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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 번역의 의의와 문제점

다수의 세계문학전집이 백가쟁명에 접어든 시점에 걸맞게 세계문학론을 전체적으로 조감한 책이 출간됐다. 창비담론총서의 네번째 책으로 나온 <세계문학론>(창비, 2010)이 그것이다. 부제는 '지구화시대 문학의 쟁점들'. 개인적으론 <창작과비평>(2007년 겨울호)에 실었던 글도 재수록돼 반갑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참고로, <안과 밖>(2010년 하반기)도 세계문학론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경향신문(10. 12. 28) '민족문학 속 보편성’ 세계문학을 논하다 

1970~90년대 ‘민족문학론’ ‘리얼리즘론’ ‘분단체제론’ 등 한국 사회의 담론 지형에 큰 영향을 미친 이론들을 생산해온 창비가 창비담론총서의 새 단행본으로 <세계문학론:지구화시대 문학의 쟁점들>을 펴냈다. 지난해 출간된 <이중과제론> <87년 체제론> <신자유주의 대안론>에 이은 네 번째 총서다.  

세계문학전집 출간이 붐을 이루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무라카미 하루키, 파울로 코엘료, 베르나르 베르베르 같은 외국 작가의 작품들이 줄지어 이름을 올리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창비의 ‘세계문학’에 대한 성찰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문학평론가 백낙청·유희석, 브라질의 문학이론가 호베르트 슈바르스의 글 등 모두 13편이 실렸다.

책에서 논하는 세계문학은 세계문학전집류가 취해온 서구 중심의 주요 고전을 모아 놓는 방식과도,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대중문학과도 거리를 둔다. <세계문학론>이 근거로 삼는 개념은 19세기 초 괴테가 주창한 ‘세계문학’(Weltliteratur)이다. 괴테는 민족문학의 편향성과 편협성을 경계하며 개별 국가의 민족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추구한 문학을 ‘세계문학’으로 일컬었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에 민족문학으로서의 특수성과 함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백낙청은 과거 민족문학론운동에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한반도의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과제와 세계체제 재편을 연결지으며, 그런 의미에서 분단체제와 대결하는 민족문학이 세계문학의 진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유희석씨는 이 논의를 한걸음 더 발전시킨다. 그는 “세계체제의 반주변부와 주변부가 하나의 체제로 작동하는 한반도라는 모호하고도 중층적인 현실 자체가 획일화·기계화되는 삶에 저항할 의지가 있는 작가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할 최적의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밖에도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우리 민족문학이 서구문학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상상력과 가치를 지닌 문학으로 자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씨는 그런 가능성을 가진 작품으로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들어 논의를 전개하고, 한기욱은 코맥 매카시의 <로드>와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예로 들어 미국 내의 소수자 문학이 가져온 의미를 짚어본다. 또한 윤지관 전 한국문학번역원장, ‘로쟈’로 불리는 서평가 이현우씨 등이 현장에서 경험한 문제의식을 풀어낸다.(이영경 기자) 

10.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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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10-12-29 0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말연시 잘 보내세요. 한해를 마무리하기 전에 로쟈님 글이 실린 책이 또 나왔나 보네요. 제목도 그럴싸해 보이니 한번 사볼게요^^

로쟈 2010-12-30 07:54   좋아요 0 | URL
네, 감사.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소설가 박인성? 기사를 읽고서야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최근 연작소설 <이채영은 잘있다!>(삼우반, 2010)를 펴내기 불과 며칠 전에 교통사고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네 권의 소설집만을 남겨놓게 됐는데, 비단 안타까운 죽음 때문이 아니라 서울이란 도시의 풍경을 그려낸 작품세계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된다('동(洞)자류' 소설이라 부른다고).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10. 12. 25) 그저 ‘무명’으로 소설집 4권을 남겨둔채 가다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자욱한 안개 저편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소설을 탈고한 뒤 새벽 햇살과 다툼하던 물방울 입자들을 톡톡 터뜨리며 소설처럼, 시처럼 사라져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 갸우뚱하며 그저 무명 소설가라고 일컬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 시대 문체 미학을 간직한 소중한 작가’라고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상찬을 내렸다.  



소설가 박인성이다. 최근 출간된 연작소설 ‘이채영은 잘있다’(삼우반 펴냄)가 나오기 며칠 전인 지난 6일 새벽 교통사고로 숨졌다. 평단도, 작단도,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죽음이었다. 1956년 9월 태어났으니 54년을 ‘자연인 박대성’으로 살았고, 1977년 21세 젊은 나이에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돼 등단했으니 33년을 ‘소설가 박인성’으로 살았다. ‘호텔 티베트’, ‘사랑은 안개보다 깊다’ 등 네 권의 소설집만을 남긴 과작(寡作)의 작가였다. 1986년 첫 소설집 ‘파장금엔 안개’는 김윤식 서울대 교수로부터 ‘무진기행에서 김승옥의 안개를 더욱 밀도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77년 월간 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유고작이 된 ‘이채영’은 서울 곳곳을 무대로 한 연작소설이다. 가회동이 나오고 상수동, 신사동, 신설동, 홍은동, 흑석동이 잇따라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2010년 한국 사회의 정치인, 기업인, 법조인, 종교인, 술집 주인, 건달, 화가, 문인 등 수많은 인물들을 아울러 풍자하고 은유하며 경쾌한 이야기로 이끌어간다. 그동안 단편소설과 단편에 걸맞은 문장만을 고집하며 삶의 비의(秘意)를 찾아 헤매왔던 박인성으로서는 파격적인 변신을 꾀한 셈이다.

정치·기업·법조인 등 풍자
특히 표제작 ‘이채영…흑석동’을 비롯해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신설동’ 등에서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나 하듯 자신 삶의 자전적 내용을 담았다. 전북 김제에서 서울로 올라와 신설동 천변에서 지내던, 지독하게 가난했던 유년의 기억부터 문청으로 살아왔던 날들, 등단 이후 광고 카피라이터와 작가의 삶을 겸했던 시절까지를 그리 길지 않은 단편 속에 분명한 기록으로 남겼다.

문학평론가인 정현기 세종대 교수는 “월북작가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그려낸 1930년대 도시 서울의 낭낭한 풍경이 2010년대 박인성에 이르면 더욱 구체적인 꼴을 띠고 이 도시가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읽게 한다.”고 언급했다.

소설을 펴낸 삼우반의 김용범 편집주간은 “장편소설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이채영’의 속편 격인 또 다른 서울 연작소설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기만 하다.”고 애석해 했다.

●‘천변풍경’ 더욱 구체화한 듯
못다받은 애도는 더 이상 이승의 몫이 아니다. 또 다른 세상에서 문학에 파묻혀 마음껏 소설 쓰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이승의 것보다 훨씬 유쾌하고 즐거운, 또 다른 삶을 누리기를 바랄 뿐이다.(박록삼기자) 

10.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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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2-2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말에 안타까운 소식을 연이어 듣게 되네요...
물만두님도 그렇고...
과문한 탓에 두 분 다 평소 글로 접하지 못했는데
해가 가기 전에 마음도 가라앉힐 겸 다문다문 읽어봐야겠네요...
게으르기 그지없는 제겐 로쟈님 서재가 세상과 통하는 창이 되는군요.
부끄럽지만... 이왕 빚진 김에 계속 빚지고 살겠습니다^^

로쟈 2010-12-25 20:40   좋아요 0 | URL
저도 손가락품이나 좀 파는 정도인 걸요. '로쟈-은행'이란 표현도 있던데, 가진 것 없이 대출해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반딧불이 2010-12-25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고나니까 보이는 것이 세상에는 허다하군요. 기억해두어야겠습니다.

올 한해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새해에도 또 염치없이 도움 받겠습니다.
맑고 향기로운 새해 맞으시기 빕니다.

로쟈 2010-12-25 20:42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반딧불이님도 새해엔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시길...

영초 2010-12-2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너무 아쉽습니다. 열심히 소설 쓰는 몇 안되는 소설가중의 하나였는데...물론 작품 수준도 굉장히 높고..

로쟈 2010-12-27 23:39   좋아요 0 | URL
아, 독자가 없진 않았네요!

雨香 2010-12-2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가 박인성! 혹시나 했는데 (20년전에) 제가 가지고 있던 '파장금엔 안개'의 그 저자였네요. 허망하게 가시다니 안타깝네요.

로쟈 2010-12-30 07:54   좋아요 0 | URL
숨은 독자들이 없지 않았네요...

포스트잇 2010-12-30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인성작가,광고 카피라이터라서 그런지 제목들이 다들 한 필~하네요.때이른 사고가 안타깝고요...,늦게나마 읽어보려합니다.모르고 지나쳤을 책과 작가를 소개받을 수 있어서 더 없이 다행입니다.올 한해도 이러한 다행을 베풀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박노해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를 드문드문 읽다가 '자기 삶의 연구자'란 시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삶은 다른 그무엇도 아니라네/ 삶의 목적은 오직 삶 그 자체라네"는 시구 때문이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데, 보통의 '혁명시인'들은 그렇게 노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채롭다(그들은 '미래'를 노래한다). 하긴 그가 노동운동가에서 평화운동가로 변신한 지 오래다. 아무려나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엔 문맥과 무관하게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자기 삶의 연구자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으면
다른 자들이 나를 연구한다네
시장의 전문가와 지식장사꾼들이
나를 소비자로 시청자로 유권자로
내 꿈과 심리까지 연구해 써먹는다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내 모든 행위가 CCTV에 찍히고
전자결제와 통신기록으로 체크되듯
내 가슴과 뇌에는 나를 연구하는
저들의 첨단 생체인식 센서가 박혀있어
내가 삶에서 한눈팔고 따라가는 순간
삶은 창백하게 빠져나가고 만다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최고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네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만들어내는 것 

삶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네
삶의 목적은 오직 삶 그 자체라네
지금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우리가 이토록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최고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10.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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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11-0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료 재건 부대가 가서 정말 의료, 재건에 힘써줄 거라고 저 순진한 사람이 믿는 걸까요?

로쟈 2010-11-01 14:37   좋아요 0 | URL
시인은 본래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영악한 시인도 몇 되지만...

비로그인 2010-11-0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보도 후지고 매력 없으면 지는 겁니다”라는 박노해 인터뷰 한겨레 기사를 읽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46443.html

글샘 2010-11-01 14:15   좋아요 0 | URL
진보는 항상 후지고 매력 없는 건데요... 일제시대에 독립군... 뽀대났을까? 저 사람은 사회주의가 매력 있어서 했던 모양이에요. 에고... 계급적 사고를 못하는 사람의 한계랄지... 진보는 못가진 사람들의 생각이라서, 늘 후지고 매력없는 쪽일텐데... 보수가 오히려 번지르르하고 멋지고 우아하죠. 매력투성이고...

로쟈 2010-11-01 14:35   좋아요 0 | URL
진보가 후지고 매력없는 쪽이란 건 일리가 가는 말씀인데, 그렇다고 보수가 멋지고 우아하다는 말씀은 생소하게 들립니다. 김규항식으로 말하면 '본능'밖에 없는 건데요...

글샘 2010-11-01 18:03   좋아요 0 | URL
보수가 정말 멋지고 우아하단 게 아니라, 겉보기에 번지르르하고 옷 갖춰 입는 거 좋아하고, 클래시컬한 거 좋아하고... 그렇단 얘기죠. ^^

봄날은간다 2010-11-0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급적 사고? 그게 뭔지 궁금해지네요.
기왕이면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사는게 좋다는 말인데...그렇게 심오하게 받아들이다니...

너의탓이아니야 2010-11-0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들어서의 진보는 후진 생활을 해야하지만 젊어서의 진보는 정말 우아하고 매력있으며... 한마디로 간지나지 않나요? 배고프고 남루함의 치명적인 미학을 모르시다니ㅋㅋ 그런 겉보기에 혹해서 운동 시작한 사람들은 결국 본능이 이끄는데로 자기 몸에 똥칠하며 떠나가기 마련이구요.

비로그인 2010-11-0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다른 그무엇도 아니라네/ 삶의 목적은 오직 삶 그 자체라네" ... 기억하고 갑니다.

돈케빈 2010-11-02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
시라기 보다는 설교나 설법, 철학처럼 직설적입니다.
박노해라는 맥락은 고려해야겠지만 시에는 운율이 있어야 시 같은 맛을 줍니다.
시인 솔봉은 박노해가 시인으로서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솔봉의 견해에 전적으로 수긍이 갑니다.
요즘은 철학조차 창의성 있게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adele 2010-11-02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어서는 누구나 한번쯤은 진보에 매혹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누구나가 순진하거나 순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가치가 더욱 발하는 법이지요. 박노해 시인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상관없이, 일단은 오랜만의 시집이라 반가웠습니다.
 

올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에 관한 기고기사를 옮겨놓는다. 바르가스 요사 문학의 이력과 그의 정치적 변신 등을 비판적으로 짚어주고 있다.   

대학신문(10. 10. 18)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아름다운 거짓말  

"문학은 불꽃이다”, 페루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1936~)가 1967년 베네수엘라에서 로물로 가예고스 상을 수상하면서 내지른 사자후이다.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문학, 현실의 부조리를 활활 태워버릴 문학을 천명한 것이다. 그 사자후는 2010년 바르가스 요사에게 크나큰 영광이 돼 돌아왔다. 노벨상위원회가 권력에 대한 신랄하고 예리한 비판,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개인의 처절한 저항(때로는 처절한 패배)이 담긴 작품들을 쓴 점을 높이 평가해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권력과 부조리에 저항한 문학 천명, 노벨상위원회를 사로잡은 이유
바르가스 요사의 비판은 좌와 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1971년에 쿠바 문인 에베르토 파디야의 자아비판 사건이 일어나자 바르가스 요사는 누구보다 더 이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아직 쿠바혁명이 지식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시점이었는지라 바르가스 요사는 이들의 공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1990년에는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 하에 있던 멕시코를 공산주의 체제보다 더한 독재로 묘사해 멕시코 국민의 공분을 샀다. 그것도 멕시코 방송에 출연해서, 또 몇달 뒤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는 멕시코 문단의 원로 옥타비오 파스 앞에서였다.

바르가스 요사의 사자후는 문학의 장에서도 여지없이 터져 나왔다. 그는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작가론인 『가르시아 마르케스: 신성 살해 이야기』(1971)를 통해 자신의 문학관을 피력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금지된 것을 갈망하는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작가들의 내면세계가 창작의 원천이다. 창작을 신의 지위에 대한 도전, 나아가 조물주의 창조 행위에 비유한 셈이니 문인으로서 자긍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엿볼 수 있다. 바르가스 요사의 사자후는 가히 명품이었던 것이다.

문학이 사회의 등불이라는 자부심과 집념으로 조숙한 성공 이뤄
작가가 조물주이고, 문학이 사회의 등불이라는 자부심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바르가스 요사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그가 문학을 시작한 1950년대의 페루 현실과 문화적 토양이 너무나 척박했기 때문이다. 독재 치하의 가난한 나라, 존경할 만한 선배 소설가가 거의 없는 나라에서 바르가스 요사는 작가라는 자존심 하나로 겨우 버티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파리 다락방의 문학청년이 되겠다는 꿈을 키운다. 척박한 국내현실을 벗어나고, 소위 세계의 문화수도에서 선진 문학조류와 접하고, 세계의 중심에서 자신의 작품을 널리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1958년부터 유럽 생활을 시작한 바르가스 요사의 조숙한 성공은 이러한 집념의 소산이다. 그의 출세작은 두번째 작품이자 장편소설로는 첫번째 작품인 『도시와 개들』(1962)이다. 이 소설은 1960년대에 국제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소설 붐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스페인의 세익스바랄 출판사 문학상을 받는다. 라틴아메리카 작가로는 바르가스 요사가 최초였다. 이로써 바르가스 요사는 불과 26세의 나이에 단숨에 스페인어권의 촉망받는 작가가 됐다. 또 1960년대에 쓴 두 장편소설 『녹색의 집』(1966)과 『‘성당’에서의 대화』(1969) 역시 대단한 반향을 일으키면서 33세에 이미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꼽혔다. 훌리오 코르타사르(아르헨티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카를로스 푸엔테스(멕시코)와 함께 소위 ‘붐’ 소설 작가 4인방으로 인구에 회자되었으니 세계적인 작가가 되리라는 꿈도 일찌감치 이룬 셈이다

 

이 4인방 중에서 가장 젊은 탓인지 바르가스 요사는 새로운 조류를 좀 더 쉽게 받아들였다. 1960년대의 작품들이 진중했다면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1977)와 『새엄마 찬양』(1988) 등을 통해서는 유머와 에로티즘을 구사하며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과 대중문화에 접근했다. 그렇다고 1970년대부터 가벼운 작품으로만 일관했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 종말 전쟁』(1981)과 『마이타 이야기』(1984) 등은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실패 원인을 성찰하고 있으며, 『염소의 축제』(2000)에서는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를 다루면서 다시 한 번 권력의 메커니즘을 파헤쳤다. 



이러한 성과에도 필자는 바르가스 요사의 노벨상 수상이 유감스럽다. 물론 정치적 소신을 바꾸었다 해서 무작정 문제를 삼을 수는 없다. 또 그가 잠시 정치에 입문했다가 1990년 무명의 후지모리에게 패하는 과정에서, 백인이라는 이유로 역인종차별을 당한 것도 일정부분 사실이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 개탄하는 것도 당연하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서구로의 투항, 신자유주의 수사학과 일치하기도 
 그러나 그 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문학으로의 회귀를 선언한 회고록 『물속의 물고기』(1993)를 보면 바르가스 요사의 변신이 단순히 좌에서 우, 혹은 진보에서 보수로의 여정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 서구로의 투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바르가스 요사가 구사하는 인권,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의 수사학은 놀라울 정도로 신자유주의 수사학과 일치한다. 바르가스 요사에게 라틴아메리카가 나아가야 할 길은 서구의 발전 경로를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다.  



서구로의 투항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안데스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한 『케케묵은 유토피아』(1996)에서 잘 드러난다. 바르가스 요사는 서구식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원한 원주민들과 이들과 뜻을 같이한 지식인들을 인류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시대착오적인 집단으로 매도한다. 가령 바르가스 요사에게 원주민주의 소설가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의 소설은 ‘아름다운 거짓말’일 뿐이다. ‘보편적’ 가치의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젊은 시절 자신이 거의 유일하게 존경한 페루 선배 소설가까지 버리게 된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무슨 인연인가 싶다. 반쯤은 바르가스 요사에 이끌려 페루에 갔다가 그를 버리고 아르게다스를 택했으니 말이다.

필자 같은 이방인의 눈으로 보기에도 보편적 가치라는 잣대가 안데스의 식민성을 강화하는 수단일 뿐인데, 바르가스 요사는 어째서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일까? 권력에 대한 바르가스 요사의 저항을 높이 평가한 노벨상위원회의 결정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서구 잣대에 맞지 않는 이들을 치워버리는 데 기여한 문인에게 주는 상이 노벨문학상이란 뜻일까? 지금 필자에게 파리 다락방의 문학청년을 꿈꾸던 바르가스 요사의 치열한 모습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일 뿐이다. 바르가스 요사의 명품 사자후야말로 ‘아름다운 거짓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우석균_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 

10.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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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10-2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칠레 출신의 소설가 아리엘 도르프만을 보면서도 근래 비슷한 생각을 해 보는걸요. 도르프만은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지금도 미국 남부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영어로 창작을 하구요.
도르프만 역시 중남미의 자산이 빈곤하다는 생각을 하는 듯 합니다. 그의 소설 <체 게바라의 빙산>을 보면 라틴 아메리카의 고유한 것으로 성욕을 말하는데, 그가 살고 있는 앵글로 아메리카는 그렇질 않은지 묻고 싶더군요.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창작기별로 꼼꼼하게 볼 필요가 있겠군요?

로쟈 2010-10-22 22:40   좋아요 0 | URL
네, 아웃라인을 잡고 읽는 게 유익하겠죠...

2010-10-22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22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10-10-2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국은 다른 곳에는 어찌 링크 안하시나요^^

로쟈 2010-10-22 22:38   좋아요 0 | URL
거명이 안 돼서요...
 

어제 아주 오랜만에 구입한 시집은 최영철 시인의 <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2010)이다. 아주 오래전에 나온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열음사, 1987)와 <일광욕하는 가구>(문학과지성사, 2000) 등이 내가 기억하는 시집인데, <찔러본다>를 거기에 보탠다. 순전히 표제작의 힘이 크다. 많은 경우에 한 편의 시는 한 권의 시집을 버틴다(읽다 보니 '비자금 만 원' 같은 시도 마음에 든다). 시집에 처음 눈길이 가게 해준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10. 09. 11) 숨이 붙어있는 모든것을 바라보며 애틋한 연민을… 

최영철(54·사진) 시인의 새 시집 ‘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는 숨이 붙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다. 사람은 물론 가녀리게 흔들거리는 풀잎에서부터 힘없이 낙하하는 낙엽과 땅 속에서 꿈틀거리는 애벌레에 이르기까지 고루 배려하는 시선이 따뜻하고 애달프다.

  
“반찬거리 파는 할머니/ 조르지도 않았는데/ 주위 눈치 보며 얼른/ 새싹 몇 잎 더 넣어준다/ 할머니와 나만 아는 비밀/ 다른 사람 절대 알아선 안 되는/ 무슨 돌이킬 수 없는/ 불륜이라도 저지른 듯/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비밀’)

할머니와 벌이는 시인의 ‘불륜’이 귀엽다. 할머니의 따스한 비밀이 애틋하고 시인의 뛰는 가슴이 정겹다. 시인의 가슴이 콩닥콩닥 뛴 이유는 비밀을 들킬까봐서만은 아닐 것이다. 할머니의 마음이 고마워서, 아름다워서, 흔치 않게 경험하는 그 느꺼운 감정을 시로 옮기게 될 순간이 성급하게 기다려져서 더 콩닥콩닥 뛰었을 것이다.

“대형마트에 얻어터진 난전의 눈두덩이 시퍼렇다/ 온 데 파스를 바르고 나온 친절 연습/ 사시사철 땡볕 세례에 그을린 할머니들/ 애교 떨며 보조개 만들며 요염한 브이자를 그린다/ 눈물겹다 자본주의 꽁무니라도 따라붙으려는/ 저 늦은 보충 학습”(‘재래시장 살리기’ 부분)

할머니들과의 ‘불륜’이 뜨거울수록 그네들의 늦은 ‘자본주의 보충학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안타깝다 못해 서럽다. 그 서러운 연민은 떨어지는 낙엽에도 투사된다.

“젖이 안 나온다고 보채던 해가/ 잘근잘근 젖꼭지를 씹었다/ 젖을 물고 흔들던 바람이/ 떨어질락 말락 젖꼭지를 땄다/ 발갛게 피멍 들어/ 바닥에 떨어진 젖꼭지/ 벌레들이 달려들어 빨고 있다/ 핏기 다 빠져 해골이 되어서도/ 수천 수만의 자식을/ 더 안아 키우겠다는 거다”(‘만추, 잎’) 

해와 바람이 나뭇잎을 씹고 흔들어 결국 땅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그 이파리를 이번에는 벌레들이 달려들어 진액을 빨아먹는 바람에 핏기 다 빠진 해골이 되었는데, 그 모습이 시인에게는 죽어서도 수천 수만의 생명들을 끌어안으려는 모성으로 다가오는 거다.

만추의 붉은 잎에서도 화려한 색감의 아름다움보다 그늘진 생의 뒤안을 먼저 보듬는 시인의 마음은 수직으로 서있어야 할 나무가 누워 있는 모습에 이르면 더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되 누워서 옆으로 자라는 ‘수영성 와목(臥木)’을 보고 시인은 “자기를 슬며시 쓰다듬고 가는 여인에게로 기울다가/ 행장 챙겨 무작정 따라나서기도 하다가/ 저렇게 호된 회초리를 맞고 쓰러졌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그때/ 나무를 쓰다듬고 간 그 여인은/ 먼 여정에 눈앞이 아득해져/ 잠시 손 짚어/ 찰나를 쉬었다 갔을 뿐”이라고 쓸쓸하게 돌아선다.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햇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찔러본다’)

이번 시집의 표제로 뽑힌 이 시편은 연민과 슬픔 같은 것은 모두 안으로 삭여버리고, 햇살과 비와 바람을 기꺼운 마음으로 껴안는다. 깼나 안 깼나, 죽었나 살았나, 익었나 안 익었나, 끊임없이 안부를 걱정해주는 해와 비와 바람 같은 것들이야말로 이곳에 존재하는 불멸의 주인이기에,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모든 생명들도 꿋꿋하게 한 번 살아낼 만한 것이다. 최영철 시인은 자서에 “내 게으름의 핑계가 되어준 병, 내 가난의 핑계가 되어준 시, 그들과 함께 조금만 더 애절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조용호 선임기자) 

10.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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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3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3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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