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전부터 꼬박 하루 반나절을 감기에 시달렸다. 고열 때문에 독감이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히 열감기였고 오늘 오전 병원에 들러 수액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아 기력을 회복하는 중이다. 세밑의 감상도 적을 여유가 없는 형편이지만 저녁을 먹고 나서 책장을 살펴보다가 김윤식 선생의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그린비)을 빼왔다. 어젠가 그제 꿈에서 뵙기도 해서(벤치에 앉아 무슨 말씀인가를 들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난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책으로 만나는 수밖에.

아직 읽지 않은 선생의 책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게 새삼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내년에 한국문학 강의 비중을 조금 늘릴 예정이어서 더 자주 참고하게 될 것이다(한국시에 대한 강의준비차 읽고 있는 근대시사 관련서만
해도 대여섯 권이다). 하지만 이런 ‘라이벌 의식‘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어느 세대에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한국문학사 전반에 대한 독서와 애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가령 김현과 백낙청, 두 평론가의 라이벌 의식을 이해하려면 두 사람의 평론집은 물론 70년대 두 라이벌 문학지(백낙청의 <창작과 비평>과 김현의 <문학과 지성>)의 대결구도도 가늠하고 있어야 한다. 젊은 세대라면 국문과 대학원생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 정도는 예전 같으면 지식인의 교양에 해당했지만 요즘은 문학 전공자라 하더라도 별로 기대하기 어렵다. 아즈마 히로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양상인지도. 헤겔의 인정투쟁, ‘위신을 위한 투쟁‘(김윤식)이 더이상 관심사가 아닐 때 인간의 삶은 한갓 동물의 삶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런 구별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는 문학 역시 ‘동물화하는 문학‘에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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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8-12-31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쓰신 글 잘보고 있습니다. 얼른 쾌차하셔서 책들을 돌봐주셔야죠!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가능하시면 며칠 푹 쉬세요!

로쟈 2018-12-31 22:12   좋아요 0 | URL
며칠 쉴 수는 없고 그래도 어제오늘은 휴업중입니다.^^

모맘 2018-12-31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도 돼지~해 되시길 바랍니다^^

로쟈 2019-01-01 19:54   좋아요 0 | URL
네 건강한 새해.~

two0sun 2018-12-31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병치레 액땜을 미리 하시는걸로~
저책들 중 2권만 만져봤는데 이런 책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저만 모르는건지)
따로 따로 읽을때보다 함께 놓고 봤을때
더 선명해지고 잘 와닿고
내용까지 충실하다면 이보다 더한
호사가 없지요.

로쟈 2019-01-01 19:55   좋아요 0 | URL
더 많아질 가능성은 희박해보입니다.^^;
 

올해의 마지막 지방 강의를 마치고 귀가중이다. 어제부터 계속되는 한파로 겨울을 실감하게 되는데 이건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뜨거웠던 지난여름만큼 매서운 겨울이 될 거라는 예측도 있기에. 귀경 기차에 오르며 승차를 안내하는 승무원의 코끝이 빨간 걸 보고 감동할 뻔했는데, 이런 날씨에는 가만히 있어도 치열하게 산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어제 강의에서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을 다루며 ‘행동주의‘ 문학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했는데, 그에 대입하자면 한파 속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행동하는 것 같다고 할까(아,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구나). 걸어다녀도 비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은 이국종의 <골든아워>(흐름출판)가 전달해주는 느낌도 이와 유사하다. 생사를 넘나드는 중환자들의 수술 장면을 묘사할 때 저자는 행동주의 작가로 손색이 없다고 느꼈다. 지난해 ‘올해의 책‘이었던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과 장르가 바뀐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은 것도 책을 손에 들기 전에는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형식상으로는 각각 외과의사와 정신과의사의 기록인데, 전자가 문학적이라면 후자는 보고서적이다(나는 강의에서 ‘자료소설‘이라고 불렀다). <골든아워>의 저자가 <칼의 노래>의 김훈을 사숙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던 것.

<82년생 김지영>이 사회적 이슈를 환기시켰다면 <골든아워>는 내내 저자의 손가락에 주목하게 했다. 수술실 외과의사의 손가락이면서 동시에 문체를 빚어내는 손가락. 의사로서는 아툴 가완디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전시조종사 생텍쥐페리에 견주어 중증외상센터의 생텍쥐페리도 상상한다. <골든아워>의 후속작도 읽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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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상 그렇듯이 책을 찾다가 예기치않은 책을 손에 든다. 만나려는 사람 대신에 길에서 마주친 엉뚱한 사람과 말문을 튼다고 할까. 모이라 데이비가 엮은 <분노와 애정>(시대의창)이 그렇게 마주친 책이다. ‘여성작가 16인의 엄마됨에 관한 이야기‘가 부제. 원저는 ‘마더 리더‘인데, 전체의 절반 가량만 옮긴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내년에 따로 책이 나온다고.

‘엄마됨‘이라고 옮긴 단어는 ‘motherhood‘다. 예전에 ‘모성‘이라고 주로 옮겨온 단어다. ‘모성‘에서 ‘엄마됨‘으로의 이행이 모성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반영한다. ‘자연스런 모성‘에서 ‘만들어진 모성‘으로의 변화다. 책은 도리스 레싱의 자서전 발췌로 시작하는데 눈길이 머문 건 미국의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이다. ‘Of Woman Born‘에서 발췌한 것인데 제목이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라고 옮겨져 있길래 확인해보니 올해 재판본이 나왔다.

편자는 리치의 글 전체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엄마됨의 과정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리치는 자녀에게 느낀 감정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쓰라린 분노와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 더없는 행복에 대한 감사와 애정 사이를 죽을 듯이 오간다.˝ 같은 기획의 한국판도 충분히 나옴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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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12-25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치의 저말은 소름돋을 정도로 공감되네요.
저기에 하나 더 얹자면
‘저 둘사이를 죽을듯이 오가는것‘에
죄책감도 느꼈다는것.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닌가~

로쟈 2018-12-25 23:47   좋아요 0 | URL
네 더이상 자연스럽게 되지는 않는 듯.
 

오후에 오랜만에 동네서점에 들렀다가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민음사) 개정판을 손에 들었다. 판권면을 보니 1판이 나온 게 1999년이고, 올 9월에 2판이 나왔다. 하지만 옮긴이 서문을 보건대 초판이 나온 건 1992년이므로(당시 <포스트모던적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서광사판도 같이 나왔다) 무려 26년만에 개역판이 나왔다. 리오타르의 불어판 원저는 1979년에 나왔기에 거의 40년 전 책이다. 개역판은 초역의 오역과 오류들을 바로 잡았다고 하므로 사실 이제 읽는다고 해서 늦은 건 아니다. 게다가 포스트모던의 여러 쟁점들은 여전히 진행형이기도 하고.

아마도 90년대 중반 대학원 시절에 두 종의 번역본을 영역본을 참고해가며 읽었던 듯싶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대유행기에 가장 많은 참고의 대상이 되었던 책이 바로 <포스트모던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미스터리한 일 가운데 하나는 프레더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가 그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번역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많이 이야기된 저작이면서도 말이다). 사실 책의 핵심은 서론에 곧바로 나온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거대서사에 대한 회의˝로 곧장 정의하고 있어서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상세한 해명이 <포스트모던의 조건>이기도 하다.

책을 다시금 손에 든 건, 근대문학과 근대성에 대한 강의를 수년간 해오면서 갖게 된 생각들을 포스트모더니즘론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싶어서다. 말하자면 생각의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 대보려는 것이다. 성장기 아이들만 그런 체크가 필요한 건 아니다. 삶이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라면 지식과 생각의 성장은 각자의 도덕적 의무다. 20년이 지나고 30년이 흘러도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이해에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꽤나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생각으로 야심한 시각에 이구아수 커피를 마시며 책장을 넘긴다. 아직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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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맘 2018-12-25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과 성장은 각자의 도덕적의무다!

로쟈 2018-12-25 23:46   좋아요 0 | URL
밥값은 해야 하니까요.~

추풍오장원 2019-12-22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현대사상‘을 읽다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언급하는 구절이 있어 냉큼 보관함에 담았는데,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에 대한 정의와 평가가 궁금해집니다. 읽어야 안다고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겠죠..
 

‘독일정신은 존재하는가‘가 비토리오 회슬레의 <독일철학사>(에코리브르)의 부제다(회슬레는 1750년 이후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2015년초에 나왔지만 계속 읽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독일문학기행을 핑계로 손에 든 책이다. 핑계만은 아닌데 헤겔이 초년기에 강사생활을 했던 예나대학도 방문지에 포함돼 있어서다. 그렇지만 너무 뒤늦게 손에 든 책이어서 아마도 뮌헨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붙들고 있을 듯싶다.

현재 미국 노터데임대학에 재직중인 저자가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이라는 건 이번에야 알았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독어로 책을 쓰지만 이탈리아사람이었던 것. 지금은 아마 미국 국적도 가지고 있고 강의도 영어로 할 것 같지만, 그래도 책은 독어로 쓴다. 아내가 한국인이어서(그러니까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철학자다) 한국어도 조금 하지 않을까 싶지만 한글책을 읽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회슬레의 주저로 알려진 <헤겔의 체계>가 번역되다 만 지 꽤 오래 되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대논리학> 등도 새 번역본이 안 나오고 있는데, 아마 그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둘중 하나로 보이는데 번역할 만한 역량을 갖춘 학자가 없거나(그 역량에는 열의나 사명감도 포함된다) 아니면 헤겔의 독어를 번역할 수 있는 한국어가 없거나(헤겔의 독어는 독일인들에게도 악명이 높아서 ‘독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회슬레의 책도 난삽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독일철학사>는 초심자를 염두에 둔 덕분인지 잘 읽히는 편이다(나이가 들면서 읽을 수 있는 책과 없는 책의 경계가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제 어떤 책들은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반면에 요령부득이라고 생각되는 책들도 자주 만난다. 독해가 어려운 책뿐 아니라 의미나 의의를 가늠할 수 없는 책들도 난해한 책들이다). 책은 영어판으로도 나왔는데 제목이 <간략한 독일철학사>다. 이 또한 구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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