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영지주의다 - 기독교가 숨긴 얼굴, 영지주의의 세계와 역사
스티븐 횔러 지음, 이재길 옮김 / 샨티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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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그노시스적 사유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영지주의에 대한 기본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분들께는 탁월한 선택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드려도 되겠다 싶다.

 

'그노시스'를 주로 '영지靈智'라 번역하는 데 학문으로서의 '그노티시즘'이 아닌 '그노시스' 그 자체란 무엇일까하는 의문에 대해, 저자는 그것을 분명한 경험적 근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라 정의하며 그 '경험'을 '환상적인 경험'과 '합일적인 경험'으로 분류하고 있다.

 

합일적 경험에 대해서는 이전 <유럽의 신비주의> 리뷰를 쓰며 동서양의 수행체계와 신비에 대한 인식의 근사성을 언급하며 논했었는데, 여기서 주의를 조금 환기 시키는 것은 '환상적인 경험'이다.

 

이는 서양의 마법 체계 중 백마법 장르에서도 중시하는 대목인데 카발라의 멜카바 명상을 근거로 한 백마법은 하나님의 진정한 천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백마법을 통해 체험함을 의도한 마법의 기법으로서 <모던 매직>의 저자 도널드 마이클 크레이그 씨는 영적 준비가 무르익으면 꿈과 환상을 통해서도 같은 체험에 이를 수 있노라는 식의 말을 했었고, <힐링드림즈>의 저자 마크 이안 바라시 씨 또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진일보시키거나 우리의 합일성을 자각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이는 신비한 꿈(자각몽)을 통해 우리가 성숙을 향한다는 언급을 하였었다.

 

'환상적 경험'이란 이러한 꿈과 환상을 통한 내적 장애들과 문제점들이 치유되며 내면이 함양되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것이 영지주의다>에서 언급된 '영지주의' 관련 정보나 저자의 식견 전체를 논할 수는 없지만 한가지만은 꼭 짚어 보아야할 것 같은데 책 전체를 꿰뚫으며 일관되이 저자가 논하는 창조된 세계의 '조물주'인 '데미우르고스'(얄다바오트, 사클라스, 사마엘)와 창조된 세계의 불완전성에 대한 저자의 주장들이다.

아포크리파의 내용들을 언급하며 이 세계의 창조자가 불완전한 존재이며 피조물인 우리를 이 세계에 한정지어 두기 위해 유혹과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묘사하며 그러한 불완전한 존재가 창조하였기에 불완전하고 황폐하기만 한 세계인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라고 저자는 경솔하게 단정 짓고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너희의 재산을 이 세계에 쌓으려 하지 말고 천국에 쌓으라는 식의 말씀을 하시며 이 세계의 한정성과 불완전성을 언급하셨고 부처님께서도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말씀하셨다. 허나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 하셨고, 부처님께서는 불성佛性에 대해 또 여래장如來藏에 대해 말씀하셨음을 종교관련 연구가인 저자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된다.

 

특히나 외경들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설파하셨다는 이 세계의 무의미함에 대한 언급들에 주목시키며 계속되는 저자의 논리는, 그럼에도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논지를 진행시키기 위해 접어둔 듯이 보이기만 하였다.

 

하나님이 직접 선택했다는 유태인들의 면면을 보면 (구약의 전체를 이루는) 그들의 역사는 실족과 폐륜 그리고 경악의 역사일 뿐이지 않은가?

이러한 불완전한 인간을 그리고 이러한 불완전한 인간들이 헤아릴 수도 없는 고통을 양산해내며 살아가는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주는 왜 만들어 내신 것일까? 이런 의문이라면 기독교 교리를 처음 접하거나, 오랜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신앙적 회의에 빠지는 순간 누구나 한번쯤 겪어보았을 것이다.

스티븐 휠러 씨라면 주저 없이 답변하리라 생각된다. 불완전한 창조주이기에 불완전한 인간과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해낼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불완전 했던 것일까?

창조주는 물질 세계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생명체를 창조함으로서 특히나 인간으로 대표되는 지적생명체들을 창조함으로써 사랑 정의 열정 따위의 감성에 기반한 것들과 관습과 도덕등 윤리의 모태가 되는 것들, 법률, 사상, 과학, 문화 등등 모든 비물질성 마저도 창조한 것이지 않은가?

이 세계에서 가능한 모든 인간의 사유와 선택으로 야기되는 무한에 가까운 자유도 또한 창조론적 관점 하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은 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 그 모두를 양산해내며 이 세계에서 발전하고 갈등하고 좌절하고 재기하고 그렇게 희망과 절망을 거듭하며 성장해 오지 않았나?

(물론, 현시대 상황만으로는 발전을 말하기엔 모호하지 않나 싶지만...)

 

이것은 동양의 음양론이나 또한 같은 의미일 서양의 대대(원어로는 뭔지 모른다. 찰스 폰즈의 <카발라>에서는 대대라 언급한 음양에 해당하는 개념)를 떠오르게도 한다. 인간은 이 세계에 헤아릴 수도 없는 문제들을 양산해내지만 또한 그 헤아릴 수도 없는 문제들을 통해서 또는 그것에 저항하거나 그를 해결해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하지 않는가? 

 

인간을 관계성의 원리(불가의 緣起)를 통해 영구적으로 끊임없이 문제의 양산과 성장을 거듭해 가는 존재로 제작한 것은 하나님의 탁월하신 계획이지 불완전함이 아니라 여겨진다.

 

-불교에서 부처님 가르침이 일승(깨달음과 그에 이르는 과정)을 말씀하시기 위해 삼승(일승에 3가지 다른 방편이 있다는)을 말씀 하신 것과 같이...

각자의 근기와 오성(달리 표현하자면, 내적 수위와 이해의 정도)에 따라 점진적으로 가르침의 수준을 달리 하신 것과 같이...

영지주의 또한 캐논(예수님 사망과 부활 200 여년 후부터 몇 차례에 걸친 종교회의의 결과 정립된 현재의 구약과 신약경전, 그 이전에는 <아포크립파>라 불리는 외경과 동등하게 전혀 구별없이 통용되었다고 한다)과는 다른 가르침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가르침의 방식과 정도를 달리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像이 정형화 될 수 없음을 상징으로서 전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리라. 그것이 서양인 특유의 정언적 논리에 부합되며 저자가 지적하는 무한한 하나님과 유한한 하나님(저자가 말한 불완전한 하나님)체계(카발리즘)를 탄생시킨 것이리라.-

 

아담과 이브가 실락을 맛본 것이나 카인(형제를 죽이고), 노아(하나님의 지시로 방주를 통해 살아남는 은혜를 받고서도 술주정뱅이 짓이나 하였다), 아브라함(죽음이 두려워 자기 아내를 여동생으로 속여 다른 남자들에게 보냈다, 하나님이 죽이란다고 제 자식을 죽이려했다), 롯(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제외되는 혜택을 입고도 가장 먼저 근친상간부터 했다), 여호수아(하나님의 지시라며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 연령과 성별의 구별없이 각지의 사람들을 전멸시켜 버렸다), 다윗(부하장수의 아내를 탐해 부하장수를 죽을 것이 뻔한 전쟁에 고의로 출전시켜 죽이는 등 부도덕함이 극치에 이른다), 솔로몬(하나님으로부터 세계 제일의 지혜를 은혜로 받고도 결국 배교한다)등등 구약 전체를 꿰뚫는 인물들을 보더라도 하나 같이 문제 많은 인간들일 뿐이다. 그리고 현시대만 보더라도 이제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숱한 문제들이 심대하게 인간을 역습할 숙명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문제 많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인간은 제 몫의 삶 속에서 아프게나마 성장해 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지 않은가?

신약에서 예수를 죽이라 하나같이 사주하고 아우성치던 무리들도 바로 유태인들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2000년이 넘도록 우리 가슴 깊은 곳에 메아리로 울리고 있는 한 인간의 사역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상징성을 몸소 보여준 이 또한 유태인... 바로 그들 중 한명이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면모 중 하나라 여겨진다.

 

이 시대에 만연하는 기아와 질병과 전쟁과 기만 등 이기주의와 무관심으로 확장에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문제점들도 그리고 나날이 점증하며 보여지는 대재앙의 전조들도 이미 요한계시록이나 4개 복음서에서도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한 내용들과 일치하고 있다. 이전에 이미 언급하였듯 나는 이것을 의도된 것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적 유도 역시 진실로 이를 기획한 분의 자기충족적 예언이 완수되는 요소이며 이것이 진정 새로운 시대로의 전제일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기독교의 바이블이나 불교의 경전들을 근거해보아도, 이 불완전함 속에서마저 우리 안의 것을 우리가 낳을 수 있는 구조로 우리를 만든 것이 하나님임을 자각할 시대가 되리라 못내 기대된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환희의 송가>가 울려퍼질 그 순간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두루 도는 화염검이 생명나무를 지키도록 한 하나님의 지시 또한 때가 이르러 준비된 후의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취하게 되기까지,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을 인간에게 임하도록 하려 않은 하나님의 배려이신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피조물까지도 자신과 같아질까 봐 질투하는 하나님의 모습 따위는 정말이지 불완전함에 머물기에 지루하지 않은 인간이나 지니고 싶어 만든 논리가 아닐까?

 

자신과 같아질까 두려웠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본따 우리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자(창세기 1:24)"며 인간을 자신과 같은 구조로 만들었겠는가?

 

인간이 '불완전하다' 인식하는 것도 하나님의 완전함 속에서는 인간을 완성시키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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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17-08-1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 사이트에 2007년 5월 18일에 올렸던 것을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