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에 실리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번에 밀란 쿤데라의 '서사적 바람둥이'를 다룬 걸 고려해 이번엔 '돈 후안 텍스트'의 원조 격인 티르소 데 몰리나의 <돈 후안>(을유문화사, 2010)을 골랐다. 이전에 두 차례 번역됐지만 현재는 구하기 어려운 책들이어서 최근 번듯하게 새로 번역돼 나온 것이 반갑기도 했다(한 가지 미스터리한 건 영역본까지 포함해서 이 티르소의 텍스트가 다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무엇이 정본인지 헷갈린다). 내친 김에 바이런의 <돈 주안>까지 번역돼 나오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한겨레(10. 08. 28) 미래 저당잡힌 ‘사기꾼’ 돈 후안의 최후 

<소설의 발생>이란 저작으로 유명한 이언 와트의 유작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서양 문학사의 네 신화적 인물의 형상을 근대 개인주의의 시조로 조명하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파우스트와 돈키호테, 돈 후안과 함께 로빈슨 크루소가 그가 분석하는 네 인물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제외하면 모두 신화적 인물들로서 많은 작품군을 거느리고 있는데, 특히 돈 후안과 관련하여 와트는 17세기 스페인의 성직자 겸 극작가 티르소 데몰리나의 <돈 후안>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몰리에르의 <동 쥐앙>과 모차르트와 다 폰테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대중적으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조 격’ 작품은 티르소의 <돈 후안>이다.

 

작품명이 <돈 후안>이라고 줄여서 표기되지만 원제목은 좀 길다. 처음 번역됐을 때는 <세빌랴의 난봉꾼 돌부처에 맞아죽다>(1995)라고 의역된 제목이었고, 두번째 번역본은 <돈 후안-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2002)란 제목을 갖고 있었다. 모두 절판된 상태에서 나온 세번째 번역본은 <돈 후안-석상에 초대받은 세비야의 유혹자>(2010·을유문화사)라고 읽어준다.

특이하게도 이 문학사적인 작품의 제목이 아직 고정돼 있지 않은데, 그래도 공통적인 건 원제의 ‘burlador’를 ‘난봉꾼’ 혹은 ‘유혹자’로 옮긴다는 점이다. 물론 주인공 돈 후안의 화려한 여성편력과 유혹술을 고려하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와트에 따르면 이 단어의 스페인어 의미에 더 가까운 건 ‘사기꾼’이다. 사람들을 속여 넘기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위인이 바로 돈 후안이라는 것이다. 반복해서 여인들을 속이고 배신하는 돈 후안의 유혹술은 실상 사기술이기도 하다.

‘스페인 최고의 사기꾼’ 돈 후안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Tan largo me lo fiais’이다. 초고본의 제목으로도 쓰인 문구라고 하니까 티르소판 <돈 후안>의 핵심 주제라고도 할 만하다. 우리말 번역본들은 “참으로 오래도록 나를 믿어주네” “오래도 두고 보시는구먼” “정말 오래도록 나를 봐주시는군” 등으로 옮겼다. 원문구는 상투적인 스페인어 표현이라고 하는데, “청산의 날은 아직 멀었다”란 뜻도 있다고 한다. ‘청산의 날’은 물론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돈 후안은 자신이 아직 젊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참회는 늙어서 해도 충분하다는 계산이다. “돈 후안은 원칙적으로 무법자가 아니며,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이지도 않다. 단지 자신의 경우에는 그 법칙이 유예될 수 있다고 믿을 뿐이다”라고 와트는 정리한다. 곧 돈 후안주의의 핵심은 현재의 젊음을 근거로 미래의 죽음과 심판을 간과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무분별한 여성편력은 그러한 태도의 부수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하지만 티르소판 <돈 후안>에서 돈 후안의 판단은 들어맞지 않는다. 작품의 말미에서 코러스는 “이승에 살아 있는 동안/ 정말 오래도록 나를 봐주시는군!/ 이런 말 하는 자 저주 있을지니./ 그 말의 대가를 치르리라”라고 노래하며 결말을 암시하는데, 예언대로 돈 후안은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불의 심판을 받는다. 마지막 순간에 돈 후안은 고해하고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의 참회는 너무 늦었다. 결국 그는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으며 지옥에 떨어진다. 요즘 인기를 끄는 뮤지컬 <돈 주앙>의 ‘사랑스러운 매력남 돈 주앙’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교훈을 주는 ‘사기꾼 돈 후안’의 운명이다

10. 08. 27.  

P.S. '돈 후안 텍스트'에 대해서는 예전에 푸슈킨의 <석상손님>(<석상방문객>이라 번역돼 있다)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관심을 갖게 됐는데, 티르소 데 몰리나판 <돈 후안>의 매력은 돈 후안에 대한 단호한 응징에 있다. 시간과의 내기에서 아주 오만했던 돈 후안에겐 참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 점이 후대 작가 호세 소리야 이 모랄의 <돈 후안 테노리오>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안다. 언젠가 돈 후안 텍스트에 대해서는 몇 작품 더 읽고 비교해고픈 욕심이 있다. 소개된 책 가운데 더 참고할 만한 것은 페터 한트케의 <돈 후안>(베가북스, 2005), 그리고 더글라스 에이브람스의소설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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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8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9 0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9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6회 서울와우북페스티벌(9월7일-12일)에 참여하게 됐다. 내가 맡은 건 '와우판타스틱서재'의 한 코너로 주로 곧 나올 두번째 책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에 관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눌 예정이다. 행사 소개는 아래 포스터를 참고하시길. 

 

10.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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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을 읽을 자유' 표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04 00:01 
    두 번째 책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이 오늘 최종 교정을 거쳐서 인쇄소로 넘어갔다. 내가 더 거든 일이 없어서 수고한 편집진에는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책은 내주에 나오고 아마 와우북 행사에 오시는 분들은 처음 구경하시게 되지 않을까 싶다. 서점 배포는 그 다음주에 이뤄질 것 같다. 궁금해하실 만한 몇몇 분들을 위해서 책의 표지 이미지를 공개한다. 표지 디자인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 때와 같은 분이 맡아주셨다.
  2. "책꽃이 피었습니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0-04 23:41 
    지난달에 서울와우북페스티벌 행사의 일환으로 저자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마침 취재기사가 뜨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사진도 덤으로 챙겨놓고.    캠퍼스라이프(10. 10. 04) 책꽃이 피는 계절 '서울와우북페스티벌' 제6회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이 지난 9월 7일부터 12일까지 서울 홍대 거리와 주변 카페 등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은 책과 문화예술공연이 함께하고 책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
 
 
루체오페르 2010-08-2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두번째 저서가 출간되는군요! 축하합니다!^^

로쟈 2010-08-27 15: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쓰다 보니 분량이 찼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8-2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 드립니다.
<인문학 서재>도 좋았는데, 이 책도 기대 됩니다.
아직 알라딘엔 책이 뜨질 않았네요?

로쟈 2010-08-27 15:46   좋아요 0 | URL
근간이고요, 시중엔 아마 9월 셋째주부터 깔릴 것 같습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0-08-27 15:53   좋아요 0 | URL
네, 조금 더 기다리겠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8-2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로쟈님 축하드려요.^^

로쟈 2010-08-27 16:45   좋아요 0 | URL
감사.^^

헌내 2010-08-2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그러면 12일에 나오실 예정인가요?

로쟈 2010-08-27 17:19   좋아요 0 | URL
행사장엔 당연히 가지요.^^ 책은 그때까지 나올 예정이고요.

헌내 2010-08-27 17:23   좋아요 0 | URL
아... 갈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12일이 중간고사 2주 전이라... ^^;

로쟈 2010-08-27 21:56   좋아요 0 | URL
^^

2010-08-27 1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7 1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쉽싸리 2010-08-28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로써 환영합니다.

로쟈 2010-08-28 12: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반딧불이 2010-08-2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헉헉거리며 첫번째 책을 읽고 제대로 소화도 안된 상태인데 두번째 책이 나오네요.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8-28 12:48   좋아요 0 | URL
두번째 책은 대부분 발표한 글들 모음이어서 평이합니다.^^;

미지 2010-08-2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8-28 20: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6회

지난 주 이사로 원고들이 밀린 데다가 외부 일정들까지 겹쳐서 아주 긴 한 주를 보내고 있다. 점심을 먹고 이번주 마지막 원고에 들어가기 전에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6회를 발췌해놓는다. 부산에 내려가기 전 어제 새벽에 쓴 글이다.   

<실재계 사막>의 서문에서 지젝이 자주 드는 예를 만날 수 있다(다큐영화 <지젝!>에도 인용된다). 구동독의 농담인데, 이런 것이다. 한 노동자가 시베리아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친구한테 이렇게 미리 일러둔다. “모든 우편물이 검열될 테니까 암호를 정하자. 나한테 받은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여 있으면 진실이고, 빨간 잉크로 쓰여 있으면 거짓이야.” 친구는 한 달 후에 파란 잉크로 쓰인 편지를 받게 된다. 시베리아의 친구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쾌적하며 만족스럽다고 적는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훌륭해. 가게에는 상품들이 가득하고, 음식이 풍부하며,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적절해. 영화관에서는 서양영화를 보여주고 관심을 끌 만한 아가씨도 많고…….” 그러고는 끝에 가서 한 가지를 덧붙인다. “단 하나 빨간 잉크만 없어.”

영화 <식스 센스> 마지막 장면의 반전이 연상되지 않으신지? “단 하나 빨간 잉크만 없어.”라는 마지막 멘트가 앞에 나오는 모든 메시지를 무효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란 잉크로 썼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실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빨간 잉크로 쓰였어야 한다는 걸 암시함으로써 이 노동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진실을 친구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한다. 설사 “빨간 잉크를 사용할 수 있었을지라도, 사용할 수 없다는 거짓말이 이런 특수한 검열상황에서 진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고 지젝은 덧붙인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이데올로기 비판의 효과적인 모체(matrix)이며,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검열상황에서, 곧 우리의 현실에서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우리의 부자유를 표명할 수 있는 바로 그 언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바로 이런 빨간 잉크의 결여가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든가,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등과 같은 현금의 갈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는 모든 주요 용어들이 거짓된 용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상황에 대해 사유할 수 있게끔 허용하는 대신에 우리의 상황인식을 신비화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정확한 의미에서 우리의 ‘자유’ 그 자체는 우리의 좀더 내밀한 부자유를 가려버리고 지속시켜 준다.(<실재계 사막>, 25쪽)

우리에게서 ‘자유’란 말이 오히려 현실인식을 오도하고 ‘내밀한 부자유’를 은폐시켜준다는 것인데, 이러한 지적은 이미 G. K. 체스터턴(1874-1936)이 100년 전에 한 것이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유명한 영국 작가 체스터턴은 언론인이자 평론가, 그리고 기독교 변증가이기도 했다. 그는 <정통신앙(Orthodoxy)>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이단(Heretics)>이란 책과 짝을 이루고 있기에 <정통신앙>이라고 옮겼다. 우리말 번역본은 <오소독시>(이끌리오, 2003)이고, <실재계 사막>에서는 제목을 <정설>이라고 옮겼다). 

“우리는 자유사상이 자유를 지켜내는 가장 안전한 보호물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현대 스타일로 말해서, 노예의 마음의 해방이 노예해방을 가로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가 자유롭게 되길 원하는지 어떤지 그에 대해 고민하라고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않을 것이다.”

첫 문장은 “We may say broadly that free thought is the best of all safeguards against freedom.”의 번역이라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against freedom”의 번역이란 걸 고려하면 “자유를 지켜내는”은 “자유를 막아내는”이라고 해야 맞다. 번역본 <오소독시>에서는 이 대목을 “우리는 대체로 자유사상이 자유를 방지하는 안전장치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제대로 옮겼다. 여기서의 역설은 물론 ‘자유사상’이 실제적인 ‘자유’의 장애물이라는 주장에 놓인다.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도록 하면 오히려 자신이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게 돼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노예로 하여금 자신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에 관해 고민하도록 가르쳐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다.”(<오소독시>, 204쪽)

 

여담을 덧붙이자면, ‘역설의 대가’로도 불리는 체스터턴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와 동시대인이었다. 체스터턴과 비교하자면 쇼는 ‘독설의 대가’로 명성이 높았는데, 어느 날 두 사람이 거리에서 만났다. 버나드 쇼는 말라깽이였고 체스터턴은 한 덩치 하는 뚱보여서 서로 대조적이었다. 체스터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을 보면 지금 영국이 기근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군요.” 쇼가 응수했다. “그렇지. 그러나 그 원인은 자네 때문이 아니겠나?” 두 사람이 서로 만만찮은 호적수였을 법하다. 참고로, 국역본 <오소독시>는 현재 품절상태인데, 교정해서 읽을 대목이 있어서 막간에 지적해둔다. 서문에서 체스터턴이 자신의 책을 누구 읽어야 하는가를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꽃밭의 꽃이나 저작집 한 권 속의 문장들, 정치적 사건과 젊은 날의 고통이 어떤 질서 체계 속에 함께 모여, 어떻게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에 대한 어떤 확실한 신념을 낳았는지 알아가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그에 합당한 노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나는 이 책을 썼다. 그러므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18쪽)

체스터턴은 이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여 정통 기독교인이 되었는가를 보여주는데, 그런 과정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읽어봐도 좋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읽지 않겠다고? 인용문 후반부의 원문은 이렇다. “But there is in everything a reasonable division of labor. I have written the book, and nothing on earth would induce me to read it.” 번역문이 생략한 건 ‘분업(division of labor)’이란 말이다. 모든 일에는 합당한 분업이라는 게 있고, 자신은 책을 썼으니까 읽는 일에서는 면제된다는 논리는 거기에서 나온다. 체스터턴의 은근한 유머를 배여 있는 대목이다.

다시 자유의 문제로 돌아오면, 지젝은 체스터턴의 말이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스스로를 해체하고 의심하고 거리를 두려는 시대에 더없이 잘 들어맞는 게 아닐까라고 말한다. 가령 “생각하지 말고 복종하라!(Don't think, obey!)”는 낡은 모토(이건 전형적인 군대식 모토인데)는 요즘 같으면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다(물론 아직도 그런 것이 통용되는, 강요되는 나라가 없지는 않다. 대낮에도 군대처럼 조인트 까고 까이는 나라 말이다). 이럴 때 사회적 예속상태를 안전하게 지속시킬 수 있는 방책은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이런 건 언론의 자유가 뒷걸음치고 있는 한국보다는 미국사회에 더 적합한 지적이다). 물론 그런 예속에서의 탈피, 곧 자유를 위한 투쟁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도그마에 대한 참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체스터턴의 또 다른 역설적 주장이다. 정리하면, 체스터턴의 역설은 상호 연계적이며 양면적이다. (1)자유사상은 진정한 자유의 장애물이다. (2)진정한 자유는 도그마를 필요로 한다.

(...) 

10. 0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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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5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5회를 발췌해놓는다. <실재계 사막으로의 초대>를 읽기 전에 이번 회까지는 '실재계'란 말에 대해 먼저 살펴보았다. 이제 겨우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우리 안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부른 것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고 불렀다. 반복하자면,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달콤하게 우리를 조종한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 우리는 출생과 더불어 욕망 속으로 내던져진다.”(테리 이글턴, <반대자의 초상>, 305쪽) 여기서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Desire is nothing personal)’란 말은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나의 욕망’이란 말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비인칭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욕망을 어디에 두었더라?”거나 “너, 내 욕망 가져갔니?”라고 말할 수 없다. 욕망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 정도면 ‘괴물’이라 부름직하지 않을까.

이 ‘괴물’과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는 것이 <HOW TO READ 라캉>의 4장 ‘실재의 수수께끼’다. 라캉의 ‘라멜라’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는 장인데, 단순하게 말하면 라멜라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분대상(partial object)’이다. “신체 없이도 존속하는 신비로운 자동성을 지닌 기이한 기관”이 부분대상이다. 젖먹이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공갈 젖꼭지’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엄마의 ‘신체’ 없이도 엄마의 젖가슴을 대신하며 존속하는 젖꼭지 말이다. 지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의 미소를 예로 든다. 고양이가 사라졌는데도 남아있던 미소가 생각나시는가? 우리의 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런, 나는 미소 없는 고양이를 본 적은 있어. 하지만 고양이 없는 미소라니! 이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운데!” 


 
라캉의 라멜라는 존재하지는(exist) 않지만 고집스럽게 존속하는(insist) 어떤 것이다. 이런 ‘고집’, ‘리비도의 맹목적이고 파괴 불가능한 고집’에 대한 프로이트의 명명이 ‘죽음충동’이다. “생명의 기괴한 과잉, 삶과 죽음, 생식과 부패의 (생물학적) 순환 너머에서 지속되는 ‘죽지 않는’ 존속에 붙여진 이름”이다(분자생물학의 ‘불멸의 이중나선’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일종의 반복강박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유기체에 주어진 자연적 한계를 벗어나, 심지어 유기체의 죽음까지 초월하여 존속하는 기괴한 고집” 같은 것이다. 그런 죽음충동과 부분대상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가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다. 알다시피 이 동화에서 주인공 소녀가 신는 마술 구두는 소녀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춤을 추도록 만든다. “그 구두는 모든 인간적 제한을 무시하고 고집스레 존속하는 소녀의 무조건적 충동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불쌍한 소녀가 구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다리를 잘라내는 것뿐이다.” 쇼펜하우어와 프로이트가 말년에 모두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인생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참고삼아 말하면,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의 성인용 버전은 잘만 킹의 성애영화 <레드 슈 다이어리> 시리즈다. <X-파일>에서 멀더 요원으로 등장하는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자신의 우편함으로 오는 여성들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사랑, 열정, 음모, 배신에 대한 에피소드를 따라가는 이 시리즈에서 ‘빨간 구두’는 말 그대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의 은유다. 다시 이글턴을 인용하면, “프로이트는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이 이질적인 부분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 세균같이 우리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개념이 그렇듯이,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깝다.”

혹은 마치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섬뜩해지는 것처럼 우리에게 아주 낯익지만 갑자기 아주 낯선 것으로 돌변할 때가 있다. ‘안’과 ‘밖’이 뒤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은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 장난스럽게 ‘괴물(thing)’이라 불렀다는 것이고, 그것이 다름 아닌 실재(the real)를 가리킨다는 게 이글턴의 설명이다. 라캉이 만년에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에일리언>(1979)을 볼 수 있었다면 더욱 만족했을는지도 모른다. 지젝에 따르면 “이 영화의 기괴한 외계 생명체는 라캉의 라멜라와 닮았는데,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라캉이 이 영화를 본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라캉의 라멜라와 ‘에일리언’에 대해선 기회가 닿을 때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보다 더 쉬운 경로로 실재(계)에 대한 설명을 보충한다. 지젝이 드는 건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이다. 주인공 떠돌이가 실수로 호각을 삼키고, 딸꾹질을 할 때마다 뱃속에서 호각 소리가 나는 코믹한 장면이다. 떠돌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신체 ‘안’에서 나는 소리를 감추려고 애쓴다. 지젝은 이것이 ‘부끄러움’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몸속의 과잉(excess)에 직면할 때다. 이 장면에서 부끄러움의 원천이 소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 몸속에서 울려 나오는 유령 같은 소리, 신체 없는 자율 기관으로서의 소리, 내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기생충이나 낯선 침입자 같은 소리 말이다.”(<HOW TO READ 라캉>, 111-112쪽)

공갈 젖꼭지부터 체셔 고양이의 미소, 빨간 구두, 뱃속에서 나는 호각소리까지 공통적인 것은 이들이 일종의 ‘신체 없는 자율 기관’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탈실체화(de-substantialized)’돼 있다고 말한다. 실체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즉 “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로의 포획에 저항하는 외재적 사물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다.” 사실 “상징적 네트워크에 포획되지 않는 외재적 사물”은 실재에 대한 가장 흔한 정의다. 하지만 지젝은 방향을 전환하여 실재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재란 ‘실체적 사물(the substantial Thing)’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곧 상징계의 간극이 불러낸 효과라는 것이다. 라캉-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일반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에 상응한다. 아인슈타인이 휘어진 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할 때 그는 그러한 공간의 휘어짐이 물질의 효과라고 보았다. 즉 물질이 원인이고 공간의 휘어짐이 그 결과다. 그러한 관점에서 기술되는 것이 특수상대성이론이다. 반면에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이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다. “물질의 현존은 공간을 휘게 하는 원인이 아니라 그 휘어짐의 효과다.”  

(...) 

10. 0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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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4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10-08-2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대자의 초상... 살까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자꾸 이렇게 보여주시면... ㅜ_ㅜ

로쟈 2010-08-25 21:51   좋아요 0 | URL
한번만 더 보여드리면 넘어가시겠네요.^^

lo초우ve 2010-08-2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우지간....
책 한권 읽는데 일주일에서 열흘이나 걸리는구만... ㅡ,.ㅡ;;
암튼...
로쟈님때문에 부지런히 아주 열심히 읽어야 소개해주신 책들을 볼 수 있는뎅...
보고싶은 욕심은 많은데 진도가 안늘어서리.....
아이겅 미치고 환장할 노릇....
휴~~~~~~~~~~~~~ ㅡ,.ㅡ;;
그래도 천천히.. 천천히라고??
이런 된장~!! ㅡ,.ㅡ;;
아휴~~~~~ 천천히는 무슨....
부지런히 읽어야징..ㅋㅋ

로쟈 2010-08-25 21:51   좋아요 0 | URL
두꺼운 책은 일주일도 더 걸리죠.^^;

2010-08-25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5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10-08-2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한 100회정도분량으로 길고 굵게 해주시길 기대해 봅니다..그래서 단행본으로 나올수 있다면 더 좋겠네요 ^^

로쟈 2010-08-27 13:05   좋아요 0 | URL
네, 무사히 완결되면 단행본은 내년 상반기쯤 나올 거예요.^^
 

책장 정리 일이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데, 잠시 틈을 내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어제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노마드북스, 2010)와 같이 구입한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역사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책과함께, 2010)을 다룬 기사다. 같이 묶은 데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브라우닝의 책은 '홀로코스트' 연구서이고 이 분야의 '학장'이라고 할 라울 힐베르크에게 헌정된 책이다.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8)의 저자 힐베르크 말이다. 소개는 이렇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1992년에 초판이 출간되었으며(1998년 재판), 한국어판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11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사회 하층 계급의 평범한 중년 남성들로 구성된 나치의 한 예비경찰부대가 수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또한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한 사례를 심층 연구한 이 책은 라울 힐베르크의 선구적 업적인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의 뒤를 잇는 홀로코스트 연구의 또 다른 기념비적 저서로 평가받는다."  

경향신문(10. 08. 21) 특수 상황선 누구라도 ‘악마’가 될 수 있다  

연쇄살인범이 잡히면 그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악마라는 것인데 대다수 보통 사람의 감정적 반응이 이것이다. 이에 반해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된 상황적 요인이 있을 것이란 입장이 맞선다. 악행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악행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행동, 특히 악행의 주요 원인은 증오심, 기질과 같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 또는 사회적 구조인가라는 질문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어찌보면 전자의 입장이 훨씬 속 편할지 모른다. 그저 나하곤 전혀 별개의 나쁜 놈, 악마로 규정하면 끝이니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반복되는 인류의 잔혹한 행동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학계의 논의도 크게 보면 비슷한 구조다.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원래부터 극도로 유대인을 증오했거나 잔악한 사람들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위에서 시켰기 때문에, 즉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미국의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가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1992년 처음 발표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원제 Ordinary Men)은 이런 질문을 물고 늘어져 강력한 가설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제목에 등장한 ‘평범’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수백만명을 죽게 만든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책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주창했듯, 사악함이나 세뇌효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 등 심리적 요인이 잔혹한 행위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암시한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학살 책임자나 피해자보다는 학살을 직접 수행한 말단의 당사자를 집중 추적한 연구서로 최초이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온 뒤 요나 골드하겐이라는 학자가 같은 자료로 브라우닝과 정반대의 결론, 즉 심리적 요인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 책을 출간하면서 꽤 유명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브라우닝은 개정판(98년) 후기에서 골드하겐의 공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어 양자 사이의 논쟁의 뼈대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아주 평범한 학살 집행자들’은 나치 독일 당시의 ‘101예비경찰대대’. 101예비경찰대대는 1942~43년 폴란드에 투입돼 유대인 3만8000여명을 학살하고, 4만4200여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 명실상부한 ‘죽음의 부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독일의 중년 남성 500여명으로 구성된 101예비경찰대대 구성원은 대부분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반(反)나치 성향이 강한 함부르크 지역 출신이었다. 철저한 훈련과 이념교육을 받은 정예부대는커녕 대부분 군 복무 경험조차 없었다. 말 그대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브라우닝은 함부르크 검찰이 1960년대에 전직 101예비경찰대대원 125명을 취조한 기록을 분석,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 전문가’가 돼 갔는지 규명했다. 1942년 7월 처음으로 유대인 학살 작전에 나서기 직전 101예비경찰대대의 지휘관은 임무를 설명하면서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빠져도 좋다고 말한다. 500여명 가운데 12~13명이 나왔다. 나머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유대인 1500여명의 머리통을 총탄으로 차례차례 날려버리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물론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몇명 죽이고 나서는 빠져나온 부대원도 생겼다. 20% 정도가 열외를 택한 것으로 추정됐다. 놀랍지 않은가. 10명 가운데 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거니와 범죄자도, 적군도 아닌 민간인을 시체더미로 만드는 데 나선 것이다. 학살 작업을 거부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물론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부대원들도 첫날의 경험을 한 뒤 극심한 스트레스와 역겨움을 호소했다. 부대로 돌아와 독한 술에 만취했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말한다. “얼마 후 그들이 다시 사살 임무 앞에 서게 됐을 때 그들은 결코 ‘미쳐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점차 효과적이고 무감각한 학살 집행자로 변해갔다.” 대부분은 학살을 무덤덤한 일상으로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학살을 즐기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요소는 ‘동조(同調)’와 ‘권위에 대한 복종’이었다. 대원들은 동료나 상관에게 ‘사나이답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체면을 중시했고, ‘최고위층의 명령’이라는 권위에 복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에 대해 충격과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대부분 학살을 계속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공개적으로 비동조 행위를 보이는 것은 그들 대부분의 능력 밖에 있었다. 차라리 총을 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쉬웠다.”

브라우닝은 “학살을 저지른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의해 결코 사면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우리가 ‘이해’했을 때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브라우닝의 결론은 평범한 사람도-나를 포함해서-특수한 상황에 처하면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우닝도 “잔혹성은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뿌리를 볼 때 사회적”이라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인용한 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이야기에서 엄청난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브라우닝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 정부들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자발적인 학살 집행자’로 동원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근대적 삶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다”(지그문트 바우만)라는 명제는 불편하지만 진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이해가 홀로코스트 학살자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학살 임무를 거부한 사람들도 소수지만 있었으니까.(김재중기자) 

10. 08. 21.  

P.S. 기사 말미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이 언급되는데, 바우만의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도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 번역중이란 얘기를 언제 들은 것도 같은데 정확하진 않다. 덧붙여, 츠베탕 토도로프의 <극한에 직면하기> 같은 책도 소개되면 좋겠다. 몇년 전 프리모 레비를 읽을 때 들춰본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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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1 1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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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2 09: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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