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철학하다 - 삶은 어떻게 글이 되고, 글은 어떻게 철학이 되는가
이남훈 지음 / 지음미디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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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가는... 비루한 개인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결연한 의지와 선택으로 저마다의 삶을 추구하는 기도하는 인간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계의 변화에 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기도project란 종교적인 기도pray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한다. ‘자신을 던져서 만드는 근본적인 기획이라는 의미라고. 글쓰기가 주제이다 보니 이에 대해 저자는 글쓰기에 한정해 말한다.

 

결국 작가라는 존재는 자신을 글쓰기에 던져 스스로의 실존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독자와 세계의 변화를 기획하는 인간인 것이다.’

 

우선 사르트르의 시각에서 공감 가지 않았던 부분은 비루한 개인이란 말이었다. ‘비루하다는 말의 뜻을 보면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는 뜻이다. 사르트르의 이 말은 개인의 가치를 폄훼하는 말이라 할 수 있는데 비루한 인간은 있을 수 있겠으나 모든 개인이 다 비루하다는 건 개인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지 않나싶다. “홀로 충만할 수 없는 존재는 타자 속에서도 공허할 수밖에없지 않나 싶다. “혼자인 순간 진정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고, 진정한 자신의 본성과 마주하려 하며 얻는 각성은 홀로일 때에야 비로소 다가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기도는 개인으로서 깨우침을 얻은 이후에야 가질 수 있는성취이기에 사람은 홀로인 자신을 마주하며 진정한 나로서 먼저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이후에야 너 곧 타자와 세계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흐리멍텅한 나, 모호하고 혼돈스러운 나로는 타자를 이해할 수도, 세상을 인식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홀로인 순간들을 통해 나를 찾아야 그제야 너를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보다 본서 작가분의 말씀이 더 와닿는데 그 까닭은 글쓰기에 자신을 던져 자신의 실존과 독자와 세계의 변화를 기획한다는 말 때문이다. “글쓰기도 홀로 충만할 수 있어야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글쓰기 자체가 홀로인 순간을 충만하게 해 주는 요소이지 않을까싶다.

 

그런데 실존은 무얼까? 철학은 다소 친하지 않은 터라 실존이란 말도 익숙치 않았다. 들어보기는 자주이지만 의미를 몰랐었다. 본서에서 사르트르의 말이 등장하기 직전 저자는 실존에 대한 정의를 먼저 전했는데 프랑스 철학에서 말하는 엑지스땅스existence’라고 하는 이 말의 뜻은 직역하면 밖으로 서다’, ‘밖으로 나타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뜻에 대해 저자는 그냥 단순히 있는 것을 넘어서 어떤 지향성, 역동성, 의도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부연하는데 실존은 공간상 시간상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내려 하고, 하고 있는 상태라는 뜻이라 다가왔다.

 

본서는 아무래도 글쓰기 관련서이다 보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본서에서는 경계라는 표현으로 인용되었다)라는 아포리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저자와도 비트겐슈타인과도 견해가 다르다. “언어 자체가 한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타자 또는 타자와의 연결 또는 타자와의 교류로 만들어진 시공간으로 정의한다면 언어는 이 세상을 잇는 불완전함과 오류 그 자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어휘를 사용하며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에 속한 개념 자체가 서로에게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간과한다. 누군가에게 있어 아버지의 의미와 다른 누군가에게 있어 아버지 의미가 언제나 같을 수는 없다. 희생하는 분으로서의 아버지와 화자에 따라 자기 딸인 자신을 어린 시절부터 성적으로 유린한 존재인 아버지가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윤곽뿐인 원형적 의미만으로 소통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싸워서 쟁취하는 성과물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휴식과 안정을 의미할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안정을 넘어서는 축복일 수도 있다. 더더 다른 누군가에겐 사랑도 성가신 감정 낭비를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이다. “사소한 하나하나의 의미가 다르다면 맥락을 이해하면서 주고받는 대화도 불완전한 소통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노력 자체가 무용하달 수 있다. “세상은, 어쩌면 우주는 서로가 이해를 바라지만 오해뿐인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도단 불립문자의 경계에서라도 이해에 다가선 역사를 보지 않았나?”

 

서로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을 포기하면 우리는 오해로도 가닿을 수 없다. “오해란 것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 이어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타자라는 우주를 자신 나름의 빛깔로라도 해석해 볼 수 있다.” 아기를 재우고 잠시 마트에 간 아기 엄마가 돌아오는 길에 집에 불이 난 걸 보고 놀라 소리치면서 자신의 머리칼과 살이 타고 녹아드는 데도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심정을 우리는 감히 글로 표현해낼 수 없다. 그리고 병상에서 피투성이로 죽어가는 아기를 보며 울부짖는 부모에 심정을 글로 어떻게 다 담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글로 소방시설 점검을 촉구할 수도 있고 불조심하자는 각성을 일깨울 수도 있다. 음주운전이든 운전 부주의든 처벌을 강화하자고 아이들이 안전한 통학을 하도록 바꾸자고 기획도 슬로건도 만들 수 있다. 한강이란 작가처럼 소설로 역사 속 사람들의 아픔을 헤아려 볼 기회를 전할 수도 있다. “말이 곧 행동이고 행동이 곧 말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자각하고 서로에게 일깨울 수 있다는 말이다. 오해가 두렵다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과 세상을 향한 다가섬을 체념한다면 우리에겐 타자의 마음을 자기 내면에 그려보고 분석해볼 기회마저 사라진다.

 

우리는 문학으로도 인문학으로도 때론 과학 교양서로도 자신과 타자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걸음을 딛는다. 때로는 독자가 되어 때로는 글쓰는 이가 되어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서로에게 향하게 된다. 이건 달에 인류 최초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보다는 새롭지 않을 일이지만 그보다 더 의미로운 걸음일 수 있다. 저자는 퇴고란, ‘나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내 글을 읽는 타인의 정체성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했다. “서로라는 우주로 향하게 해 주는 노력의 하나가 바로 글쓰기라는 말일 것이다. “진정한 나로 바로 서는 일과 서로라는 우주로 다가서는 걸음을 글쓰기란 작업으로 해보고 싶은분들이라면 본서의 글귀들에 일깨움과 사유가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의미로운 감상에 이르시는 분들께는 나에게도 서로에게도 나은영향을 줄 책이니까.

 

덧붙이며 이 책과 함께 우주님이 개설하신 우주소설클럽에서 소설쓰기를 해보았다. 오래 창작활동을 안 하게 되었었는데 이번 기회로 다시 뛰어들었다. 작년 9월 이후 소설쓰기는 중단했었다. 이 책의 서평단 모집과 함께 더해진 우주소설클럽은 우주님의 창작 조언과 함께 다시 창작의 의지에 불꽃이 일게 했다. 오랜만에 쓰는데도 마감 기한도 있는 관계로 활력적으로 임하게 된 듯하다. 평을 구체적으로 해 주신 것도 많은 격려가 되었다.

 

글쓰기는 어느 장르던 정신과 마음을 다잡아주지 않나 싶다. 본서의 퇴고에 대한 장에 따르면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세계와 너에 대한 어렴풋한 공감과 연대감이 생긴다는 해석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전에 자기 이해와 자기 정화를 경험하게 해 주는 게 글쓰기라는 감상이 크게 남는 시간이었다. “나를 찾는 길, 나에게 평안을 주는 길, 스스로로부터 위로받으며 치유되는 길... 이 모두가 글쓰기로 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본서도 이번 모임도 많은 여운을 남긴다. 창작활동을 앞으로도 게으르지 않게 이어가야겠다.

 

@woojoos_story 모집, @ziummedia 도서 지원으로

우주클럽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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