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원래 4주 간격이던 것이 3주가 된 것은 필진 한 분의 개인사정 때문이었다. 다음 연재는 다시 4주 간격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여하튼 급하게 돌아온 차례였지만 나름대로 '선방'하고 넘어간다. 오늘 낮에 쓴 칼럼의 주제는 지난주에 서평을 쓰느라 읽은 마이클 샌델의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동녘, 2010)에서 암시를 얻은 것이다. 처음엔 '공정한 사회'론과 관련지어 두 문단쯤 쓰다가 마무리가 안될 것 같아 방향을 틀었다. 글도 자기의 운을 갖는다...
경향신문(10. 08. 31) [문화와 세상] 부모 뜻대로 안 되는 좋은 사회
가을의 문턱이다. 아직 무더위가 가시지 않았지만 수능을 두어달 앞둔 수험생이나 학부모의 마음이 바빠질 때다. 공연한 남 걱정인가 싶지만, 자녀 교육과 부모의 책임에 대한 고민만큼은 부모에게 면제되지 않는다. 게다가 초등학교 1학년생부터 ‘예비 수험생’으로 내몰고 있는 대한민국 교육의 강박적 현실을 고려하면 남 걱정이 아니다. 하지만 그 걱정과 부담을 좀 덜어놓자는 생각을 갖게 됐다. ‘아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는 또 다른 책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에서 우리의 삶을 ‘선물’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친다. 생명공학 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이 생명의 디자이너가 돼도 좋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우생학에 반대하여 그가 옹호하는 것은 생명을 선물로 보는 윤리다. 생명의 디자이너가 된다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자녀를 부모의 의지의 산물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는 한편으론 부모를 자녀에게 책임을 다하는 ‘능력 있는’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로 양분한다. 자녀의 성별뿐만 아니라 지적인 소질이나 운동능력 같은 유전형질도 부모가 정한다. 아예 부모가 적극적으로 나서 외모까지도 손봐주는 시대다. 원래는 치료의 목적으로 개발됐지만 생명공학은 이러한 부모의 의도와 ‘과잉 양육’을 현실화시켜 준다.
가령, 리탈린이란 약은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로 진단받은 아이들을 위한 치료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정상적인 아이들도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이 약을 처방받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18세 이하 미국 청소년의 5~6%가 리탈린이나 다른 자극제를 처방받고, 친구의 약을 사거나 빌려서 먹고 SAT(미국의 대학입학 자격시험)나 대학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주의력 결핍 치료제가 주의력 강화제로 탈바꿈한 것이다. 물론 ‘치료’와 ‘강화’ 사이의 경계가 흐릿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구분 자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샌델 교수의 입장이다. 자녀를 강화하려는 부모는 역설적이지만 자녀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난다. 자녀의 존재를 그 자체로 긍정하는 ‘받아들이는 사랑’과 자녀의 복지를 추구하는 ‘변화시키는 사랑’, 이 두 가지 사랑이 부모에게 있다고 하면, 자녀가 완벽해지길 바라면서 모든 면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도록 요구하는 것은 ‘변화시키는 사랑’ 쪽으로만 치우친 것이다.
여기서 충돌하는 것은 ‘자식은 부모 뜻대로 안 돼’라는 통념과 ‘자식은 부모 하기 나름’이라는 믿음이다. 문제는 유전공학까지 동원하여 모든 것이 ‘부모 하기 나름’으로 간주되는 순간 아이의 재능과 능력은 모두 부모의 책임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유전적 자기 개량에 익숙해짐에 따라 운명과 행운의 몫은 줄어들고 자신과 자녀의 운명에 대한 책임은 증폭된다. 그에 따라 우리보다 못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과의 연대의식은 감소한다. 삶이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든지 조작하고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보는 관점의 음울한 미래상이다. 반면에 삶이란 선물이며 각자의 재능은 유전적 제비뽑기의 결과일 뿐이라는 인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자녀의 성공이 부모의 노력 덕분만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은 ‘똑같은 부모’의 처지를 돌아보게 하고 서로 연대감을 갖도록 해줄 것이다. 더불어 성공에 뒤따르는 사회적 혜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게끔 유도할 것이다. 부모 뜻대로 안 되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다.
10. 08. 30.
P.S.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의 내용은 샌델 교수의 강연으로도 참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