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플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하나 보다. 독보적? 읽고 쓰고 한 걸 매일 만보기처럼 기록하라는 모양인데, 일거리가 하나 느는 것인가. 나 같은 올드 회원은 면제해주면 좋겠다. 그렇잖아도 일이 너무 많으므로.
일도 많고 책도 너무 많다(그럼에도 거의 매일 책을 주문한다). 책이 포화상태라 집에서 책을 펴놓고 읽을 공간도 없다. 집에 있는 날이면 가방을 들고 동네 카페로 나설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다. 읽을 책은 많지만 이미 생의 시간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가서 앞으로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이상은 어려울 것이다. 지난 30여 년간, 혹은 40여 년간 많이 읽어왔다. 게으름을 부렸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다르게 한 일이 없어서 책만 읽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 문제다.
다른 한편으로 책을 덜 읽어야 뭔가 쓸 수 있지, 라는 생각도 한다. 리쩌허우의 <비판철학의 비판>(문학동네)를 읽다가 새삼 든 생각이다(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도 고전적 사례다. 참고문헌이 없어서 쓸 수 있었던). 칸트 연구서가 충분하지 않은 터에 독어를 할 줄 몰라서 영역본 칸트와 씨름하며 쓴 책이다. 지금이라면 중국에서도 연구서가 많이 나왔을 테니 그런 대담한 시도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책이 귀해서 읽은 책을 또 읽어야 했던. 나부터도 초등학교 시절 소년소녀 세계명작(전50권)을 반복해서 읽었다. 다섯 번 읽은 책도 적지 않았고 조풍연 역의 삼국지도 그렇게 읽었다. 이젠 어떤 책도 그렇게 읽기 어려울 것이다. 그럴 여유가 없고 그러기엔 읽을 책이 너무 많다. 너무 당연하게도 나는 필독서도 다 읽지 못하고서, 문제를 다 풀지 못한 채 시험장을 떠나는 수험생처럼, 인생의 무대를 떠날 것이다. 좀 읽었다는 사람으로 잠시 기억되다 말 터이다.
아동심리학자 장 피아제는 그토록 많은 책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이 피아제를 읽을 필요가 없어서였다고 한다(언젠가 김현 선생의 글에서 읽었다). 칸트가 늦게라도 3대 비판서를 쓸 수 있었던 건 칸트를 읽을 필요가 없어서였겠지. 늦기 전에 칸트를 좀 읽으려고 하니(처음은 아니다. 30년 전에 최재희 선생의 번역서와 해설서로 시도한 적이 있다. 이후에도 몇 번. 하긴 백종현 교수 번역의 선집만 나왔고 아직 칸트학회판 전집이 다 나오지 않은 상태다) 그런 생각이 든다. 칸트를 읽을 시간에 내가 쓸 수 있는 책은 혹 없을까.
그렇더라도 생각이 칸트에 미치자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도서출판b)을 다시 읽어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번역된 칸트 저작 가운데 일부가 그간에 또 나온 게 있어서다. 독어권 해설서 가운데 카울바하의 책도 이번에 다시 나왔다. 찾아보면 입문서로 구해놓은 책이 열 종은 될 것이다(승계호 교수의 책이 왜 번역되지 않는지 미스터리하다).
칸트를 읽다 보면 스위스문학기행 준비차 나는 또 니체도 읽어야 한다. 그렇게 모든 게 밀리고 밀려 있으니 나는 ‘독보적‘에서 빠지고자 한다. 북플 친구가 8000명에 육박하지만 서재 방문자는 진작에 반토막난 지 오래되었다.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지도 모르겠다(이젠 감각도 떨어지고 열정도 바닥이 나서 북튜버로 변신하지도 못한다). 어떻게 발을 뺄지도 궁리해봐야겠다. ‘독보적‘ 때문에 적어본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