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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ㅣ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평점 :
여기까지 예수님의 사역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조지프 캠벨님의 저작 《신의 가면 1 원시신화》로 돌아 보았다.
그의 주장으로는 샤먼은 온화한 마음이 속성이라지만 세계와 우주의 변화를 가져오는 자이며 진정한 자신을 깨닫기 위해 자아가 발가벗겨지는 상황에 긴 시간 놓인다고 한다. 길고 긴 시련의 길을 걸어야 하며 그 속에서 자발적이면서도 강제적으로 엄청난 고독을 감당해내야 하는 존재다. 비극이 고통에서 환희로 바뀌는데는 마음의 초점을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게다가 기괴한 사고라는 갑작스럽고 기묘한 죽음이 죄와 벌을 스스로 불러오게 한단다. 이것이 일상성의 기괴함, 신적인 기괴함을 돌아보게 하는 매개적 역할을 한다고 한다.
샤먼에게 나타나는 위기는 적절하게 육성하면 탁월한 지성, 세련된 태도, 훨씬 강한 육체적 에너지와 정신적 활력을 가져온단다. 이제껏 테러리스트 성자에서 말했듯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유대사회의 대부분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저항하셨다. 심지어는 그 과정에서 물리적 테러도 서슴지 않으셨다. 온화한 샤먼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사냥꾼 같은 자기과시적 폭력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화적 놀이를 위한 미성숙함이라는 전제이기에 미성숙함 자체가 축복이라고 조지프 캠벨님은 주장했다.
그러나 미성숙함과 성숙함이 어우러진 삶이었다고 여겨진다. 스스로 정치범으로 죽임을 당하기에 합당한 상황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자발적으로 몰고 가지 않았던가? 그의 모든 사역과 기록된 만큼의 발자취만 보더라도 그는 미성숙한가 싶으면 하나의 연출을 완벽히 이뤄낸 성숙한 영혼이셨다.
유대사회 속에서 유대문화의 한부분인 경제인들에게 낙타와 바늘구멍의 예를 들어 비난하셨고 유대교인들을 신랄히 비판하셨다. 그러는 과정에 성전 앞 환전상들과 비둘기 판매상을 테러하셨고 말이다. 아비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맞나?) 서로 대립하라는 말씀도 하셨고 예수님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가 찾아왔을 때 마저 신도들 앞에서 실제 외면해 버리셨다. (요리하다 지친 언니가 자기 여동생도 주방으로 보내 달라는 부탁에도 다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여동생이 미녀라는데 큐티 라이프 성경 책 한권을 건다.)
유대사회 지도층들이 예수님의 교세가 확장되는 만큼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도록 딱 그렇게 행동하셨다. 왜 그러셨을까는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공동연출로 완성된 수난과 십자가형과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그런 미성숙해 보이는 행동들이 성숙하게 안배되어 일어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상황이 다 지나고서야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며 "다 갚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며칠전까지 있던 정신과의 약품 때문에 안그래도 무안한 대뇌가 더 잘 돌아가지 않고 있지만 어쨋듯 마치려던 글을 끝맺으려 한다) 정신과에서 기독교 방송만 듣고 있던 707호 동기 어르신 때문에 (그 어르신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같은 707호 동기인 어르신 때문에 "다 갚았다"란 표현을 사용하는 목사님 설교 기독교 방송을 보았고 방 호실 마다 찾아다니며 히브리어와 헬라어도 아시는 분을 찾아서 물어본 것이다) "다 이루었다"란 말씀에 "다 갚았다"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앞서 누차 말해왔듯 그의 탄생은 이스라엘의 한도시인지 그 근방 전체까지인지의 신생아들이 모두 죽는 저주 같은 현실을 가져왔다. 또 유년시절의 예수님의 살인과 저주에 대해 외경의 내용을 언급했듯 자라는 과정에서도 그는 섬찟할 정도로 순수한 의식을 지니고 계셨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살해도 저주도 꺼리낌이 없으셨던 분이시다.
그러고 자라는 과정 중에 어떤 계기일지 몰라도 광야에서의 단식과 유혹 보다 더 먼저인 어떠한 계기가 분명히 선행했을 것이다. 어떤 계기가 선행했을지는 모르지만 사랑의 전도사이시던 예수님에게 이미 자신이 행한 타인들에 대한 살해와 저주가 이후 "다 갚았다"는 말씀을 하시도록 만들 정도 였다면 분명 목숨만큼 소중한 누군가를 잃으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상황이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말했던 "태어날 때 흐트러진 머리 속의 회전"을 바로 잡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것은 억측에 가까우니 살펴서 생각하시길 바란다.
조지프 캠벨님이 이야기하던 '기괴한 사고(사건)'이 성장해 가는 샤먼에게서 자주 살해의 형태로 일어난다던데 이 살해가 죄와 처벌의 형식을 띠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죄의식과 함께 전국면의 국면 전환의 성격을 가지려면 샤먼 스스로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찌된 것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어떤 계기가 있은 이후 광야에서의 단식과 시험이 있었고 그의 공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원시신화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길고 긴 시련과 고난 또한 엄청난 고통 위대한 고통에 해당하는 놀이가 완성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놀이 일수 있는 건 서양영화에 등장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행해지는 마굿간에서 태어나는 예수님과 동방박사의 조우를 유치부 아동 연극으로 펼치는데서나 또 성찬식에서나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전생애를 놀이라고 보아야 할 텐데 그토록 슬픈 연극을 누구에게 강요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미워지는 전제가 아닌가 말이다. 그 슬픈 연극 속에서 그분은 용서와 사랑의 화신으로 거듭 누구라도 마지막 한사람까지 용서하셨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까지 용서하고 가셨다는 말이다.
그의 생은 용서와 사랑의 구현으로 많은 이들을 사랑으로 가득찬 이들로 변모 시키려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사랑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회복하면 죽음 마저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란 걸 증명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도 준비 안된 이들과 흥을 깨는 이들에게는 깊은 의미를 숨겨주는 우화(우언)가 되었어야 할 아포크리파들이 기독교 내의 통합을 위해 졸지에 외경(아포크리파)이란 이름으로 대중의 눈 밖에 난 것은 과연 다행인 것인지 애석해 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함자에 히브리어 발음은 "예수아"라고 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축약형 발음이라고 하던데 '여호'라는 하나님 함자를 표기할 때 사용되는 접두사와 '수아'라는 "구원하다" "인도해내다"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에 야샤가 결합된 어휘라고 한다. '야샤'에 대해 '히브리어 종합사전'은 '존재의 기원을 밝히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들었다.
"예수아"라는 이름은 결국 "인류를 구원하고 존재의 기원을 밝히실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말이다.
사랑의 전도사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한 종류일지 감히 마음대로 단정짓기 어려운 어떠한 계기로 인해 인류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죄인들의 죄를 사하여 주면서도 자신은 '기괴한 사고'에 대한 죄의식을 수난과 십자가형에 처해서야 용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외치던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용서하는데는 그토록이나 버거워 하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보면 레니게이드가 떠오른다. 이 시대에 그분께서 다시 오신다면 엘리트가 아니라 날건달로 오실 것 같다. 아니다. 오히려 선입견을 깨고 엘리트로 오실지도 모르지만 날건달 성향을 버리긴 어려울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그분의 친구들인 크리스찬들이 쉽게 알아보긴 할지 모르겠다.
끝맺음이 불완전해 보이긴 하는데 여기서 마치려 한다. "어쩌다 어른"이란 방송을 보니 사람에겐 패턴완성을 하는 특성있다니까 미흡한 부분은 자신들의 지식으로 메우리라 생각하며 이만 접겠다.
-음! 잊고 나도 모르게 넘어간 주제가 있었다. 그건 조지프켐벨님이 생득적방출기제(모르시면 검색바람^^*)를 통해서라도 새시대의 새로운 통합신화가 완성 되기를 못내 기다렸음이 책 속에 은근슬쩍 비춰지더라는 것이다. 사람이 원인과 조건만 갖춰지면 누구라도 신화의 한부분을 시작할 수 있다고 저자는 꿈꿨던 것 같다. 그래도 호돈 단편 중 '큰바위 얼굴' 같은 긍정적 변화만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신지학회의 블라바츠키 여사 등이 크리슈나 무르티의 남다름을 알아보고 예수님과 같은 인물로 키워내려 하였으나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유로운 연설가가 되고 싶어했을 뿐이지 않나? (뭐!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오쇼라즈니쉬의 책들 중에 하나에서 읽었던 이야기다)
작위적으로 모조나비를 더 그럴듯 포장해 암나비들이 다 모여들게 만든다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다음세대가 태어날 수 없다. 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예수님의 재림을 바란다. 이 시대의 문제들에서 해답같은 사람을 기대할 대중들을 농락하는 그런 가짜 보다 가짜 빛에 더 반짝이는 사람보다는 기다리던 진짜가 진실로 오시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과거의 예언을 이 시대에 현실화 시키며 해결안 같은 가짜들을 제시하려고도 한다. 물론 조지프켐벨님이 바란 것은 조건을 갖추어 실제 메시아가 등장하는 현실이 보고 싶었던가 본데... 불완전한 인간의 의도와 노력으로 진실한 기적을 불러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예언대로 조작한다고 해도 가짜메시아 마저 조작하려는 노력은 그쳤으면 좋겠다. 어딘가에서 시대의 해결안을 하나하나 준비하며 자신의 현신을 대기하고 있을 진짜 메시아가 있을 것이라 믿어보자.-
미흡한 글 사람들의 패턴 완성 특성을 기대하며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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