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를 드문드문 읽다가 '자기 삶의 연구자'란 시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삶은 다른 그무엇도 아니라네/ 삶의 목적은 오직 삶 그 자체라네"는 시구 때문이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데, 보통의 '혁명시인'들은 그렇게 노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채롭다(그들은 '미래'를 노래한다). 하긴 그가 노동운동가에서 평화운동가로 변신한 지 오래다. 아무려나 우리 모두가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엔 문맥과 무관하게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자기 삶의 연구자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으면
다른 자들이 나를 연구한다네
시장의 전문가와 지식장사꾼들이
나를 소비자로 시청자로 유권자로
내 꿈과 심리까지 연구해 써먹는다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내 모든 행위가 CCTV에 찍히고
전자결제와 통신기록으로 체크되듯
내 가슴과 뇌에는 나를 연구하는
저들의 첨단 생체인식 센서가 박혀있어
내가 삶에서 한눈팔고 따라가는 순간
삶은 창백하게 빠져나가고 만다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최고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네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만들어내는 것 

삶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네
삶의 목적은 오직 삶 그 자체라네
지금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우리가 이토록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최고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10.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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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11-01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료 재건 부대가 가서 정말 의료, 재건에 힘써줄 거라고 저 순진한 사람이 믿는 걸까요?

로쟈 2010-11-01 14:37   좋아요 0 | URL
시인은 본래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영악한 시인도 몇 되지만...

비로그인 2010-11-0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보도 후지고 매력 없으면 지는 겁니다”라는 박노해 인터뷰 한겨레 기사를 읽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46443.html

글샘 2010-11-01 14:15   좋아요 0 | URL
진보는 항상 후지고 매력 없는 건데요... 일제시대에 독립군... 뽀대났을까? 저 사람은 사회주의가 매력 있어서 했던 모양이에요. 에고... 계급적 사고를 못하는 사람의 한계랄지... 진보는 못가진 사람들의 생각이라서, 늘 후지고 매력없는 쪽일텐데... 보수가 오히려 번지르르하고 멋지고 우아하죠. 매력투성이고...

로쟈 2010-11-01 14:35   좋아요 0 | URL
진보가 후지고 매력없는 쪽이란 건 일리가 가는 말씀인데, 그렇다고 보수가 멋지고 우아하다는 말씀은 생소하게 들립니다. 김규항식으로 말하면 '본능'밖에 없는 건데요...

글샘 2010-11-01 18:03   좋아요 0 | URL
보수가 정말 멋지고 우아하단 게 아니라, 겉보기에 번지르르하고 옷 갖춰 입는 거 좋아하고, 클래시컬한 거 좋아하고... 그렇단 얘기죠. ^^

봄날은간다 2010-11-01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급적 사고? 그게 뭔지 궁금해지네요.
기왕이면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사는게 좋다는 말인데...그렇게 심오하게 받아들이다니...

너의탓이아니야 2010-11-0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들어서의 진보는 후진 생활을 해야하지만 젊어서의 진보는 정말 우아하고 매력있으며... 한마디로 간지나지 않나요? 배고프고 남루함의 치명적인 미학을 모르시다니ㅋㅋ 그런 겉보기에 혹해서 운동 시작한 사람들은 결국 본능이 이끄는데로 자기 몸에 똥칠하며 떠나가기 마련이구요.

비로그인 2010-11-0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다른 그무엇도 아니라네/ 삶의 목적은 오직 삶 그 자체라네" ... 기억하고 갑니다.

돈케빈 2010-11-02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
시라기 보다는 설교나 설법, 철학처럼 직설적입니다.
박노해라는 맥락은 고려해야겠지만 시에는 운율이 있어야 시 같은 맛을 줍니다.
시인 솔봉은 박노해가 시인으로서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솔봉의 견해에 전적으로 수긍이 갑니다.
요즘은 철학조차 창의성 있게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adele 2010-11-02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어서는 누구나 한번쯤은 진보에 매혹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누구나가 순진하거나 순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가치가 더욱 발하는 법이지요. 박노해 시인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상관없이, 일단은 오랜만의 시집이라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