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안 나가고 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모임이 존재했다.
인원수가 많이 모이다 보니 회비를 걷기 마련. 회비로 2차까지 마무리하고 3차부터는 각출하여 비용으로 충당한다. 모이는 인원 중에 회비를 내지 못하는 경우의 사람도 존재한다. 형편이 어려워서 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게 아니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모임에 나와 돈 한 푼 쓰지 않는 인간형이 존재한다는 소리다. 더불어 4차, 5차까지 가는 모임에 끝까지 살아남는다. 당연히 그때까지 지갑에선 백 원짜리 하나 안 나온다. 이쯤 되면 그런 인물에게 '빈대'라는 인칭대명사가 부여된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모임 때마다 지켜보곤 하는데 일 년이 다 가도록 회비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먹고 마시는 건 남 들보다 2배 된다.) 그러다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어느 날 갑자기 오백만 원이 넘는 캐논 캠코더를 들고 나타난다.(방송국 VJ들이 들고 다니는 그 모델) 모임에 나와 성능을 자랑한다. 무리해서 질렀단다. 역시 그날도 회비는 안낸다. 그냥 판단해버린다. ‘남을 위해 쓰는 돈은 아깝지만 자기를 위해 쓰는 돈은 아깝지가 않다.’ 나만 그리 판단하지 않았는지 알게 모르게 모임에서 '따'가 되버렸다. 나보다 불같은 성질의 어느 회원은 급기야 면전에서 회비 못 내겠으면 앞으로 모임 참가하지 말아달란 소리까지 듣게 된다. 그럼에도 요지부동이다. 철판 깔고 모임에 나타난다. 아무도 말을 안 건다. 혼자 먹고 마시고 논다. 3차로 진행될 때 의도적으로 따로 모여 떨어트리곤 했다. 재미가 없었는지 이런 반응을 보인지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모임에 안 나타났다.
이게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인가 내가 한참 바위를 씹고 자갈 똥을 쌌던 20대 때 이야기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이런 사람은 아직도 존재한다. 그런데 그게 머나먼 엘신 행성 깐따삐야 별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무실 이야기다.
우리 사무실 정규회식은 물론 소장마마 지갑이 털린다. 그것도 장렬하게 탈탈 털린다. 소장마마 마인드는 ‘먹고 죽은 귀신 때깔 좋다.’ 소신이기에 어쩌다 회식자리에서 직원들 먹는 걸로 쫀쫀하게 안 군다. 막 퍼먹어라. 주의다. 그래도 사람 밥통이 한계치가 있으니 블랙홀마냥 퍼먹기는 불가능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실 사람들 진짜 잘 먹는다.)
이런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실장이 술값, 밥값을 내곤 한다. 그러니까 정규 회식이 아니거나 소장마마 주도하의 술 먹기, 밥 먹기가 아닌 이상은 말이다. 하지만 실장 역시 우리와 똑같은 봉급쟁이. 더불어 나와 월급차이가 기 백 만원 차이도 아닌 이상 매일 얻어먹기 미안해 가끔 내가 술을 사거나 밥을 산다. 우리 실장 사람 좋게 '늬가 뭔 돈이 있냐.'는 핀잔을 하며 계산하는 걸 방해하곤 하지만 매일 얻어먹기 미안하다 보니 실장이 세 번 사면 내가 한번 정도 사는 걸로 어느 정도 인사치례는 하고 있는 편이다.
내가 가진 기본적인 마인드는 '좋은 것이던 나쁜 것이던 받은 건 돌려준다.' 가 적용 안 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나와 비슷한 연봉이면서 결코 밥을 안사는 인물(페이퍼에 언급했던 진보신당 후원금은 내며 직원들에게 초코파이 하나 안 사주는 사람)도 존재하고 30살이라는 나이로 사무실 막내 위치지만, 입사 이래 지갑에서 돈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는 직원도 존재한다. (역시나 개인을 위한 지출은 제법 많이 나간다.)
얼마 전 3차까지 가는 모임에서 앞에 말한 내 연봉과 비슷한 인물에게 2차에서 덤탱이를 씌웠다. 1차를 내가 내고 2차에 가서 반강제적으로 계산을 하게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이 지나 가는데 아직도 툴툴 거린다. '고기 그렇게 먹고 뭔 닭을 세 마리나 먹었냐.' 느니. '맥주는 그렇게 많이 시켜 마셨냐'느니.. 그럴 땐 홈메이드로 싸온 간식거리(군고구마, 과자, 찐 계란, 혹은 간단한 파스타 종류)를 의도적으로 제외시켜버리곤 한다. 한마디 나온다.
난 왜 안줘. / 넌 안 먹어도 돼 / 먹는 걸로 치사하게 구네!/ 누가 더 치사한지 사무실에서 여론조사 해볼까?/ 유 윈!/
난 먹는 걸로 치사하게 군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다.
어제도 쌀쌀을 넘어서 쌩쌩 거리는 칼바람을 맞으며 퇴근을 서둘렀다. 실장은 송년회 모임 차 시간 때우고 퇴근한단다. 얼마 전 닭 세 마리 덤탱이 쓴 직원은 내 눈치 보더니 자긴 좀 더 있다 간단다. (날이 추워 술 먹으러 가는 눈치를 캐치한 듯.) 그리하여 이리저리 남은 인원 챙겨보니 나포함 4명이 남는다. 버스 타고 가며 술 먹자란 의견에 콜! 을 외친다. 물론 30의 나이에 막내의 직함에 위치한 직원도 존재한다. 양꼬치집 가서 양꼬치 4인분에 꿔바로우(중국식 탕수육), 사천강장닭조림에 완자탕까지 먹는 식성을 선보인다. (더불어 소주 3병, 맥주 4병), 옆자리를 보니 가운데 칸막이가 채워진 홍탕 백탕에 담가 먹는 샤부샤부를 먹는 손님들이 보인다. 눈치 없는 막내직원 저것도 한 번 먹고 보고 싶다 한다. (너 잘 걸렸다.)
저것도 시켜볼까?/네!/ 근데 배부르네. / 그렇긴 하죠. / 그럼 다음 주 화요일 먹으러 다시 오지/ 그래요/ 먹고 싶은 사람이 사야겠지?/ 네?
순간 긴장하는 녀석. 그래도 이미 넌 빠져 버린 늪. 다음 주 화요일 덤탱이 카운트다운, 커밍 순......
이렇게 분위기 조성하고 양꼬치 집을 빠져나와 2차로 간사이 오뎅집에서 가볍게 도꾸리 한 병으로 대리가 쏘는 2차를 마무리했다. 아마 주말이 지나 다음 주 화요일엔 양고기 샤부샤부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봐야 알겠지만....
간사이 오뎅탕에 하얀 마후라 멋들어지게 목에 맨 도꾸리와 함께 한 2차...
내가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니다. 자판기 커피 한 잔, 껌 한 통, 하다못해 사탕 한 알이라도 잘 먹었습니다. 인사와 더불어 수줍게 내 손에 쥐어 준다면 난 그걸로 만족하는 인간형이다. 그것조차 아깝다면 남들과 함께 밥은 왜 먹고 술은 왜 먹을까. 먹는 걸로 난 언제든지 치사해질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도 철저하게 말이다.
뱀꼬리 : 그래서 말인데 실비님 책 한 권 고르세요. 해마다 아름다운 꽃 달력 받아쓰는데 인사정도는 해야 겠어용...^^ (에또 누가 있더라..누가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