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모드에 빠져 있다가 조금 기운을 내 히로세 다카시의 <제1권력>(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0)을 펼쳤다. 화급한 일이 너무 많다 보면 자포자기가 돼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 저자는 서장에서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추리소설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 얘기를 꺼내는데, 기억엔 초등학교 때 읽은 듯하다(그러니 30년 여년 전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펭귄클래식으로 새로 나온 <바스커빌 가문의 개>(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해설에 따르면, "여러 측면에서 <바스커빌 가문의 개>는 진정한 네오고딕 양식의 탐정소설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공포영화로 만든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고, 모든 홈즈 소설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이다." 흠, 다시 읽어보고 싶기도 하군. 덕분에 초등학교 3학년 때 반장 겸 독서부장을 하면서 학급문고로 읽은, 나폴레옹 솔로 주인공의 첩보소설들도 잠시 떠올렸다. 원작자가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읽으면 얼추 상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JP 모건이 미국 남북전쟁 때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읽다가(북군에게 총을 사들였다가 6배의 가격으로 되팔았다. "한마디로 영약하기 짝이 없는 사기꾼 일당"이었다)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인물과사상사, 2010)에는 어떻게 나오나 살펴봤다. 3권 '남북전쟁과 제국의 탄생'에 잠깐 이름이 비치는데, 론 처너의 책 <모건가>(1990)을 인용하고 있다(참고문헌에 서지가 빠져 있다. <금융제국 JP 모건>(플래닛, 2007)으로 번역된 책이다). 존 피어폰트 모건(1837-1913)에 대한 얘기다.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은, 그는 남북전쟁을 봉사의 기회가 아닌 돈벌이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이다... 여느 유복한 집안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피어폰트도 게티즈버그전투 이후 징집되었으나 300달러를 주고 자신의 대역을 고용했다. 불공정한 이 일상적 관행은 1853년 7월에 일어난 징집폭동의 원인이 되었다."

징집폭동이란 링컨의 징집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규모 항의시위가 일부 지역에서 폭동으로 전화된 걸 말한다. 또 한 대목은 허버트 스펜서와 윌리엄 섬너의 사회진화론의 유행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187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국에서는 스펜서의 학설이 내리막길에 서게 됐지만 미국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1860년에서 1900년까지 50만권 가량이 팔려나갔는데, 요즘 기준으론 수백만 권에 해당한다고. 이유는 짐작대로, 부자들이나 부자 지망생들에게 어필했기 때문("부자 되세요!"가 인사말인 사회에서 스펜서나 섬너의 책이 소개되지 않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이미 체화하고 있기 때문일까?). 

"존 D. 록펠러나 J.P. 모건 등과 같은 거대 부자들이 '가난에서 부유함으로(from rags to riches)'의 본보기로 부각되면서 빈곤은 가난한 사람들의 결함 때문이라는 사상이 풍미했다."

'미국의 스펜서'라고도 불렸다는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1840-1910)는 어떤 인물인가?  

엄격한 청교도인 섬너는 2년간 미국 성공회의 목사로 목회를 한 뒤 1872년 예일대 정치학 및 사회과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대표작으로는 <사회계급들이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것>(1883), <사회적 관행>(1906) 등이 있다.

당면한 사회문제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거나 과학적인 방법으로 진보를 이룩할 수 없다고 믿었다는 섬너의 주장을 강준만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특별한 창조라고 하는 종교적 교리를 포기하면서 확신에 찬 진화론자가 된 섬너는 노골적인 '부자옹호론'을 폈다. 그는 "백만장자는 자연도태의 산물"이며, 그들은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선정된 사회의  대행자로 보는 것이 마땅하며, 그들의 존재는 사회적으로도 이로운 것이라고 단언했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로도 분류되는 섬너에게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걸로 간주된다.  

"인간의 삶에 따르는 고통은 자연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의 투쟁을 통해서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고통을 받는다 해서 그것을 이웃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누구도 남에게 도움을 청할 권리가 없고 또 어느 누구도 타인을 도와야 할 부담을 지지 않는다."

몰인정한가? 하지만 더 나쁜 사회는 자연적인 경쟁을 독려하는 사회가 아니라 '강자' 혹은 '부자'를 일방적으로 보호하는 사회다. <미국인의 역사>(비봉출판사, 1998)의 저자 앤디 브링클리의 지적이다.  

"사회적 진화론은 대기업 중심 경제현실과 많은 관련이 있는 이념은 아니었다. 동시에 기업가들은 경쟁과 자유시장의 덕목을 찬양하면서, 자신들을 경쟁에서 보호하고 시장의 자연적 기능을 자신들의 거대한 기업연합의 통제로 대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스펜서와 섬너가 찬양하고 건전한 진보의 근원이라 불렸던 사악할 정도로 투쟁적인 경쟁은 사실 미국 기업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면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권용립 교수에 따르면, 섬너의 사회진화론은 '개인 책임주의'를 역설한 것으로 그는 '자연적 독점'에는 찬성했지만 보호관세나 제국주의 정책 같은 '인위적 독점'에는 반대했다. 보수적 자유주의자인 그가 '반제국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사회진화론의 양면성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사회진화론은 쇠퇴했는가? 경제학자 갤브레이스의 대답은 다르다. "아무도 스펜서나 섬너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아직도 부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거지에게 자선을 베푸는 행위를 억제시키고 있다."(<불확실성의 시대>)  

이런 정도까지 읽고 윌리엄 섬너를 검색해보다가 관련 신간이 나온 걸 알게 됐다. 미국 대공황기의 역사를 다시 짚어본 애미티 슐래스의 <잊혀진 사람>(리더스북, 2010)이다. 뉴딜 정책의 허와 실을 분석하고 있는 책으로 비판의 요지는 이렇다.   

당시 뉴딜 추진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 대신 '유익한 손'을 옹호했다는게 저자의 시각이다. 자유주의 경제를 비도덕적으로 여기며 유권자를 중요시하는 경제정책을 펼쳤다는 것. 소련의 집산주의 모델에서 영향을 받은 전국부흥청이나 테네시계곡개발공사(TVA) 등 규제·원조·구호 기관을 통한 대규모 프로젝트는 미국경제에 치명적인 손실을 초래했다고 본다.

일부 정책들은 경제에 활력을 넣으며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거기에 투입된 정부 지출을 감안할 때 완벽하게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경제 회복에 기여하는 민간 부문의 활동을 억누르는 다양한 제도와 계속되는 세금신설로 기업을 압박했고 기업 활동은 더 위축됐다. 결국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한 뉴딜 정책이 대공황을 더 깊고 오래 유지시키는 데 일조한 셈이라는게 저자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뉴딜 시대의 희생양은 누구인가. 저자는 당시 앨런 그린스펀 격인 앤드루 멜런을 거론한다. 그는 하딩과 쿨리지 및 후버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지내며 시장주의를 고수했지만 정부는 그를 기소했다. 또 뉴딜 담당자들이 대폭락의 책임을 전가한 유틸리티 업계의 거물 새뮤얼 인설, TVA의 전력산업 국유화에 대항했던 민간회사 커먼웰스앤드서던의 웬델 윌키 등도 희생양으로 거론한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시기에 정부정책으로 어린 가축까지 죽여야 했던 농민, 양계업자 등 유명무명의 사람들도 예로 든다. 저자는 이들을 '잊혀진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거시경제적 집단들 틈에 끼여 잊혀져 버린 미시경제적 주체'라고 설명한다.

대공황이 시작되기 50여년 전인 1883년.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예일대 교수는 '잊혀진 사람(The Forgotten Man)'이라는 논문을 통해 정부정책이 평범한 시민들에게 사회적 프로젝트의 비용을 부담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책의 제목 '잊혀진 사람'은 여기서 나왔다.(한국일보, 오미환기자)

 

하여, 예기치 않게도 오늘의 인물은 윌리엄 섬너, 오늘의 상식용어는 '잊혀진 사람'이 됐다. 다시 <제1권력>으로 돌아가거나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다시 읽거나,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어야겠다. 아니 그보다 더 급한 일들을 빨리 처리해야 할 텐데... 

10. 04. 11.  

P.S. '잊혀진 사람' 대신에 '잊혀진 여인(The Forgotten Woman)'을 따로 고르자면, 히로세 다카시가 헐리우드 영화사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언급한 '잇걸It Girl' 클라라 보우(1905-1965)다.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적인 육체파 배우였다고. 어쩐지 이미지는 낯설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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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4-12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인가 2008년 무렵 이상돈(중앙대 법대 교수)이 월간조선에 연재한 글 중에 잊혀진 사람을 꽤 길게 언급하면서 뉴딜을 비판하더군요.정부의 개입을 반대하고 시장과 기업의 자유를 옹호하는 측에서 보는 뉴딜관입니다.물론 좌파들이 뉴딜을 비판하는 것은 각도가 또 다르지요.

로쟈 2010-04-12 17:29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정상적인 보수라면 '4대강'에도 반대해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입니다. 좌파와는 다른 이유에서요...
 

엊그제 강의 때문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다시 읽었다. 거의 20년만에 읽은 셈이니 어렴풋한 인상 정도만을 갖고 있었을 따름이고, 세부적인 내용은 처음 읽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교재로 사용한 건 <인간실격/사양>(문예출판사, 2009[2003])인데,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잘못이었어요."
마담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우는 아주 정직하고 영리하고, 술만 그리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술을 마셔도, ... 천사같이 착한 아이였어요."(오유리)

이것만 읽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텐데(주인공 이름 '요우'는 다른 번역본들과 대조해보건대, '요조'라고 해야 맞다), <인간실격>(민음사, 2009[2004])도 같이 읽은 게 화근이었다. 이렇게 끝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김춘미)

일어에서는 그런 표현도 쓰는 모양인데, '하느님같이 착하다'란 게 말이 되는지 궁금했다. '천사같이 착하다'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도 같지만, 나의 직관으론 한국어에서는 가능하지 않거나 어색한 말이다. 다자이의 간략한 전기를 포함하고 있는 소개서 <자화상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살림출판사, 2008)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빠요."
태연스레,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짱은, 무척 얌전하고 아주 눈치 빠르고, 그냥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였습니다."(유숙자) 

짐작에 일어 원문은 '하느님같이'('하나님같이')로 옮겨질 수 있고, '천사같이'라고 옮기는 건 의역이 아닐까 싶다. 다른 번역본들을 조금 더 뒤져봤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빴어요."
그리고 마담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짱은 온순하고 재치 있는, 거기다가 술만 안 마신다면... 아니, 술을 마셔도 정말 훌륭한 좋은 사람이었지요."(을유문화사판)  

"그 사람의 아버님이 나빠요."
마암이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요조는, 정말로 착하고, 경우가 바르고,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아니, 마셨다 하더라도, 하느님같이 착한 사람이었어요."(웅진지식하우스판)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요짱은, 정말 순진하고, 또 남을 생각하고, 정말이지 술만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마셨어요,... 하느님같이 좋은 애였어요."(제이앤씨판) 

작품에서 '인간실격자'로 지목되는 주인공 오바 요조에 대한 마지막 인물평이기도 해서 음미해볼 만한 대목인데(요조는 다자이 자신의 자전적 분신이기도 해서 이 인물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 나로선 '천사같은 아이'와 '하느님같은 아이'의 의미가 동일하게 여겨지질 않아서 어떤 해석이 타당한지 궁금하다. 다들 일어라면 자신 있는 분들의 번역일 테지만, 이 번역만 갖고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혹 일어를 아시는 분이라면 댓글로 도움을 주셔도 좋겠다. 참고로, 오늘 팩스로 받아본 영역본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It's his father's fault," she said unemotionally. "The Yozo we knew was so easy-going and amusing. and if only he hadn't drunk - no, even though he did drink - he was a good boy, an angel." 

인용한 건 1958년에 나온 영역본인데,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의 영역본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걸로 보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여하튼 영역본은 "그는 천사와 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정도로 옮겼다. 사소한 문제에 과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학 전공자들은 원래 이런 문제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10. 04.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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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f2234 2010-04-09 00:40   좋아요 0 | URL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저는 전공자도 아니고 일어도 잘 모릅니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몇 자 적어봅니다.

1. 오유리 선생님의 '요우'도 틀린 번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문에는 '요짱'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건 다들 아시다시피 요조의 애칭입니다. '요짱'이라고 번역하는 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요조'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고, '요'(요우)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므로 요조, 요(요우), 요짱 모두 가능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2. '하느님' '하나님' '천사'로 번역된 단어는 한국어로는 주로 '신(神)'으로 많이 번역되는 ’神様(kamisama)'라는 단어입니다. 원문대로라면 'kamisama 같은 착한 아이였어요(神様みたいないい子でした)'라고 번역되는데요. kamisama를 어떻게 번역해줄 것이냐가 여기서 문제가 되네요.

'하느님 같다' '신 같다'라는 말 자체에 이미 완전한 인격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이므로 '마치 하느님 같은 아이였어요'라고 '착한'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번역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네요...^^;; 아니면 '마치 천사 같은 애였어요'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로쟈 2010-04-09 00: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위키에는 이렇게 설명해놓았네요.
Kami-sama (神様) is the Japanese word for "deity". The word is used to indicate any sort of god, beings of a higher place or belonging to a different sphere of existence, or the Christian-Judeo God.
문화적 차이 같은데, 저는 '하나님같이 착한 아이' 같은 비유는 한국어 어법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pdf2234 2010-04-09 01:13   좋아요 0 | URL
하느님 같은 사람, 이라는 말은 어색하게 들리지 않고 천사 같은 사람, 천사 같은 아이, 라는 말도 그닥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하느님'과 '착하다'는 일종의 연어로서 사용하기 영 어색한 것 같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처음 일본어 성경을 봤을 때 꽤 충격적이었는데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대목이 '태초에 '신(神)-kamisama도 아니었습니다-'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이 '팔백만'이나 된다고 하니 절대자를 그 팔백만 신과 동등한 '글자'로 나타내는 듯해서 매우 재밌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했답니다.^^

로쟈 2010-04-09 09:07   좋아요 0 | URL
영어에서도 마찬가지 같아요. 'he was like an angel' 정도로밖에는 옮길 수 없을 듯하니까요

조선인 2010-04-09 08:37   좋아요 0 | URL
번역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일본엔 착한 여우신도 있고, 나쁜 여우신도 있잖아요. 카미사마는 그중에서도 착한 쪽... 우리나라로치면...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산신령 느낌이랄까?

로쟈 2010-04-09 09:08   좋아요 0 | URL
'착한 산신령 같은 애였어요'라고 하면 말이 되네요.^^

비로그인 2010-04-09 14:43   좋아요 0 | URL
원문은 이렇네요.
「あのひとのお父さんが悪いのですよ」
 何気なさそうに、そう言った。
「私たちの知っている葉ちゃんは、とても素直で、よく気がきいて、あれでお酒さえ飲まなければ、いいえ、飲んでも、……神様みたいないい子でした」

본문을 안 읽어봐서 맥락에 따라 인물의 성격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이 부분만 보면 성격묘사는 제이앤씨판이 가장 무난해 보여요. 하느님이든 천사든 굉장히 착해 빠진 인물과 호응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리고 역시 본문에 기독교적 편향이 나타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부처님같이 좋은/부처님 같은 애/이였어요"라고 하면 좀더 와닿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작가의 종교 소속과 무관하게 일본인이 쓰는 '신'이란 관념은 현대 한국인만큼 곧바로 기독교적인 뉘앙스를 연상시키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요.

이상은 모두 개인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일어도 잘 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09 16:3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일본인이 말하는 카미사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하느님-하나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다신교의 나라인 일본이니까요.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네, 이런 대목에선 문화적 차이가 확연합니다. 생사관에서도 그렇지만...

시고 2010-04-10 05:11   좋아요 0 | URL
제 일어 경험에 따르면, 神(kami)란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신령스런 존재에 해당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서라면 원시 무속 신앙에서의 '하늘'쯤 될까요. 보통 '하늘이 지켜본다' 라거나 '하늘이 노하셨다'같은 표현에서의 경외의 대상에 해당하는...
(게다가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신적 존재에 대한 표현이 상당히 많으니까요. 굳이 '인간에게 해가 되는 쪽'이라면 '怪'에 해당하는 '모노노케'나 '아야카시'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둘이 실제 일본에서 거의 항상 '惡'의 영역이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지요. 파고들면 재밌어요. 번역하기는 난감하지만. ^^;)
원문의 뉘앙스를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번역문의 호불호가 갈리는 경향도 있으니 섣불리 단정은 못하겠습니다만, 저 문장만 놓고 봤을 때 제겐 '문예판, 민음판, 웅진판'을 서로 참조하면 좋을 듯 하네요.

저는 윗분들 댓글 보면서 오히려 '마치 하느님같은 아이'라는 표현이 원문의 뉘앙스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느꼈어요. '하느님같은 아이'라고 하면 어쩐지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라서, 너무 고귀하달까요.

저는 대략...저 원문의 의미가 이렇다고 생각합니다.(어느 정도 의역해서)
"그이 아버지가 나쁜거예요. - 아무렇지 않은 양, 그리 말했다. - 저희가 알고 있는 요우는, 무척 솔직하지, 똑부러지게 야무지지, 거기에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죠, 마신다고 해도, ...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애였답니다."

'카미사마같이 착한 애'였다는 건 실제로 그가 어떤 완벽함(도덕성 혹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일부러 깍아내릴 필요가 없는 그라는 존재 자체로 있는 것이 허용된다는 류의 (상대적)절대성을 품고 있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뉘앙스로 치자면 말이죠. (이런 얘기엔 늘 조심스러워져서;;) 일본의 '카미'란 108신이라는 말처럼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서 '절대성'보다는 '일상성'을 근저로 하고 있으니까요.(그렇기에 '카미'는 언제든 선과 악을 오갈 수 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지요.)

마담에게 있어 요우짱은 똘똘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이미지가 강한 거겠죠, 분명. 그러니 남들이 뭐라든 그에겐 늘 좋은 아이로 남는 걸테구요.

비로그인 2010-04-11 09:42   좋아요 0 | URL
끼어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번역본에 대한 평가가 달라서 굳이 말씀을 붙이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의 의역이 그렇게까지 필요한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지만 위 번역본들보다는 성격해석에서 원 단어의 뉘앙스를 살리신 것 같아서 자연스럽네요.

다만 다른 분들을 위해 단어의 원 의미와 뉘앙스에 대해서 조금 보충하고 싶습니다.

素直는 양심에 따른 말과 행동을 한다는 일종의 윤리적 덕목을 내포할 수 있는 '정직'(일어에 '정직하다'란 단어도 따로 있고요)보다는 더 직접적인 성질을 가리키는 편이죠. 아이들의 성격을 가리키는 데도 잘 쓰이듯이. '솔직'(이것 역시 '솔직하다'란 단어가 따로 있긴 합니다)은 '정직'보다는 더 나아 보이지만 저는 솔직하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당돌함이나 당당함 따위의 느낌을 素直에서 결코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일어 단어는 '고분고분하다', '부드럽다' 등과 연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온순하다', '얌전하다'가 가까워 보이지만 그것만은 아닌 듯 싶고 '순수하다'도 그에 직접 상응하는 일본어가 있는데 본문 캐릭터 묘사에 따라 가능하겠지만 단어만을 놓고 보면 조금 튀는 감이 없지 않네요(素直를 일본사람들이 자주 쓰듯이, 인간에게 순수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이들에겐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지만).

気がきいて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야무지다'도 충분히 어울리지만 '야무지다'는 뭔가 자기 앞가름을 잘하는 식의 근면함(일종의 덕목)을 떠올리게 하는데, 과연 주인공이 그런 성격일까 궁금해지기도 하거니와, 気が利く는 '눈썰미가 있다', '세심하다' 따위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특히 '세심하다'의 의미일 때는 대개 자신의 일에 대해서라기보다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에 그렇게 할 때 술어로 잘 쓰는 것 같습니다. 위 번역들 중 '영리하다'는 利口だ와 혼동한 게 아닌가 싶고 '눈치 빠르다'는 약삭빠르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보태어지고(인물이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단어만으로는 그런 뉘앙스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마담의 언어생활이 홍상수적이면 몰라도), '재치있다'는 영어도 amusing으로 번역된 걸로 봐서는 본문의 캐릭터 묘사를 통해 조금 의역한 듯하고, '경우가 바르고' '남을 생각하고'는 (본문을 읽지 않고 단어에 대해서 느끼는)제 생각과 가장 가깝지만 조금 순화된 번역어인 듯 싶습니다.

아무튼 본문을 직접 읽고 주인공의 행적을 좇아봐야겠습니다. 아울러 마담의 너그러운 연민에 대해서도 공감을 해야겠고요. 그럼 인간을 더 사랑할 마음이 생길라나요? 로쟈님은 어떻든가요? ^^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시고 2010-04-13 13:12   좋아요 0 | URL
제레카폴님의 뉘앙스에 대한 설명에 동의합니다.
저도 저 문장에서 그 두가지 용어가 맘에 걸렸거든요. 참, 저는 '하느님같이'라는 표현이 일본 내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려고 하다보니 의역이 과해졌습니다.
(그나저나 다시 읽어보니 기존 번역본 전부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여 한 두가지로 꼽는 게 잘못된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네요.^^;)

단지 저는 '솔직하다'는 표현이 한국에서 당돌한 이미지로 굳혀진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선택했는데...이 부분은 개인에 따라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지는군요.

'気がきいて'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확실히 일본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에 좀 더 가까운 세심함과 꼼꼼함을 일컫는 말이지요. 저는 마담이 요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아줌마들이 아이들의 꼼꼼함을 칭찬할 때 쓰는 말로 '야무지다'를 골라봤습니다. 하지만 사실...불충분한 표현이죠. ^^; 제레카폴님 의견대로 '세심하다'가 사전적 의미로 걸맞으니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겠네요.

비로그인 2010-04-13 15:07   좋아요 0 | URL
리린님 댓글 위에 있는 제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어디까지나 본문을 안 읽고 주관적으로 느낀 판단이니까요, 아마 '솔직하다'를 비롯해 기존 번역본들의 술어가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하다에 당돌함 따위를 연관시키는(항상은 아니지만) 건 개인적인 경험에서 오는 편견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서재 주인께서 번역과 관련해서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말을 꺼내볼 수 있는 판을 가끔 열어주시는 바람에 제가 좀 오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양해하시리라 믿습니다. ^^

픽션들 2010-04-10 07:54   좋아요 0 | URL
리린님의 번역 제일 마음에 듭니다^^
 
인디고의 유쾌한 문화혁명

강의가 있어서 저녁을 일찍 먹었더니 끝나고 나서 허기가 졌다. 자정이 다 돼 귀가해 라면을 끓여먹고 또 내일 강의 준비를 하기 전에(아직 책도 다 안 읽었다) 잠시 숨을 돌린다. 어제, 아니 그제 저녁 다지원 강의가 끝나고 인디고 유스 북페어 프로젝트팀이 만든 <가치를 다시 묻다>(궁리, 2010)를 뜻밖의 선물로 받았는데, 다시금 무릎에 놓는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는 그 부제다.

 

그제 버스 안에서 서서 오면서도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과의 영국 리즈 자택에서의 대담을 읽고 부듯해한 기억이 떠오른다(강의와도 연관이 있어서 하워드 진보다 바우만을 먼저 읽었다). 바우만 교수로선 한국인과의 만남이 아마도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 이후에 처음이 아닐까.    



한국의 청소년들이 세계적인 석학을 직접 찾아가서 만나고 질문을 던지고 성실한 답변을 받아오는 일련의 과정이 아름답고도 대견하게 그려져 있다. 인디고의 유스 북페어는 격년으로 열린다고 하는데, 지난 2008년에 펴낸 책은 <꿈을 살다>(궁리, 2008)이다. 인디고에 관한 기사를 두어 차례 옮겨놓은 적은 있지만 직접 '인디고 아이들'이 펴낸 책을 보니 기대 이상이다. 나머지 대담들을 마저 읽게 되면 소감을 적기로 하고 일단은 간단한 소개를 옮겨본다.  

이 책은 전세계 6대륙에 하나의 가치쌍을 연결하여 살펴보고 있다. 북아메리카-정의와 희망, 아시아-평등과 다양성, 유럽-자유와 자기실현, 아프리카-공동체와 민주주의, 오세아니아-생명과 자연, 남아메리카-사랑과 아름다움이다. 그 대륙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 그 대륙과 연결한 가치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하며 이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학자, 그리고 이러한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개인 또는 단체들 특히 청소년, 청년팀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했다. 

그 '실천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노엄 촘스키나 마서 누스바움, 그리고 올해 초에 타계한 하워드 진이 포함돼 있다. 몇 번 써먹은 사진을 한번 더 우려먹는다. 정말로 보기 좋지 아니한가. 그들이 꿈꾸는 '가치혁명'이 꼭 실현되기를 기원한다. 아니 이런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혁명이다...  

10. 04. 07.  

P.S. '인디고 아이들'이 펴낸 책을 몇 권 더 꼽아본다. 그들의 '행복한 책읽기'와 '꿈꾸기'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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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umanities Magazine for Young People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01 09:12 
    어제 중앙게르마니아 강연이 끝나고 뜻밖에도 인디고 팀원들에게 이번에 나온 국제판 <인디고>(2010년 봄호)를 선물로 받았다. 안 그래도 어제 오전에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이다. 지난번에 <가치를 다시 묻다>(궁리, 2010)도 나를 놀라게 한 책이었는데, 깔끔한 장정의 국제판은 한번 더 놀라게 한다. 다음 세대 인문학에 대한 걱정은 내 몫이 아닌 듯하다. 하긴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읽는 중학
 
 
2010-04-07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7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07 22:56   좋아요 0 | URL
저런 책을 읽는 청소년들의 부모나 교사가 모두 이해를 해줄까요...시험공부는 안 하고 쓸 데 없는 책 읽는다고 핀잔은 안 듣는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10-04-07 22:58   좋아요 0 | URL
부모나 교사도 여러 수준이 있으니까요...
 

이번 학기 아트앤스터디의 강좌 중에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라는 게 있다(http://blog.naver.com/artnstudy?Redirect=Log&logNo=110081840384). 문화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택광 교수의 강좌인데, 교재로 예고된 책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 2010)가 이번주에 출간됐다.   

 

두 가지가 키워드인데, 먼저 '가이드'에 대한 설명. 책소개를 참조하면 이렇다.  

‘가이드guide’라는 꼬리표가 붙은 다소 생뚱맞은 이 책은 ‘이론의 종언’에 맞서 ‘이론의 복원’을 요청하는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본격적인 이론적 퍼스펙티브가 담긴 저작이다. 지난 십 년 한국사회를 배회한 각종 패배주의와 냉소주의 중에서도 ‘이론 무기력증’이란 것이 있었다. 이것은 지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지성주의’와 지성과 이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먹고사니즘’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고 곧 전면화되었다. 저자는 이런 태도에 종지부를 찍고, 마르크스주의 비평과 정신분석 이론이 결합한 이론 공부와 이론적 글쓰기가 생산성과 비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저자는 푸코와 들뢰즈 이후 등장한 지젝과 랑시에르 같은 새로운 사상가들의 이론이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유산에 발을 디디고 있으며 그들이 과거의 이론과 오늘의 정치 지형 속에서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분석함으로써, 2000년대 후반 이후 다시 범람하기 시작한 유럽 발 이론의 백가쟁명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독자들에게 ‘거시적 안목’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리고 저자가 철학자 김영민과의 대화하던 중에 나왔다는 '인문좌파'라는 말(그러니까 김영민과 이택광이 '인문좌파'의 견본이다).   

“한국사회에서 ‘교환가치’를 갖는 고전적 인문학, 군주를 보필하고 관료를 양성하는 ‘동양적 인문학’의 유령이 느껴지는 이 인문학과 구분해서 나는 인문좌파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문좌파는 단순하게 ‘정치적 좌파’라고 규정할 수 없다. 기존의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독특한 사유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역할이 인문좌파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개념은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개념을 창조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필연성에 붙잡혀 있는 우발성을 풀어놓는다는 말이다. 재현체계를 벗어나는 힘을 드러내는 것이 인문좌파의 일이다. 사유가 실천이라는 명제는 여기에서 정당성을 얻는다. 다르게 사유한다는 것은 공동체의 규범을 거스르는 탈영토화를 의미한다. 이 메커니즘을 지배하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백의 동요이다.”(11~12쪽)

몇 개의 규정이 중첩돼 있는데, 기존의 우파와 좌파의 이념 모두를 회의하는 사유의 주체가 제3의 포지션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 하더라도 '인문좌파'란 말은 그 자체로 명명효과를 갖는다. 지시대상이 없어도 의미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유니콘처럼. 아무려나 여러 곳에서 '인문학 가이드' 노릇을 하는 처지에서 재미있게 읽어볼 만한 책이 출간돼 반갑다(개인적으론 한 술자리에서 저자와 함께한 적이 있는데, '이론적 만담'의 최고 수준을 경험할 수 있었다. 저자는 슬라보예 지젝과 직접 통화해보겠다고 하여 일행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인문좌파'란 말이 영어에도 있는지(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그 동네의 용어로 하자면 아마도 '라캉주의 좌파' 정도가 저자의 이론적 입장이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와 라캉(프로이트)이 그의 문화비평의 주된 이론적 바탕이니까.  

참고로, '라캉주의 좌파'와 그냥 '라캉주의'가 어떻게 다른지는 맹정현의 <리비돌로지>(문학과지성사, 2010) 같은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라캉에 대한 정치적 독해를 강조한 지젝(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을 전혀 경유하지 않은 라캉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현대철학자는 들뢰즈/가타리와 푸코 정도이고, 알튀세르와 지젝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란 말도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10.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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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의 인문학 위기와 강남좌파 한비야
    from 당신 덕분에 꽃이 핍니다♡ 2010-04-06 17:15 
    삶의 의미나 존재의 이유,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은 ‘넘사벽’이 되어 손가락질 당하고 있습니다. 넌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있냐면서 비아냥거림을 받아야 하는 시대죠. 경영학과를 복수전공하면서 조금이라도 취업에 유리하고자 아등바등해야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과 집값과 펀드, 자기 자녀가 무슨 대학 들어갔는지 열나게 이야기한 뒤 TV와 연예인 연애이야기밖에 할 게 없는 중년층들까지, 사회는 속되게 변해갔습니다.
  2. 인문좌파와 비가시적인 정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2 23:23 
    아침신문을 밤중에야 읽었다. 최근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글항아리, 2010)를 펴냈을 뿐만 아니라 한겨레21('노 땡큐!'란)과 교수신문의 연재(격주로 '세계사상지도'를 다룬다)를 새로 시작하는 등 문화비평가로서 '시즌2' 활동에 나선 이택광 교수의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사실 낮에 한겨레21에서 드라마 <추노>에 대한 칼럼도 읽었기에 이런 정도의 활동 빈도라면 '기록'해두어야
 
 
구보 2010-04-06 12:47   좋아요 0 | URL
<이론적 만담의 최고 수준>에 호기심이 생깁니다.
넘치기 마련인 출판사 카피가 아니라서 더 궁금하네요.

로쟈 2010-04-07 01:09   좋아요 0 | URL
술자리 만담과 책은 또 다를 수 있는데, 여하튼 재미는 있을 거 같아요...

시몬느 2010-04-06 20:0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어제 다지원에서 인사드린 인디고 서원의 박용준입니다.
어제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왔습니다.
어제 하루종일 이사를 하고, 강의를 갔더니, 강의 중간에 졸음이 와서...죄송했습니다. ^^

강의 내용뿐 아니라 '이론 투쟁'에 관한 선생님의 언급이 매우 인상깊었습니다.
의미를 둘러싼 투쟁.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선생님의 건승을 빕니다!
다음에 또 인연이 닿아 뵐 수 있기를... :)

로쟈 2010-04-07 01: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책은 뜻밖의 좋은 선물이었어요.^^

비로그인 2010-04-06 20:34   좋아요 0 | URL
"합의된 공동체의 윤리를 의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던지는 역할이 인문좌파의 몫이기 때문이다." ... 그냥 '철학자'나 '지식인'의 기본덕목 아닐까요? 좀더 뚜렷한 상이나 규정이 있어야 저처럼 개념이나 실천이 짬뽕인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여간 저는 "The Left"부터 좀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10-04-07 01:10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지시대상이 모호하다고 적었는데, 사실 저자도 그냥 수사라고 했어요...

phrensy 2010-04-07 03:19   좋아요 0 | URL
좋은 소개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10-04-14 23:36   좋아요 0 | URL
^^

bplat 2010-04-14 17:52   좋아요 0 | URL
이거 추천하시는 거 맞죠? 로쟈님이 추천하시는 책이라면 믿고 질러봐야겠네요ㅎㅎ 그렇지 않아도 이제 한물간 취급을 받는 루카치를 다시 읽어보자는 문단 제목에 확 꽂혔었는데.. 이 책이 절 제대로 입문시켜 주면 좋겠네요. 물론 그전에 베이스가 어느 정도 있어야겠지만..

로쟈 2010-04-14 23:36   좋아요 0 | URL
가이드삼아 읽으셔면 될 거 같아요.^^
 
나루케 마코토-김훈-기타노 다케시

알라딘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마쓰오카 세이고의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추수밭, 2010)를 읽었다. 지난 금요일에 서점에 잠깐 들렀다가 무슨 책인가 싶어 펼쳐봤는데, 우연히도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다. 자신의 '링크를 늘리는 편집적 독서법'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니시다 기타로의 책과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책과 오오시마 유키코의 만화책과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책과 롤랑 바르트의 철학책이 있다고 합시다. 제가 이 책들을 읽고 나면 거기에는 다양한 '메모' '강조' '내용 분류' '인용 대상'이 남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별도의 노트에 각 항목별로 옮겨놓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 작업은 머릿속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해보면 알게 됩니다만, 니시다 기타로와 타르코프스키와 오오시마 유키코와 에도가와 란포와 롤랑 바르트의 일부 구절이나 문장은 놀랄 정도로 같은 항목에 속하거나 인접해 있습니다.(156쪽) 

이전에 읽은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 권을 동시에 읽어라>(뜨인돌, 2009)와는 종류가 좀 다른 책이란 생각이 들어서 수중에 넣기로 했다. 가령 나루케와 달리 마쓰오카는 문학을 존중한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꼭 읽었으면 하는 책'으로 추천하는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이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에피스드도 털어놓고 있다. 나도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읽은 소설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여하튼 타르코프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그날 버스 안에서 반쯤 읽고, 오늘 저녁을 먹고 나머지 반을 읽었다. '지의 거인'(나루케 마코토)이나 '독서의 신'이란 평판을 얻고 있는 저자의 독서법을 일목요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유익했다. '책쟁이'나 '독서가'라면 다른 명망가의 서재를 한번쯤 엿보고 싶은 호기심도 갖고 있는 것이니까. 읽다 보니 '다독술'보다는 그의 '편집공학', 그러니까 저작술이 궁금해서 <만들어진 일본>(프로네시스, 2008)이나 <지의 편집공학>(지식의숲, 2006)도 읽어보려 한다. 다독술 자체는 크게 새로울 게 없지만, 요즘처럼 원고에 치일 때 도움을 받을 만한 뭔까 뾰족한 (편집공학적) 글쓰기 수단이 있을까 싶어서다. 그런 게 있다면 좀 알아두어야겠다(밀린 일들 때문에 휴일마다 '우울증'에 시달리느니!).  

이미 리뷰들이 많이 올라온 책이라 내용에 대해선 늘어놓을 필요가 없을 것 같고, 두 가지 생각할 거리와 오류에 대한 지적만 챙겨놓도록 한다. 생각할 거리란 건 독서문화와 관련된 것인데, 먼저 북클럽 얘기. 마쓰오카에 따르면 서양과 달리 일본에서도 별로 발달하지 못한 게 북클럽이다.  

"북클럽은 일종의 독자 조직입니다. 물론 책을 읽고 책을 사랑하기 위한 조직이나 모임입니다만, 여기에서 책을 공동 구입하거나 배포하는 행위가 일어납니다. 독일에서는 연간 2,000만 권 정도가 북클럽을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도 이런 북클럽 회원이 약 1,000만 명 이상 활동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258쪽)

일본에서는 왜 이런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는가란 원인을 분석하면서 마쓰오카는 그 중 한 가지로 교육 문제를 든다. "서양에서는 어린이 교육의 중심을 '다독'과 '토의'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260쪽)라는 게 그의 주장이고 나도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경쟁력 교육' 같은 헛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독서 교육'이나 제대로 하면 좋겠다.  

그리고 역자와의 대담에 나오는 것인데, 일본의 대형서점 마루젠 본점에 '마쓰마루' 서점을 오픈했다는 얘기. 마쓰오카의 '마쓰'와 마루젠의 '마루'를 결합한 이름으로 책의 분류나 배열을 모두 마쓰오카가 기획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일반서점의 도서 분류법 대신 새로운 방법으로 책을 배열하고 있습니다. 잡지나 단행본, 문고판, 고서, 수입서가 하나의 책장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책이 똑바로 꽂혀 있지 않고 일부러 옆으로 눕혀 놓은 책도 있고, 겹쳐서 꽂아 뒤의 책이 잘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같은 책이 여기저기에 여러 권 꽂혀 있기도 합니다."(293쪽) 

개인 서가라면 모를까 일반서점에서 이런 독창적인 분류/배열을 시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학로의 이음책방 정도가 떠오르는데, 규모가 너무 작다는 아쉬움이 있다. 서점마다 할인율이나 인테리어로 경쟁하기보다는 이런 개성적인 분류/배열 방식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오류라고 한 건 대단한 게 아니라 표기와 정보에 관한 것이다. 73쪽에서 니체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 '루 자로메'는 '루 살로메'가 우리의 통용 표기이고, 156쪽 각주에서 타르코프스키 소개에 나오는 <버찌 통조림>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작품이다. 무얼 잘못 읽어야 '버찌 통조림'이 되는 것인지? '벤야민'(73쪽)과 '베냐민'(214쪽) 표기에 혼동이 있고, 211쪽 각주에서 푸코의 책 <광기와 비이성>은 무얼 말하는지 모르겠다. <광기의 역사>라면 일본에서도 그렇게 번역되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215쪽, 도나 해러웨이의 <원숭이와 여자와 사이보그>는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동문선, 2002)로 번역돼 있다.  

끝으로, 일본 출판계에 대한 부러움을 갖게 한 책 두 권. 사실 일본책을 종종 들여다보면서 얻는 수확은 서지정보이다. 때론 본문보다도 그러한 '디테일'에 더 이끌리기도 한다. 마쓰오카의 강점은 과학책도 열심히 많이 읽었다는 것인데(하지만 대학은 불문과에 진학하는 '바보짓'을 했다), 그건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다. 어떤 식으로 읽었나?  

"처음에는 이른바 명저라고 불리는 책을 구하거나 도서관에서 찾아 읽어야 할 목록을 만듭니다. 양자역학은 폴 디락이나 도모나가 신이치로입니다. 전자기학은 역시 파인만이고, 상대성이론이라면 아인슈타인이지요."(71쪽) 

 

이런 책들이 처음엔 '이빨'도 들어가지 않지만 다른 참고서나 비슷한 유형의 책으로 보충해나간다는 것.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1965년에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의 물리학자라 한다. 국내에도 <물리학이란 무엇인가>(사이언스북스, 2002), <유카와 히데키와 도모나가 신이치로>(범양사, 1994), <양자역학적 세계상>(전파과학사, 1974) 등이 소개돼 있다. 파인만이나 아인슈타인은 물론 국내에도 여러 책들이 나와 있다.    

  

문제는 폴 디락. 교양과학서에서 자주 이름을 접하지만 국내에 디락의 책이나 강의는 소개돼 있지 않다. 찾아보니 일본에서는 폴 디락의 <양자역학>이 1959년에 이와나미에서 번역돼 나왔다. 이게 현재의 '수준차'가 아닌가 싶다. 한 끝 차이일까? 사실을 말하면 두 끝 이상의 차이다. 자신의 독서일기 <센야센사쓰(千夜千冊)>(전7권과 부록으로 일단 간행됨)에 대해 소개하면서 마쓰오카가 다독술의 핵심인 '키북'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그리고 제3권의 10장 '이미지의 극장'에서는 발트루 사이티스의 <환상의 중세>, 루돌프 비트코베어의 <이미지와 상징>, 프란시스 예이츠의 <세계극장>, 그리고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파사주)와 스기우라 고헤이의 <형태의 탄생>이지요. 이 책들에서는 몇 백 권의 책이 연쇄적이고 중층적으로 연결됩니다."(214쪽)

  

거명된 책 중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형태의 탄생>은 우리에게도 소개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권은 먼 나라의 책들이다(비트코베어의 다른 책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원리>(대우출판사, 1997)는 검색이 된다).   

특히 '리투아니아의 상징주의 시인이자 번역가'로 소개되는 '발트루 사이티스Baltru Saitis'란 이름이 눈에 밟히는데, 일단 이름부터가 잘못 표기됐다. '요르기스 발트루사이티스Jorgis Baltrusaitis'다('발트루샤이티스'라고 읽는 게 발음에는 더 가깝다). 이름도 오기할 정도로 생소하니 소개됐을 리는 만무하다. 영어권에도 형태에 관한 에세이 한 권이 소개돼 있는 정도이고, 불어로나 책들이 좀 나와 있다. 아래가 불어본 <환상의 중세>. 이게 일어본으로는 있다는 얘기다.  

  

이런 것도 '격차'라면 앞으로 더 좁혀지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일본에서도 잘 안되고 있다는 북클럽을 좀 활성화해볼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고민들을 해보면 좋겠다... 

10. 04. 04. 

P.S. 독서가로서 마쓰오카 세이고가 떠올려주는 국내인은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과 장석주 문학평론가다. 두 사람의 편집공학과 다독술을 결합하면 얼추 마쓰오카가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한기호 소장이 마쓰오카에 대해 소개한 칼럼이 있기에 참고삼아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8. 04)[한기호의 출판전망대] 매너리즘 사고를 뒤집고 싶다면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대학 4학년 때 아버지가 상당한 빚을 남겨놓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매달 대졸 초임 월급의 2.5배 정도를 갚아도 얼추 5년이 걸릴 정도의 거액이었다. 어머니는 울며불며 네가 빚을 갚아달라고 매달렸다. 순간 이것으로 인생 끝났구나 하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여러 방안을 모색하다 그는 광고대리점에 취직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대리점 사장은 급여는 높게 책정할 수 없지만 커미션(마진)은 나름대로 생각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광고 하나씩 따내서는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생각해낸 것이 두 개씩 한 쌍의 광고를 따내는 것이었다. 맥스 팬터와 전일본항공, 산토리위스키와 토라야, 대의류옥과 BIC볼펜, 학생 원호회와 게키단 사계 등의 조합이었다. 화장품(맥스 팬터)과 비행기 타기(전일본항공)에서 ‘나들이’라는 연결점을 찾아냈듯이 두 회사나 두 제품 사이의 ‘어떠한 관계’, 즉 한 쌍으로 묶을 만한 무언가를 찾아낸 것이다.

문제는 한 쌍을 어떻게 관계 설정하는가였다. 그래서 밤마다 타깃을 몇 개인가 선정해 놓고 한 쌍을 선택해서 기획안을 짰다. 그러자면 전체 스케치도 필요했고 때로는 가상 캐치프레이즈나 카피도 붙여야 했다. 매일 철야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밤을 새워가며 아침까지 준비했다. 준비가 끝나면 두 회사에 기획서와 전체 스케치를 갖고 찾아갔다. 절대 사적인 인맥은 사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주위의 소개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일은 상상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그렇게 즐기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5년보다 2년이나 빨리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돈보다 더 소중한, 인생 전체를 좌우할 무척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나아가 어떤 기업이나 상품(제품)은 모두 ‘새로운 관계의 상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실태와 책과 정보는 무언가와 연결되고 싶어서 좀이 쑤신 상태이다 보니 정보는 절대로 혼자서 존재할 수 없었다.

오늘날 하나의 업종은 종적 관계로, 시장은 철저히 세분화되어 있어 날개를 펼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날개를 달아도 어디로 날아가면 좋을지를 알기 어렵다. 기업과 상품뿐 아니라 학문과 기술도 무언가와 연결되고 싶어 하지만 좀처럼 연결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광고를 따낸 경험을 통해 이러한 현실의 이면에는 어떤 질곡이 있음을 느꼈고 그것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어떤 것이든 ‘의미’를 갖고 있겠지만, 현실 사회와 경제에는 이러한 의미가 자유롭게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 어떤 영역의 어떠한 사물과 사정에도 적합한 ‘의미 확장 방법’을 생각해서 그 방법을 조금씩 형태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에디팅 프로세스(Editing Process)’라고 말할 만한 의미의 변용과정이 언제나 다이내믹하게, 또한 분류와 영역을 넘어서서 관련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편집공학’(Editorial Engineering)이다. 이 사람은 <지知의 편집공학>(넥서스), <지식의 편집>(이학사) 등의 저서로 국내에서도 지명도를 얻고 있는 마쓰오카 세이고다. 녹슨 가슴과 매너리즘에 빠진 사고 습관을 확 뜯어고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여름에 한번 그의 책을 펼쳐보기를 강력하게 권한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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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4-05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 떠오르는 페이퍼네요. 경영할만한 지식도 없는데 무슨 소용에 닿을까 싶어 회의하면서도 각 장을 덮을 때마다 이 책의 가장 훌륭한 리뷰는 실천이라고 다짐했었는데 방법적인 면에서 '편집공학'과 비슷한 것 같아요. 로쟈님의 마지막 문장 특히 '강력하게'에 기대어 반드시 읽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10-04-05 10: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산도 편집공학의 원조쯤 되겠네요. '강력하게'는 제 추천은 아니지만, 지식생산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듯해요...

2010-04-05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6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