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롤리타는 산문시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수록 좋은 소설일 때가 있다. 섣부른 작가의 입김이 책이란 유리창에 서리거나, 책갈피를 넘기는 독자의 손끝에 작가의 손길이 자꾸 부대낀다면 이는 독자를 배려한 소설은 못 된다.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기만 하면 되는 소설. 의도하는 바 없기에 변명할 필요 없고, 바라는 바 없기에 훈수 둘 일 없는 소설. 쓰는 작가는 단지 그것을 끝낼 궁리를 하고, 읽는 독자는 묵묵히 마지막 장을 덮기만을 바라는 그런 소설. 질문하지 않았으므로 답할 필요 없고, 설사 질문 하더라도 판단유보로서 독자의 권리를 곱씹을 수 있는 소설. 이런 소설은 나를 매혹시킨다. 『롤리타』가 내겐 그랬다.
롤리타는 소설을 빙자한 산문시이고, 험버트를 가장한 작가 나보코프의 심미적 고백록이다. 흠잡을 데 없는 산문적 글쓰기는 시종일관 균질한 농도로 독자를 사로잡는데, 소설은 메시지가 아니라 문장으로 승부한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시대를 앞선 작가로서 부도덕한 작가 의식에 대한 세간의 혐의를 의식했을까. 전통적 액자 기법으로 그 혐의를 피해가려 한 것은 독자로서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설계도가 필요 없을 만큼 첫 글이 다음 글을 몰고 가는 글 장단이 독자를 압도하는데 소심한 부채감, 이를테면 작품성에 대한 일말의 회의를 가질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작가 입장에서는 소설은 시작하면 끝내야 할 심리적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정신적 노동의 범주에 넣을 만한 그 작업을 통해 작가는 심연의 경계에서 폭발하는 무질서한 심상을 무한 발설하는 욕구에 휩싸인다. 그것이 단순한 욕구로 끝나지 않고 예술성을 확보하려면 독자보다 심리적·심미적 우위에 있어야 한다. 거기엔 독자를 가르치려는 위선도 자신을 과장하려는 위악도 필요 없다.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작가의식만 있으면 된다. 도덕과 교훈과 감동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입체적 인생의 질문지, 소설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롤리타는 썩 매혹적인 소설이다.
2. 공감과 동정
공감과 동정은 우정이나 애정을 둘러싼 여러 환경에 등장하는 보편적 정서이다. 크게 보아 공감과 동정을 같은 범주에 놓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공감과 동정은 별개의 감정이다.
심리학에서의 공감(empathy)은 객관성을 담보한 이해의 감정이다. 당사자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그 사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이해하되, 나의 입장과 관점을 버리지 않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동정(sympathy)은 주관적 심리 상태의 자기 반영이다. 나도 너와 다르지 않고, 같은 기분이라는 직접적 감정으로 상대에게 쉽게 동화되는 상태를 말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적절한 예가 될 지는 자신이 없다.) 직장 상사에게 서류철을 패대기 당하고 뺨까지 맞은 남자가 있다 치자. 공감하는 여자라면 남자의 서류철 정도를 챙기고, 남자가 자신의 억울한 얘기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남자의 하소연에 맞장구를 치되 객관성을 잃지 않고 가만히 들어준다. 반면 동정하는 여자라면 남자보다 자신이 더 흥분하고 감정이입 되는 바람에 울음을 터뜨리거나 상사에게 덤빌지도 모른다. 난처하고도 억울한 남자의 입장이 곧 나의 감정이 되어 중심을 잃고 동화되어 버린다. 남자는 자신의 감정에 앞서 여자의 태도에 더 당황하게 된다.
수치심이나 열패감 또는 슬픔에 휩싸일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동정보다는 공감을 원한다. 동정은 나와 똑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공감은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하느냐 동정하느냐는 ‘감정의 객관화’에 달려 있다. 오늘밤 술 취한 친구가 슬픔이나 분노로 횡설수설할지도 모른다. 동정하고 싶다면 친구보다 더 취한 목소리로 친구 편을 들면 된다. 당황한 친구는 퍼뜩 술이 깬 나머지 다시는 당신에게 하소연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반면, 공감하고 싶다면 친구 얘기에 그저 옳다고 맞장구 쳐주며 들어주면 된다. 비록 취했지만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친구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공감하는 당신은 동정하는 당신보다 향기롭고 미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