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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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世間,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라,
情爲何物, 정이란 무엇이길래,
直敎生死相許  이처럼 삶과 죽음을 서로 허락하는가?

 

금나라 시인 원호문의 안구사雁丘詞라는 시의 첫 소절이다. 이 소절은 신조협려를 읽어본 김용 작가의 팬들이라면 누구라도 잊지 못할 한 소절일 것이다. [헤어질 결심]은 이 시와 신조협려를 떠오르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존 트라볼타와 셀마 헤이엑의 2006년 작 영화인 [론리 하츠 Lonely Hearts]도 떠오르게 만든다. 그 사랑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과 씁쓸함이 기억 속의 이 작품들과 맞닿아 버리는 것이다.

 

 

농담 안 할 테니까 해준 씨도 솔직히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날 떠난 다음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마 살아있는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당신은 내내 편하게 잠을 한숨도 못 잤죠?

억지로 눈을 감아도 자꾸만 내가 보였죠?

당신은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날 밤 시장에서 우연히 나와 만났을 때,

당신은 사는 것 같았죠? 마침내.

 

서래가 번역기의 힘을 빌려 해준에게 물었던 이 물음들에 대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지난 세월 어디에선가 대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이들도...

삶에서 사랑을 뺀다해도 물론 무슨 맛이든 맛은 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빠진 맛은 커피에서 커피 맛이 사라진 것과 무엇이 다를까?

 

보이지 않을 곳들 뼈만 골라서 부러뜨리던 깔끔한 남편 기도수는 서래의 몸에 자신의 것이라는 낙인을 찍듯 KDS라는 문신까지 새겨넣었다. 그런 남편과 살던 그녀였기에 해준이 그녀에게 신문 이후 사준 사시미가 친절하고 다정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해준 역시 처음부터 그녀가 남달랐기에 그리 대접한 것일 테고. 길고양이가 까마귀 사체를 먹이의 답례로 놓아 둔 이후에 그녀의 대사나 그녀의 말을 번역해 들어 보려는 해준의 잔망스러움도 감정의 오고 감이 거듭 느껴지는 연속들 사이에서 인상 깊던 부분이다. 자신을 감시하려 잠복 아닌 잠복하던 그에게서 그녀가 느낀 심정은 후에 대사로 전해지기도 하는데 그녀의 마음을 이미 짐작했지만 그녀의 고백으로 듣는 심정은 더 깊이 와닿았다. 임호신과 재혼한 그녀의 심정도 이해가 갔지만 역시 그녀 자신의 입으로 들으면서 더 깊이 와닿았다.

 

해준 (답답하다는 듯 약간 톤이 올라가서)

왜 그런 남자하고 결혼했습니까?

 

서래 (눈에 힘주고 똑바로 보면서)

다른 남자하고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 대사 속 다른 남자는 다름 아닌 해준을 이야기하고 그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는 그녀의 면면은 그녀가 결코 그와 헤어질 인연이 아니었고 헤어질 마음도 진심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극의 대미에서 보여준 그녀의 최종 결정은, 그녀의 마지막 결심이 헤어질 결심이 아니라 하나될 결심임을 확인시켜준 것이라 생각됐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녀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결코 헤어질 수 없는 불멸의 연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그녀에게 해준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대사도 인상적이었다. 론리 하츠란 영화가 깊이 연상된 것도 다음 대사 때문이다.

 

서래 나는 왜 그런 남자들하고 결혼할까요?

...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랑 결혼해 주지 않으니까.

얼굴 보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살인 사건 정도는 일어나야 하죠.

 

시나리오 중반의 서래가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라고 말하고 나서 해준의 대사는 거기까지 각본을 읽는 동안엔 그냥 지나치게도 되었는데 그 대사의 깊음을 극의 종반에 이르러 그것이 얼마나 깊은 사랑 고백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했다. 하지만 인용해 옮기지는 않겠다. 스포일러를 최소화하려 하지만 그런데도 스포일러가 넘치고 있는 이 리뷰에 최소한의 양심을 담아 남겨 두어야 할 대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나에게 선물을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이 말은 극 초반의 서래의 중국어를 번역해 남자 성우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대사로 길고양이만이 아니라 해준에게 꼭 전해져야 할 마음이었고 다행스럽게도 해준은 그녀를 따라가 그녀의 그 말을 녹취해 번역해서 듣는다.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씬들이 잦지만 그녀의 대사와 해준의 집요함이 드러나는 이 장면은 그 중에서도 백미가 아니었나 싶다

 

나로서는 이 영화의 스토리 자체와 스토리 보다 튀지 않고 짧은 사랑 이야기를 잘 담고 있는 대사들도 마음에 들었다.

 

해준과 서래 둘 다가 이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사랑의 정의를 온전히 실천하고 있는 인물들이라 여겨졌다. 사랑이 얼마나 거대한 깊은 원형인지를 다시금 깊이 느꼈다. 각본집부터 보게 되었지만 꼭 영화를 보고 싶어지기도 했다. [헤어질 결심]을 읽으며 까만 밤이 보랏빛이 되었다.

 

 

아니다, 소화야... 아니야... 진정 용맹한 행동은 사랑이야.

 

사랑은... 그 외 다른 모든 것의 포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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