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디자인>이란 잡지를 택배로 받았다. 8월호 '오피니언' 란에 쓴 칼럼 덕분이다. 디자인에 대해 몇마디 해달라는 청탁을 꽤 오래 전에 받았지만 미루고 미루다가 지난달에야 급조한 글이다. 그런 곤욕스러움도 글에는 배여 있다. 그래도 지면에 번듯하게 실은 글이니 여기에도 옮겨놓는다. 

디자인(2010년 8월호) 형태와 불륨에 바치는 예찬

디자인이란 말의 사전적 정의는 “의상, 공업 제품, 건축 따위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조형 작품의 설계나 도안”으로 돼 있다. 내 기억에 그런 디자인을 해본 건 중학교 2학년 기술 시간에 양철 쓰레받기를 만든 게 전부가 아닌가 싶다. 물론 창조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교과서에 나온 설계도면을 양철판에 그대로 옮겨오는 일이었지만, 그것도 잘 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으로 나뉘었다. 손재주가 없는 편에 속하지만 이때만은 교과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다. 물론 그런 인연으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이후에 디자이너를 꿈꾼 적도 없고 디자인에 대해 깊이 숙고해본 적도 없으니 대략 나는 디자인과 무관한 부류다.   

그럼에도 뭔가 디자인에 대해 할 말을 찾다 보니, 떠오르는 건 ‘형태’뿐이다. 디자인을 구성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입체적인 차원에서 어떤 부피를 뜻하는 ‘볼륨’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 형태나 볼륨에 시간이란 차원을 추가하면 ‘진화 형태론’이 된다. 진화 형태론의 관심사는 어떤 형태적 자질이 진화적 압력을 견뎌낼 수 있는 안정적인 전략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사실 디자인 또한 그렇지 않은가. 제품 디자인의 경우, 구매자의 호응이라는 시장의 압력에 대응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유력한 자질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니까. 다만 진화적 압력이 시장의 압력과 다른 점이라면 시간의 스케일일 것이다. 지질학자들이 얘기하는 이른바 ‘깊은 시간(deep time)’이 우주적 진화의 시간이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10억을 의미할 때 10뒤에 0이 몇 개나 붙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10억 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건 단지 비유를 통해서만 가능할 따름이다. 가령 이 깊은 지질학적 시간을 1마일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마지막 몇 인치를 차지한다. 또 우주 달력을 예로 든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제야의 종이 울리기 불과 몇 분 전에 나타났을 뿐이다. 한 지질학자는 지구의 역사를 왕의 코에서부터 쭉 뻗은 손끝까지를 거리로 쟀던 옛 영국식 야드 자로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왕의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손톱줄로 한 번 갈면 인간의 역사는 지워져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한 깊은 시간 앞에 놓일 때 인간은 가련한 존재일 따름이다. 그것은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 내던져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이것을 ‘우주적 공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하는 갈대’에게 방책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에겐 ‘깊은 시간’에 대응하는 ‘깊은 개별성’이 특권처럼 주어졌기 때문이다. 로버트 폴락의 <생명의 기호>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다른 모든 종들이 태어나서 얼마 동안 살다가 자손을 낳고 그리고 언젠가 죽는다면, 우리 종의 운명도 그러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큰 뇌는 사람에게, 의식과 기억과 불멸성에 대한 꿈을 가져다주었고 또한 우리 종이 자연선택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이며 종의 생존은 보장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 깊은 개별성을 주었다.”  

이 ‘깊은 개별성’이란 특권은 모든 망각을 주도하는 매우 막강한 것이다. 이것을 나는 달리 ‘유한성의 방어기제’라고 부르고 싶다. 그것은 모든 ‘무한성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한다. 흔한 말로 ‘자기 앞가림’이고, ‘생활’이다. 그런 앞가림에서 벗어날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두려운 진실이다. 우주적 공간에 상응하는 무한한 시간과의 조우. 형태에 대한 진화적 압력이란 시간의 압력이다. 곧 시간은 형태의 적이다. 시간은 형태를 마모시키고, 어렵게 가꾸고 다듬은 볼륨을 무너뜨린다. 디자인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건 두려운 일이고 견디기 힘든 일이지 싶다. 그래서? 예의 우리는 자신의 발등만을 주시하며 자신의 일생에만 목을 맨다. 이걸 겸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압력에서 살아남은 형태들은 내게 그런 겸손을 떠올려준다. 하지만 그것은 영웅적 겸손이기도 하다. 비록 한시적일지라도 무한성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한 역량을 뽐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한편으론 우리를 경탄케 하는 형태와 볼륨에 대한 어떠한 예찬도 과도하지 않다고 해야겠다

10. 08.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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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솝 2010-08-02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디자인이라는 말을 어원으로 풀기를 즐겨합니다.
디자인의 말 뜻을 어원으로 나누면 'Design = De + Sign'이 되고 이 두 단어의 뜻을 풀어보자면 기존의 형식(Sign)을 해체(De)하는 행위가 디자인(Design)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기성세대가 '상식'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모든 것을 두들겨 부셔서, 다시 해석하는 행위. 그것이 디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로쟈 2010-08-02 22:16   좋아요 0 | URL
네, 오래전 강의때 저도 애용한 기억이 나네요. 기호학 강의였거든요.^^

미지 2010-08-03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조하셨다고는 해도, 큰 글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10-08-03 23:10   좋아요 0 | URL
그게 급하게 '편집'한 원고이기도 합니다.^^;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40자평만 적어놓고 입을 닫으면 '오해'를 부를 것 같아서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의 번역에 대한 유감을 몇 자 적는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에 연이어 '하버드' 간판을 달고 나온 책이라서, 인터뷰이가 된 14명의 철학자 가운데 9명은 '구면'이지만 나머지 5명의 '철학'은 궁금하기도 해서 책은 단박에 구입했다. 공역자 중에 강유원씨도 포함돼 있어서 번역에 대한 자연스런 신뢰도 보태졌다.'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이 말하는 철학과 삶의 문제 그리고 공부에 대한 조언'!? 하지만 정작 읽은 책은(나는 1/3을 읽었다) 무척 당혹스럽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무척 괴이하다는 느낌이다. 이럴 땐 어디에다 조언을 구해야 하는지? '철학이란 무엇이고, 철학함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따라가보려고 했지만, 내가 얻은 건 '철학이란 무엇이고,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고민이다. 혹 하나 더 붙인 격이다.  

 

번역서는 원서와 차례가 좀 다른데, 존 롤스로 시작하는 것보다는 움베르토 에코로 시작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덜 부담스러우리라는 '배려'일 것이다(국내에 좀 지명도가 있는 리처드 로티도 전진 배치되었다). 하지만 번역은 에코의 약력 소개에서 "튜랭대학에서 처음에는 법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중세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는 대목에서부터 삐걱거린다. '토리노(Turin)'란 지명을 영어로는 '튜랭'이라고 읽어주는지? '밀라노(Milan)'와 '피렌체(Florence)'가 '밀란'과 '플로렌스'로 옮겨지지 않은 걸 보면, 지명은 이탈리아어 표기를 따라준 것인데, 듣보잡 지명인 '튜랭'은 어떻게 해서 살아남았을까? 유려한 번역서였다면 '옥에티'가 되었을 뿐이겠지만, 읽다 보니 여기저기 '튜랭'이다. 리처드 로티까지의 인터뷰를 보다가 나는 원서를 구하기로 했다. 번역서만으론 읽을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였고, 그게 두 주 전이다. 그리고 엊저녁에서야 잠시 시간을 내서 코넬 웨스트 편을 읽고(이 책에서 가장 흥미를 끈 철학자다) 오늘 스탠리 카벨에서 책을 덮었다.  

한 언론 리뷰에서는 기자가 '기계적인 번역' 같다는 인상을 적었지만 뜻이 통한다면 기계적인 번역이라고 해서 '유감'까지 가질 이유는 없다. 문제는 '작문'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정말 제대로 된 '공역' 작업이 이뤄진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그나마 잘 넘어가는 편인 에코의 인터뷰 말미에서(곁다리로 말해두자면, 이 인터뷰의 질문자에는 홍종민이라는 학생이 포함돼 있다. 한국 학생인 듯하다) 에코가 하는 말을 보라.  

"개념이나 사상들이 기호라는 것은 오컴의 사상에서 알 수 있듯이, 로크의 말보다 더 오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봅시다. 정신과 뇌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자유롭게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통해 우리는 사물들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26쪽)  

17세기 철학자인 존 로크가 "사상조차 기호들이다"란 말을 했다는 질문자의 언급에 실상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인데,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라는 대목은 "But it can be found even before."의 번역이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발견될 수 있다"는 정도가 '직역' 아닌가. 어떤 심오한 의역의 과정을 거쳐서 "공표될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오게 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 "-라고 가정해봅시다" 다음에 "If Mind=Brain, then what happens are certain physical states"란 문장이 누락됐다. "만약 정신(마음)=뇌라면, 정신에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물질적 상태들이죠." 그리고 이어서 "정신과 뇌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면"이 이어진다. 하지만, 또 "그러나 정신을 통해 우리는 사물들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란 문장 앞에서 "Certainly they are not things"(분명히 그것들이 사물은 아니죠)는 번역이 누락됐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문장들은 일부러 생략한 것일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유럽에선 열두 살과 열여섯 살에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를 읽기 시작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많이 알게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조금 더 정확하게 옮기자면 "유럽의 상급학교에선 열두 살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읽기 시작해서 열여섯 살이 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모든 걸 알아야 하게끔 돼 있습니다."이다. 하지만 <쿠란>은 물론 <성서>도 읽지 않으며 불교 교리에 대해선 구경도 못해본다는 것이 '유럽중심적 교과과정'의 오류이고, 이것이 '보편교육'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에코의 지적이다.   

이어서 로티는 내가 한때 열렬히 관심을 갖던 철학자여서 관심있게 읽었는데, 인터뷰에서 별로 건질 게 없었다. 일단 로티의 약력에서 미국의 주류 분석철학계의 '우등생'으로 프린스턴대학 철학과에 몸담고 있다가 버지니아대학의 (철학과가 아닌) 인문학교수로 가서, 다시 스탠포드대학의 비교문학과로 자리를 옮긴 일이 이렇게 번역돼 있다.   

"직업적으로 보면, 로티는 미합중국 철학과 사랑싸움을 벌였지만 끝내는 이혼을 한 것처럼 끝나버렸다. 로티가 버지니아대학의 소속 학과가 없는 자리로 가면서 프린스턴대학을 그만둔 것이다."(31쪽) 

'미국(America)'을 '미합중국'이라고(혹은 '유에스'라고) 옮기는 것은 강유원씨의 고집이다('미국'이 '미합중국'의 준말이란 사실을 절대로 잊어선 안된다는 취지일까?). 뒷문장은 "Rorty left Princeton for a non-department position at the University of Virginia, and now teaches in the Comparative Literature department at Stanford."을 옮긴 것이다. 물론 로티는 2007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현재는 스탠포드대학 비교문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는 정보가 '잉여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누락시킬 것까지야 없지 않을까.  

로티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그가 생각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이렇게 정리해주고 있다.  

"로티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이라는 잘 정당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31쪽)

번역문은 이미 장황한데, 여기에도 누락이 있다. 원문은 "Rorty argues that 'true' is simply a 'compliment' to views that we think well-justified, as that the notion of truth as the representation of the world 'as it really is' is no more than dogma."이다. 로티의 기본적인 입장은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진리=자연의 거울)이 도그마에 불과하므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경우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 대신에 존재하는 것은 '정당화된 견해들'뿐이고, '진리'란 말은 이 '견해들'에 대한 칭찬이라는 것이다.('브라보!' 혹은 '굿잡!') 다시 옮기면, "로티는 '진리'란 우리가 잘 정당화됐다고 보는 견해에 대한 '칭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진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표상이라는 개념은 도그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리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기다. "로티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윤리의 기반으로서의 신을 버리려 했으며, 인간만이 서로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할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이제 '세계에 대답할 수 있음'이라는 진리의 개념을 포기해야만 하고, 인간으로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대답할수 있음'은 'answerability to the world'의 번역이며, 지배적 진리관이었던 '대응설'로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옹호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로티에게 문제가 되며, 매우 중요한 것이다. 특별히 '자연'을 제외하고, 로티에게 인간성 자체 이상으로 호소하는 법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문만 보자면, 로티에게는 자연만이 유일하게 "인간성 자체 이상으로 호소하는 법정"이라는 것이 되는데, 이야말로 정반대의 해석이다. 원문은 "To him there is no court of appeal beyond humanity itself, particularly not 'Nature'."이다. 강조한 대목은 '특히 '자연을 제외하고'가 아니라 '특히 자연은 그러한 법정이 아니다'라는 것이다.(*참고로, 'court of appeal'은 '항소법원' 혹은 '최고법원'이란 뜻이라고 한 분이 알려주셨다.)  

  

마냥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시간관계상,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코넬 웨스트 편으로 넘어간다. 1953년생의 중견철학자인 그는 현재 프린스턴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비평가와 시민권 운동가이기도 하다고. 이 번역서에 나는 별점을 둘 주었는데, 번역은 아주 실망스럽지만 코넬 웨스트란 저자를 알게 해준 것 때문에 별점 하나를 덧붙인 것이다. 그를 소개하는 서두에 보면, 2000년 봄학기에 웨스트는 하버드에서 힐러리 퍼트넘과 함께 '실용주의와 신실용주의'란 강의를 했다. 웨스트 교수의 강의 습관은 매 시간 공부하게 되는 각 철학자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전에 핵심 단어 몇개 쌍을 칠판에 적어놓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대목. 

"웨스트의 철학에 대한 강좌에서 퍼트넘은 싱긋 웃는 웨스트의 습관을 따라하며, 웨스트가 철학적으로 조망한 주요 관심사로 죽음/욕망, 독단주의/대화주의, 지배/민주주의를 들었다."(49쪽) 

원문은 "When it came to the lecture on West's own philsophy, Putnam, with a playful grin, borrowed West's habbit and wrote what West had acknowledged as the primary concerns in West's philsophical landscape: death/desire; dogmatism/dialogue; domination/democracy."이다. 요는 '싱긋 웃기'가 웨스트의 습관이 아니라 '주요 개념쌍을 칠판에 미리 쓰기'가 습관이라는 것이고, 퍼트남이 웨스트의 철학에 대해 강의하면서 그걸 흉내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는 것이다. 너무 대충 번역했다는 인상이다.  

  

코넬 웨스트는 이스라엘 셰플러(<하버드 대학의 학자들>의 저자)에게서 배우고, 리처드 로티에게서 실용주의를 배운다. 그리고는 "노년의 조시아 로이스를 발견"한다. 번역서는 불친절하게도 조시아 로이스에 아무런 설명도 붙이고 있지 않은데, 미국 철학자 'Josiah Royce(1855-1916)'를 가리킨다. 주저는 <근대철학의 정신>(1892). 'old Josiah Royce'는 '노년의 조시아 로이스'가 아니라 '옛날 철학자 조시아 로이스'를 뜻한다. 별로 주목받지 않은 철학자였던 것 같은데, 웨스트는 그를 아주 높이 평가하며, 주저에 포함된 쇼펜하우어에 대한 강의는 "미합중국 철학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로까지 꼽는다. 웨스트의 특이한 점이긴 한데, 그는 "키르케고르적이고, 쇼펜하우어적인 경로"를 통해서 실용주의를 알게 되고, 또 그런 관점에서 해석한다.  

웨스트는 미국 분석철학계의 좌장이었던 윌러드 콰인도 실용주의 철학자로 간주할 정도다. 그래서 나온 질문이 "콰인이 천재적인 것은 인간-만들기와 감수성 같은 실용주의적이고 에머슨적인 도식들로 기호 논리학자와 논리실증주의자의 가장 복잡한 담론들에 개입했다는 점 때문"(53쪽)이라고 쓴 구절을 설명해달라는 것이다. 한데 이 인용도 핀트가 맞지 않게 옮겨졌다. 원문은 "The genius of W. V. Quine was to intervene in the most sophisticated discourses of symbolic logicians and logical positivists with pragmatic formulations and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이다. 구문은 'intervene A with B'이다. 'B를 가지고 A에 개입하다'. 문제는 B에 해당하는 두 가지다. "pragmatic formulations and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을 "인간-만들기와 감수성 같은 실용주의적이고 에머슨적인 도식들"이라고 옮겼는데, 어떻게 해서 '도식들'이 뒤에 나오는 '에머슨적인'도 받게 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A)pragmatic formulations (B) Emersonian, i.e., human-making, sensibilities가 따로따로다. '에머슨적인 도식들'이란 엉뚱한 소리가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저는 물리주의자들이 우리에게 세계-만들기에 대해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소견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 굿맨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측력에 관해서라면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삶에는 예측하는 능력 그 이상의 것이 있으며, 제가 콰인을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54쪽) 

이 대목은 웨스트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잘 말해주는데, 번역문은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넬슨 굿맨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그러졌다. 굿맨의 책은 <예술의 언어들> 번역이 두 종 나왔었는데, 이대출판부판은 어찌된 영문인지 뜨지 않는다. 번역문의 첫 문장은 "And I do believe that physicists have much to tell us, they have their own versions of world-making, to use Goodman's language, and they predict better than any of the other groups."이다. '굿맨의 언어(용어)를 빌리자면"이라고 해놓고, 정작 그게 무엇인지 번역문은 놓쳤다. '세계-만들기'가 굿맨의 용어이고, 그는 <세계만들기의 방식들>이란 저작을 갖고 있다(박이문 교수의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책으로 나는 한때 번역스터디를 한 인연이 있다). 굿맨이 보기엔 예술이나 과학이나 다 대등하게'세계만들기'의 방식들(버전들)일 뿐이다. 물리주의자들의 언어로 기술되는 세계판은 '예측력'에서는 뛰어나지만 그렇다고 그게 유일한 세계판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예술은 예술대로 독자적인 '세계만들기'로서 정당화된다. 그게 굿맨의 기본적인 예술철학이고 언어철학이다. 대체로 역자는 미국 철학에 별다른 관심도 지식도 없는 게 아닌지.  

"당연히 그것은 흑인 학생이 아닌 학생들, 백인, 종동계, 남미계, 아시아계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용기 있게 그러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전면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계층, 와스프(WASP), 남성이 될 수 있지만, 그러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흑인은 흑인 청교도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흑인 청교도주의자가 아니라, 보다 나은 계층이며, 와스프이며, 남성입니다. 존재하려는 용기를, 고투를 할 용기만 충분하다면, 그런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67쪽) 

"존재하려는 용기, 고투를 할 용기"(courage to be, to wrestle)는 웨스트 철학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보이지만 여기서 강조할 일은 아니고, 다만 '흑인 청교도인' '흑인 청교도주의자'가 '흑인 프롤레타리아(black proletarian)'의 오역이란 것만 지적한다. '프롤레타리아'와 '청교도(Puritan)'를 혼동한 것이리라. 기독교 얘기가 나온 김에 키르케고르로 넘어간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삶이란 위험하게 사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최초의 니체적 인간이었지만, 그는 기독교의 원조를 받고 있었습니다. 버나드 쇼는 증오란 겁쟁이가 된 비겁한 자의 복수라고 말했는데, 레비나스처럼 하다가는 차이를 연결시키고 소통하는 용기있는 방식으로 타장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습니다."(70쪽)  

키르케고르가 '최초의 니체적 인간'이었다고 한 대목은 "Kierkegaard shows Christian life is living dangerously -ah, proto-Nietzschean, but he's got it under Christian auspices, right?"를 옮긴 것이다. '기독교의 원조'보다는 '기독교의 보호' 하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이다. 원문은 이렇다. "Bernard Shaw says hatred is a coward's revenge to being intimidated, so that you can't deal with otherness, you can't deal with stangeness, in the courageous way that trying to relate, commune - it's almost Levinas-like."이다. 번역문은 '그건 거의 레비나스식이죠'라는 대목을 "차이를 연결시키고 소통하는 용기있는 방식으로 타장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습니다"와 연결시켜놨는데, 정반대 아닌가? '타자성의 철학자'가 '타자성과 이질성'을 다룰 수 없다니! 번역문대로라면 코넬 웨스트가 멍청이란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비로소, 본론이자 클라이막스다. 코넬 웨스트에게 매력을 느끼게 된 부분인 동시에 번역의 '횡포'에 화가 났던 부분이다(70-73쪽). 어떤 주장을 펼치고 있는지도 잠시 따라가본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지적 용기가 철학의 전성기를 만듭니다. 플라톤이나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말했던 것이 맞다면, 소크라테스는 심오한 방식의 지적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보기에 예수는 그렇게 큰 지적 용기가 없었지만 자비로서의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그 점이 결국 소크라테스보다 더욱 더 심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에 관한 대목은 "And for me, of course, Jesus is not so much intellectual courage, but it's courage as compassion, which I think in the end is much more profound than Socrates."을 옮긴 것이다. 'compassion'을 '자비'라고 옮겼는데(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뜻이다), 뒤에 보면 '눈물 흘리는 예수'를 겨냥한 말이다. "그렇게 큰 지적 용기가 없었지만"은 방점이 잘못 찍혔다. "예수는 지적 용기라기보다는 자비로서의 용기를 보여주었는데, 제 생각엔 결국 그게 소크라테스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입니다."라고 옮기고 싶다. 왜 더 심오한가? 소크라테스는 울지 않았지만 예수는 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뭔가 많은 걸 잃어버린 것이라고 웨스트는 생각한다. 체호프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 점 때문에 체호프로 돌아가게 되는데, 우리는 진정 소크라테스, 예수, 지적인 관심, 과학자, 의사 그리고 뿌리 깊은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 면에서는 불가지론자입니다. 기독교적 위안이 없는데도 기독교적 심정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좋은 겁니다!"   

원문은 "And that takes us back to Chekhov, because you really do have Socrates, Jesus, intellectual curiocity, scientist, medical doctor, and deep Christian backdrop but agnostic in belief. Christian temper without the Christian consolation, see, that's good stuff!"이다. 간단히 말하면 '소크라테스+예수=체호프'이다. 그런데, 번역몬은 그 의미상 주어로서의 '체호프'를 '우리'라고 옮겨놓았다. 우리는 모두 체호프다!? 이어지는 문장도 부정확하게 옮겨진 건 마찬가지다.  

"사랑, 열정, 용기 그 모든 것은 지적인 개입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인데, 그 결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연을 들여다보십시오, 그것이 체호프입니다. 보세요, 체호프 안에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것이 있지만, 그는 끝내는 저희 할아버지가 하는 소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할 용기, 존재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싸우라는 겁니다. 휴! 그것이 체호프가 말하는 겁니다, 틀림없어요. 그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습니다."

체호프에 대한 연이은 경탄이고 찬사다. 그런데, 첫 문장 "사랑, 열정, 용기 그 모든 것은 지적인 개입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인데, 그 결론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을 보면 역자는 자신이 무얼 옮기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듯싶다. 즉 이게 모두 체호프에 관한 설명이란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체호프를 읽은 적은 있는 것일까?). 첫 문장의 원문은 "All that love and compassion, courage, but still Socratic, in terms of intellectual engagement, go wherever the conclusions take you and so forth, but you're still loving."이다. 다시 옮기면, "체호프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기를 다 갖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소크라테스적입니다. 지적인 개입이란 관점에서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든지 간에 거기엔 또 사랑이 있구요." "휴, 이건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해요! 그게 바로 체호프입니다."(Look into the abyss, whew! That's Chekhov.)  

이 '유일무이한 사람' 체호프에 견줄 만한 철학자가 있는가? 웨스트가 보기엔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후보로 떠오르지만 그는 겁이 많았다. "그는 사상의 측면에서는 용기 있었지만 삶을 견뎌내지는 못했어요"라는 게 웨스트의 평가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의 위대한 천재이고 그의 삶 속에서 철학적 대화를 재연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용기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학생들을 난폭하고 가혹하게 대했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충분히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소하고 개인적인 방식이므로 그의 잘못이 아닙니다. 다른 많은 것들이 비트겐슈타인을 형성하고 있지만, 결코 체호프 같은 인물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과 체호프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로 이어지는 문장이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에서 천재성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던 것처럼 체호프의 재능은 그의 삶 속에 있었습니다. 체호프, 와일드 두 사람 다 그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니체적 기준을 만나게 됩니다. 체호프는 주로 낮에는 의사였지만 문학예술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믿기지 않지요."

이 대목도 원문을 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 "...Chekhov, who didn't just invest his genius in his work, his talent in his life as Oscar Wild talked about; it was both."이 첫 문장의 원문이다. "체호프는 그의 작품에서 천재성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망발이자 엉터리 번역이다. "체호프는 자신의 천재성을 작품에만 쏟아붓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가 체호프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다? 그것도 아니다. 유미주의의 대표적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삶이 예술을 모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호프는 자신의 재능(천재성)을 그의 삶 속에도 실현했다는 내용이다. 체호프와 와일드 두 사람이 다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이 대목에서 한숨이 나왔다. "it was both"라는 건 체호프가 자신의 천재성을 작품과 삶 양쪽 모두에 쏟아부었다는 것, 곧 그의 재능은 작품과 삶 모두에서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그는 작가이면서 의사였다. 그리고 그는 냉정한 관찰자이면서 풍부한 연민의 작가였다). 그리고 이런 체호프야말로 "너의 인생을 예술작품으로 만들라"는 니체적 기준(요구)에 부합하는 사례라는 얘기다. 믿기지 않는가?!    

그래서 코넬 웨스트가 기대하는 철학 또한 체호프적인 철학, 체호프를 닮은 철학이다. "저는 결국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체호프와 철학적으로 유사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이 웨스트 자신의 바람을 말하는 거라고 이해한다. 그는 '철학에서의 체호프'가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철학과에서는 체호프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등은 철학 강의실에서 만날 수 있지만 체호프는 아니다. "체호프는 정말로, 철학적으로 사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가"라는 게 그의 결론이므로 체호프에 관한 그의 책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당장은 <코넬 웨스트 독본>이라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  

'코넬 웨스트와 체호프'에 대해 적었으므로 번역에 대한 시비는 대충 마무리하도록 한다. 알고 보니 코넬 웨스트는 지젝, 아비탈 로넬, 주디스 버틀러 등과 함께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영화 <이그재민드 라이프>(2008)에 출연하기도 했다(마이클 하트, 마사 누스바움, 피터 싱어 등이 더 출연하는군). 겸사겸사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다.  

 

정작 써야 할 원고와 해야 할 번역이 산더미인 상황에서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다. 요긴한 책이 번역돼 나온 듯해서 반가워했지만, 아무튼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는 번역이어서 유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역자들은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일종의 철학 혹은 인문학 입문서라고도 할 수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궁금한 사람,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철학은 공부하고 있는 사람, 철학을 공부하다가 다른 인문학과의 연계가 궁금해진 사람, 그 누구보다 철학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가라는 냉소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이 가리키는 건 번역서가 아니라 원서다. 때문에 우려스러운 건 잔뜩 기대를 안고서 책을 펼쳐든 독자가 오히려 철학에 대한 냉소나 품게 되지 않을까란 점이다. 역자들의 바람에 걸맞게끔 좀더 온전한 번역서가 나왔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10. 08. 01.  

P.S. 책은 스탠리 카벨의 인터뷰까지 읽었지만, 시시비비를 더 옮겨적지는 않겠다. 카벨은 예전에 철학과 대학원 강의를 들을 때 귀동냥을 한 덕분에 여러 권의 책을 구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분석철학을 전공했지만 미학을 강의하고 또 영화와 오페라에 대해서도 정통한 드문 철학자다. 소로의 <월든>과 하이데거와의 친연성을 주장하기도 하는 게 그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그가 에머슨과 소로를 재발견하게 된 일에 대해 회고하는 대목의 번역만 인상적이어서 옮겨놓는다.  

"저는 소로를 환영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소년으로 제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93쪽)

'환영 꽃다발을 들고있는 소년'으로서의 소로? 원문은 "I wasn't intersted in holding up Thoreau as a flower child"이다. 여기서 '플라워 차일드'는 1960년대 히피 세대를 가리킨다. 당시 자연주의자 소로는 히피들의 숭배대상이었고. 이를 테면, '원조 히피'? 그러니 "환영 꽃다발을 들고 있는 소년" 곧 '화동'과는 의미가 다르다. 카벨은 소로를 그런 '원조 히피'로 숭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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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버드, 번역을 인터뷰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8 00:39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을 겨우 다 읽었다. 무더위에 다른 일들과 겹쳐서이기도 했지만 별로 흥미를 끌지 않는 분석철학자들의 인터뷰가 줄줄이 배치돼 있어서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내달에 나올 서평집('책을 읽을 자유'란 타이틀이다) 교정도 보고 있는 형편이어서 집중적으로 책을 읽진 못했다. 중간에 건너뛴 법철학자 앨런 더쇼비츠 편을 맨마지막에 읽었는데(찾아보니 그의 책도 두 권이 국내에 소개됐다), 그래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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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0-08-06 01:30   좋아요 0 | URL
일이 있어서 아직 안 자고 있습니다. '리콜'을 하는 수도 있지만 아주 드물죠. 그냥 1쇄가 빠지길 기다리면서 대충 손보는 게 보통입니다. 너무 많이 손을 봐야 한다면 그것도 문제이긴 합니다. 정오표 정도로 끝날 게 아니면요...

최용준 2010-08-06 09:29   좋아요 0 | URL
로쟈 님, 대답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책을 번역할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 출판 후 오역이나 번역 누락, 오탈자 등의 처리 문제가 궁금했습니다. 물론 출판되기 전에 꼼꼼하고 성실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dayfornight 2010-08-06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날도 더운데 한 여름 밤의 썩은 개그에 욕 보십니다.

로쟈 2010-08-06 01:06   좋아요 0 | URL
러시아에선 유로지비라고 하지요.--;

로쟈 2010-08-06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 "로티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이라는 잘 정당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란 번역문은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과 "잘 정당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맞나요?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의 표상으로서의 진리 개념"은 로티가 줄기차게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것 대신에 로티는 "잘 정당화된 견해"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번역문은 로티의 생각을 전혀 엉뚱하게 옮긴 것이죠.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가 안되시면, 로티를 다시 꺼내보세요. 물론 이 영어문장만 독해해도 되지만, 그걸 기대하긴 어려운 듯하네요...

로쟈 2010-08-06 10:57   좋아요 0 | URL
너무 일찍 일어나셨나 봅니다...

2010-08-06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6 0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하 2010-08-06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님, 강유원님의 게시판에서 '공표'관련 부분의 지적에 대한 대답으로 <"그러나 그 이전에는 공표될 수 없었습니다."는 '심지어 그 이전에도 그러한 생각이 있었습니다'로 고치려 합니다.">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이를 보건데 번역자 또한 님이 제기한 에코의 문맥을 읽어내진 못한 듯합니다.
위 댓글에서 당근주스님은 로쟈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제가 위에서 말한 '공표'가 잘된 의역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오캄,로크,퍼스 등을 단서로 잡고 에코의 말을 뜯어보면 휼륭한 의역이라는 말입니다. 감을 못 잡는 것은 로쟈님의 문제이니 알아서 판단하세요."
이를 통해 당근주스님은 로자님에 대해서 '감을 못 잡는다'라는 주장(이 표현은 이후에도 계속되는군요.)의 근거로 "'공표'가 잘된 의역"이라는 점을 모른다는 점을 들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번역자는 '의역'을 한 것이 아니라 '오역'을 하였기 때문에 로자님에 대한 '감을 못 잡는다'는 표현은 당근주스님의 것이 돼 버렸습니다.

번역자가 실수로 맥락을 꿰뚫는 것처럼 '보이는' 번역하여도 그게 실수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에 대한 독자로서의 감을 익히실 필요가 있습니다.

콩세알 2010-08-06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덧글들을 보니 이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라도 빨리 1쇄가 다 나가서 오역을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도록..^^;; 강유원님의 인문고전강의 오디오 파일이 저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는데 공짜로 그런 강의를 들은 것이 왠지 빚진 기분이었거든요. 이번 기회에 빚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될 것 같다는...^^;;

로쟈 2010-08-06 11:09   좋아요 0 | URL
한가지 방법이긴 합니다. 그렇담 한 10권은 사셔야겠는데요.^^;

ON 2010-08-07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어 보지도 않았고 위와 같은 논쟁을 보면 제 지적 수준으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페이퍼는 "철학이란 무엇이고,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댓글이 늘어나면서 점차 '번역비평이란 무엇이가'라는 의구심을 갖게되었습니다.

인문학이나 어학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비평은 있을것입니다.
저는 건축설계 분야에서 일하면서 비평은 일상화 돼 있습니다.
건축은 특히나 번역과 달라서 쇄를 거듭하면서 수정한다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수정의 영역이 개인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얼마나 비평이 냉정하겠습니까.

하지만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비평하기 전에 그렇게 한 "의도"를 먼저 묻는다는 것입니다.
의도(컨셉)가 다르면 현상에 대한 해석도 그에 따른 전개 과정도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비평가는 발표(사적인 대화가 아닌 발표입니다)자의
"의도"를 묻고 그 의도에 부합하게 설계하였는지 비평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의아했습니다. "번역 비평"이란 무엇인가.
번역도 하나의 학문이고 번역자의 "의도"가 있을진데 발표자의 의도를 묻는
그런 노력을 하셨는지.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하냐고 하신다면 그건 비평이 아니라 비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설계한 작품에 누군가가 의도를 묻지 않고 비평을 한다면 그 사람은
제 의도를 다 알고 있는 스승님이거나 비트루비우스 정도의 위대한 인물 아니겠습니까

쿼크 2010-08-07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님...

먼저 제 글이 당근주스님에게만 감정을 추스리라고 읽히는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사실 두분(로쟈님과 당근주스님)과 혹시나 모를, 그러니까 다른 분들도 댓글 올리실때 조금만 부드러웠다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올린 글인데 당근주스님의 댓글에 댓글을 달다보니 그렇게 보이게 된 듯 합니다. 역시나 사람의 생각 그대로 글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네요...

처음엔 번역자체에 대해 흥미를 가졌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감정이 더불어 읽히는게 조금은 거북스러웠습니다. 자칫 생산성 있는 토론이 비효율적으로 흐를 수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게되었습니다.

저야 대충 이미지화 시켜 영어를 이해하는 수준뿐이기에 번역문제에 직접적으로 끼어들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어깨너머로 공부는 되거든요.

저야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수 밖에 없지만 좀 더 좋은 방향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생각이 평행을 달리면 절충이고 뭐고 없잖아요. 문제는 어떻게 끝맺음을 하느냐인데 너무나 완벽한 결론만을 내려고 하지 않았으면 하네요. 실상 책의 번역하신 분들이 주석을 좀 달아줬더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주석 단다는 문제도 또 다른 이야기를 불러 올 수 있기에 뭐라 하기는 힘드네요. 사람마다 호불호도 있고 말이죠. 그래도 출판사가 신경 좀 썼으면 좋겠네요. 제가 알기로는 이 책 출간 좌담회도 있어서, 번역하신 분들이 얘기도 들려줄거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쪽 이야기를 듣고 다시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하구요.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좌담회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고 갈지 궁금해지는군요.

제가 조금 경솔했던 점 사과드리고요, 제 댓글에 답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많이 배우고 갑니다~~.


Rousseau 2010-08-0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쿼트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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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읽은 칼럼이 인상적이어서 관련기사를 찾아봤다. 그간에 모르고 있었는데(너무 천안함에만 빠져 있었나 보다), '위키리크스'라는 내부고발 전문 웹사이트에서 아프간 전쟁과 관련한 미국의 기밀문서를 공개하여 큰 파문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여러 모로 흥미를 끄는 사건이다(정신분석의 용어를 쓰자면 '상징계에 대한 실재의 습격'이라 할 만하다). 인터넷 시대에 개인과 국가권력 간의 쟁투가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지도 보여주는 사례 같다(당연한 관심은 우리에게도 이런 폭로가 가능할까란 것이다). 추가적인 폭로 자료도 엄청난 분량으로 쌓여 있다고 하는 만큼 귀추가 주목된다. 기사는 엊그제 칼럼에서 지난 4월의 칼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두 조찬제 경향신문 국제부 차장의 기사다.        

경향신문(10. 07. 29) [마감 후…]‘위키리크스’라는 유령

하나의 유령이 미국을 배회하고 있다. ‘위키리크스’라는 유령이다. 이 유령이 들춰낸 치부들은 미국을 뒤흔들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있다. 백악관과 국방부를 비롯한 미 행정부는 이 유령을 사냥하기 위해 혈안이다. 그러나 유령은 공중을 빙빙 돌며 먹이를 찾는 독수리처럼 끊임없이 오바마 행정부의 치부를 노리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이제 미국의 최대 위협 가운데 하나가 됐다.

위키리크스는 처음부터 유령처럼 다가왔다. 지난 4월5일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세상을 전율시켰다. 2007년 7월 이라크 바그다드 상공의 미군 아파치 헬기에서 마치 사냥하듯 민간인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퍼붓는 장면은, 희희낙락하며 환호하는 조종사의 몰인간적 행태와 겹치면서 분노를 자아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실체는 이로써 발가벗겨졌다. 하지만 이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3개월 20일 뒤, 메가톤급 핵폭탄이 터졌다. 지난 25일 위키리크스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일지(war logs)’라는 이름으로 공개한 9만2000여건의 기밀문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민간인 사망, 파키스탄 정보부와 탈레반의 유착, 탈레반 요인 암살을 위한 비밀 특수부대 운용 등 감춰진 아프간전의 실상이 이 기밀문서들을 통해 드러났다. 미 행정부는 “전쟁 중에 벌어진 일” “중요한 문서는 없다”는 식으로 의미를 애써 축소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아프간 전쟁 일지 공개 이틀 만인 27일 문서 누출이 “개인이나 작전의 잠재적 위험”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위키리크스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120만건의 비밀문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간폭탄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내부비리 폭로가 목적이다 보니 위키리크스의 활동은 유령처럼 이뤄지고 있다. 사이버공간에서 활동하기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서버도 익명성이 법적으로 보장되는 나라에 두고 있다. 활동가들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위키리크스에는 주인이 없다. 정부의 비리에 관심 있는 내부고발자나 반체제 인사, 언론인, 사회활동가 등 누구든 정보원이 될 수 있다. 정보제공자 신원보다 정보 내용을 중시한다. 대신 신원은 철저히 보호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위키리크스가 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위키리크스라는 유령은 미국의 정보자유법(FOIA)의 부산물이다. 위키리크스의 기밀문서 폭로가 낳은 ‘국가기밀 대 언론자유’ 논란의 중심에 ‘정보자유’라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는 행정부와 언론 간의 정보자유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국가 안위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미 행정부는 정보 비밀주의를 강화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취한 조치가 대표적 사례다. 위키리크스가 정보자유를 강조하는 이유는 창설자 줄리안 어산지가 지난 25일 독일 슈피겔과 한 인터뷰에서 확인된다. 그는 “양심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공권력의 남용을 폭로했다. 우리의 일은 이들을 보호하고 대중에게 알리고 역사 기록이 부인되지 않게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는 “전쟁을 책임진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대답했다.

위키리크스는 개인의 힘은 미약하지만 하나하나 뭉치면 국가권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정부 비리를 폭로하는 것이 정책을 바꾸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면, 내부고발자든 언론인이든 활동가든 모두가 단결해야 한다.(조찬제 국제부 차장)  

경향신문(10. 07. 28) 위키리크스의 폭로 ‘오바마의 리스크’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관련한 위키리크스의 기밀문서 폭로가 가져올 향후 파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는 연방법 위반을 언급하며 파문 차단에 나섰지만 향후 아프간전 수행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는 데다 오는 11월 중간선거의 악재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더욱이 위키리크스는 추가 기밀 폭로를 예고한 상황이어서 파장은 일파만파로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26일 정례 브리핑에서 위키리크스 기밀문서 공개에 대해 “이는 연방법 위반으로, 현재 수사의 대상이 돼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기브스 대변인은 “기밀 공개는 충격적”이라면서 “아프간 주둔 미군을 위험에 빠뜨리고, 군의 기밀유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문건의 내용들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대 아프간 전략이 변경되기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며 이번 문서 공개가 오바마 행정부와 관련이 없음을 강조했다. 미 국방부도 기밀 누출자 색출에 나서는 한편 폭로된 기밀들이 가져올 잠재적 위험에 대한 분석작업에 돌입했다.

백악관의 파문 확산 차단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행정부 내부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뉴욕타임스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의회와 국민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이 확실하다”는 한 관리의 말을 인용해 행정부 내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폭로가 향후 아프간전에서 파키스탄의 협력을 얻어내는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관리는 “이제 모든 것이 공개됐다. 기밀 공개로 우리는 파키스탄에 도와달라고 말하기가 쉬워졌다”고 말했다.

현재 아프간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과 의회의 태도를 감안하면 오바마 행정부에 미칠 파장은 심각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파키스탄에 쏟아부은 천문학적인 돈과 정보가 탈레반을 돕는 데 사용된 것이 밝혀진 이상 의회의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는 27일로 예정된 미 하원의 아프간 전비 지원에 관한 법안 처리 결과가 주목된다면서 오는 연말까지 아프간 전략을 재검토해야 하는 오바마 행정부엔 부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바마가 의회를 설득하지 못할 경우 주둔군 축소라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프간에 군을 파견한 다른 국가들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보 공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경우 그동안의 협력관계에 손상이 갈 수도 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이번 폭로를 계기로 아프간전은 ‘부시의 전쟁’에서 ‘오바마의 전쟁’이 됐다고 지적했다. 미 프린스턴대 역사학과 줄리안 젤리저 교수는 AFP통신에 “이번 공개는 부시의 문제를 오바마의 것으로 만들었다”면서 “오바마는 자신을 그것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조찬제기자) 

 

위클리경향(10. 07. 06) ‘위키리크스’ 미국 정부 눈엣가시   

미국 정부의 비리를 담은 기밀문서를 폭로해 온 내부고발 전문 민간 웹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org)가 미국 정부의 눈엣가시가 되고 있다. 지난 4월 초 이라크 주둔 미군 아파치 헬기가 2007년 바그다드 상공에서 무차별 기총사격으로 로이터통신 기자 2명 등 민간인 10여 명이 사망하는 과정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해 파문을 일으킨 위키리크스는 최근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할 것이라고 밝혀 ‘제2의 파문’을 예고했다. 이라크 동영상 공개 후 곤경에 빠진 미국 당국은 이 자료를 위키리크스에 제공한 사병을 체포해 조사 중이며, 심지어 위키리스크 설립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는 등 잠재적 파문 차단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라크·아프간 동영상은 빙산의 일각
영국 일간 가디언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위키리크스 설립자인 줄리앤 어샌지는 6월 초순 지지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미군이 지난해 5월 아프간 가라니 마을에서 민간인을 공습하는 동영상을 곧 공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아프간 침공 이후 미군에 의한 최악의 민간인 학살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아프간 정부는 미군 공습으로 어린이 92명을 포함해 민간인 140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아프간 정부의 발표를 믿지 못한 미군은 자체 조사를 벌였으나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터통신 기자 2명을 포함해 10여 명이 사망한 이라크 동영상이 보여 준 파장을 생각하면 140명이 숨진 ‘아프간 동영상’이 공개될 때 가져올 파장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아프간 민간인 학살 동영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동영상은 5월 26일 미군 당국에 체포된 이라크 주둔 미군 정보분석가 브래들리 매닝(22)이 위크리크스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 26만건의 민감한 기밀자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007년에 입대한 매닝은 업무상 비밀를 취급할 수 있었다. 이 덕분에 그는 근무하는 동안 이라크 동영상을 비롯한 외교 전문 등 엄청난 기밀자료들을 내려받았다. 그는 당국에 체포된 뒤 쿠웨이트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체포된 과정은 어처구니가 없다. 자신의 무용담을 전 컴퓨터 해커인 애드리언 라모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랑한 데서 비롯됐다. 매닝은 라모에게 “당신이 비밀 네트워크에 하루 14시간씩 8개월 이상 마음껏 접근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고, 라모는 이 사실을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알린 것이다.

매닝의 문서가 공개될 경우 파괴력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매닝이 라모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확인된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을 비롯한 전 세계 외교관 수천명이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비밀로 분류된 외교문서 전체가 일반에 공개된 사실을 알면 심장마비에 걸릴 것”이라고 썼다고 인터넷 매체 와이어드(wired.com)가 전했다. 이 때문에 미국 당국의 최대 관심사는 매닝이 위크리크스에 넘긴 자료의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미국 당국은 매닝 체포 직후 그의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를 압수하고 워싱턴에서 전문가들을 동원해 분석작업을 벌이고 있다. 어샌지는 매닝 체포 이후 그를 변호할 변호사 3명을 고용했지만 미국 당국은 면회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체포설 때문에 피신 중인 설립자 
아이슬란드 의회 의원이자 반전운동가로 이라크 동영상 작업을 한 브리기타 욘스도티르는 6월 18일 미국 ABC방송 <월드뉴스>에 나와 “어샌지가 미국 정부로부터 체포 위협을 느껴 피신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우리는 매일 그와 접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욘스도티르는 아이슬란드 의회가 전날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국가안보와 관련한 내부고발자에게 ‘국제 피란처’를 제공하는 법안을 발의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 뒤인 6월 21일 가디언은 유럽의회가 주최한 정보의 자유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차 벨기에 수도 브뤼셀을 찾은 어샌지를 만나 인터뷰했다. 미군이 매닝을 체포한 뒤 모습을 감췄다가 약 한 달 만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피신한 이유는 내부고발자나 변호사들이 매닝 체포 후 그에게 닥칠 위험을 감안해 극도로 조심할 것을 당부했기 때문이다. 어샌지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지와 보호가 필요하다”면서 “그러나 항상 방심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어샌지가 자신의 활동 때문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것은 올해 초부터였다. WSJ에 따르면 그는 올해 초 자신들을 미군과 미국의 정보전 노력에 대한 잠재적으로 묘사한 미국육군정보전센터의 2008년 비밀보고서를 위키리크스 사이트를 통해 폭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육군정보전센터는 “비밀로 분류된 국방부 문서가 인가 없이 유출되면서 외국 정보기관이나 해외 테러조직 등에게 미군을 상대로 소송을 제공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위키리크스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 와중에 이라크 동영상을 폭로하면서 그는 피신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됐다. 실제로 미국 웹 매체인 데일리비스트는 매닝의 체포 사실이 알려진 뒤 사흘이 지난 6월 10일 “미국 국방부 조사관들이 어샌지가 공개될 경우 미국의 국익을 크게 해칠 국무부의 비밀문서들을 공개할까 봐 두려워해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위키리크스의 기밀문서 폭로는 한편으로 국가안보와 국민의 알 권리에 관한 논란을 가열시키고 있다. 국가안보를 우려하는 측은 과거 내부고발자가 기자에게 정보를 주던 것과 달리 인터넷 등의 발달 덕분에 누구든 사이버 공간에 익명으로 직접 올릴 수 있어 국가 기밀이 쉽게 유출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든다. 뉴욕타임스는 이와 관련해 6월 12일 오바마 행정부가 정부 기밀을 언론에 유출하는 공무원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출범 17개월째인 오바마 행정부가 정부 기밀을 유출한 관리를 처벌한 건수가 전임 부시 행정부보다 많다고 지적했다. 반면에 국민의 알 권리가 중요하다는 측은 처벌 강화가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지 않으려는 방편에 불과하다면서 내부고발자야말로 진정한 국민적 영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앤 어샌지는 호주 출신의 컴퓨터 해커였다. 그는 정부나 기업, 각종 기관의 부패를 내부고발자들이 일반인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2006년 위키리크스를 만들었다.
그는 6월 1일 위키리크스 사이트에 실은 인터뷰에서 “사회의 모든 정보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특정 정부와 정당, 정치지도자 가운데 누구를 지지할지와 관련이 있다”면서 “시민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사이트의 존재 이유”라고 밝혔다. 위크리크스의 운영 철칙은 내부고발자의 신원 확인보다 자료의 신뢰성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실제 운영자는 5명이지만 수백명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소송이 제기될 경우 변호사의 도움도 받는다. 서버는 익명성이 법으로 보장된 스웨덴에 두고 있다.

경향신문(10. 04. 15) [마감 후…]전쟁,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2007년 7월12일 낮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외곽의 거리. 열 명 남짓한 남자들이 골목 한 쪽에서 어슬렁거린다. 머리 위엔 미군 아파치 헬기 두 대가 이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다. 조종사들의 목소리가 다급해진다. 군중 5~6명이 AK47 소총과 로켓추진수류탄(RPG) 등을 갖고 있다며 발포명령을 내릴 것을 상부에 요구한다. 이윽고 상부 지시를 받은 헬기는 이들에게 총탄을 퍼붓는다. 일부는 쓰러지고 일부는 몸을 피한다. 피하는 이들에겐 다시 총탄이 쏟아진다. 공중을 선회하던 헬기는 부상자 한 명을 발견하고 다시 발포 준비를 한다. 순간 승합차 한 대가 그를 싣기 위해 다가간다. 차 안에 어린이 두 명이 있었음에도 헬기는 이들에게 사격을 퍼붓는다. 아이 두 명은 겨우 목숨을 건진다. 이날 헬기 공격으로 10여명이 사망했다. 그 가운데는 로이터통신 소속 이라크인 2명이 포함돼 있었다.

미 정부와 기업의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org)가 지난 5일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한 비디오 내용이다. 이 비디오는 약 3년 전 이라크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 사건을 다룬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미군 발표에 의존해 미군이 기습공격을 받고 공격해 무장세력 9명과 민간인 2명(로이터 고용인 2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 비디오를 보면 미군 발표가 거짓임이 드러난다. 몇 사람은 무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긴장은 전혀 없다. 미군과의 교전은 더더욱 없다. 왜 미군이 그동안 비디오를 공개하라는 로이터의 요청을 거부했는지 알 만하다. 위키리크스는 이 비디오를 미군내 내부고발자들로부터 입수했다. ‘부수적 살인’이라는 제목은 민간인 사망자를 ‘부수적 피해’로 표현하는 미군의 주장에 빗댄 말이다.

가공할 만한 것은 조종사들의 교신 내용에서 볼 수 있는 태도다. 이들은 자신들의 공격으로 죽은 사람들을 보고 고소해하고 환호한다. 승합차 속 아이들이 다친 데 대해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른들을 나무란다. “전쟁터에 애들을 데리고 오는 게 잘못이지.” 조종사들에겐 인간에 대한 존엄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전쟁은 이들에게 인간을 사냥하는 게임일 뿐이다. 이 비디오는 과거 어두운 기억을 떠올린다. 2004년 아부그라이브 수용소 수감자 인권유린 사건이다. 포로들을 발가벗겨 바닥에 쓰러뜨리거나 알몸인 포로 머리에 두건을 씌운 채 문이나 침대에 손을 묶는 등 갖은 추행을 저지르면서도 즐거워하는 미군들. 미군은 이런 악몽 때문에 비디오를 감췄던 것일까.

이 비디오는 공개 9일 만에 유튜브 클릭 수만 약 600만회에 이를 만큼 파장이 크다. 하지만 미국은 사과는커녕 곧 잊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11일 미 ABC방송 <디스 위크>에 출연한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은 “비디오 공개로 미국 이미지가 훼손되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전쟁 중에 벌어진 일”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군의 행위는 전쟁범죄라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마당이다. ‘전쟁 중 환자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돌봐야 한다’는 제네바협정을 어겼다는 것이다. 미군과 미 정치인들은 안다. 전쟁터에서 미군의 추행과 민간인 희생이 많으면 많을수록 반전여론만 높아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감춘다. “정치언어는 거짓말을 참말로, 살인도 훌륭한 일로 만들고, 허공의 바람조차 고체처럼 단단하게 보이게 고안된 것이다”라는, 위키리크스가 첫머리에 인용한 조지 오웰의 말이 그 답이다.(조찬제 국제부 차장)   

10. 0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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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위키리크스와 폭로의 시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6 23:05 
    점심과 저녁, 두 차례 소나기가 내렸어도 무더운 건 여전한 날씨다. 이러다가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 섭섭한 마음이 들지도 모른겠다. '정'이 들어서 말이다. 날씨는 그렇고, 요즘 가장 흥미로운 외신 기사는 내부고발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에 관한 것이다. 미국 정부와 한바탕 법적 분쟁을 치를지도 모르겠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7월26일 위키리크스 설립자 어샌지가 위키리크스가 제공한 정보로 기사를

도박장에 가보질 않아서 '잭팟'의 느낌이 어떤 건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번주 신간들을 보며 '이건 잭팟이야!'라고 혼자 중얼거렸다(분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최근 신간 제목을 빌려 조금 점잖게 말하면 '버스트'. 뭔가 터졌다는 것. 하루키의 <1Q84> 얘기가 아니다(물론 그건 하루키의 '잭팟'이다). 이번주 언론 리뷰에서는 다뤄지지 않을 듯싶은데, 일단 리처드 세넷의 <장인>(21세기북스, 2010)이 번역돼 나왔다(그러고 보면 나 혼자 느끼는 '손맛'일 수도 있겠다).  

 

작년에 <뉴캐피털리즘>(위즈덤하우스, 2009)이 나왔을 때부터 눈여겨본 타이틀인데, 예기찮게도 번역본이 빨리 나왔다. 전작들에서 그가 강조하던 '장인정신'이란 게 어떤 것인지 세계적 석학의 솜씨로 확실하게 보여줄 듯싶다. 맛보기 소개는 이렇다.  

저자는 장인의 모습을 단지 목공이 하는 육체적인 기능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아주 편협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책에서 상고시대의 그리스 도공, 로마제국의 이름 없는 벽돌공, 거대한 성당을 지어 올렸던 중세 석공, 르네상스 예술가를 비롯해 근대의 노동자, 리눅스 프로그래머, 건축가, 의사 등 현대의 전문 직종에 이르기까지, 시공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장인 분석을 통해 장인의 정체성과 가치를 재정립하고, 장인의 신(新)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결국 저자의 목표는 별다른 보상 없이도 일 자체에서 깊은 보람을 느끼고 세심하고 까다롭게 일하는 인간, 즉 우리 안에 잊힌 장인의 원초적 정체성을 복원하는 일이다.

 

아, 그리고 사르트르의 <사르트르의 상상계>(기파랑, 2010). 번역서 제목이 그렇게 돼 있으니 사르트르를 두 번 반복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책과 짝이 되는 <상상력>도 <사르트르의 상상력>(기파랑, 2008)으로 나왔었다. <변증법적 이성비판>(나남, 2009)이 완역된 마당이어서 더 바랄 게 없다 싶었는데, 그의 상상력 연구를 집대성한 책까지 번역돼 나오니 감지덕지다. 일단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질베르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문학동네, 2007)을 읽을 수 있겠다는 것. 전에 책을 좀 읽다가 사르트르의 상상력론과 대결하는 대목에서, 공정하게 읽자면 사르트르의 책을 먼저 봐야겠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는데, 마침내 때가 온 셈이다(빨리 다른 핑계를 찾아야겠다).  

 

혹 상상력이란 주제에 더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뒤랑의 제자이자 '전도사'이기도 한 진형준 교수의 <상상력혁명>(살림, 2010)과 <싫증주의 시대의 힘 상상력>(살림,2009)를 참조해도 좋겠다. 아무래도 번역서보다는 읽기가 편하니까. 역시나 뒤랑의 제자인 서정기 교수의 평론집 <신화와 상상력>(살림, 2010)도 소위 '신화비평'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문예학자 페터 지마의 신간 <모던/포스트모던>(문학과지성사, 2010). 책은 어제 신촌 홍익문고에서 사들었는데(다른 책들은 들어오질 않았었다), 지마의 책은 하도 오랜만이어서 '감회'까지 느껴진다. 번역은 그간에 지마를 거의 전담해서 번역해온 김태환 교수. 나는 가장 먼저 소개됐던 <문학 텍스트의 사회학을 위하여>(문학과지성사, 1987)를 비롯하여 지마의 책을 거의 대부분 읽은 듯싶다(오래전 읽이지만 그의 방한 강연도 들었다). <문예미학>(을유문화사, 1993) 같은 책은 대학원의 필독 세미나 교재이기도 했다.   

그런데,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 2001) 이후 거의 10년 만에야 번역서가 나온 셈이니 격세지감이 있다. 한때 서점을 '주름잡던' 그의 책들도 상당수가 절판되거나 품절된 상태이고. <모던/포스트모던>은 그런 가운데 나온 것인데, 원저는 1997년에 초판이 나오고 2001년에 2판이 나왔다. '생명력'이 있는 이론서라고 봐야겠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 총결산'이 비록 요즘 유행과 맞는 건 아니지만 시류를 거슬러서 일독해봄직하다.   

그밖에도 네그리의 <예술과 다중>(갈무리, 2010), 캘리니코스의 <무너지는 환상>(책갈피, 2010),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간들>(문화과학사, 2010) 등 쟁쟁한 명망가의 책들이 이번주 신간이고 모두 보관함에 들어가 있다.  

 

체 게바라 평전의 결정판이라는 <체 게바라, 혁명적 인간>(플래닛, 2010)도 이번주에 나온 책이고(무려 1176쪽 분량이다), 이미 화제가 되고 있는 <김대중 평전>(시대의창, 2010)도 이번주 신간이다, 라고 적고 보니 오류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2008)과 혼동했다. <평전>과 <자서전>이 동시에 나오는 바람에 같은 책으로 착각했다(<자서전>을 고른다면서 <평전>을 클릭했다).  

하여간에 이 정도면 '잭팟'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물론 '옆에서' 그런 게 터졌다는 얘기일 뿐이고, 그게 그냥 구경거리가 아니라 '나의 횡재'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투자가 좀 필요하다. 대다수 직장인들의 휴가가 시작된다는 내주에 한두 권 정도 챙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사르트르나 지마 같은 경우야 아무래도 전공자들 손에서나 대접받을 터이지만, 나머지 책들은 충분히 유혹적이다. 다년간의 경험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일이 흔치 않다... 

10. 0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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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각하는 손과 장인 예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4 14:04 
    리처드 세넷의 <장인>(21세기북스, 2010) 출간 소식의 반가움은 이미 지난주에 포스팅한 바 있는데, 언론리뷰는 이번주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가장 빨리 올라온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는 번역본보다 원서를 미리 구했는데, 내주쯤에는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기사를 보니 저자의 3부작 중 하나라고 하는데, 나머지 책들도 기대된다.   연합뉴스(10. 08. 04) '생각하는 손' 장인정신을 찾아서 
 
 
미지 2010-07-31 0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알라딘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글 올리면 조회수가 급감하나요? 제가 좀 놀라운 걸 겪어서요...

로쟈 2010-07-31 08:29   좋아요 0 | URL
그 정도로 '정서적인' 시스템이라곤 생각지 않습니다. 조회수가 갑자기 늘어나는 경우는 있어도 갑자기 주는 경우는 좀 드물고요. 어떤 착오인지는 모르겠지만요...

2010-07-31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1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7-31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은 <김대중 평전>(시대의 창)이 아니라 삼인에서 나온 <김대중 자서전>이 아닐까요?^^ 물론 김삼웅 선생이 집필한 <김대중 평전>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고 김대중 대통령의 육성이 담긴 <김대중 자서전>에 새로운 정보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에 대한 2권의 책이 동시에 출간되어 혼돈을 일으키는 듯 싶습니다.^^ <장인>이라는 책에 눈이 가는군요. 사르트르의 <상상계>는 두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 마음에 듭니다.^^

로쟈 2010-07-31 19:0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제가 잘못 클릭했어요.^^; 그래도 표지는 <평전>이 더 낫네요. <상상계>는 저도 주문을 넣었는데, 저렴한 거야 고마운 일이죠.^^

푸른바다 2010-08-02 15:22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의 상상계와 라캉의 상상계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라캉은 사르트르보다 오히려 한 살이 많은데 실존주의 뒤에 유행한 구조주의의 대표주자로 알려지는 바람에 사르트르보다 후세대인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사르트르와 동시대인 라캉은 알튀세르, 레비스트로스, 푸코보다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하면 까마득한 선배인 셈인데 말입니다.^^ 라캉은 실존주의-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전 시대에 걸쳐 유행을 누리는 드문 사상가인 것 같습니다. 라캉은 다른 구조주의자들에 비해 사르트르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이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로쟈 2010-08-03 10:07   좋아요 0 | URL
라캉이 1901년생이니까 네 살 더 많습니다. 저는 요즘 라캉-지젝의 주체와 사르트르(실존주의)의 주체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서 관심이 생겼어요. 마땅한 책이 없나 찾아봐야겠습니다...

푸른바다 2010-08-03 13:14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주체를 넘어서 있는 구조가 인간의 훨씬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단 1%에 불과하더라도 '주체의 결단'이라는 부분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3종의 번역본과 영역본, <변증법적 이성비판> 번역본, 라캉 <에크리>와 <세미나> 번역본들과 영역본들을 갖추어 놓고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싶지만 우공이산이라고 언젠가는 끝나겠지 하는 믿음으로 천천히 나아가볼까 합니다.^^


로쟈 2010-08-03 13:34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와 라캉을 주제로 한 연구서가 몇 권 있는데, 모두 불어본이네요.^^;

푸른바다 2010-08-03 15:12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 때 불어를 제 2외국어로 꽤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그를 살리지 못한게 좀 후회스럽군요.^^ 불어의 기억이 좀 남아있었던 대학시절 교보 문고에서 발췌본이긴 하지만 <에크리> 불어본을 구매한 적이 있어요. 이게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누가 관심을 가질 책도 아니었는데요.^^

개인적으론 독서모임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로쟈 2010-08-03 23:12   좋아요 0 | URL
저도 학부 졸업하기에 불어2 듣다가 흥미를 잃었는데(한 학기 동안 바둑, 장기만 뒀지요.^^;) 약간은 후회가 됩니다...

종이달 2022-05-05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 월요일에 쓴 원고인데,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번역에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점 한 가지를 글감으로 삼았다.   

한겨레(10. 07. 31) '서사적 바람둥이’가 낯설어진 이유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이미 눈치챈 독자들이 있겠지만, 체코 출신의 망명작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서두다. 쿤데라는 1981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지만 ‘프랑스 작가’라고 부르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소설)의 특별한 예찬자인 그에게 특정 국적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니 차라리 그의 조국은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중부유럽의 작가’를 자임하는 쿤데라는 체코어판과 프랑스어판을 동시에 ‘정본’으로 인정한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정본이 둘이다. 독어 중역본으로 처음 출간된 한국어본도 체코어본, 프랑스어본 번역 등이 추가되어 그간에 네댓 종 이상이 나왔다. 현재는 프랑스어본 번역만이 통용되고 있어서 아쉬운데, 다양한 번역본을 음미하면서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단 복수의 번역본은 번역의 차이와 변화 양상에 주목하게 해준다. 한두 가지 예를 들면, 먼저 주인공들의 이름이 바뀌어왔다. 체코어본 번역에서 ‘토마스’와 ‘테레자’라고 표기된 주인공의 이름이 독어본 번역과 프랑스어본 번역에서는 ‘토마스’와 ‘테레사’가 됐고, 프랑스어본 번역 개정판에서는 ‘토마시’와 ‘테레자’가 됐다. ‘테레사’가 ‘테레자’가 된 것은 교정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토마스’가 ‘토마시’로 바뀐 것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독일작가 ‘토마스 만’이 덩달아 ‘토마시 만’으로 바뀐 걸 보면 유머를 의도한 건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바람둥이의 유형’도 달라졌다. 쿤데라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누는데, 한쪽은 ‘서정적’ 유형으로 모든 여자에게서 자신의 이상을 찾으려고 애쓰고, 다른 한쪽은 ‘서사적’ 유형으로 수집가적인 열정을 갖고서 여성적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한다. 전자는 항상 이상 찾기에 실패함으로써 동정을 사기도 하지만, 후자는 항상 만족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산다. 작품에서 토마스는 후자에 속한다. 이 두 유형이 독어본과 체코어본 번역에선 ‘서정적 바람둥이’와 ‘서사적 바람둥이’ 정도로 번역됐지만, 프랑스어본 번역에서는 ‘낭만적 호색한’과 ‘바람둥이형 호색한’으로 옮겨졌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빚어졌는지 궁금할 법한데,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을 참고하면 ‘내막’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자기 소설의 ‘열쇠어’ 중 하나로 ‘서정성’을 풀이하면서 그는 ‘서정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은 미학의 영역을 넘어서 “자신과 세계와 타인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를 표상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프랑스인들에게는 아주 낯설다는 점이다. 그는 타협책으로 프랑스어판에서 ‘서정적 바람둥이’를 ‘낭만적 한량’으로, ‘서사적 바람둥이’를 ‘자유주의적 한량’으로 바꾸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 서글펐다”고 그는 덧붙였다. 요컨대 체코어본이나 독어본, 영어본과는 달리 유독 프랑스어본에서는 ‘서정적 바람둥이’와 ‘서사적 바람둥이’라는 유형학이 허용되지 않은 것이다. 그에 따라 프랑스어본을 정본으로 삼은 한국어본은 쿤데라의 ‘서글픔’까지도 옮기게 되었다. 더불어 서정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이란 이분법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되고 말았다.  

10. 07. 30.  

P.S.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최초 번역본은 송동준 교수의 독어본 번역이다.(이 번역본에서는 '서정적 난봉꾼'과 '서사적 난봉꾼'이라고 옮겼다). 김규진 교수의 체코어본 번역은 중앙일보사간 소련동구문학전집판(<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과 한국외대출판부판(<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두 종이 출간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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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 2010-07-3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시와 테레자로 쓴 까닭은 체코어 이름이 Tomáš와 Tereza이기 때문입니다.
독어본은 독어 철자에 없는 하체크 š를 뺀 Tomas와 독어화한 Teresa라서 번역본은 토마스와 테레자가 된 것이고 불어본은 역시 하체크를 뺀 Tomas와 그냥 체코어 이름 Tereza인데 번역본은 둘 다 한국 식 세례명에도 있고 좀 더 익숙한 이름인 토마스와 테레사로 썼다고 보면 됩니다.
체코어 원문을 보니 Thomas Mann으로 돼 있던데 토마시 만은 토마스를 토마시로 일률적으로 바꾸다 생긴 오류로 보입니다.

로쟈 2010-07-31 18:48   좋아요 0 | URL
기왕에 나온 체코어 번역본도 '토마스'라고 표기해주고 있으므로 '토마시'는 불필요한 혼란을 안겨준다고 생각해요. 그냥 생색용 흉내내기 정도(정작 교정되어야 할 오류들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충실성'이 바람둥이 번역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므로 일관성이 없는 거지요. 그리고 '토마시 만'이야 물론 한번에 바꿔쓰기 하면서 생긴 오류일 텐데, 교정을 보지 않았다는 걸 꼬집고 싶었어요...

홍차 2010-07-31 18:32   좋아요 0 | URL
체코어 번역본도 토마스로 적었다니 좀 의외긴 한데 아마 맨 처음 번역한 책의 표기에 맞추지 않았나 싶군요.
근데 좀 더 자세히 쓰셨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게 기고문 내용만으로는 그냥 왜 이름을 바꿨는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읽히거든요.
물론 번역에서 정작 더 중요한 문제를 지나친 일이 좀 아쉽긴 합니다.

로쟈 2010-07-31 19:06   좋아요 0 | URL
자세히 쓸 수 있는 분량은 아니고요. 고유명사 표기에서 원음 흉내는 보통 '알리바이'여서 제가 못마땅해 하는 편입니다. '테레사'의 경우에도 저는 그렇게 통용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보는데, 체코어본도 '테레자'라고 했으므로 통일해줘도 되겠다 싶어요. 한데, '토마시'는 뭥미 수준인 거죠. 고유명사 표기는 원음을 고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헷갈리지 않는 것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š(sh)를 '시'로 표기하는 것도 임의적인 규칙이지요. 예전엔 '슈'나 '쉬'로 표기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