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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 시립도서관에서 대출한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레, 2008, 초판1쇄) 반납일이어서 부랴부랴 번역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적는다. 내가 읽은 건 <마음>(문예출판사, 2006, 5쇄)이고, 이레판과 웅진판 <마음>(웅진지식하우스, 2010, 재판9쇄)을 참고했다. 범우사판이 가장 먼저 나온 듯하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판본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히는 건 문예판-이레판-웅진판 순이다(적어도 알라딘에서는 그렇다). 

  

일본소설의 번역을 대조해서 읽은 건 기억에 처음이지 싶은데, 작가가 나쓰메 소세키 정도라면 그런 수고를 무릅쓸 만하다. 그래서 더 거창하게 '나쓰메 소세키를 읽기 위하여'란 페이퍼도 구상을 했었지만 3월엔 여유를 얻지 못했다. 몇몇 작품을 더 읽게 되면 나대로 정리를 해볼 계획이다.   

간단히 적으려고 하는 건 현재 가장 많이 읽히는 문예출판사판의 몇 가지 오역이다. 작품의 핵심이 되는 '선생님과 유서' 장은 번역본들마다 문체가 달라서 어느 것이 더 나은 번역인지 판별하기 어렵다. 당장 문예판과 이레판에서 "나는 올 여름 자네로부터 두세 통의 편지를 받았네."라고 옮긴 첫 문장이 웅진판에서는 "나는 이번 여름에 당신에게서 두세 번 편지를 받았습니다."로 돼 있다. 그런 경어법이 원문의 뉘앙스에  더 가까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느낌은 상당히 달라진다. 거기에 '선생님'이 하숙집 여주인을 부르는 호칭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나는 주인 아주머니를 늘 사모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여기서도 사모님이라 칭하겠네."(문예판)   
"나는 주인집의 미망인을 항상 사모님이라고 불렀으니, 이제부터는 사모님이라고 부르겠네."(이레판) 
"나는 미망인을 늘 아주머니라고 불렀으니까 이제부터는 아주머니라고 부르겠습니다."(웅진판)

한번 부르고 마는 거라면 별로 상관이 없지만, 이 작품에선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호칭이기 때문에, '사모님'과 '아주머니'는 작품의 색깔마저도 달라지게 한다.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아주머니'는 경어체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아주머니'는 높임말의 쓰임도 갖지만 요즘은 예삿말로 보통 사용되기 때문이다). 번역본은 그런 차이를 고려하여 선택하면 될 듯싶다. 다만, 문예판에서 몇 대목은 교정이 필요하다. 먼저 작품의 서두 부분.  

"나는 그분을 언제나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러니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 칭하고 본명은 밝히지 않겠다.(...) 나는 그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곧바로 '선생님'이라고 부르게 된다. 붓을 쥐고 글을 쓸 때에도 마음은 한결같다. 나에게조차 낯선 이름으로는 도무지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문예, 8쪽) 

"나는 그분을 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 쓰고 본명은 밝히지 않겠다.(...) 나는 그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금방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펜을 들어도 그 마음은 마찬갖지다. 어색한 머리글자 따위는 도무지 사용하고 싶지 않다."(이레, 8쪽) 

"나는 그분을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그냥 선생님이라고만 쓰고 본명은 밝히지 않겠다.(...) 나는 그분의 기억을 되새길 때마다 금세 '선생님' 하고 부르고 싶어진다. 펜을 들어도 마찬가지 기분이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니셜 따위는 쓸 생각이 전혀 없다."(웅진, 9쪽)   

'나'는 그를 항상 '선생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에 관해 쓰면서도 이름 대신에 '선생님'이라고 부르겠다는 것. 이름(본명)을 밝히지 않는 방법으론 이니셜을 쓰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다는 것. 뭔가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이유에서다. '선생님과 유서' 장에서 선생님은 자신의 친구를 K라는 이니셜로 부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나'와 '선생님'과의 차이도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니셜을 쓰고 싶진 않다"는 내용으로 옮겨져야 하는데, 문예판은 "나에게조차 낯선 이름으로는 부르고 싶지 않다"라고 다소 모호하게 옮겼다(이름과 이니셜의 차이가 지워졌다).  

그리고 사소한 것으로 "친구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어느 자본가의 아들로 경제적으로 별 부족함이 없었지만 같은 학교에 나이도 나이니만큼 생활하는 수준은 나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문예, 9쪽)라고 한 대목. 다른 번역본을 보면 여기서 '중국(中國)'은 '주고쿠 지방'을 가리킨다. 중부지역의 5개 현을 일컫는 말이라고(당시 중국은 '지나'라고 썼겠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어느 자본가"는 "주고쿠 지방의 한 자산가의 아들"(이레)이나 "주고쿠 지방의 부잣집 아들"(웅진)이라고 옮기는 게 맞겠다.   

부주의에서 빚어진 오역으론 이런 대목도 있다. '내'가 선생님 댁에서 술을 마시게 된 상황에서 선생님과 사모님이 나누는 대화 장면이다.  

"오늘 웬일이세요. 저한테 잔을 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요."
"내가 당신 싫어하잖아. 그래도 가끔씩은 마셔도 되지. 기분이 좋아진다구."(문예, 30쪽)

"웬일이세요. 좀처럼 저한테 술을 권하지 않으시는 분이." 
"당신이 싫어하잖아. 그래도 가끔씩은 마셔도 괜찮아. 기분이 좋아진다니까."(이레, 29쪽) 

"별일이 다 있네요. 나한테 마시라고 한 적은 웬만해서 없었는데."
"당신이 싫어하니까 그랬지. 하지만 가끔씩은 마셔 보라구.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웅진, 27쪽)
 

문예판에선 원문에도 없을 법한 '내가'가 왜 삽입됐는지 모르겠다. 이보다 더 중요한 대목은 '나의 아버지'가 천황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하며 매일 아침 신문 기사를 챙겨 읽다가 하는 말이다.  

"이것 좀 봐라. 오늘도 임금님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왔다."
아버지는 천황을 늘 임금님이라고 부르셨다. "안됐지만 말이야, 임금님의 병환도 선친이 앓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야."(문예, 129쪽) 

"이것 봐라, 오늘도 천자님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구나."
아버지는 천황을 항상 천자님이라고 불렀다.  
"황송한 얘기지만 천자님의 병환도 내 병하고 비슷한 모양이야."(이레, 124쪽) 

"이거 봐라, 오늘도 천자님 일이 자세히 나와 있다."
"아버지는 폐하를 항상 천자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송구스럽게도 천자님 병도 아버지 병과 비슷한 거 같구나."(웅진, 105쪽)  

'임금님'이란 번역도 아무래도 좀 과한 듯싶고 '천자님' 정도가 적당해 보인다. 문제는 당시 메이지 천황이 앓고 있던 병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당뇨병'이었다는 것(메이지 천황은 당뇨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황송한 일이긴 하지만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미천한 자신도 아직 살아있으니까 천황도 괜찮을 거라는 얘기를 '아버지'는 덧붙인다. 그런 문맥에서 보면 "임금님의 병환도 선친이 앓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이야"라고 옮긴 것은 부정확하다.  

그리고 '장모님'의 병환에 관한 대목도 "그러는 동안에 장모님이 병으로 돌아가셨네.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보니 도전히 완치할 수 없는 병이라 했네. 나는 정성스럽게 간호해드렸네."(문예, 333쪽)라고 돼 있는데, 다른 번역본에서 "그러던 중 장모님이 병에 걸렸네."(이레, 307쪽), "그러던 중에 아내의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되었습니다.(웅진, 265쪽)라고 옮겨졌다. 결과적으론 병으로 돌아가신 게 맞지만, 논리상 진찰도 받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 건 너무 앞지른 것이고, 다른 번역본을 보더라도 "병으로 누우셨네."정도가 맞겠다.   

참고로, <마음>을 읽는 데 참고할 만한 자료로는 윤상인 교수의 <문학과 근대와 일본>(문학과지성사, 2009)에 실린 '국민 속의 <마음> -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와 정전'과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2004)에 수록된 '소세키의 다양성 - <마음>을 둘러싸고' 등이 있다. 국내 전공자들의 논문집도 나와 있지만, 학회용 성격의 책이다.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데는 고모리 요이치의 <나는 소세키로소이다>(이매진, 2006)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세한 작품론은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소세키론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단행본을 쓴 건 아니지만 가라타니는 여러 편의 소세키론을 쓴 바 있다)...  

10.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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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겨보아야할 죽음의 의미
    from 창조를 위한 검은 잉크의 망치 2010-04-27 12:23 
      주인공 나는 방학 중 가마쿠라 해변에서 처음 선생님을 만난다. 도쿄에 돌아와서도 정기적으로 선생님을 방문하며 선생님과 꽤 친해졌다. 그러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간 사이 선생님은 나에게 두툼한 편지를 남겨놓고 자살을 한다. 선생님의 유서에는 자서전이라 할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쓰여 있다. 외아들인 선생님은 스무 살 무렵 장티푸스로 거의 동시에 부모님을 잃는다. 부모님이 남긴 유산을 맡아 관리하던 작
 
 
반딧불이 2010-04-04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유리와 박유하를 놓고 어떤 것을 읽을 것이냐 망설이다가 박유하 번역을 선택했어요. 이렇게 비교해주시니 도움이 많이 되네요. <언어와 비극>에 실린 글은 전혀 몰랐었는데 참고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로쟈님. 일본인에게 아버지와 천황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요?

로쟈 2010-04-04 11:22   좋아요 0 | URL
그렇게 일반화해서 말하기는 어렵구요, 나쓰메 소세키의 경우엔 알다시피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진 않았습니다. 그의 문학에 나타난 가족관계에 대해선 국내에도 연구서가 나와 있습니다. 그의 천황론은 의견이 분분하던데, 윤상인 교수의 책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론 <마음>에서 선생이 말한 '메이지 정신'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가라타니 고진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는 메이지 10년대와 20년대를 구분하고 메이지 10년대의 시대저정신을 소세키가 말하는 '메이지 정신'이라고 봅니다...

2010-04-27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27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안함 침몰 사건 원인과 관련하여 어제 국방장관이 다시금 어뢰를 지목하고 어뢰의 파편을 찾겠다고 나섰다. 점입가경이다. 더 이상은 이 잔혹 부조리극을 관람할 용의가 없다. 거짓말을 키우면서 국방부는 아마도 자기 무덤을 파게 될 듯싶고, 상황에 따라서는 MB정부의 수명도 단축될지 모르겠다. 이 사건에 대한 가장 납득할 만한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는 칼럼을 옮겨놓는다(http://www.kookminnews.com/news/service/article/mess_03.asp?P_Index=631&flag=).  

 

국민뉴스(10. 04. 01) [포커스]나름대로 분석해본 천안함 침몰 진상 

1.아군 혹은 미군에 의한 오폭 오조준의 가능성

지금 일각에서 가장 많이 제기되는 이 가설에 대해서 가능성을 높게 상정해봤지만,다음의 몇 가지 반대되는 근거 때문에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첫째, 사고 당시 주변해역에 있었던 미해군 혹은 우리 해군의 함포 그 어느 것으로도 천안함 정도 되는 배를 한번에 두동강을 낼 수가 없습니다. 현대 해군의 함포는 적함의 상부구조물을 무력화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지 과거 전함시대의 거포처럼 한번에 적함을 바다 속으로 처넣을 수 있는 대구경 함포가 아닙니다. 물론 작은 경비정 정도는 단 일격 으로 수장이 가능하지만 만재배수량 1500톤이나 되는 천안함 정도를 한번에 두쪽을 낼 수 있는 함포는 당시 해역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함포를 두들겨 맞았다면 선체 곳곳에 피탄 흔적이 나타나야 하고 실종자가 지금처럼 후미와 바닥에 모두 쏠려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근 속초함의 연이은 함포발사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결론부분에서 다시 보충해드리겠습니다.

둘째, 현재 상황에서 천안함을 한번에 두동강을 낼 수 있는 무기는 사실상 어뢰뿐 인데, 문제는 천안함이 침몰한 위치가 어뢰나 기뢰에 피격될 수 있는 해역이 아니기에 이 역시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현대의 어뢰는 과거처럼 배 옆구리를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부분 선박의 바닥 바로 밑에서 폭발하여 거대한 수중 진공상태를 만들어 목표 선박의 용골을 비틀어 반쪽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 곳곳에 나돌아다니고 있는, 순식간에 반토막이 된 채 침몰해버리는 표적함들의 동영상이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죠. 천안함 역시 어뢰에 피격되면 그렇게 함이 두동강이 날 수 있다고 가정을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천안함이 침몰된 해역은 그런 어뢰를 쓰기에는 바닥이 너무 얕다는 게 걸립니다. 미해군이건 우리건 설사 북한잠수함이라고 해도 어뢰를 발사했다면 사고 당시 천안함의 위치에서는 미처 명중되기도 전에 바다 밑바닥에 처박혀 버렸을 겁니다. 누가 어뢰를 발사했건 천안함을 현재의 모습대로 두동강을 낼려면 최소한 심도가 50미터는 되어야 합니다. 현재 천안함 침몰지점의 심도로 볼 때 불가능하죠.

다음은 기뢰에 피격되었을 경우인데, 문제는 그렇게 얕은 해역에는 기뢰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과 만약의 경우 유실된 기뢰에 피격되었다면 천안함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침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정말 기뢰에 의한 것이라면 분명히 사망자들의 시신이나 기름과 선체조각 등 각종 부유물들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주변해역에 널려 있어야 하는데, 현재까지 해군이나 해경이 건져낸 물품들을 봐도 그렇고 생존자를 제외한 사망자들의 시신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선체의 절단면을 만져본 수중구조대원들의 증언이 선체의 절단면이 아주 깨끗하다고하니, 분명 기뢰에 의한 외부 폭발에 의한 침몰은 아닌 듯 합니다. 기뢰에 맞았다면 선체의절단면은 분명히 너덜너덜 걸레쪽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위 두가지 가설들을 입증해줄 또 다른 단서는 바로 부상자들의 상처유형입니다.만약 함포에 맞았거나 어뢰 혹은 기뢰에 의해 피격되었다면 부상병들 가운데 반드시 화염이나 화약의 폭발에 의한 화상 환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부상자 대부분은 충격에 의한 골절상이나 타박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고 생존자들의 증언가운데 화약냄새가 없었다는 대목은 그들의 증언이 맞다는 가설 하에 어뢰나 함포에 의한 피격은 아니라는 분석이가능합니다.

2. 북한에 의한 공격가능성

일부 냉전극우들과 조중동에서 슬슬 현정권 면피를 위해서 냄새를 피우고 있지만, 몇가지 사실 때문에 사실상 아니라고 봅니다. 사고 시점이 한미 양국해군의 훈련기간이었다는 점, 당시 미해군의 이지스함 2척이 해역에 이미 들어와 있었고 우리해군의 이지스함도 작전중에 있었습니다. 미군의 첨단 군사첩보위성과 정찰시스템들이 총동원 되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시점에 감히 특수부대나 잠수함 혹은 반잠수정을 침투시켜 "긁어 부스럼"을 만들만큼 저들이 멍청할까요? 그랬다간 바로 전면전으로 치닫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것도 고속정도 아닌 천안함 정도의 대물을 노리고서? 이미 십여년전에도 상어급 소형 잠수함의 침투경로를 출항지에서부터 추적해 모두 알고 있었을 만큼 북한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자국 함정이 작전하고 있는 수역에서 이러한 북한의 움직임을 과연 용인했을까요?

또 다른 반증하나는 사고 당시 이례적으로 평양에서 직접 정찰기를 띄워 백령도까지 내려 왔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해주인근 전방 레이다나 통신감청으로 사고당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북한당국이 왜 평양공항에서 직접 정찰기를 띄웠을까요? 그 얘기는 좀 더 최신의 기종으로 더 상세히 상황을 파악할 필요성 때문이었을 겁니다. 평양주변에 집중 배치된, 그들에게는 가장 최신예 기종인 미그 29의 정찰카메라로 백령도일대 해역의 상황을 모니터링해야 후일 남조선 정부의 그 어떤 대응도 가능하다는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했을 겁니다. 북한의 움직임은 그들도 지금 이곳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뭔가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는 소립니다. 그러니 통상적인 해주인근의항공정찰보다 더 좋은 장비를 가진 평양인근에서 출격해 직접 최고위층에 보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그들이 뭔가 기습적인 공격을 주도했다면 이러한 예외적인 정찰은 애초부터 불필요했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이명박정부가 자신들에게 책임을 덮어씌울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정찰을 강행했다고 봅니다. 요즘 중국방문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김정일 입장에서 설사 세 번째 서해교전의 보복을 하고 싶었다 해도 지금은 뭘 감안해도 그럴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미 국무성이 이례적일만큼 빠르게 그럴 가능성을 차단해버렸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한국내 일부의 고질적인 북한신경과민증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미 국무부의 "북한 개입 가능성 없다" 라는 발표는 그쪽으로의 사태 와전을 좌시하지 않겠다 는 미국의 의중이 담겨져 있습니다. 6자 회담 재개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는 상황에서 더더욱이나 그럴 이유가 없지요.  

3. 사건진실의 핵심: 왜 천안함이 평소 가지 않던 백령도 연안으로 침로를 잡았는가

김태영 국방장관은 천안함이 15차례나 그 해역을 지나다녔다고 발표했지만 이것은 명백히 허위진술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대 동형함종을 지휘하거나 탑승했던 예비역 제독들과 장교들 그리고 천안함에서 근무했었던 전역자들이 모두 일치되게 천안함 같은 함종이 그렇게 얕은 바다로 진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더구나 견시를내세워도 안전이 보장되기 어려운 깜깜한 밤중에 연안으로 배를 몬다? 이건 예삿일이 절대로 아니지요. 천안함보다 더작은 참수리급 고속정들도 그렇게 얕은 곳은 잘 안들어가는 해역에서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모든 진실은 거기에 전부 숨어 있는 것 아닐까요? 분명 천안함은 그렇게 얕은 바다로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부여되거나 발생하고 있었다고 봐야합니다. 사고가 난 천안함은 예사롭지 않는 행동을 계속하다 결국 예사롭지 않게 가라앉았습니다. 그 사실을 깊게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 시점에서 실종자 가족들의 예사롭지 않은 증언 하나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안함이 자꾸 물이 새서 불안하다"는 실종 부사관의 아내 되시는 분의 증언.

해군의 특성상 자주 교체되는 장교들보다 한배에서 오래 근무한 부사관들 특히 기관이나 선체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부사관들이 배 자체에 대해선 더 정통 합니다. 누구보다 자기가 탄 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부사관의 입에서 물이 새서 불안하다는소리는 천안함의 상태가 뭔가 비정상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천안함이 물이 새서 불안하다는 증언은 그 외에도 실종병사의 부모도 같은 말을 했고 주로 배 밑바닥에서 생활하는 병사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면 신빙성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게다가 지난 2차 서해교전이후 피해분석과정에서 가장 크게 대두된 사항은 바로 최전방에서 작전하는 참수리급 고속정들에게는 "천안함과 같은 초계함의 엄호가 반드시 필요하다"였고 아마도 이 때문에 천안함과 같은 초계함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예전보다 더잦은 작전에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잦은 작전투입은 선체의 피로도를 과중시키는 첩경이고 그렇다면 천안함은 불과 20년이 조금 넘은 선령이지만 이미 선체의 핵심적인 부분 어디에선가는 골병이 들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이 시점에서 잠시 우리는 사고 발생시각에 대해서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비롯한 해군당국은 사건 발생 시각에 대해서 생존자들이 있음에도 계속말을 바꾸고 사건 발생시각을 은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생존자들을 지금병원에 몰아넣고 일체의 언론접촉을 막고 입단속을 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 이럴까요?

그 점 역시 천안함이 예외적으로 백령도 해안에 근접했었던 사실과 무관치 않습니다. 군당국은 사고시점을 9시 30분전후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제 생각에는 사고는 분명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 단적인 예로 한겨레 신문에 보도된 실종된 차균석 하사의 여자친구 핸드폰 문자메시지 단절시각을 놓고 보면 9시 15분을 전후해서 뭔가 심각한 상황이 천안함에서 발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차하사의 문자메시지를 보면 여친의 대답이 늦다고 되려 핀잔을 주던 상황에서 갑자기 15분을 전후해 비번이던 차하사의 메시지가 끊어진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국방부, 해군 그리고 생존 최함장이 말하는 것처럼 사고는 9시 30분 혹은 그 이후에 갑작스레 발생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랬다면 당시 비번인 부사관 혹은 병사들의 휴대전화 통화와 메시지들이 일제히 9시 15분을 전후해 끊어졌을 이유가 없습니다.

위 두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천안함의 이상행동에 대한 가설들을 세워보면, 선체중앙 혹은 용골등의 핵심 부위에서 균열 혹은 그에 준하는 선체의 안전을 매우 위협하는 심각한 위기 상태가 9시 15분을 전후해 발생했고 보고를 받은 함장은 이에 전원 비상전투배치 혹은 위기시 대응행동을 명령했을 겁니다. 그랬기 때문에 비번이던 승무원들도 핸드폰을 모두 팽개치고 나갔을 거구요. 특히 선체의 기관부와 안전을 담당하던 부사관들과 사병들이 일제히 선체 하부 사고지점에 달려들어 비상복구를 하는 동안 당연히 함장은 백령도 연안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 어떤 선박도 비상상황이 되면 연안으로 접근하지 외해로 나가는 짓은 하지 않지요. 그런데 문제는 선체 하부에서 상황을 반전시키기도 전에 배는 두동강이 나버렸고, 그와 동시에 선체 하부에서 복구작업을 벌이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인원들은 미처 손쓸새도 없이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을겁니다. 틀림없이 사고지점으로 긴급 복구 작업을 위해 내려가면서 수밀격벽을 폐쇄했을겁니다. 아마도 총지휘는 실종자중 가장 계급이 높은 선임원사가 맡았겠지요.

실종된 인원 대부분이 그와 같은 임무에 투입될 위치에 있는 병사들과 부사관들이고 그에 비해서 나머지 인원들 특히 장교들이 전부 생존했던 것은 바로 그 위급한 시각에 그들이 자기 정위치인 함교나 선체 상부에 있었기에 설명이 가능합니다. 통상 수심 25미터 내외의 얕은 바다로 가지 않아야 하는 천안함이 작전상황도 아닌 그 시각에 그토록 백령도 연안으로 근접했었던 이유는 선체가 안전을 위협받고 있는 매우 심각한 상황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배 밑바닥에 물이 엄청나게 새기 시작했던가,아니면 사람으로 치면 척추에 해당하는 배의 용골이 비틀리거나 부러져 이대로 가다간 배가 두동강이 나는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면 도대체 천안함 함장 최중령이 그런 얕은 바다로의 침로변경을 지시했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마도 함내 전체 비상이 발동되기 몇 시간전부터 이상징후가 보고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일부에서는 천안함이 모종의 특수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추측하고 계시지만, 만약 그런 종류의 극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면 비번의 부사관이 한가로이 여자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는 일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함정의 운영 특성상 정말 임무수행중이었다면 모두들 자기 전투위치에 서있었을 테니까요.지금 이러한 제 주장을 입증시켜줄 가장 명백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는 바로 실종자들의 평소 함내 위치와 근무장소 그리고 보직입니다. 그들 모두가 천안함이 침수 혹은 균열시 이를 복구하거나 막아야 할 임무를 가진 병사들이었습니다. 만약 함포나 어뢰와 같은 외부 피격에 의한 것이었다면 생존자와 실종자는 이렇듯 보직이 확연하게 구분될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어뢰나 미사일, 함포에 의한 피격이라면 사망자나 실종자는 계급과보직과는 상관없이 무작위로 발생해야 맞습니다. 일부의 주장대로 만약 기뢰에 접촉했다면 틀림없이 시신들이 여기저기 사방에 떠올라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여태 그 엄청난 수색에도 불구하고 시신하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요?

그런데 지금 생존자들과 실종자들의 보직과 계급을 보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됩니다.놀랍게도 함장이하 장교들이 모두 살았습니다. 부사관과 사병들도 선체 하부 복구와 관련이 없는 부서 근무자들은 전원 무사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분명 천안함이 백령도 연안으로 접근했어야했던 긴박했던 이유와 생존자와 실종자가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 예사롭지 않은 우연은 이 사고가 분명 급작스러운 것이 아님을 말없이 대변합니다.그리고 이것이 명백한 필연에 의해 생과 사가 갈렸던 대형사고였음을 말해줍니다.그들 대부분이 선체 하부에서 뭔가 심각한 임무에 종사하다가 그대로 매몰된 채 바다에 가라앉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4. 급작스런 사고의 발생 그리고 은폐조작 시도: 석연치 않은 행동이 설명가능

근본적으로 함장의 말대로 9시 30분 무렵 갑작스런 사고 발생이라면 9시부터 사고발생시점까지의 모든 통신기록을 공개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공개를 할 수 없습니다. 함에 심각한 뭔가가 발생한 시각은 9시 30분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죠.

구조된 이후 함장이 보고를 구실로 그렇게 빨리 현장을 떠나버렸던 행동 역시도 총체적인 조작과 상부의 구체적인 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얘깁니다. 함장은 사건의 핵심증언자인데, 사건 현장을 그렇게 쉽게 내버려두고 도대체 어딜 그리 급하게 갔어야 했고 왜 핸드폰까지 들고서 상부에 보고를 그렇게 긴급하게 했어야 했을까요?

저의 가설에 따라 현 정권의 행동들을 분석해보면 왜 그들이 지금 저런 행동을 취하고 있을지는 보다 더 수월하게 설명이 가능합니다. 함장은 아마도 계속 가동되고 있었을 통신을 통해서 천안함이 계속 항해하기 어려운 매우 심각한 상황에 도달했음을 보고했을 것이고 백령도 연안으로 긴급하게 대피기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상을 걸어 선체보수반원들을 총동원해 투입했겠지요. 그러나, 배는 결국 연안근처에서 두동강이 나버렸고(선체가 처음엔 후미가 부서졌다고 하더니, 지금 상황에선 선체 절반이 뚝 부러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걸 보면 애초부터 이 사고는 선체의 구조적인 하자 문제였습니다) 격실을 폐쇄하고 선체복구에 나섰던 절반에 가까운 보수반원들은 결국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게 된겁니다. 해경에게 구조되면서 마지막 구조 인원들이 '우리가 마지막이다'라는 말을 한게 우연이었을까요? 떨어져나간 선체에 갇힌 보수반원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당장 구조를 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소리지요.

자, 이 시점에서 왜 대통령과 안보담당 주요장관들이 벙커에 들어가 숙의와 논의를 거듭하게 되었을지를 따져보겠습니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번 사고가 곧이곧대로 발표되면 정권의 입지는 바로 레임덕으로 직행하게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뻔히 내다보이는 상황에서 저들은 이유야 어떻든 사고를 최대한 은폐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면서도 당장 북과는 관련이 없다는 식의 차단을 한 것 역시도 그만큼 내부사정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최대한 잃어버린 선체 후미의 수색을 지연한 것도 혹시나 생존자들이 나와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도록 미필적고의가 작용했다고 보여집니다.

심해작업을 하는 수중구조대에게 필수적인 감압실을 고작 하나만 떨렁 들고와서 작업을 한다든지, 정지된 물체를 찾기위해서는 기뢰수색장치를 갖춘 함정이 필수인데도 그 출동에 늑장을 부린 것이라던지, 이미 실종자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고 실종자 가족들 대기 장소에 일찌감치 빈소를 만들려다가 가족들을 격분시키고 어영부영 철수한 것이라던지. 충분히 부표설치가 가능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표설치를 고의적으로 하지 않은 점이라던지, 국방장관의 말대로 떨어져나간 선미의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어선이 찾아낼 때까지 수색을 게을리 했던 점 ...그것도 부족해 실종자 가족을 가장하고 가장 민감할 실종자 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경찰까지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 사고에 대해서 정부가 사실상 팔짱을 끼고 있다는 명백한 정황은 사건 발생직후 혈맹이라는 미해군에게 일체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봐도 분명합니다. 아무리 조류의 흐름이 빨라 구조활동이 원활치 않고 우리 해군의 장비가 빈약해 진척이 어렵다는 변명은 명백히 눈가리고 아웅에 불과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미해군걸 빌려도 됩니다. 미해군이 평소 이런 일에 우리를 거부할 사이이던가요? 가상적국인 러시아 잠수함 침몰사건때도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하던 미국이 동맹국이 요청만하면 그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한데도 지금 정부는 우리 해군 단독으로 수색을 강행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미해군을 투입했다가 혹시라도 곤혹스러운 사실이나 정황이 외부에 드러나는 일은 애초부터 막겠다는 의지가 아니고서는 지금 이럴 수는 없습니다. 선체 잔해 수색을 위해서 최첨단 무인수중 탐사기 정도는 요청만 하면 미해군은 전세계 어디로도 24시간안에 수송이 가능하며 깊은 바다에서 작업하는데 필수인 감압실 역시도 얼마든지 추가 지원이 가능합니다. 미해군의 무인 수중탐사기는 수천미터 심해와 각종 험악한 곳에서도 금속탐지장치와 열영상장치등의 최첨단 탐지기능으로 잔해를 찾아내는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고해역의 시계가 불량하다한들 고작 25미터 내외의 얕은 바다에서 반경 1킬로도 떨어져 있지 않은 선체후미 잔해를 미해군의 첨단 탐색장비가 못찾았을까요? 아니죠, 정권은 미해군에게 이를 부탁했다가는 너무도 빨리 이를 찾아낼 것을 알고 있기에 절대 미해군의 힘을 빌리지 않은 거죠.

마지막으로 천안함 근처 속초함이 계속 사격을 했던 이유를 따져볼까요?

원래 76밀리 함포는 상부의 허가 없이는 발사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서슴없이 속초함은 76밀리 함포를 5분간이나 사격했습니다. 연막을 피워야 하니까요. 속단일지는 모르나 속초함의 사격은 뭔가를 봐서 사격한 것이라기보다는 천안함 침몰사고의 본질을 흐리기 위한 일종의 연막이었을 공산이 큽니다. 그런데 이러한 속초함의 행동은 북한의 추가정찰과 샤프 한미연합사 사령관의 급거 원대복귀를 낳았지요. 다들 이게 뭔일인가 했던것이지요. 샤프 연합사 사령관은 한국정부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고 북한은 나름대로 엉뚱하게 독박을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요. 또한 인도적인 구조를 위해서라면 남다른 협조를 아끼지 않는 미국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샤프사령관을 복귀시켰을 거구요. 물론 샤프 사령관의 협조제의는 우리정부가 정중히 거절했을 거 같네요.

천안함은 선체에서 예상치 못한 급작스런 균열과 침수로 백령도 연안으로 피신했던 것이고 그 와중에 결국 붕괴를 막지 못하고 선체가 둘로 갈라지면서 침몰한게 아닌가합니다. 물론 저의 가설이 정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드러난 정황증거를 보면 외부의 공격이나 오폭 보다는 그들 자체의 문제였던 거 같습니다. 생존자와 실종자가 극명하게 가려진 것도 급작스런 선체 분해가 아니라면 일어나기 어렵지요.

문제는 지금 이 상황에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을 경우 가장 큰 비난을 뒤집어 쓰게 될게 명약관화한 이명박 정권이 대대적인 은폐를 위해서 예의 그 벙커회의를 수차례 주재하게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 않구서야 뻔한 사실들을 이렇게 오래도록 감추고 말을 바꿀 이유가 저들에게 없습니다.(권종상 객원논설위원) 

10. 04. 03.  

P.S. 더불어, 국방부가 발표한 사고 발생 시각에 대한 의문도 킬럼의 추정을 뒷받침해준다(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414002.html). 

한겨레(10. 04. 03) 천안함이 침몰하게 된 ‘비상상황’이 발생한 정확한 시각은 언제인가?

해양경찰청(해경)은 지난 28일 ‘해군함정 침몰관련 수색 구조 상황’이라는 이름의 보도자료에서 상황발생시각을 ‘26일 오후 9시15분’으로 특정했다. 이는 당시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밝힌 ‘밤 9시30분’보다 15분이나 이르다. 국방부가 1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탐지한 지진파 발생시각을 근거로 공식적으로 제시한 ‘9시22분’보다도 여전히 7분이 이르다. 어찌된 일일까?

이에 대해 해경 관계자는 2일 “해군에서 해양경찰청 경비국에 통보해온 상황 발생 자료를 보고 보도자료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해경이 자체 판단한 게 아니라 해군의 통보 자료를 근거로 했다는 얘기다.

국방부가 1일 내놓은 천안함 관련 해명자료에도 “사고발생 시간을 오후 9시22분경으로 판단한다”는 국방부의 ‘판단’과 다른 내용이 들어 있다. 국방부는 이 해명자료에 “해군 해난구조대(71명)는 상황 발생 40분 만인 21시55에 비상소집”됐다는 내용도 명시했다. 국방부의 이 설명대로라면 상황 발생시각이 오후 9시15분이 된다. 국방부의 ‘9시22분 사고발생’과 어긋나며, 오히려 해경이 밝힌 ‘오후 9시15분’과 일치한다. 국방부가 공식 발표한 사고발생 시각에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욱이 실종자 가운데 1명이 여자친구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다 26일 오후 9시16분께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 것도 국방부가 발표한 사고 시각보다 이른 시각에 사고가 일어났을 수 있다는 정황증거로 거론된다.

국방부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지진파 발생 시각을 사고 발생 시각의 근거로 들지만, 폭발은 오후 9시22분에 났을지 몰라도, 그 앞 6~7분 정도 사이에 천안함 안에서 ‘특이 상황’이 생긴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가능한 상황이다.

아직도 ‘해명되지 않는 7분’을 둘러싼 의혹을 불식시키려면 국방부가 천안호의 교신·항적 기록 및 해경과의 구체적인 교신일지 등을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권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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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제트 원인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02 23:37 
    오늘 아침 CBS 라디오의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천안함 침몰 사고와 관련하여 美 브루킹스연구소 박선원 초빙연구원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http://www.cbs.co.kr/radio/pgm/?pgm=1378). 국방부와 합동조사단의 잠정 결론과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어서 인터뷰 내용을 스크랩해놓는다. 의혹만 부풀려진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믿는다. 전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2010-04-03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3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YLA 2010-04-03 01:39   좋아요 0 | URL
구조작업하던 배가 또 사라졌다는데 애꿎은 사람들만 계속 죽어나가네요. 자연을 해치고 국고를 낭비하는 것도 속 터지지만 이렇게 사람목숨을 갖다 버리는 행태에는 정말 두손두발 다 들고싶습니다. 사이코패스가 따로 없어요

로쟈 2010-04-03 08:53   좋아요 0 | URL
무능과 사악함을 계속 오가고 있습니다...

비로그인 2010-04-03 10:51   좋아요 0 | URL
르네 톰의 카타스트로피 이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이 모든 사태들에 대해.

로쟈 2010-04-03 20:26   좋아요 0 | URL
문제는 '인재'라는 점이죠. 짐작에 군 지휘부는 사고 발생시 '매뉴얼'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휘책임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몰고가는. 그래서 이게 대단히 엄청난 사건이란 점에 대한 '감'이 없는 것 같고요...

blanca 2010-04-03 11:34   좋아요 0 | URL
저인망 어선까지 저렇게 되고 나이 이제는 정말 분노와 슬픔이 범벅이 되네요. 이 정권이 국민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절실하게 느낍니다.

로쟈 2010-04-03 14:49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정권' 문제라기보단 군부에 휘둘리는 듯한 인상입니다. 북한과 무관하다고 미국과 청와대에선 밝혔지만, 군은 계속 어뢰 타령을 하고 있어요. 이유야 짐작가능한 대로고요...

비연 2010-04-03 20:13   좋아요 0 | URL
정부의 발표내용이나 국방부장관이라는 작자가 하는 말도 안되는 얘기들을 듣고 있으면 가증스러움을 지나쳐 슬퍼집니다. 국민들 수준은 저 높이 있는데 저들은 도대체 우리를 뭘로 보는 걸까요. 누가 봐도 다 알만한 내용을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저러는 거 보면 저들의 머리에 어뢰가 박힌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4-04 11:23   좋아요 0 | URL
김우룡 사태 때도 그랬지만, 상식적으로 부조리해보이는 일들이 그쪽에선 일상적인 거 같아요. 둘러대고 축소하고 왜곡하고 하는 일들이 '매뉴얼'인 것이죠...

학생 2010-04-04 01:32   좋아요 0 | URL
결국 MBC에서 한 건 터트린 것 같습니다.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600562_5780.html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600548_5780.html

로쟈 2010-04-04 11:22   좋아요 0 | URL
군에선 곧바로 부인했더군요...

쥬베이 2010-04-04 20:05   좋아요 0 | URL
로쟈님 오랜만에 들렸습니다.
정말 소름돋는 글이에요. 처음부터 뭔가 이상했는데 저런 가능성도 있네요.

로쟈 2010-04-05 10:09   좋아요 0 | URL
함선에 물이 샌다는 얘기는 국방부 자체 보고서에서도 나온다네요. 그런 것부터 숨기고 있으니 군의 발표를 전혀 신뢰할 수가 없지요...
 

어제 한겨레교육문화센터 강의가 끝나서 4월엔 한숨 돌리게 됐지만(5월 강의 이전에 재충전이 될까?), 3월에 마무리 못 지은 일들이 고스란히 이월됐기에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내내 부조리극을 연출하고 있는 천안함 침물 사건도 물론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고.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4월의 책장을 펼친다. 무엇이 보이나?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추천한 문학분야의 책은 '현대문학' 55주년 기념 소설집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현대문학, 2010)로 박완서 선생 외 여덟 작가의 자전적 단편을 모았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회상과 함께 펼쳐지는 박완서의 자전이나 전쟁 통에 홀로 떨어져 피난 가는 소년 이동하의 모습에서는 우리 역사가 만들어낸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의 입장에서 쓰여진 윤후명, 사람 속에 섞이지 못하고 자신 속으로만 파고드는 여자의 내면을 고백 투로 펼쳐낸 김채원, 누구보다 뛰어난 예술가의 자질을 펼쳐보지 못하고 투신해버린 오빠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 양귀자를 비롯한 최수철, 박성원, 조경란, 김인숙의 자전 속에서는 작가로서의 그들의 삶만 보이는 게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 작가의 삶속에 비쳐지는 우리 역사와 지금의 현실이 보인다.

생각난 김에 <얼룩 - 2010 현대문학상 수상작품집>(현대문학, 2009)과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작가, 2010)도 같이 묶어볼 만하다.    

세계문학의 고전들도 연이어 출간되고 있는데, 일단 눈에 띄는 건 작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헤르타 뮐러의 작품들이지만, 1930년대 미국작가 너새네이얼 웨스트의 소설들을 골라본다. 그건 <거금 100만 달러>(마음산책, 2010)이 출간됨으로써 39살에 교통사고로 요절한 이 작가의 '전집'이 소개된 셈이기 때문이다. <메뚜기의 하루>와 <미스 론리하트>, 그리고 이번에 묶여서 나온 <거금 100만 달러>와 <발소 스넬의 몽상> 등 네 편이 그가 남긴 작품의 전부라 한다. 그럼에도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포크너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면 대단하지 않은가! 해럴드 블룸은 <거금 100만 달러>에 대해 "이 혼란의 시대의 정전"이라고 평했는데, 그게 어떤 시대인지는 작품의 에피그라프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말했잖아요. 저는 죄가 없다고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걸 입증할 돈이 없지 않은가." 

'1930년대 암울한 미국사회의 축소판'을 그려냈다고 하지만,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성싶지 않다. 고전은 그래서 언제나 '우리시대의 고전'이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의 추천작은 임상혁의 <나는 노비로소이다>(너머북스, 2010). 제목의 암시대로 '노비제', 특히 '노비 소송'이라는 프리즘으로 조선시대를 들여다보는 게 핵심. 부제는 '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다.    

저자는 노비제가 조선시대의 신분제, 나아가 사회의 얼개를 규명하는 핵심 관건이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노비에 대한 연구는 극히 소략하다. 저자는 “신분이라는 것이 지극히 법률적인 개념인데도 노비의 법적 성격에 대해 거의 외면한 채 진행된 것은 따져 볼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일본은 물론 중국과도 달랐던 조선의 노비소송을 들여다보면 조선의 시스템이 보이는 듯하다. 이 책은 노비 소송을 통해서 바라본 조선 사회의 생생한 속살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흑인 노예의 역사를 다룬 정상환의 <검은 혁명>(지식의숲, 2010)도 우리와 비교해서 읽어봄직하다. 노예제에 관한 이론적 저작으론 모시스 핀리의 <고대 노예제대와 모던 이데올로기>(민음사, 1998)가 있다. 현재는 절판된 책인데, 다시 나오면 좋겠다. 개인적으론 작년에 핀리의 책을 모아놓고 조금 읽다가 만 적이 있다. 여차하면 다시금 시도해봐야겠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고른 철학분야의 책은 최훈의 <라플라스의 악마, 철학을 묻다>(뿌리와이파리, 2010)이다. 철학 입문서인데, 책소개에 따르면, "기존 책들이 대부분 사고실험을 단순히 흥미 위주로 쭉 나열해놓았을 뿐이어서 특정한 사고실험이 철학사의 어떤 맥락에서 제기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점을 보였다면 논리학을 전공한 최훈 교수가 쓴 이 책은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 과학철학 등 철학의 주요 분야들에서 골고루 선택한 117가지 사고실험을 통해 철학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고. 청소년들도 읽을 수 있는 책이지 않을까 싶은데, 원조를 따지자면 양운덕의 <라쁠라스의 악마는 무엇을 몰랐을까?>(창비, 2001)도 있었다. 영어권 철학 입문서로는 로젠버그의 <철학의 기술>(서광사, 2009)도 소개돼 있다. 원제대로 하자면 '철학실습'이 딱 어울린다.   

 

개인적으론 라캉과 정신분석 관련서들이 몇 권 출간돼 반가운데, 모두 4월에 손에 들려고 하는 책들이다. '라캉 정신분석의 쟁점들'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맹정현의 <리비돌로지>(문학과지성사, 2010)는 라캉의 사위이자 상속자 자크-알랭 밀레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있는 저자의 '인간 정신의 지형도'. 국내 저자의 책으론 <라깡의 재탄생>(창비, 2002) 이후의 성과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만화책 <라캉>(김영사, 2002)을 통해서 처음 소개됐던 영국의 정신분석가 대리언(다리언) 리더의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문학동네, 2010)도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다. 어인 일인지 나는 저자를 여자로 착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책은 "우아하고, 지적이고, 명쾌하다!"는 알랭 드 보통의 추천사도 싣고 있는데, 거기에 보태진 뒷표지의 문구는 이렇다. "알랭 드 보통보다 대담하고 지젝보다 친절하다!" 보통보다 어렵고 지젝보다 쉽다, 고 읽힌다.

     

덧붙여, 카자 실버만의 <월드 스펙테이터>(예경, 2010)도 소리소문 없이 나온 라캉주의 철학서다. 부제는 '하이데거와 라캉의 시각철학'. 저자는 기호학과 정신분석, 페미니즘을 이론적 기반으로 하여 영화와 사진을 분석한다. 이번엔 진짜 여자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정치/사회분야의 책은 한번 소개한 바 있는 박지희, 김유진의 <윤리적 소비>(메디치, 2010)다. 이젠 많이들 아는 내용인데, 책의 핵심은 '합리적 소비 VS 윤리적 소비'다.    

자급자족적인 농업문명 시대와 달리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상의 거의 모든 활동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하여 활용하는 소비행위를 수반한다. 그런데 소비활동의 중요 요소인 구매 과정은 전형적인 경제활동으로서 ‘현명한’ 소비자로서 활동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상품이나 서비스의 제조나 제공 과정을 살펴보지 않고,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을 얻기 위해 구입하는 행위는 합리적인 소비자의 최고 덕목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찬양받는 ‘합리적’ 소비의 ‘비윤리성’을 고발하고, 대신 ‘윤리적’ 소비를 주장한다. 우리의 소비활동을 생태계 보존, 동물의 복지, 노동자와 제1차 생산자의 복지, 그리고 (여행과 같은 문화적 소비의 경우) 현지인들의 복지 등과 연관시켜 윤리적으로 사고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보이는 '윤리적 소비'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도 없지는 않은데,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실천문학사, 2010)이 대표적이다. 관련 페이퍼로 '윤리적 소비에 관한 두 권의 책'(http://blog.aladin.co.kr/trackback/mramor/3451490) 참조.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의 추천작은 <토요타의 어둠>(창해, 2010)이다. 얼마전 언론에서 크게 다루었던 책인데, '품질경영'의 대표적 브랜드로 인식됐지만 자사 자동차의 결함에 대한 은폐로 위기에 몰린 도요타의 문제를 짚고 있다. 알고 보면, 1년에 광고비만 1천억 엔 이상씩 쓴 광고빨이었다는 것.    

이 책을 쓴 사람들은 토요타 자동차의 성능이 좋다는 이미지가 허구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은 자동차 판내대수와 리콜대수가 거의 똑같을 정도로 결함이 많은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 2004년에서 2006년의 기간 동안 512만 대를 팔고 511만대를 리콜해 결함률 99.9%를 기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소중하게 키운다는 기업이 과로사한 사람에게 산재 처리조차 해주지 않는 매정함을 보이고 있다. 토요타의 사례는 기업의 덩치가 통제불능의 수준까지 커지는 공룡화의 현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 토요타의 교훈을 새겨들어야 할 기업이 많을지 모른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어떤 시사점인가? <삼성과 도요타, 왜 최강인가?>(열매출판사, 2006)란 책 제목이 반어적으로 말해주는 듯싶다.   

 

개인적으론 자본주의 해부서 몇 권이 관심도서다. 짐 스탠포드의 <자본주의 사용설명서>(부키, 2010)은 "노동자나 자영업자 같은 보통 사람들을 위해 쉽게 풀어 쓴 자본주의 경제학 입문서"이고, <제1권력>(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0)은 J.P. 모건과 록펠러가라는 독점재벌이 미국경제뿐 아니라, 세계경제를 어떻게 '주물렀는가'를 폭로한다. 히로세 다카시 버전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문화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감정 자본주의>(돌베개, 2010)는 자본주의를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도록 해준다.  

6. 과학

최영주 교수가 추천한 과학분야의 책은 김병호의 <과학인문학>(글항아리, 2010)이다. 시인이 쓴 과학이야기란 점에서 <시인을 위한 물리학>(에코리브르, 2006)과는 거울상을 이루는 게 아닌가 싶다. 어떤 장점을 지녔을까? 

“질량이 뭐야, 아빠”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물리를 전공한 시인의 관점으로 물리학에서 필요한 근본이론을 설명하고자 노력한 책이다. 저자는 시인이 생각하는 삶의 관점에서, 고민 많은 청소년의 경험의 관점에서, 우리의 주변 일상생활에서 어려운 물리학의 개념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철학적으로 때로는 현실적인 예를 들어 설명의 지루함을 피하게 한다. 

요즘은 뇌과학이 대세이므로 <인문학에게 뇌과학을 말하다>(동녘사이언스, 2009)도 같이 꼽아볼 수 있겠다. 모두 지난달에 '이달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은 나탈리 앤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지호, 2010)와 자웅을 겨뤄볼 만하다.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김동규, 정해진의 <이 장면을 아시나요?>(생각을담는집, 2010)이다. 오페라 가수의 오페라에 관한 책이다. "오페라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 열다섯편이, 마치 그 인물들이 옆에서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쓰여진 책이 나왔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곡을 불러 인기를 한몸에 안고 있는 성악가 김동규씨가 자신의 입담대로 이야기하듯이 책을 엮어 아주 재미있다."고 한다. 소개를 보니, 라디오 프로그램의 인기코너를 엮은 것이다. 

CBS-FM <아름다운 당신에게> 최고 인기 코너 ‘이 장면을 아시나요’에서 소개된 오페라만 해도 무려 30여 편. 한 장면 한 장면이 아닌, 오페라 전체를 들려주고 싶은 욕구로 바리톤 김동규는 “아니, 오페라가 뭐하는 데 쓰는 물건이여?”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오페라가 별 게 아녀요.”라고 너스레를 떨며 오페라의 황홀한 세계로 안내한다.

오페라 애호가라면 돌라르와 지젝의 <오페라의 두번째 죽음>(민음사, 2010)도 같이 꽂아둘 만하다. 오페라 광팬이라는 두 저자가 각각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오페라를 철학적으로,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짐작엔 오페라에 관한 가장 고난도/고감도의 책이지 않을까 싶다. 지젝이 밝힌 취지는 이렇다.    

“근대기 주체성의 시대와 대체로 일치하는 시대에, 어떤 극적 사건을 상연하는 일부로서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우리는 오페라의 역사에서 주체성의 역사를 구성하는 추세들과 변동들의 발자취를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고른 교양분야의 책은 랠프 네이더의 <열일곱 개의 전통>(재인, 2010)이다. 랠프 네이더? 소비자-시민 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인물이다.  

랠프 네이더, 우리에게는 미국의 대표적인 소비자운동의 선구자 정도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레바논계 부모님으로 받은 교훈을 아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네이더는 당당하게 말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둘 다 거의 백 년을 살았다.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의 풍부한 경험에 바탕을 둔 통찰과 지혜의 도움을 받았다.” 어머니는 늘 네이더 형제들에게 듣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이런 식으로 경청의 전통, 가족식탁의 전통, 자녀평등의 전통, 독립적 사고의 전통, 애국의 전통, 시민생활의 전통 등 부모와 자연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익힌 17개의 자랑스러운 덕목을 마치 곁에서 이야기하듯 들려준다.

결들여, 요즘 사회-시민운동엔 전통 대신에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 앤디와 마이크의 <예스맨 프로젝트>(빨간머리, 2010)에도 눈길을 줄 만하다(관련기사는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6931.html 참조). 광고카피였던 '유쾌-상쾌-통쾌'는 이들의 작업에도 더없이 유효한데, 이런 사진은 어떤가. 



예스맨이 어떤 천재지변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서바이버볼’을 입고 해변을 거닐고 있다. 테러 방지에 안달한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다큐멘터리 <예스맨 프로젝트>의 한 장면.  

9. 실용 

손수호 논설위원이 추천한 실용서는 김효정의 <나는 오늘도 사막을 꿈꾼다>(일리, 2010). 저자는 영화프로듀서인데, 특이한 것은 사막 횡단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그녀가 구른 것은 영화판만이 나니었다. 사막의 모래밭을 굴렀다. 세상에서 가장 추운 고비(중국), 가장 건조한 아타카마(칠레), 가장 뜨거운 사하라(이집트), 가장 바람이 세게 부는 남극 대륙을 달렸다. 이 네 곳의 사막 레이스를 완주한 사람을 그랜드 슬래머라고 한다. 여성으로서는 아시아 최초, 세계에서는 세번째란다. 나는 이 그랜드 슬래머를 줄여 ‘글래머’라고 부르고 싶다.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이야기다.

이 정도면 '실용서'가 아니라 '모험서'로 분류해야 될 듯싶지만, 여하튼 '꿈을 향해 도전하는 젊음'이란 이미지에 잘 맞는 이야기가 펼쳐질 듯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오늘도'의 컨셉이 그런 것이겠다. 덩달아 <나는 오늘도 유럽출장간다>(부키, 2008), <나는 오늘도 춤추러 간다>(마젤란, 2007) 등의 타이틀에도 눈길이 간다. '실용서'가 무엇인지도 감이 좀 잡힌다.   

10. 오늘의 영화 

내 맘대로 고르는 주제는 '오늘의 영화'다. 계기가 된 건 영화평론가 허문영의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강, 2010). <씨네21>의 편집장을 역임한 저자의 영화평은 자주 읽어봤지만 한데 묶어놓으니 중럄감이 다르다. 그의 비평은 '표준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개성적'인 쪽에 가깝다는 것도 알게 됐다. 저널리즘적 비평에 몸담고 있었지만 별로 구애받지 않았다는 의미다. 말미에는 동료 평론가인 정성일, 김혜리의 유익한 발문도 수록돼 있다. 더불어 '오늘의 영화'에 대한 흥미도 자극한다. '강의 영화' 시리즈에는 '우리시대의 감독'도 예고돼 있는데, 임권택, 김기덕 감독과의 대담은 정성일, 그리고 홍상수 감독과의 대담은 허문영, 박찬욱 감독과의 대담은 김영진 평론가가 각각 맡고 있다. 기대가 되는 근간들이다.  

10. 04. 01.  

P.S. 이달의 '의무방어전'을 치른 기분이다.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만을 덧붙인다. 이달의 고전작가라고 해도 되겠다.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로 꼽히는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들이다.  

"니콜라이 레스코프, 그야말로 진정한 작가다"라고 톨스토이는 평했는데, 톨스토이가 남을 칭찬한 건 흔하지 않은 일이다. 대표적인 중단편을 묶은 <왼손잡이>(문학동네, 2010)가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됐고, <괴물 셀리반>(닮, 2006)과 <러시아의 맥베스부인>(소담출판사, 2006)은 수년 전에 출간됐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이야기꾼'이기도 한 레스코프의 면모를 확인해볼 수 있겠다. 발터 벤야민의 레스코프론은 유명한데,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꾼이 지닌 재능은 그의 전 생애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야기꾼이란 그의 삶의 심지를, 조용히 타오르는 그의 이야기의 불꽃에 의해서 완전히 연소시키는 사람이다. 레스코프와 같은 이야기꾼을 둘러싸고 있는 비교할 수 없는 아우라는 바로 여기에 기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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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3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03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약칭 '인사회')에서 발행하는 <아름다운 서재>(통권 제5호)에 실린 추천사를 옮겨놓는다. 인사회 소속 출판사들의 추천도서 목록과 인사회 선정 '2009 올해의 책' 목록이 포함돼 있는 비매품 책이다. 과분한 자리에 초대를 받아 추천의 소견을 남기게 됐다.    

아름다운 서재(통권 제5호) 추천사 

“난 적어도 책 한 권에 인생이 변했노라고 말하는/ 비열한 인간은 되기 싫었던 것이다.”(이응준, 「어둠의 뿌리는 무럭무럭 자라나 하늘로 간다」)

오래 전에 읽은 시의 한 구절입니다. 보통 ‘내 인생의 책’이니 ‘나를 바꿔준 한 권의 책’ 같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생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인간이 그렇게 쉽게 나아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공감한 대목입니다. 책에 매혹된 이후로 책을 읽는 일이 제 주업처럼 돼 버렸지만, ‘책이 전부야!’란 말만큼은 피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앉은 자리에서 ‘비열한 인간’이란 소리를 듣고 싶지도 않았지요.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책이라곤 읽지 않아!’라고 자랑스레 말해야 할까요? 적어도 이 <아름다운 서재>를 손에 든 분들이라면 그런 ‘아Q’적 발상을 선택지로 꼽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필요하지요. 맞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러 권’입니다. 우리가 좀 ‘덜 비열한 인간’이 되거나 더 나아가 ‘비열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 다수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아직도 비열한 인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가 ‘책만 읽어서’가 아니라 ‘책을 덜 읽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충분히 읽지 않아서’라고 말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인의 평균 독서량이 ‘한 달에 한 권’ 정도라고 합니다. 책읽기에 관해서 우리는 ‘한 권 읽기’ 문화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굳이 각 나라별 비교수치를 갖고 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독서량과 독서문화가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건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온갖 종류의 책들을 다 포함한 통계치라서 그 ‘한 권’도 ‘인문사회과학서적’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시인의 기준을 조금 비틀어서 이렇게 말해보고도 싶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인문사회과학서적을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않으면서 책을 읽었노라고 말하는” 비열한 인간, 비열한 독서가는 되지 말아야겠다고요.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나 다수의 책을 읽는 일, 그건 독서가 습관이자 문화일 때 가능하겠지요. 우리가 그런 습관과 문화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책 읽는 뇌>란 책의 저자가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인간에게서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곧 인류가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기는 합니다. 인류가 책을 읽게 된 것은 전체 인류사에 견주어 보면 극히 최근의 일이며, 진화적 적응이라고 보기엔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입니다. 독서는 후천적으로 개발되는 능력이고, 한 과학자의 표현을 빌면 ‘옵션 액세서리’입니다. 그러니 “나는 독서에 흥미가 없어”거나 “나는 책을 못 읽겠어”라는 투정이 특별히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독서 능력은 ‘옵션’이니까요. 하지만 강조해야 할 것은 그것이 ‘특별한’ 옵션이란 사실이지요.  

불과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대중적 독서’는 불과 1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을 따름입니다.) 독서능력이라는 ‘발명품’은 인간의 뇌 조직을 재편성하고 사고능력을 확대시켰으며 역사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러한 인류사적 대전환은 한 개인의 역사에서도 반복됩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 또 다른 우주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니까요. 흔히 인간을 ‘도구적 인간(호모 파베르)’로 정의하면서, 인간이 똑똑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한 사정은 독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듯싶습니다. 즉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집니다. 따라서 독서능력이라는 ‘옵션 액세서리’는 있으나 마나한 장신구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물론 독서 능력 자체는 오늘날 표준적이며 어느 정도 보편화된 능력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오징어나 말미잘과는 다른 존재로 구분해주지만 똑같이 책을 읽을 줄 아는 다른 사람과는 구별해주지 못합니다.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이 독서능력 또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아니 지속적으로 발달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발달은 무엇보다도 다양하고 풍부한 독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서 이루어질 터입니다(그리고 여기 그렇게 읽을 만한 책들의 목록이 수록돼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단순한 생명과 일치하지 않는다.”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말입니다. ‘단순한 생명’을 ‘생존’이나 ‘목숨’으로 바꿔 넣어도 좋겠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생명’으로서 그저 ‘자연사적 삶’만을 영위하는 존재는 아니지요. 간단히 말하면,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니 그렇게 사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우리가 연어나 날치보다 뭐 그렇게 대수로운 존재인가 의심해볼 수도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한 의심 자체,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우리가 ‘단순한 삶’이나 ‘자연사적 삶’을 넘어서는 차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축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외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존재입니다. 물론 이 질문은 인간 문명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것이기도 합니다. 독서는 이 질문의 연속성을 상기시켜주면서, 우리를 그러한 질문의 공동체로 묶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혼자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독서경험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우리’로 확장시켜주면서, 사회역사적 존재로 거듭나게 합니다. 따라서 당위적인 독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필연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책을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읽습니다.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는 책들의 목록을 마주하면서 긴장과 축복을 동시에 느낍니다.  

10. 0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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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4-0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생각도 아주 가끔씩은 하기도 해요. 책 한권으로 바뀌는 인생 얼마나 줏대없는 인생인가..라는 말도 안되는 궤변을요..^^

로쟈 2010-04-01 10:00   좋아요 0 | URL
더불어 좀 게으른 인생이란 생각도 들지요...

구보 2010-04-0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 아이 독후감 숙제에 <아침형인간>이 있는 걸 봤습니다.독후감까지 써야할 수고를 생각하면 그 책을 대체하고도 남을 많은 책들 때문에 가슴이 쓰립니다.존경하는 인물에 박정희와 김대중이 나란히 있는 모 연예인 네어버책추천 블러그를 봤을 때만큼이나 뜨악하기도 합니다.수많은 중고생들 서가에 꽂혀있는 추천도서들 선정기준도 궁금하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로쟈 2010-04-02 10:17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서재'는 일종의 자가-추천입니다. 각 출판사에서 내놓을 만한 책들을 골랐더군요. 중고생 추천도서 같은 경우는 경험과 피드백이 돼야 할 거 같아요. 추천받아서 읽어보니 괜찮더라, 아니더라 하는...

비로그인 2010-04-0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망의 진화를 읽으면서 생각해 봤어요. 책읽는 뇌와 그렇지않은 뇌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로쟈 2010-04-02 10:18   좋아요 0 | URL
진화의 산물이 되기엔 기간이 너무 짧구요. '훈련' 문제 같습니다.^^

꼬마별 2010-04-0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도서는 누가 정할까 항상 궁금해하는 한사람입니다
아이들 추천도서 보면 나이에 비해 좀 어렵다 싶은 것도 많은데
목록은 왜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어요..

로쟈 2010-04-02 10:19   좋아요 0 | URL
어린이책은 저도 모르겠어요.^^;

비로그인 2010-04-02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칸트에게 영혼, 신, 자유가 있었다면 로쟈님께는 책이 있었다는... 아마 무덤까지 책을 가지고 가실 분이세요. ㅎㅎ

로쟈 2010-04-05 11:29   좋아요 0 | URL
책에 파묻혀 죽을 거라는 얘기는 종종 듣지요.--;
 

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나는 한 가지 주제만을 반복적으로 쓰고 있다). 보통 월초에 나가다가 이달엔 월말에 나가게 됐는데, 낮에 천안함 구조 속보를 계속 클릭해가며 쓴 것이다(끝내 원고를 보낼 때까지 좋은 소식은 뜨지 않았다). 칼럼의 제목은 '행복은 경제성장과 무관하다'로 나갔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행복'은 정치적 공약이 되기에는 너무 모호하다는 점이다. 정치의 장에서 행복은 언제나 계량화된 행복, 정량적인 행복일 수밖에 없으며(행복의 비교급은 그런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것은 곧 '행복의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 미처 거기까지 다 쓰지 못한 탓도 있다...    

경향신문(10. 03. 30) [문화와 세상]행복은 경제성장과 무관하다 

중국의 부유층 사이에서 티베트의 토종개 ‘짱아오’ 열풍이 불고 있다 한다. 사자의 갈기처럼 긴 털로 덮여 있어서 일명 ‘사자개’라고도 불리는 이 희귀종 개는 원래 유목민들의 양치기개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의 신흥부자들이 부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육하면서 몸값이 한국 돈으로 십수억원까지 치솟았고, 중국의 고가품 10대 아이템에서도 1위로 꼽혔다는 소식이다. 사치품 과소비의 전형적 사례로 이제 자본주의 중국도 본격적인 ‘소비사회’로 진입했다는 의미일까. 

소비사회란 상품의 사용가치, 곧 도구적 용도보다는 행복이나 위세 같은 기호적 가치가 소비의 고유한 영역이 되는 사회다. 사람들은 과시적 소비행위를 통해서 자신이 남들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는 걸 인정받고 싶어한다. 더 행복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한다. 소비사회에서 행복은 구원과 동의어다. 하지만 행복에 대한 이런 갈망은 인간의 타고난 성향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역사적 조건에 의해 배태된 것이다.

사회학자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1970)에서 내민 통찰에 따르면, 행복의 신화는 근대의 정치혁명이 표방한 평등의 신화를 구체화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이념이 ‘모두가 행복한 사회’로 전이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평등이 실현되기 위해 행복이 계량 가능한 것이 되어야 했다는 점이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즐거움은 평등의 척도로 부적합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행복은 무엇보다도 측정 가능한 복리와 물질적 안락이라는 내용을 갖게 되었다. 모든 인간이 욕구와 충족의 원칙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이 그 전제다. 그렇게 해서 똑같이 유행하는 옷을 입고 똑같은 TV프로그램을 보고 하는 생활수준의 민주주의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짝이 되었다. 더 높은 성장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보장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행복의 신화’는 한갓 ‘신화’에 불과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멜라네시아의 원주민들은 미군의 보급기지를 본떠 어설픈 활주로를 만들었다. 물자를 잔뜩 싣고 드나들던 화물기가 자신들의 ‘비행장’에도 착륙하기를 고대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들의 ‘화물 숭배’는 아무런 효력을 보지 못했다. 원주민들의 주술적인 미신이었을 뿐일까? 하지만 이것은 소비라는 활주로를 만들어놓고 그곳에 행복이 착륙하기를 필사적으로 기다리는 소비사회의 우화이기도 하다고 보드리야르는 꼬집는다. 개발과 풍요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이 대책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은 최빈국의 하나인 방글라데시 국민의 행복지수가 언제나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그들은 쓰레기를 뒤지며 살더라도 마실 물과 먹을 것이 있으면 감사하며 행복해한다고. 이것은 ‘행복지수’란 말 자체가 난센스이면서 동시에 행복은 경제성장이나 정치적 진보와는 무관하다는 걸 시사해준다. 



절판 유언에 따라 품귀 현상이 벌어진 법정 스님의 대표작 <무소유>의 중고판이 20억원대까지 경매가가 치솟았다가 110만5000원에 낙찰됐다고 한다. ‘무소유’라는 가치조차도 소유의 대상이 되는 소비사회의 자연스러운 풍경이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무소유에 대한 이러한 붐이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이어진다면, 다가오는 정치의 계절에 혹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도 해본다. 적어도 ‘7·4·7’ 같은 구호에는 더 이상 현혹되지 않으리란 기대다. 사회적 진보는 오히려 행복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10. 03. 29. 

 

P.S.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문예출판사, 1991/2002)는 강의를 할 기회가 있어서 자세히 들여다본 책인데, 그의 중요한 논쟁상대가 <풍요한 사회>(한국경제신문, 2006)의 저자 갤브레이스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풍요한 사회>의 초판은 1958년에 나왔으며, 보드리야르는 갤브레이스의 성장사회론에 대한 검토와 비판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갤브레이스의 책으론 1967년에 나온 <새로운 산업국가>(홍성사, 1979)도 다뤄진다. 모두 당시에 불어로 번역된 책들이다. 전에 포스팅한 바 있지만, 리포베츠키의 <행복의 역설>(알마, 2009) 또한 <소비의 사회>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으로 같이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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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3-29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요한 사회>가 요즘도 나오는군요.우리나라에는 예전에 갤브레이스의 책이 꽤 번역이 된 편이지요.

로쟈 2010-03-29 20:46   좋아요 0 | URL
지금은 거의 씨가 말랐습니다. 지금의 <풍요한 사회>는 98년에 나온 40주년 기념판을 옮긴 거네요...

구보 2010-03-30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적 진보가 오히려 행복에 대한 무관심에 비롯되지 않을까"란 구절이 번쩍 들어오네요. '행복(웰빙)강박증사회'로 진입한 듯 합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백치의 언어일 터,진정한 행복을 전유하는 길은 원래 있었던,그러나 우리가 체험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던 행복의 순간들을 다시 사후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벤야민>-마침 아침에 이 구절을 읽고 있었습니다.

로쟈 2010-04-01 09:46   좋아요 0 | URL
네, 벤야민을 읽게 되면 '진보'란 말을 조심스럽게 쓰게 되죠...

비로그인 2010-03-3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에게 행복추구는 '자연스러운' 동기일 텐데요, 과연 그에 대해 무관심해질 수 있을지... 각자 자신의 행복의 정의와 기준을 명확히 하든지, 공동체 혹은 사회가 행복을 대신할 가치와 동기를 제시하든지 해야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은 몸이든 마음이든 '빈 상태'를 견디지 못하니까요...

로쟈 2010-04-01 09:47   좋아요 0 | URL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란 말도 있는 것처럼, 저는 '행복'이 무의미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정치적 수사로는 계속 애용되겠지만...

비로그인 2010-04-01 17:00   좋아요 0 | URL
여전히 '행복에 관한 한 무신론자'시군요... 기표의 무의미함으로 치자면 '사랑'만큼 기만적인 것도 없겠지만요.

로쟈 2010-04-01 20:55   좋아요 0 | URL
그래도 '사랑'은 정치적 구호로 남용되진 않지요.^^

비로그인 2010-04-02 21:26   좋아요 0 | URL
종교의 정치적 측면은 그렇다 쳐도 '나라 사랑'은 충분히 남용되었지 않나요?
여담이지만 언젠가 지나가며 언급하신 로쟈님의 네 가지 키워드 중에 사랑이 있던 것 같은데, 언제쯤 그 사랑관 혹은 사랑론을 접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데요.^^

kumun 2010-03-3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 1위 였다는게 꽤나 충격적이었나 봅니다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것을 보니... 그러나 조사방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또한 실제로 수많은 조사결과에서 국가간 행복정도에 차이는 거의 경제발전도와 비례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조사결과까지 가지 않더라도 실제로 우리 주변만 보더라도 대체적으로 좀 더 잘사는 아이들이 안정적이고 행복한 자아와 인생을 누리는 것을 볼 수 있죠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로쟈 2010-04-01 09:49   좋아요 0 | URL
칼럼은 중학생 독자까지 염두에 두어야하기 때문에 눈높이를 조금 낮춰야 합니다. 그리고 잘사는 집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건 너희들이 행복한 거란다고 주입하기 때문이겠죠. 아이들이야 맛있는 걸 먹고, 자기들끼리 맘껏 놀 수 있다면 행복해하죠...

코나투스 2010-03-31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소유' 책에 대한 "이러한 붐이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이어진다면..."이라고 기대해 보셨는데, 이 문장이 좀 맘에 걸렸습니다. '무소유' 책에 대한 붐은 위에 언급하셨던 듯이 품절되는 무소유 책 조차 소유함으로써 소유를 통한 행복의 경쟁에 나선 사적 소유, 사적 소비의 극단을 보여주는 아이러니 일수도 있고, 또는 반대로 법정스님의 타계로 새삼 궁금해진 무소유 사고를 접해 봄으로써, 소유/소비 그리고 이를 위한 경쟁의 끊임없는 연쇄고리를 벗어나 행복을 추구해보고 싶은 현대인의 절박한 심정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것이 되었든 행복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거나 추구되는 것이지,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 기대해보는 것은 상당히 거리가 먼 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행복은 경제성장이나 정치적 진보와는 무관하다는 걸 시사해준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이 말은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으로도 그리고 보수적으로도 역시 쉽게 차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행복에 대한 무관심' 역시 진보적일 수도 보수적일 수도 있습니다. 왠지 로쟈님의 말씀 속에서 '행복에 대한 관심' 자체가 본질적으로 문제를 지닌다는 것으로 오해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아마도 지적하신 점은 소비를 통한 행복의 추구, 계량화된 행복에 대한 환상에 대한 비판이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행복에 대한 관심인가 무관심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행복으로 보는가와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에따라 환상일수도 희망일수도 있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10-04-01 09:57   좋아요 0 | URL
원래는 초점을 '행복은 진보와 무관하다'는 쪽으로 가려고 했어요. '행복 담론'은 '성장 담론'과 마찬가지로 진보의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요(상상력이란 이럴 때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진정한 행복'론도 별로 효과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행복에 대한 무관심' 역시 진보적일 수도 보수적일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행복은 일반적으로 '보수적 가치화'의 경향이 있는 만큼 방향을 좀 트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픽션들 2010-04-01 0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소유' 책에 대한 "이러한 붐이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면...">,

과도하게 형성된 '무소유'라는 집단무의식적 코드를 통해서라도, 현대인들의 과도한 행복찾기가 와해되는, 그런 경험이 주어진다면 의미가 있겠지요.

저는 로쟈님의 글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로쟈 2010-04-01 09:58   좋아요 0 | URL
네, 소유에 대한 무관심이 행복에 대한 무관심으로 연결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물질적 소유(경제성장)가 행복의 중요한 척도로 돼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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