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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과 혁명 -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
권명아 지음 / 책세상 / 2013년 5월
평점 :
Review: 권명아, 『음란과 혁명』, 책세상, 2013.
한국사의 파토스케이프와 혁명의 가능성
오영진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첫 장의 목차가 아니라 맨 뒷장에 숨겨져 있는 이미지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것을 조심스럽게 ‘정념의 풍경들-파토스케이프‘(Pathoscape=Pathos+
Landscape)라고 불러본다. 공을 들여 칼라로 인쇄했을 페이지에는 1910년부터 2000년 초반까지, 한국사에서 배제한 부적절한 정념들의 연대기가 모던 아트의 감각으로 펼쳐져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역사 자료들과 문서고를 살펴보며” 얻은 “어떤 ‘이미지’”를 “지식의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담고 있다.
그러니 간혹 이 책의 목차와 서술방식에서 보여지는 비논리성을 지적하기 앞서 이 ‘모든 부적절함’이 아래의 이미지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산개(散開)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식민지 계몽기의 음란한 계집들에 대한 이광수의 논평’, ‘뒷골목에서 유행하던 점괘놀이와 저속한 노래집들’, ‘풍속괴란을 야기하는 구소설들’, ‘1930년대 에로 그로 넌센스의 독물들과 이에 대한 통제’, ‘풍기문란을 이유로 금서가 된 에밀졸라의 『나나』’, ‘냉전과 풍기문란의 수사학이 결합된 ’정조 38선‘이라는 은유’, ‘망국병이 되어버린 풍기문란’, ‘퇴폐와 암흑으로 치부된 3.1 운동 이후의 문학사’, ‘범죄자가 된 소년-장정일’, ‘혁명 이후 범죄의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한 주체들: 미성년과 하층 여성(남성)들’.
당연히 위 잡다들을 꿰어낼 만한 논리적 구성은 불가능해 보인다. 정상성의 범주에는 사회유지를 위한 미풍양속, 국가재건을 위한 건전한 신체가 있다. 그 외의 것들은 벌거벗은 생명이 되어, 배제되며 포섭될 뿐인 것이다. 이들은 미풍양속이 아닌 것, 건전한 신체가 아닌 것이므로 그들 사이에선 그 어떠한 일관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명아가 그려낸 한국사의 파토스케이프는 소위 정상성에 대한 부정진술들의 총체성을 담는다. 독자는 부적절한 정념들 각각의 선정적 측면이 아니라 그 부적절함들이 만들어낸 성좌를 보기를 권한다. 이 예감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그동안 통제되어온 정념들이 ‘고독’과 ‘외로움’의 대기를 찢고 서로를 물들였을 때, 정념은 정동적 차원으로 이행되어 정치로 나아갈 가능성을 가진다.
때문에 이 책의 문제의식은 정념통제의 파놉티콘에 대한 단순한 폭로에 있지는 않다. 이 책의 제목처럼 『음란과 혁명』, 즉 ‘음란’을 ‘혁명’과 연결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간의 문화론적 연구와 차별점을 만드는 요소이다. 그동안 국문학 기반을 가지고 문화론적 방법론을 접목한 일련의 연구들은 문학제도에 대한 연구에서 그 저변의 매체에 대한 관심, 그리고 본격적인 풍속/습속연구로 나아가는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권명아는 이 보다 더 나아간다. 그는 풍속의 본질을 제도화의 결과라고 진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제도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제도 밖으로 몰았는지 초점을 옮겼으며, 비표상적 차원에 놓여있는 그것들을 언어적 차원으로 옮겨놓으려 노력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음란’을 ‘혁명’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행위는 그 자체로 시적이다.
그런 입장에서 필자는 이 책의 전․중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도표와 통계에 의거한 연구보다 후반부 의 사유를 더 사랑한다. 여기서 그는 아주 과감한 태도로 4.19의 도화선이 되었던 소년 김주열의 훼손된 육체와 4.19 이후 태어난 소년 장정일의 범죄적 육체를 연속성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4.19에 대해 종종 잊고 있는 것은 4월 혁명의 주체는 고등학생이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당시의 고등학생과 오늘날의 고등학생의 성숙도가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권명아가 보기에 이는 어디까지나 소년소녀에게서 그 위험한 정치성을 거세하는 수작에 불과한 것이다. 최루탄이 박힌 모습으로 귀환해 온 세상을 혁명의 도가니로 물들인 소년 김주열이 소년 장정일이 되어 보호라는 명분하에 관리되어야 할 범죄자로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5.16이 되어버린 4.19에 대한 반성은 가능하다. 문제는 4.19는 어떻게 다시 한번 가능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4.19의 혼란을 자유로서 전유하지 못하고 성급히 5.16의 질서로 귀결시켰다는 것이 다소 모호한 반성이라면 4.19의 불씨를 낳은 그 미성숙한 주체들에 대한 재고는 보다 명확하면서도 실천적인 반성일 것이다. 때문에 그는 다소 거칠게 질문한다. 90년대 후반 충격을 준 10대 섹스 스캔들 ‘빨간 마후라’의 소녀는 ‘촛불 소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부적절한 주체-서벌턴은 비단 미성숙의 소년소녀뿐 아니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젠더적 차원에서 담지되기도 한다. “해방 50년-초기의 3년은 여성들의 훈풍시절이었고, 6.25전쟁부터 9년은 ‘하리켄’ 시절이었고, 4.19까지의 3년은 ‘하리켄’이 숨을 죽여가는 광풍시절이었다”고 소회하는 잡지『여원』의 기사구절은 의도치 않게 ‘허영’과 ‘문란’의 차원으로 밀어넣은 채, 혁명에서 유폐시킨 여성주체들에 대해 증언해준다. 저자는 간통하는 이들의 문란함을 다시 사랑하는 이들의 보편성으로 전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명아는 “문란함이라는 규정은 단지 성적인 열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문란함이라는 규정은 주체와 타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결속의 특정한 형식을 사회적 연대나 정치적 결사에 미달하는 것으로 저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반대의 지점에서 우리는 “문란함이라는 규정 속에 갇혀 있는” “특정 주체들의 결속 방식”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는 도중 우연히 읽게 된 다음의 기사를 보자.
또 등장한 竹棒(죽봉).. '폭력버스' 시위꾼에 습격당한 울산 현대車(조선일보,, 2013. 07. 21)
희망버스 타고가 술판.. '난장버스'로(세계일보, 2013. 07. 21)
위 기사가 가진 부당함은 기사의 진실성 여부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발휘된다. 사실 실로 부당한 것은 혁명이 비폭력과 건전함으로 낭만적인 모습으로 펼쳐지길 바라는 우리의 의식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폭력’에 비한다면, ‘난장’이 보여주는 미성숙함의 위계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러한 언어 프레임에 너무나 취약한 채 저항해 왔다. 불온함은 지향하면서도 음란함/문란함은 거절한다. 그러나 정작 언론이 고발하는 문란함이란 고작 소주병 여댓 개에 불과한 것이다. 문란함이라는 규정 속에서 정념의 주체들은 고독해지며, 정치적으로 무능해진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범죄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정념의 가능성 같은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대신 법의 실정성이 성립하면서 은폐하고 억누른 부정성의 가능성이 폭로된다. 권명아는 우리가 문란함 속으로 더 뛰어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문란함의 휘말림 속에서만이 우리는 서로 연대하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마음으로, 저자인 권명아의 입을 빌어 되려 이 책의 한계를 지적해 볼 수도 있겠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생생한 변이”를 ‘정동’이라고 부른다면, 정작 한 상태와 다른 상태를 각각의 차원에서 기술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유의 곡예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되는 그 순간에 벌어져야 한다. 이 과정은 순차적인 논리가 작동하지 않으며, 모든 국면이 급격히 정반대로 이행되는 카타스트로프의 출현과 함께 할 것이다. 이는 약속 없는 방문으로 매우 당혹스럽다. 정동의 걷잡을 수 없는 번짐은 통제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여기까지만 예상할 수 있다. 정념이 연대의 따뜻함 속에서 분출되고 펼쳐진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다만 그런 의미에서만, 본문 마지막 장에 배치된 전국 농성촌 지도는, 네트워크 상을 떠도는 보다 잉여로운 영혼들의 기약없는 파토스케이프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