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역본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내 취향으로는 우선은 김진준의 손을 들겠다. 이제 겨우 시작이라 중간에 바뀔 수는 있겠다. 부분 번역 순서는 전자는 문학동네, 후자는 민음사.
9 <롤리타: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 이것은 내가 받은 기묘한 원고의 제목과 부제이며, 이 글은 그 원고에 붙이는 머리말이다. 원고의 저자 ‘험버트 험버트’는 ~
7 <롤리타, 혹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 이것은 필자가 받은 좀 이상한 원고에 붙은 두 개의 제목이었다. 필자의 이 글이 서문이 된 그 이상한 원고의 저자인 ‘험버트 험버트’는 ~
9 현재 컬럼비아 특별구 변호사협회 소속인 그는 내 사촌이자 절친한 벗으로, <롤리타> 출간에 대한 모든 권한을 저명한 내 사촌에게 위임한다고 밝힌 의뢰인의 유언장 내용을 근거로 나에게 이 일을 맡겼다. 클라크가 나를 편집자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모종의 병증과 도착증을 다룬 졸저(<정신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가?>)로 최근에 폴링 상을 수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 클라크 씨는 현재 워싱턴 D.C.변호사 협회에 속해 있는데 험버트가 <롤리타>의 출간에 관한 모든 권한을 나의 저명한 사촌에게 위임한다는 유언장의 한 조항을 조건으로 원고를 받았다. 그의 결정은 아마 자신이 선정한 편집자가 방금 폴링 상을 탄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수상작은 <감각들이 의미를 만드는가?>라는 수수한 책이었는데 괴상한 정신 상태와 성도착을 논의한 것이다.
10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정표나 묘비처럼 그의 글 속에 끈질기게 살아남은 몇몇 세부사항(즉 인품과 동정심을 겸비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감춰주고 덮어줄 만한 인명과 지명)을 꼼꼼히 고쳤을 뿐, 나머지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이 놀라운 회고록을 그대로 선보인다.
8 그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 비석이나 이정표(취향상으로나 동정심으로 사람들이 감추려 했을 인명이나 지명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로 줄기차게 나타나는 몇몇 고집스런 내용들을 조심스레 억누르는 것 외에 이 굉장한 수기는 여기 그대로 선보인다.
17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15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머리글 부분을 빼면 실제 본문의 제일 첫 문장은 각 17쪽과 15쪽으로 인용된 바로 윗 부분이다. 이 첫 부분만은 뭔가 자꾸 할 말이 떠오른다. 앞 문장은 완벽한 문학동네의 승리, 뒤 문장은 민음사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원문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이라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다.) 문학동네 김진준의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설사 원문에서는 대구를 이루지 않았더라도 번역할 때는 섬세한 대구 구조까지 신경 쓴 것 같다. 짧은 문장에서도 문체 미학을 완성하려는 노고가 보인다.
민음사 권택영의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시적인 문장이었을 첫 원문이 번역으로 바뀌면서 약간 풀어지고 삐걱대는 느낌이다.
나보코프에게도 아쉬운 점을 느낀다. 기왕 신경 쓸 첫 문장인데 ‘롤리타, 내 몸의 불, 내 삶의 빛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이런 순서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쓸 데 없는 생각도 해본다. 협의에서 광의의 대구, 점층적 기법 등을 제대로 활용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하기야 대가 쯤 되면 좁쌀 영감, 먼지할망구가 되지 않기 위해 잘잘한 데 신경을 덜 쓰기는 하겠다.) 하지만 문장에 치중하는 작가들(우리나라로 치면 김훈, 이승우, 김경욱, 천운영, 기타 여러 작가들)이라면 디테일한 면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런 섬세한 부분에도 조용히 열광하고 숨어서 희열을 느끼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정원 가꿀 때, 안정감과 통일감을 위해 장미 뒤의 수국, 배롱 뒤의 느티를 배열하지 그들을 마구 뒤섞지는 않는다. 그림에 구도가 있고, 음악에도 대위법이 있듯이 글에도 미시적, 거시적 구성을 신경 쓴다면 예술미를 좀 더 살릴 수 있을 것이다.(뭐, 문학이 예술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뒤로 하고.)
이번엔 뒷문장. 역시 원문을 안 봐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민음사의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알파벳과 한글 체계가 다른 이상, 역자가 윤문을 했더라도 용서할 만한, 독자를 배려한, 충분히 매혹적인 번역이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원문과 함께 두 번역서를 옆에 두고 부분마다 내 취향에 맞는 쪽으로 골라가며 읽는 재미도 있을 텐데. 한없이 게을러 원 없이 뮝기적(!)댈 망정 언제나 시간은 그런 여유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정말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한 마디. 겨우 읽기 시작했지만 나보코프의 문장은 (내게) 넘사벽이다! 방금 아무 페이지나 펼쳐봤다. 가령 이런 문장들의 연속이다.
109(문학동네) 나는 그들이 출발 준비를 하면서 내는 잡다한 소음을 듣고 침대에서 나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포플러나무 밑에 서 있는 자동차가 벌써 부릉부릉 떨었다. 보도에 서 있는 루이즈는 마치 꼬마 여행자가 벌써 저 멀리 나지막한 아침해를 향해 달려가기라도 하는 듯이 한 손으로 눈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동작을 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헤이즈가 소리쳤다. “서둘러!” 그러자 차 안에 엉거주춤 올라탄 나의 롤리타가 막 문을 닫으려다가, 바야흐로 차창을 내리고(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루이즈와 포플러나무들에게 손을 흔들기 직전에 문득 운명의 흐름을 중단시켰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도로 집 안으로 달려들어왔다(헤이즈가 노발대발 소리쳤다). 뒤이어 나의 연인이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내 몸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기세로 부풀었다. 나는 허둥지둥 파자마 바지를 끌어올리면서 방문을 열어젖혔고, 그와 동시에 롤리타가 들이닥쳤다. 제일 아끼는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쿵쾅쿵쾅 헐떡거리며 달려와서 다짜고짜 내 품으로 뛰어들었고 그녀의 순결한 입술은 남자의 시꺼먼 턱 아래 난폭하게 짓눌려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심장이 팔딱거리는 나의 연인! 다은 순간 나는 그녀가 -살아 숨 쉬는 그녀가, 농락당하지 않은 그녀가 -콩닥콩닥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운명의 흐름이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