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헤겔 레스토랑>(새물결, 2013)을 읽다가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분석에서 막힌 이후로(막혔다는 게 <파르메니데스>를 먼저 읽어야 했다는 뜻이다) 한동안 지젝을 손에 들 여유가 없었는데, 며칠 전부터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새물결, 2013)을 다시 펼쳐보고 있다. 새 번역본은 진즉에 구했지만 막상 펼쳐볼 짬은 잘 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젝 입문서를 문의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종종 추천하면서, 나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한국어본으로는 물론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도 갖고 있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아) 비교해보지 않아서 번역이 얼마나 개정/개선됐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사실 인간사랑판과 같이 읽던 영어본도 찾지 못해서 새물결판을 표지 갈이를 하고 새로 나온 영어본과 같이 읽는다. 같은 책을 한국어판과 영어판 모두 두 종씩 갖고 있는 셈. 게다가 나는 이 책을 러시아어판으로도 읽었으니 나름 애장서라 할 만하다. 아래가 1999에 나온 러시아어본인데, 요즘은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이 된 듯싶다.

 

 

다시 읽으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한 가지는 내겐 지젝의 책이 일종의 진정 효과가 있다는 것. 아마도 기독교인이 복음서를 읽으며 느낄 법한 진정 효과가 이렇지 않을까 싶다. 마음이 혼란하거나 울적할 때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흠, 가장 좋은 상태의 번역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렇지 않은 대목도 있다는 것. 오탈자나 오역이 교정되지 않아서다.

 

번역본 244쪽에서 "따라서 주체-텍스트와 그것에 대한 외부의 해석 사이의 고전적 대립이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이미 그 자신의 해석이라 할 무한한 문학 텍스트의 연속성으로 대체된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주체-텍스트'는 'object-text'(대상-텍스트)를 잘못 옮긴 것이다. 이건 단순 오역이라 원문과 대조하는 확인과정만 거쳤다면 교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단순 오역이라도 독자에게는 큰 혼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보다 좀 더 문제적인 오역도 나온다. 그래서 이 페이퍼까지 적게 된 것인데(이 책을 추천했으니 보증도 해야 하므로), 라캉의 실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는 대목에서다. 인용하면 이렇다.

라캉의 전체 요점은 실재란 이러한 쓰기의 불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재는 초월적 실정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접근할 수 없는 단단한 중핵처럼 상징계 너머 어딘가에 존속하고 있는 일종의 칸트적 '물 자체'이다.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중심적 불가능성을 각인하는 상징적 구조 내의 구멍, 곧 공백이다.(274쪽)  

문제의 구절은 "실재는 일종의 칸트적 물 자체이다"라는 대목이다. 지젝의 독자라면 대번에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문은 정반대로 적혀 있다. 전후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he Real is not a transcendent positive entity, persisting somewhere beyond the symbolic order like a hard kernel inaccessible to it, some kind of Kantian 'Thing-in-itself' - in inself it is nothing at all, just a void, an emptiness in a symbolic structure marking some central impossibility. (195쪽) 

"일종의 칸트적 '물 자체'"라는 보어도 "초월적 실정성을 가진 실체"와 마찬가지로 "실재는 -이 아니다"(the Real is not)에 걸리지만 좀 멀리 있는 탓인지 역자가 간과하여 정반대로 옮겼다. 이것도 실수로 봐야겠지만, 보통 이런 유형이 번역본에서 읽을 수 있는 가장 안 좋은 오역이다. 정반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뒷표지의 소개 문구이기도 하지만 '지젝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로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지젝 사유의 원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표 데뷔작"이다. 중요한 건 번역본도 그 원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거꾸로 예전 번역판의 오역이 고스란히 새 번역판에도 남아 있다면,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잘못된 건 하나라도 교정하고 새해를 맞는 게 좋을 듯싶어서,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몇 분 쪼개 썼다. 이제 한 시간여 남았다. 식탁에 싱싱한 시간이 새로 차려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새로운 시간, 새로운 책들로 모두에게 풍성한 새해가 되시길...

 

13. 12. 31.

 

 

 

P.S. 덧붙여, 개정 번역판임에도 찾아보기가 없는 건 유감스럽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소송>이 예전 번역본 제목인 <심판>으로 돼 있는 것도 새 번역본답지 않게 '올드'하다. 게다가 주인공 이름은 '요제프 K'가 아닌 '조세프 K'로 표기돼 있다. 역자나 편집자나 <소송>도 읽지 않은 건지 아니면 무슨 소신을 갖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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