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드 만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놓았던 김에 <독서의 알레고리>(문학과지성사, 2010)에 대한 리뷰기사도 옮겨놓는다. 드 만식 읽기 혹은 드 만식 해체론이 어떤 것인지 잘 정리해주고 있다.
한겨레(10. 05. 22) “책은 언제나 의도와 다르게 이해된다”
폴 드 만(1919~1983·사진)은 덴마크에서 태어나 벨기에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예일대에서 학문적 전성기를 보낸 문학이론가이다. 그는 이른바 ‘예일학파’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이력을 요약하면, 프랑스에서 출현한 ‘해체주의 사상’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 퍼뜨렸다는 한 줄의 문장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번역자이고 전파자였는데, 뛰어난 전파자들이 그러하듯 원본을 재해석해 새로운 사유를 덧붙였음은 물론이다. 드 만의 목소리는 특히 문학이론, 문학비평에서 크게 울렸고, 그 울림이 퍼져 사상 일반에까지 미쳤다.
드 만은 평생 65편이라는 적지 않은 에세이와 평문을 썼지만, 생전에 펴낸 책은 두 권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의 알레고리>는 그중에서 두 번째로 낸 책이다. 이 책의 출간 연도는 1979년이지만, 실린 글들은 대부분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썼다. 해체주의의 대명사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인데, 드 만은 데리다를 1966년 처음 만난 뒤 해체주의 사상 활동의 동지가 됐다. <독서의 알레고리>에 묶인 글들은 이 해체주의가 드 만의 언어로 옮겨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그대로 해체주의가 영어권에 번져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드 만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 책의 대부분은 ‘해체’가 불화의 씨가 되기 이전에 쓰였다”고 밝힌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 해체주의는 ‘이론 전쟁’으로 불린 격한 논란의 한가운데로 진입한 상태였다. 그 전쟁을 더욱 격렬하게 만든 것이 이 책인 셈인데, 드 만은 그 머리말에서 해체주의가 그동안 오해받아 왔음을 강조한다. 한쪽에서는 해체주의가 아무런 현실적 불온성도 없는 대학 강단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체주의가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지적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한다. 드 만은 둘 다 틀렸다고 말한다. ‘해체’는 단순한 지적 유희도 아니고 허무주의적인 지적 테러도 아니다.
그렇다면 드 만이 생각하는 ‘해체’는 무엇인가. <독서의 알레고리>는 해체에 관한 드 만의 생각을 드 만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릴케·프루스트·니체, 그리고 특히 루소의 저작들에 대한 분석이다. 그 저작들을 읽어 추출해낸 결정체가 제목으로 쓰인 ‘독서의 알레고리’다. 여기서 ‘독서’(reading)란 말 그대로 ‘책을 읽는 행위’를 말하는바, 책 속의 기호(글자)를 매개로 삼아 저자가 말하는 것을 실제 사태와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쉽게 말해, 책을 읽고 사태를 이해하는 것이 독서다. ‘독서의 알레고리’는 그 독서가 곧 ‘알레고리’(allegory)라는 말인데, 여기서 알레고리는 ‘(어떤 것으로써) 다른 것을 말하다’라는 어원적 의미로 새겨야 한다. 비둘기로 평화를 나타내고, 왕관으로 권력을 암시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그렇다면 알레고리는 일종의 은유(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데, 은유가 보통 단어나 문장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 기교라면, 알레고리는 통상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 구실을 한다.
여기서 요점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라는 알레고리의 그 본질에 있다.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독서란 저자가 말하는 것을 독자가 그대로 읽어내는 행위다. 그러나 실제의 독서는 저자가 말하려는 것을 언제나 다르게 이해한다는 것이 드 만의 논점이다. 기표와 기의의 일치, 단어나 문장이나 책 전체가 가리키는 것과 그 가리킴의 대상 사이의 일치, 요컨대 책이 말하려는 것과 독자가 이해한 것의 일치가 독서의 이상적 상태일 터인데, 이런 완결된 독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 만의 발상이다. 독서는 언제나 기표와 기의 사이의 차이를 내장하고 있다. 글이 의도하는 바와 실제로 이해되는 바 사이에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독서는 번번이 오독·오해·오인을 포함한다는 것, 저자가 진짜 의도한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것, 이것이 드 만의 주장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독서 곧 읽기가 책을 넘어 삶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삶 자체가 읽기의 과정이다. 우리 삶은 끊임없이 읽고 해석해야 할 것들의 연속체다. 사람들의 눈빛, 표정, 몸짓을 읽어야 하고, 책을 읽듯 사람의 말을 읽고 속뜻을 이해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읽기가 언제나 완결된 읽기에 도달할 수 없고 궁극적 읽기에 성공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인식이란 언제나 굴절과 착란과 오해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투명한 인식,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 세워진 근대 학문은 그 토대를,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객관적인 총체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근대적 믿음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드 만의 ‘완결된 독서의 불가능성’이라는 테제가 말 그대로 해체적임을 실감할 수 있다. <독서의 알레고리> 이후의 작업은 드 만 사후에 <이론에 대한 저항> <미학적 이데올로기> 같은 책으로 묶여 나왔는데, 거기에서 그의 해체 사상은 정치적·사회적 이념으로 확장된다.(고명섭기자)
10. 05. 22.
P.S. '독서의 알레고리'가 비단 고급 텍스트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매직'으로 쓰인 간단한 글씨도 '필자'(혹은 '조작자')가 진짜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의도를 '배반'하는 것이 '독서의 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