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부터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담론, 혹은 키워드는 '파시즘'이다(최근엔 보다 '대중적'인 버전으로 '대중독재'란 말도 쓰이고/퍼지고 있다). 흔히 스탈린이즘과 함께 전체주의의 두 축을 이루는 이념으로 지칭되는 파시즘은 상식적으로 이해하면, '권위적 국가주의'와 그에 대한 '대중의 절대적 지지'가 결합된 형태인데('대중독재'란 조어는 그 두 가지항을 결합한 것이겠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의 응원열기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은 '파시즘'이란 표현을 썼고, 최근에 황우석 사태와 관련하여 일부 열성적인 '황빠'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파시즘'이란 표현을 갖다붙였다. 당초 '파시스트'란 말은 아마도 최대의 경계와 경멸을 담은 어사였을 텐데, 이젠 다반사로 쓰는 말이 돼 버린 것. 나의 일상, 나의 파시즘?






그만큼 '파시즘'이란 용어가 '일상화'되었다는 뜻이겠는데, 이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이는 줄기차게 우리사회의 '일상적 파시즘'론을 주장해온 임지현 교수가 아닌가 싶다(거기에 강준만 교수의 개마고원팀들이 가세했다). 좁은 견문에 기대어 말하자면, 그 '(일상적) 파시즘'은 아마도 계간 <당대비평>의 최고 히트상품일 것이다. 최근엔 김상봉 교수까지 <도덕교육과 파시즘>(길, 2005)으로 무장하고서 이 '반-파시즘' 대열에 가세했다. 한 용어의 이러한 일반화/일상화는 한편으로 우리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극대화하면서(대한민국이 파시스트 국가라니!)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이도록 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파시즘'을 말 그대로 부드러운 것으로 순치시켜버린 면도 있다('항시적' 파시즘은 말 그대로 '부드러운' 파시즘이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이나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현 '노빠 정권'이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정권의 '무시무시함'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히틀러/무솔리니 정권을 무능력하고 무기강적인 정권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지지율이 30%를 밑도는 '국가주의'도 있나?).
해서, 현재의 '파시즘 인플레'는 주창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파시즘을 권장하고 장려한다(왜? 일상적 파시즘은 견딜 만한 파시즘이니까. 견딜 만한 것이 아니면 일상화될 수 없으니까). 더불어 모든 근본주의는 서로 공모하기에(주사파들이 조갑제류가 되는 것은 '전향'이 아니다. 본래 조갑제가 '주사파'이기 때문에. 박정희주의나 김일성주의나 그게 그거니까. 모두가 '인민'을 위해 애면글면했다. 단, 차이라면 뭔가 꿀리는 게 있었던 '친일파'는 어떻게든 먹여살렸지만 너무도 당당했던 '항일투사'는 인간 주체라는 게 먹고만 사는 거냐라고 내내 '교시'했다는 것. 말하자면, '배부른 돼지' 대 '배고픈 주체' 간의 차이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 파시즘론이 무용하다거나 임지현 교수의 작업이 오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이론은 의미론과 함께 화용론을 가지는 것이어서 의미론적으로 '옳은' 이론이 화용론적으로, 즉 실제 현실상으로 언제나 '옳은' 결과를 낳는 건 아니라는 것(이론적 순결주의자는 교리적 근본주의자의 세속적 버전일 뿐이다). 사실 '좋은 의도'와 '나쁜 결과'의 조합은 인간적인 결함의 결과만은 아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이런 모양'을 기대하신 건 아닐 테니까.





이야기가 괜히 길어졌는데, 최근에 임지현 교수의 파시즘론에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했던 책이 출간됐고, 나는 그냥 그 책에 대해서나 말하려던 참이다. 빌헬름의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그린비, 2006)이 그 책이다. 임교수는 책의 뒷표지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생동감을 잃어버린 좌파 교과서의 정답을 무시하고, 파시즘의 복합적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집요한 시선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내 개인의 지적 여정에서 이 삐딱한 맑스주의자와의 만남은 '대중독재' 패러다임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징검다리였다."

이 '삐딱한 맑스주의자'를 일반적으론 '프로이트 좌파' 혹은 '프로이트 맑스주의자'라고 부른다. 프로이트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해보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프로이트주의는 혁명 러시아에서 곧 기각된다). 이미 작년에 <오르가즘의 기능>(그린비, 2005)이 출간됐을 때 라이히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늘어놓지 않겠다. 대신에 횡적으로, 작년초에 출간된 책으로 파시즘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는 '최고'라는 평을 듣는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교양인, 2005)과 나란히 읽어볼 만하겠다는 의견 정도를 덧붙인다. 심리적 분석과 역사적 분석이 서로 보완해줄 수 있을 테니까. 팩스턴의 <파시즘>은 600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이게 좀 부담스럽다면, 마크 네오클레우스의 <파시즘>(이후, 2002)로 때우셔도 해도 좋겠다. 1/3 정도의 분량이다. 얼마전에 나와서 이 연재에서 다룬 바 있는 강유원의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에는 한 장에 파시즘 관련서들에 대한 서평에 할애돼 있다.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라이히의 파시즘론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만한 책으로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교양인, 2006)도 이번에 출간된 책이다.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괴벨스의 본격 평전인 이 책은 괴벨스의 일기와 그가 쓴 소설, 연설문, 편지 등 방대한 자료를 꼼꼼히 분석해 괴벨스의 내면세계를 가장 깊숙한 지점까지 파헤쳐 들어간 탁월한 나치 심리의 해부서"라고 하니까 관심있는 독자들은 참조해볼 만한다. '대중의 자발적인 지지'가 '파시즘'의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할 때, 괴벨스의 공적은 그 지지를 '동원'할 수 있는 선전선동(=아지프로)전략을 개발한 데 있다. 물론 이것은 파시즘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그러한 선전선동은 현실민주주의에서도 이미 '파시즘'만큼 일반화되어 있는 것이니까.




괴벨스를 언급하면서 히틀러를 빼놓을 수는 없겠는데, 관련서들은 막스 피카르트의 <우리 안의 히틀러>(우물이있는집, 2005)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분석서 <히틀러와 홀로코스트>(을유문화사, 2004), 히틀러에 대한 신화적 분석서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민음사, 2003), 히틀러에 대한 정신분석서 <히틀러의 정신분석>(솔출판사, 1999) 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거기에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푸른숲, 1998)과 <히틀러 최후의 14일>(교양인, 2005)도 덧붙일 수 있겠다(바람구두님의 강추에 따른 것이다). <30분에 읽는 히틀러>(랜덤하우스중앙, 2004)라면 히틀러에게 너무 야박한 것일까? 그렇다고 당신이 이 참에 <나의 투쟁>까지 읽겠다고 나선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속으론 이렇게 중얼거리겠다. "그건 좀 오버가 아닌가요?"





두번째로 꼽을 책은 프랑스의 저명한 두 에세이스트 파스칼 브뤼크네르와 알렝 핑켈크로트(팽켈크로)의 공동저작인 <길모퉁이에서의 모험>(동문선, 2005). 작년말에 나온 책인데, 최근에서야 눈에 띄었다. <피아니스트>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비터문>의 원작자이기도 한 브뤼크네르의 책은 <비터문>(산하, 1993) 등의 소설을 포함해서 여러 권의 번역돼 있지만, 내가 읽은 가장 압권은 역시나 <순진함의 유혹>(동문선, 1999)이었다. 핑켈크로트의 경우도 <사랑의 지혜>(동문선, 1998), <사유의 패배>(동문선, 1999) 같은 뛰어난 에세이들이 소개돼 있고(아래 사진은 영화 <비터문>의 포스터).
각자가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지만, 내가 알기에 두 권의 공저도 쓰고 있는데, 한때 내가 구했던 책은 <새로운 사랑의 혼돈>이었지만 이번에 <길모퉁이의 모험>이 먼저 나왔다(전자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얼른 가늠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엔 저자들의 지명도를 믿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물론 번역서의 경우엔 역자를. 한데 역자의 책을 내가 읽은 게 없다! 브뤼크네르의 <번영의 비참>을 약간 읽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차례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곱 개의 장이다. 그러니까 '일상'이 전면화되어 있는 셈인데, 일상에서의 모험이란 사실 '길모퉁이에서의 모험'밖에 더 있겠는가? 이 책을 집어드는 것이 모험이듯이(한가지 곁들이자면 동문선 책 치고는 가격이 저렴하다).




세번째 책은 송태현의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살림, 2005). '융, 바슐라르, 뒤랑 - 상징과 신화의 계보학'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책 자체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이 부제이며 세 명의 상상력 '이론가'들과의 조우를 한번쯤 권하는 의미에서 꼽아본다. 유익한 안내서가 되어줄 듯하기 때문에. 융이나 바슐라르 관련서들은 우리 인문학 현실에선 '과다'할 정도로 여러 권 번역/소개돼 있기 때문에(가장 얄팍한, 그래서 읽기에 간편한 책 몇 권만 이미지로 띄워놓는다), 한때 소개되다가 주춤하고 있는 질베르 뒤랑에 대해서만 몇 마디 덧붙인다. 사실 저자 자신이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교에서 '질베르 뒤랑의 문학비평:새로운 세계관과 비평의 쇄신'으로 박사학위 받은바, 뒤랑은 상상력이론과 신화이론에 있어서 (바슐라르파와는 또 구별되는) '그르노블학파'의 수장이었고, 국내에도 그의 직간접적인 제자들이 여럿 된다.




대표적으론 뒤랑의 <상징적 상상력>(문학과지성사, 1983)을 처음 번역/소개한 진형준 교수를 들 수 있다.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 질베르 뒤랑의 신화방법론 연구>(문학과지성사, 1992)가 그의 박사학위논문이다. 오래전에 둘다 읽어보았지만 역시나 번역서보다는 우리말 저작이 읽기 쉽고 이해하기 편하다. 이후 뒤랑은 진형준 교수가 관여하기도 했던 계간지 <상상>과 살림출판사쪽이 '전담'하게 되는데, 뒤랑의 <신화비평과 신화분석: 심층사회학을 위하여>(살림, 1998)이 유평근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고, 이어서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원제는 '상상력')>(살림, 1997)이 다시 진형준 교수의 번역으로 나온다. 같은 해 <상상력이란 무엇인가>(살림, 1997)도 진형준 교수 등의 편역으로 출간되고(덧붙이자면 유평근, 진형준 교수의 <이미지>(살림, 2001)도 이런 맥락상에 놓여 있는 책이다). 뒤랑의 상상력론이 한국문학에 실제적으로 적용된 사례는 진형준 교수의 비평집 <깊이의 시학>(문학과지성사, 1986), <또 하나의 세상>(청하, 1988)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가장 최근의 평론집인 듯한 <아주 멀리 되돌아오는 길>(살림, 1997)은 읽어보지 못했다).





네번째 책은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라 로슈푸코의 인간을 위한 변명>(한길사, 2005). 라 로슈푸코(1613-1680)에 관한 책으론 국내에 드물게 소개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저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 꼽아본 책이다. 이미 <고야>와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 등의 저작이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는 바, 저자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문화사나 지성사쪽의 전문가라고 해야겠다. 언젠가 몽테뉴를 <인생에세이>를 소개하면서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요시에의 <몽테뉴>를 꼽은 적이 있는데, <라 로슈푸코>도 보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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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인문주의자 정도로 알고 있는 라 로슈푸코는 블레즈 파스칼(1623-1662)과 동시대인이고 미셸 드 몽테뉴(1533-1592)보다는 두 세대쯤 아래 연배이다. 저작으론 원래 <잠언집>이 유명한데, 현재 구할 수 있는 번역본으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 511>(나무생각, 2003), <광우예찬, 군주론, 방법서설, 잠언과 성찰>(을유문화사, 1995)에 실린 '잠언과 성찰'이 있다.





끝으로 남아공의 여류 극작가 레자 드 왯(Reza de Wet)의 <러시안 트릴로지>(예니, 2005). 출간된 책들은 많지만, 손가락은 한정돼 있고 또 팔은 원래 안으로 굽는 법이니 내 눈길이 '러시안'에 머문 걸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저자에 대해선 별로 아는 바 없다. 다만, 이 희곡집이 체홉의 주요 희곡 <세자매>, <바냐 아저씨>, <갈매기>를 토대로 그 주요 등장인물들의 '후일담'을 그렸다는 것밖에(그러니까 '후일담 희곡'이다). 나로선 그걸로도 충분히 흥미롭다(아래 이미지들은 차례대로 레자 드 왯, <세자매> 영화스틸, 데이빗 마멧과 그의 <세자매> 원서이다).


소개에 따르면, "<세자매2>는 체홉의 <세자매>의 마지막 장면에서 17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1920년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그 격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올가, 마샤 그리고 이리나 세 자매가 갖고 있는 열망과 희망이, 또 그들의 고귀함과 선량함 혹은 그들의 무지가 어떻게 비루해지고 전락해 가는가를 성찰한 작품이다." 그리고 "<엘레나>는 원작인 <바냐아저씨>의 8년 후를 배경으로 혈연과 애정, 결혼으로 이루어진 한 작은 집단이 사랑으로 파멸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마지막 "<호숫가에서>는 원작 <갈매기> 4막 이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호숫가에 있는 집에 다시 나타난 니냐의 이야기로,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보인다."
이미 번역/출간돼 있는 체홉의 희곡들과 나란히 비교해서 읽어봄 직하다. 거기에 덧붙일 건 이번에 미국 연출가 데이빗 마멧의 번안작을 옮긴 <세 자매>(예니, 2006). "체홉을 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현대 관객들에게 소개하려는 의도로 집필되었다. 영상미에 주안점을 두고, 공연하기에 적합한 글로 새롭게 썼다"고 하니까, 이 또한 흥미를 끌 만하다.





P.S. 그밖에 눈에 띄는 우리 저자들의 책들은 나중에 몰아서 다루기로 하고, 세 권 정도만 덧붙여 '언급'하도록 한다. 먼저, '책, 그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란 부제를 가진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 아마도 지난주에 이 페이퍼를 썼다면 제일 먼저 꼽았을 책이다. 하지만 이미 주간베스트에도 오를 만큼 널리 알려진 책이기에 내 말은 군말 정도이겠다. 책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 즉 도서수집가들의 역사를 추적한다. 책의 제목인 '젠틀 매드니스(Gentle Madness)'는 한마디로 '점잖은 미치광이, 책에 미친 점잖은 사람들'을 일컫는다."는 소개대로이다. '곱게 미친 사람들'로 보면 되겠다("미치려면 곱게라도 미칠 것이지!"란 요구를 그래도 잘 수용한 사례들이라고나 할까).
이런 책소개를 수시로 늘어놓는 통에 간혹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내게도 어쩌면 '젠틀 매드니스'의 유전자가 새겨져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이 말은 1800년대 미국의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가리켜 '가장 고귀한 질병, 바로 애서광증(愛書狂症)에 일찌감치 푹 젖어버린 분'이라고 한 표현에서 차용했다"고 하니까 그게 그리 나쁜 건가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책은 분량도 분량이고 역자들도 역자들이다. "평론가이자 번역가인 표정훈,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김연수, 출판기획자이자 번역가인 박중서 등 책에 미친 세 사람이 3년만에 번역을 마쳤다"! 우리의 경우 혈통과 무관하게 이들의 조상은 아마도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가 아니었을까? 표덕무, 김덕무, 박덕무 하는 식으로 말이다.






두번째 책은 중국화인열전의 한 권으로 나온 저우스펀의 <석도>(창해, 2006), "청대 초기의 화가 '석도'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전기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왕손으로 태어나 승려의 몸으로 세상을 떠돌고 유민(遺民)화가로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서위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되살려 그림과 함께 담아냈다. <팔대산인>, <서위>에 이어 출간된 '중국화인열전'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내가 중국 회화에 조예가 있을 리는 만무하고, 다만 이전에 김용옥의 편역으로 출간되었던 <석도화론>(통나무, 1992/2002)에 등장하는 이름 '석도'가 그 '석도'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되어 꼽은 것이다. 도올의 책은 부제가 '김용옥이 백남준을 만난 이야기'라고 돼 있는데, 백남준 예술론의 요체는 '예술은 사기다!'라는 것이다. 오래전에 백남준과 '플럭서스' 운동에 대한 논문을 교정하느라 참조했던 책들이 문득 몇 권 떠오른다(김홍희의 책들이 표준적이었다).
세번째 책은 <호두까기인형>의 독일작가 E. T. A. 호프만의 <스퀴데리양>(열림원, 2006). 예전에 <스퀴데리 부인>(이유, 2002)이라고 출간된 적이 있는 책인데 새 번역본이 나온 것. 러시아 낭만주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작가이기에 관심이 가는 책이다. 비록 '세 자매'에 밀리긴 했지만. 호프만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P.S.2.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오세철 교수 등의 번역으로 1980년대에 현상과인식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영역본을 옮긴 것이다). 내가 산 1987년 2판은 당시로선 고가인 8,000원이어서 상당 기간 망설이다가 구입한 기억이 있다. 어제 새로 나온 번역본과 대조해서 몇 페이지 읽다가 (부분적으로라도) 새 번역본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걸 알았다(오역들이 지적되던 예전 번역보다 못한 대목들도 더러 있는데, 이에 대한 지적은 다른 자리에서 하도록 하겠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파시즘의 대중심리>의 우리말 정본에 대한 기대는 좀더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다.
06. 01. 17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