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 월요일에 쓴 원고인데,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번역에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점 한 가지를 글감으로 삼았다.
한겨레(10. 07. 31) '서사적 바람둥이’가 낯설어진 이유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이미 눈치챈 독자들이 있겠지만, 체코 출신의 망명작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서두다. 쿤데라는 1981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지만 ‘프랑스 작가’라고 부르는 건 여전히 어색하다.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소설)의 특별한 예찬자인 그에게 특정 국적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니 차라리 그의 조국은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중부유럽의 작가’를 자임하는 쿤데라는 체코어판과 프랑스어판을 동시에 ‘정본’으로 인정한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정본이 둘이다. 독어 중역본으로 처음 출간된 한국어본도 체코어본, 프랑스어본 번역 등이 추가되어 그간에 네댓 종 이상이 나왔다. 현재는 프랑스어본 번역만이 통용되고 있어서 아쉬운데, 다양한 번역본을 음미하면서 읽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단 복수의 번역본은 번역의 차이와 변화 양상에 주목하게 해준다. 한두 가지 예를 들면, 먼저 주인공들의 이름이 바뀌어왔다. 체코어본 번역에서 ‘토마스’와 ‘테레자’라고 표기된 주인공의 이름이 독어본 번역과 프랑스어본 번역에서는 ‘토마스’와 ‘테레사’가 됐고, 프랑스어본 번역 개정판에서는 ‘토마시’와 ‘테레자’가 됐다. ‘테레사’가 ‘테레자’가 된 것은 교정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토마스’가 ‘토마시’로 바뀐 것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독일작가 ‘토마스 만’이 덩달아 ‘토마시 만’으로 바뀐 걸 보면 유머를 의도한 건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바람둥이의 유형’도 달라졌다. 쿤데라는 두 가지 범주로 나누는데, 한쪽은 ‘서정적’ 유형으로 모든 여자에게서 자신의 이상을 찾으려고 애쓰고, 다른 한쪽은 ‘서사적’ 유형으로 수집가적인 열정을 갖고서 여성적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한다. 전자는 항상 이상 찾기에 실패함으로써 동정을 사기도 하지만, 후자는 항상 만족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산다. 작품에서 토마스는 후자에 속한다. 이 두 유형이 독어본과 체코어본 번역에선 ‘서정적 바람둥이’와 ‘서사적 바람둥이’ 정도로 번역됐지만, 프랑스어본 번역에서는 ‘낭만적 호색한’과 ‘바람둥이형 호색한’으로 옮겨졌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빚어졌는지 궁금할 법한데,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을 참고하면 ‘내막’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자기 소설의 ‘열쇠어’ 중 하나로 ‘서정성’을 풀이하면서 그는 ‘서정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은 미학의 영역을 넘어서 “자신과 세계와 타인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를 표상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프랑스인들에게는 아주 낯설다는 점이다. 그는 타협책으로 프랑스어판에서 ‘서정적 바람둥이’를 ‘낭만적 한량’으로, ‘서사적 바람둥이’를 ‘자유주의적 한량’으로 바꾸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조금 서글펐다”고 그는 덧붙였다. 요컨대 체코어본이나 독어본, 영어본과는 달리 유독 프랑스어본에서는 ‘서정적 바람둥이’와 ‘서사적 바람둥이’라는 유형학이 허용되지 않은 것이다. 그에 따라 프랑스어본을 정본으로 삼은 한국어본은 쿤데라의 ‘서글픔’까지도 옮기게 되었다. 더불어 서정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이란 이분법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되고 말았다.
10. 07. 30.
P.S.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최초 번역본은 송동준 교수의 독어본 번역이다.(이 번역본에서는 '서정적 난봉꾼'과 '서사적 난봉꾼'이라고 옮겼다). 김규진 교수의 체코어본 번역은 중앙일보사간 소련동구문학전집판(<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과 한국외대출판부판(<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두 종이 출간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