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모드에 빠져 있다가 조금 기운을 내 히로세 다카시의 <제1권력>(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0)을 펼쳤다. 화급한 일이 너무 많다 보면 자포자기가 돼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 저자는 서장에서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추리소설 <바스커빌 가의 사냥개> 얘기를 꺼내는데, 기억엔 초등학교 때 읽은 듯하다(그러니 30년 여년 전이다!). 내가 갖고 있는 건 펭귄클래식으로 새로 나온 <바스커빌 가문의 개>(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해설에 따르면, "여러 측면에서 <바스커빌 가문의 개>는 진정한 네오고딕 양식의 탐정소설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공포영화로 만든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고, 모든 홈즈 소설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것이다." 흠, 다시 읽어보고 싶기도 하군. 덕분에 초등학교 3학년 때 반장 겸 독서부장을 하면서 학급문고로 읽은, 나폴레옹 솔로 주인공의 첩보소설들도 잠시 떠올렸다. 원작자가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시 읽으면 얼추 상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JP 모건이 미국 남북전쟁 때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읽다가(북군에게 총을 사들였다가 6배의 가격으로 되팔았다. "한마디로 영약하기 짝이 없는 사기꾼 일당"이었다)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인물과사상사, 2010)에는 어떻게 나오나 살펴봤다. 3권 '남북전쟁과 제국의 탄생'에 잠깐 이름이 비치는데, 론 처너의 책 <모건가>(1990)을 인용하고 있다(참고문헌에 서지가 빠져 있다. <금융제국 JP 모건>(플래닛, 2007)으로 번역된 책이다). 존 피어폰트 모건(1837-1913)에 대한 얘기다.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은, 그는 남북전쟁을 봉사의 기회가 아닌 돈벌이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이다... 여느 유복한 집안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피어폰트도 게티즈버그전투 이후 징집되었으나 300달러를 주고 자신의 대역을 고용했다. 불공정한 이 일상적 관행은 1853년 7월에 일어난 징집폭동의 원인이 되었다."

징집폭동이란 링컨의 징집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규모 항의시위가 일부 지역에서 폭동으로 전화된 걸 말한다. 또 한 대목은 허버트 스펜서와 윌리엄 섬너의 사회진화론의 유행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187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국에서는 스펜서의 학설이 내리막길에 서게 됐지만 미국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1860년에서 1900년까지 50만권 가량이 팔려나갔는데, 요즘 기준으론 수백만 권에 해당한다고. 이유는 짐작대로, 부자들이나 부자 지망생들에게 어필했기 때문("부자 되세요!"가 인사말인 사회에서 스펜서나 섬너의 책이 소개되지 않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이미 체화하고 있기 때문일까?). 

"존 D. 록펠러나 J.P. 모건 등과 같은 거대 부자들이 '가난에서 부유함으로(from rags to riches)'의 본보기로 부각되면서 빈곤은 가난한 사람들의 결함 때문이라는 사상이 풍미했다."

'미국의 스펜서'라고도 불렸다는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1840-1910)는 어떤 인물인가?  

엄격한 청교도인 섬너는 2년간 미국 성공회의 목사로 목회를 한 뒤 1872년 예일대 정치학 및 사회과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대표작으로는 <사회계급들이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것>(1883), <사회적 관행>(1906) 등이 있다.

당면한 사회문제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거나 과학적인 방법으로 진보를 이룩할 수 없다고 믿었다는 섬너의 주장을 강준만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특별한 창조라고 하는 종교적 교리를 포기하면서 확신에 찬 진화론자가 된 섬너는 노골적인 '부자옹호론'을 폈다. 그는 "백만장자는 자연도태의 산물"이며, 그들은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선정된 사회의  대행자로 보는 것이 마땅하며, 그들의 존재는 사회적으로도 이로운 것이라고 단언했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로도 분류되는 섬너에게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걸로 간주된다.  

"인간의 삶에 따르는 고통은 자연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의 투쟁을 통해서 생존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고통을 받는다 해서 그것을 이웃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누구도 남에게 도움을 청할 권리가 없고 또 어느 누구도 타인을 도와야 할 부담을 지지 않는다."

몰인정한가? 하지만 더 나쁜 사회는 자연적인 경쟁을 독려하는 사회가 아니라 '강자' 혹은 '부자'를 일방적으로 보호하는 사회다. <미국인의 역사>(비봉출판사, 1998)의 저자 앤디 브링클리의 지적이다.  

"사회적 진화론은 대기업 중심 경제현실과 많은 관련이 있는 이념은 아니었다. 동시에 기업가들은 경쟁과 자유시장의 덕목을 찬양하면서, 자신들을 경쟁에서 보호하고 시장의 자연적 기능을 자신들의 거대한 기업연합의 통제로 대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스펜서와 섬너가 찬양하고 건전한 진보의 근원이라 불렸던 사악할 정도로 투쟁적인 경쟁은 사실 미국 기업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면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권용립 교수에 따르면, 섬너의 사회진화론은 '개인 책임주의'를 역설한 것으로 그는 '자연적 독점'에는 찬성했지만 보호관세나 제국주의 정책 같은 '인위적 독점'에는 반대했다. 보수적 자유주의자인 그가 '반제국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사회진화론의 양면성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사회진화론은 쇠퇴했는가? 경제학자 갤브레이스의 대답은 다르다. "아무도 스펜서나 섬너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아직도 부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쳐 거지에게 자선을 베푸는 행위를 억제시키고 있다."(<불확실성의 시대>)  

이런 정도까지 읽고 윌리엄 섬너를 검색해보다가 관련 신간이 나온 걸 알게 됐다. 미국 대공황기의 역사를 다시 짚어본 애미티 슐래스의 <잊혀진 사람>(리더스북, 2010)이다. 뉴딜 정책의 허와 실을 분석하고 있는 책으로 비판의 요지는 이렇다.   

당시 뉴딜 추진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 대신 '유익한 손'을 옹호했다는게 저자의 시각이다. 자유주의 경제를 비도덕적으로 여기며 유권자를 중요시하는 경제정책을 펼쳤다는 것. 소련의 집산주의 모델에서 영향을 받은 전국부흥청이나 테네시계곡개발공사(TVA) 등 규제·원조·구호 기관을 통한 대규모 프로젝트는 미국경제에 치명적인 손실을 초래했다고 본다.

일부 정책들은 경제에 활력을 넣으며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거기에 투입된 정부 지출을 감안할 때 완벽하게 효과적이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 뿐만 아니라 경제 회복에 기여하는 민간 부문의 활동을 억누르는 다양한 제도와 계속되는 세금신설로 기업을 압박했고 기업 활동은 더 위축됐다. 결국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한 뉴딜 정책이 대공황을 더 깊고 오래 유지시키는 데 일조한 셈이라는게 저자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뉴딜 시대의 희생양은 누구인가. 저자는 당시 앨런 그린스펀 격인 앤드루 멜런을 거론한다. 그는 하딩과 쿨리지 및 후버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지내며 시장주의를 고수했지만 정부는 그를 기소했다. 또 뉴딜 담당자들이 대폭락의 책임을 전가한 유틸리티 업계의 거물 새뮤얼 인설, TVA의 전력산업 국유화에 대항했던 민간회사 커먼웰스앤드서던의 웬델 윌키 등도 희생양으로 거론한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시기에 정부정책으로 어린 가축까지 죽여야 했던 농민, 양계업자 등 유명무명의 사람들도 예로 든다. 저자는 이들을 '잊혀진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거시경제적 집단들 틈에 끼여 잊혀져 버린 미시경제적 주체'라고 설명한다.

대공황이 시작되기 50여년 전인 1883년.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예일대 교수는 '잊혀진 사람(The Forgotten Man)'이라는 논문을 통해 정부정책이 평범한 시민들에게 사회적 프로젝트의 비용을 부담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책의 제목 '잊혀진 사람'은 여기서 나왔다.(한국일보, 오미환기자)

 

하여, 예기치 않게도 오늘의 인물은 윌리엄 섬너, 오늘의 상식용어는 '잊혀진 사람'이 됐다. 다시 <제1권력>으로 돌아가거나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다시 읽거나,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읽어야겠다. 아니 그보다 더 급한 일들을 빨리 처리해야 할 텐데... 

10. 04. 11.  

P.S. '잊혀진 사람' 대신에 '잊혀진 여인(The Forgotten Woman)'을 따로 고르자면, 히로세 다카시가 헐리우드 영화사의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언급한 '잇걸It Girl' 클라라 보우(1905-1965)다.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적인 육체파 배우였다고. 어쩐지 이미지는 낯설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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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4-12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인가 2008년 무렵 이상돈(중앙대 법대 교수)이 월간조선에 연재한 글 중에 잊혀진 사람을 꽤 길게 언급하면서 뉴딜을 비판하더군요.정부의 개입을 반대하고 시장과 기업의 자유를 옹호하는 측에서 보는 뉴딜관입니다.물론 좌파들이 뉴딜을 비판하는 것은 각도가 또 다르지요.

로쟈 2010-04-12 17:29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정상적인 보수라면 '4대강'에도 반대해야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입니다. 좌파와는 다른 이유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