한나 홈스 책도 참 재미있겠네요.

로쟈 2010-05-21 09:35   좋아요 0 | URL
기다리던 분들이 계시군요.^^

2010-05-21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1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1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1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hooseme 2010-05-29 10:35   좋아요 0 | URL
<주문을 깨다>의 출판일을 출판사에 문의 했을 때 4월 말에 나온다고 했었는데 결국 5월 중순이 지나서야 나오더군요. 다윈의 위험한 생각도 올해 안엔 출간된다고 하네요.

만들어진 신과 비슷한 난이도라고 하셨는데 1/4쯤 읽은 바로는 그보다는 난이도가 높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철학자가 쓴 책이라서 그런건지 도킨스만큼 명료하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네요. 철학자의 특성상 설명을 하는 것 뿐 아니라 질문도 많이 던지고요. 뭐 아직은 초반부니까 끝까지 읽어보고 다시 판단해야겠지요.
 

어제 오전과 저녁 강의 사이에 시간이 비어서 대학로CGV에서 이창동 감독의 <시>를 봤다. 곧 종영하는 걸로 나와서 서두른 것이기도 했다(나는 전작 <밀양>을 스크린에서 보지 못했다). 영화는 격렬한 감정을 다룬 전작에 비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단조롭고 단선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비범한 영화였다. 이런 감독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온갖 거짓과 추악의 횡행 속에서도 한편의 '시'처럼 느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시란 눈으로 볼 때 아름다운 것만 아니라 어쩌면 추하고 더러운 것에 숨은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라고. 칸국제영화제에서의 상영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영화제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으면 좋겠다...   

경향신문(10. 05. 21) "시는 추함에서 아름다움 찾는 일”  

제63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인 <시>가 19일(현지시간) 공개됐다. 갈라 스크리닝에 비해 박수가 박한 언론 시사에서도 영화가 끝나자 장시간 박수가 이어졌다.

 

이창동 감독은 언론 시사회 직후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시>는 문학의 한 장르인 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며 “시란 눈으로 볼 때 아름다운 것만 아니라 어쩌면 추하고 더러운 것에 숨은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라고 말했다.

<밀양>으로 2년 전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전도연씨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긴 이창동 감독에 대한 반응은 뜨거운 편이었다. 회견장에 모인 많은 외신기자들은 대부분 <밀양>에 대해 알고 있었다.

“굳이 구분하자면 <밀양>이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라면, <시>는 가해자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해자를 손자로 둔 할머니 마음의 죄의식과 시를 쓰기 위해 찾아야 하는 세상의 아름다운 말 사이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주연 윤정희씨(왼쪽)는 외신기자의 질문에는 프랑스어로, 한국 기자의 질문에는 한국어로 답했다. 객석에는 그의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도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영화로 돌아온 소감에 대해 윤정희씨는 “영화는 내 인생이다. 한 번도 영화를 떠난 적이 없다. 90살까지는 지금처럼 활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나이든 육체를 드러낸 장면에 대해선 “영화배우는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나이와 세월의 흐름은 생각지 않는다. 세월의 흐름에 맞는 역할에 충실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소설가이자 문화부 장관이었고, 지금은 영화감독인 이 감독에게 어느 직업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는 질문도 던져졌다. 그는 “어떤 직업이 좋아서 선택한 적은 없다. 심지어 영화감독이라는 일조차 마찬가지다. 영화를 만드는 일에 회의가 생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영화감독이 재미만 따지면 제일 좋다”고 말했다.

시사회 직후 만난 독일 텔레비전 ZDF의 마이크 플라첸은 “<밀양>과 <시> 모두 좋았지만, <시>가 더 압축적이고 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시의 특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시적인 분위기를 내는 대단한 영화”라며 “지금까지 본 경쟁작 중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칸영화제는 23일 폐막과 함께 수상작을 발표한다. 

10. 05. 20. 

P.S. 지난주 씨네21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창동 감독은 <시>가 <밀양>과 마찬가지로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밀양>의 연장선이라면 영화로 질문을 한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다.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한다는 점, 답을 쉽게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 연장이라는 거다. 하지만 나에게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점점 질문을 안 하니까. 나는 영화가 우리의 삶에 당연히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영화는 질문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 나라도 질문을 해보자 하는 거다. 다음을 또 기약하긴 어렵지만 이번만 할게, 하는 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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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2010-05-2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함 속의 아름다움'이라는 감독의 말을 들으니 무릎을 치게 되더군요. 저는 아직 경험의 부족 때문이겠지만, 추함을 보고 분노하고 몸서리치며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반추해보니 그 추악한 일상들 이면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물결(오프닝과 클로징 쇼트)같은 아름다운 풍경들을 왜 잊고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살한 여중생에 대한 보상문제를 논의하는 창밖으로 꽃잎의 아름다움을 쫓는 여인의 모습....그리고 그 긴박한 긴장감.

끝내 여중생의 죽음의 장소와 여인의 감정이 이어지던 다리...그리고
죽은 아이가 회생한듯 흠뻑 젖은 채 길 위에 서 있던 여인의 모습.



결국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그러나 여전히 슬픔이 아름다움으로 전이시키기 어려운 잔상으로 남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 그만큼 뿌리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5-21 09:37   좋아요 0 | URL
영화는 두번, 세번 보도록 자극하는 듯해요. 개인적으론 시낭송회 풍경 같은 게 너무나 '정확하게' 그려져서 놀랐습니다...

쉽싸리 2010-05-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주 대구 00시네마에서 보았죠. 토요일 저녁시간 인데도 열 명도 채 안되는 관객들 ㅜㅜ
기본 상영관이 너무 적은것 같습니다. 자본의 논리인지 흥행의 논리인지,,

같이본 파트너는 윤정희씨 연기가 별로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참 좋았습니다. 약간 들뜬것 같은, 푼수? 같은 연기가 딱 이더군요.
이불 뒤짚어 쓴 손자를 일으키려고 하는 장면에서는 찡하더군요.
이창동감독 영화의 배우들은 참 연기를 잘해요. 자연스럽게.
이왕이면 좋은 결과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하네요,,,

로쟈 2010-05-21 09:38   좋아요 0 | URL
이런 영화를 많이 안 보는 세태와 우리의 정치현실이 무관하지 않겠지요...

blanca 2010-05-20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말에 동감합니다. 90살까지. 너무 감동적입니다. 시를 보러 가야겠습니다. 무리를 해서라도요^^;; 참, 로자님 덕택에 생존자 서문 읽고 있는데 벌써 가슴이 떨리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로쟈 2010-05-21 09:39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어제 받았습니다.^^
 

엊저녁에 알라딘 공부방 2기 강의가 있었다. '인문학으로 마음의 가난을 벗어나는 법'이 주제였고, 나는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 들어 있는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이란 글과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열린책들, 2008) 끝부분에 나오는 한 대목을 자료로 이용했다(이제 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가져온 걸로 오기했다). 그 대목은 옮겨놓는다. 밑줄긋기에 더 적합해 보이지만 '로쟈의 한줄'로 분류해놓으면서. 물론 그 한 줄은 '노르웨이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전쟁(2차대전)이 터지자 나는 평화나 위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찮은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어려운 시절에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자부심을 찾아야 하겠기에, 다시 크레타의 산으로 갔다. 언젠가 나는 일요일 예배가 끝난 다음 성당 입구의 계단에 앉아서 남자다운 용감성을 찾는 방법에 대해 젊은이들에게 얘기하는 늙은 노병을 보았다. 「가능하다면 두려움을 부릅뜬 눈으로 빤히 보아라.」 그가 말했다. 「그러면 두려움은 겁이 나서 도망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지팡이를 들고, 어깨에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갔다. 독일군이 노르웨이로 쳐들어가 정복하려고 싸우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대낮에 프실로리티 기슭을 건너가려니까 사나운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어이, 여봐요, 잠깐 기다려요! 하나 물어봅시다!」
머리를 들어 보니 어떤 남자가 커다란 바위에서 뒤로 물러나 고꾸라지듯 내려왔다. 그는 바위에서 바위로 성큼성큼 내려왔고, 그의 발밑에는 돌멩이들이 굴러 요란한 소리가 나서 산 전체가 그와 함께 무너지는 듯싶었다. 그가 늙고 덩치가 큰 양치기라는 사실을 이제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기다렸다. 무얼 알고 싶어서 저렇게 극성일가? 나는 궁금했다.

그가 가까이 와서 바위 위에 섰다. 겉으로 드러난 가슴은 털이 나고 김이 피어올랐다.
「이봐요, 노르웨이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 그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는 어느 나라가 곧 정복되리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노르웨이가 어떤 나라이고, 어디에 위치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인지 전혀 몰랐다. 그가 분명히 알았던 사실이라고는 자유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좋아졌어요, 영감님, 좋아졌어요.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대답했다.
「다행이구먼.」 성호를 그으면서 늙은 양치기가 큰소리로 말했다.
「담배 태우시겠어요?」 내가 물었다.
「제기랄! 내가 뭣하러 담배를 피워요?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노르웨이만 별일 없다면 그만이지!」
그 말을 하고 그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양 떼를 찾아 기어올라갔다.

그리스의 공기는 정말로 신성하고, 자유는 틀림없이 여기서 탄생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세계의 어느 농부나 양치기도 자유를 위해 싸우는 미지의 머나먼 나라의 시련에 대해서 그토록 고민하고 실감나게 의식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자유란 자기가 낳은 딸이나 마찬가지여서, 노르웨이의 투쟁은 그 그리스 양치기의 투쟁이기도 하다.

10. 05. 20. 

P.S. 크레타의 양치기 노인이 아직 살아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요, 한국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비록 한국이 어떤 나라이고, 어디에 위치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인지 전혀 모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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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e02 2010-05-20 13:21   좋아요 0 | URL
엊저녁 인문학 공부방에 참여했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인용했다는데, 왜 전혀 기억나지 않을까....늙어가는 뇌를 탓했더랬습니다...ㅎㅎ <영혼의 자서전>도 읽어봐야겠네요. 수줍은 소년같은 첫인상은 의외(!)였습니다.....글에서 느껴지던 악동같은 분위기가 강의 중반 이후 살아나더군요.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치유불가능한 호모사피엔자들의 연대를 위한, 지속적인 글쓰기를 기대합니다.

로쟈 2010-05-21 09:40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조르바와 카찬차키스를 혼동했어요.^^ 제가 '소년'과 '악동' 사이에서 진동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