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최면세뇌술 - 마음을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
박한진.손인균 지음 / 성숙한삶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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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며 1980년대~1990년대에 출간된 최면 서적들에서의 내용이 줴다 구버전이 되어버린 걸 알았다. 이젠 최면에 대한 학자들과 치료가들의 시각이 "최면은 일상 속 의식에 자연스레 개입하는 것이다" 란 식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맨 위 부터 읽어 보면 "최면을 통한 의식의 통제로 기억이 없이 행동하게 하는 것과 자신은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아마도 이건 비판적 사고라고 말한, 검열을 거치는 체계를 무력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야 한국에서 쓰이는 최면 암시라는 말이 일본을 통해서 최면이 들어오며 통용되던 용어이고 서양에서는 최면 제안이라고 하는 줄 알게 되었다. 암시는 어두운 지시를 말하는 것이니 "피최면자가 자신도 모르게 최면자의 의도 하에 놓일 수 있다" 는 의미 전달일 것이다. 또 제안이란 표현은 "인간은 의지가 있기에 자기의지에 반하는 지시나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우는 없다. 그저 인간의 의지를 향해 하나의 제안을 할 뿐이다" 라는 관점이 담긴 용어인듯하다.


그러나 본서에서 비판적 사고를 우회하는 최면 제안을 통해서, 받아들일만한 사고를 구축하면(선택된 사고를 확립하면), 의지(의도)를 조작해 살인도 할 수 있다고 도입부분의 부록란에서 이미 저자가 언급했었다. 자신이나 타인의 취향과 도덕성을 최면 제안으로 왜곡(우회)하여 의지(의도)를 조작할 수 있다고 저자 역시 인정한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은 왜곡(비판적 사고를 우회)하여 의도를 조작했기에 그런 것이지, 결국은 최면 제안은 하나의 제안일뿐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라는 식의 사실호도는 어떤 의도가 있어서일까? 이건 최면의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간과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밈MEEM이 아닐까? "최면은 위험하지 않고 인간의 의지는 강력하다. 최면도 그저 하나의 제안일뿐, 결국 너희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으로 저항할 수 있으니 최면이 악용되는 것에 우려할 필요는 없다" 는 대중적 기만을 펼치기 위한 것일듯 싶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집단자살을 한 과거 이단종파들이 각국 마다 적지 않았다. 또 한번 1000년의 끝을 앞두고 무언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심리의 연약함이 사이비교주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그 사이비교주에 대한 무한신뢰가 결국 교주의 말과 행동에 따라 대량학살과도 다를 바 없는 집단자살을 불러오기까지 한 것이다. 최면은 그저 제안일 뿐이라기엔 과거 팔극권 서적에서 보았던 이서문 권사의 일화가 떠오른다. 제자 한명과 타지역으로 떠나신 권사를 어느 부호가 알아보고서 절대극강 권사로 알려진 이서문 권사에 대한 호의를 보이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했다고 한다. 그의 집에서 환대를 받은 이서문 권사께서 그에게 호의에 대한 답례로 팔극권을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헌데 "이렇게 출수하라" 며 그의 몸에 권을 타격하는 자세를 취하자 그 부호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호의를 보이고 대접한 부호를 타격해 죽였을리도 없고 만일 실제 이서문 권사께서 타격하여 죽은 것이라면 아마도 생사장을 쓰고 대결한 결투가 아니었기에 분명 이서문 권사께서 법적 판결을 받고 수감된 고사가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사망한 이가 타격을 받아 죽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그 부호는 도대체 왜 죽은 것일까? 그저 추측일지라도 해보자면 그 시대 이서문 권사가 절대강자임은 전중국에 다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 이름난 영웅들을 우상시 하는 중국문화에서 그 부호는 이서문 권사에 대한 존경과 동경이 하나의 최면 작용을 하여 이서문 권사가 자신을 타격하는 동작을 취하기만 했는데도 놀라서 죽은게 아닌가 싶다. 


다른 예로는 과거 사형수에게 사형집행 방식이 손목의 동맥을 잘라 출혈과다로 죽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며 의자에 묶고 눈을 가린 채 손목에 작은 생채기 정도를 내고는 손목 위에 링거를 설치해서 거기서 조금씩 손목으로 물이 흐르게 했다고 한다. 사형수는 몇십분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고 한다. 링거에서 떨어져 흐르는 물을 자신의 피라고 생각하고는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는 상상만으로 죽고만 것이다. 이 두 경우는 모두 실화이고 인간심리가 그저 믿기만 하면 죽음 마저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번에는 실화는 아니지만 누구라도 수긍할 법한 그럴싸한 예를 하나 만들어 보자. 밤 늦게 시골집에 홀로 있는 심장질환을 앓는 노인이 있다고 하자. 이 노인이 하얀 잠옷 원피스를 입은 동네 광녀 하나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치자. 밤이라 누군지 못알아 보고 놀라 겁을 먹고 있는데 이 정신 이상한 여자가 입가엔 빨간 립스틱이 눈가엔 눈화장이 번진 채 다가온다면 노인은 더 놀라지 않겠나? 그 때 그 여자가 "죽어버려!" 라고 소리쳤고 이 노인이 심장 마비로 죽었다면 이 심장마비의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심장이 약해서?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심장이 약한 것도 하나의 조건일테고 그 노인이 그 정신이상한 여인을 귀신으로 보았다는 것과 그 귀신이 자신에게 죽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귀신의 말에는 힘이 있을 것이라는 밈MEME까지 모든 오해가 심장질환에 더해져 일어난 현상일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최면 제안이 비판적 사고의 검열 과정을 피하기 위한 딱히 치밀한 체계나 구성 없이도 개인이나 집단에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신념(MEME)에 따라 별다른 저항없이 강력히 작용하여 신속한 결론에 이르게 한다는 증거일 수 있다. 팔극권 이서문 권사의 일화에서는 이서문 권사에 대한 존경과 동경이 최면 제안(타격하는 시늉)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고, 출혈과다 사형집행 설정으로 사형수가 사망한 경우는 눈을 가리고 손목의 작은 생채기를 내고 물을 손목으로 떨어뜨리는 설정을 통해 자신의 손목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착각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사망에 이르렀다. 단지 동맥을 끊어 출혈과다로 사망하도록 사형집행방식이 결정되었다는 최면 제안이 인지판단오류를 가져오고 위에서 언급한 설정이 극도의 정서 동요를 불러왔다는 것만으로 사망한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심장마비 사례는 비판적 사고의 우회를 거칠 수 없을 직설적이기만 한 "죽어버려!" 라는 말이 최면 제안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 광녀의 차림을 보고 심장병이 있던 노인이 귀신으로 착각을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심장병이 일차조건이라면 귀신으로 오해해 공포를 느낀 것은 충분조건이 되었다 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신념이나 의도적 비의도적 환경 왜곡(설정, 착각)만으로 별다른 최면 제안의 구조화없이도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도입부의 주제로 돌아가 보자. 저자는 '기억없이' 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지각없는 사람" 등의 표현으로 쓰는 "지각" 을 적용해 보자면 "최면으로 과연 지각없이 자신의 의사와는 달리, 의도와는 다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게 가능한 것일까?"


나로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고 생각한다. 정규 최면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 최면학회에선 아마도 "최면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은 착오이며 미신일뿐이다. 최면은 인간이 인간의 의지와는 다른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주술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의사를 통해서야 실현되는 것이다" 라고 가르칠듯 싶다. 


이 시대는 "인간의 의지는 강력하다. 인간의 의지로는 못할 것이 없다. 정신력만 강하다면 자신의 의지로 극복 못할 것이 없다" 는 인간의 자기만족적 관점을 명분삼아 자기확신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서 하는 자신의 모든 태도와 판단과 행위에 있어서 자신만이 스스로의 의식과 의사와 행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모든 것은 자신만의 책임이다" 라는 오류에 가까울 논리를 대중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며 모든 대상과 자기자신에 대해 분석과 판단과 행위를 함에 있어... 다시 말해 개인 스스로의 의식과 의사와 행동에서 자기통제력만이 절대적으로 강력히 작용하는 것일까? 


이 시대에는 인간의 자기만족과 매체들의 대중적 심리조작 유도가 더해져 그런 관점과 논리를 대중화 하고 있다. "모든 것은 그저 제안이며 판단은 각각의 개인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해당 개인에게 있다" 이런 논리와 관점은 대중을 통제하면서도 책임은 회피하기 위해 만든 또 다른 최면 제안이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오히려 심리학이론을 마케팅과 대중심리통제에 적용해 대중을 기만하고 이용해 쳐먹는 얍삽한 시대이다.


이 시대는 자기 확신은 강화하여 자기만족감은 충족시키지만 오히려 서로에게 서로가 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 유도 또 특정집단이 개인이나 대중에게 의도를 지닌채 의사결정에 개입할 수 있음을... 바로 그 원리의 대중심리통제를 이용해 간과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개인과 집단의 분석과 판단과 행동에 타자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이 하나의 학문으로까지 완성되어 있는데도 대중들은 자신과 집단이 통제 받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위의 마지막 포토의 내용에선 이미 저자가 처음 최면에 대해 정의한 "최면은 자기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지각없이 맹목적으로 따르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내용을 저자 스스로 반박하고 있지 않나? "최면 제안을 따르면 현실세계에 대한 반응성이나 현실성이 떨어지고 최면가가 체험하도록 한 가상의 세계에 대한 반응성과 현실성이 높아진다" 고 말이다. 한마디로 "실제 사실 보다 오히려 최면으로 유도하는 가상의 것들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는 말이다.


실제 사례 하나를 들자면 타인(여기서는 절친)에 대한 신뢰가 이차적인 인지판단오류를 띠게 되는 경우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여자문제에 있어 그리고 항상 판단에 있어 신뢰감을 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오래 전 사진 두장을 보여주며 이런 여자랑 사귀다가 이런 여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던 적이 있다. 아직 어린시절이라 결혼을 생각할 나이가 아니었고 그 이후에도 그 친구는 늘 다른 여성과만 사귀었었지 결혼하겠다던 여성과 사귄적이 없었기에 지나가는 말이었나 보다 했었다. 그러다 두번째 사진 속 여자와 교제하게 되었다. 친구는 이 두번째 사진 속 여성에 대해 순진하고 자기관리 잘하고 단정하다고 칭찬만 했었다. 이런 말들이 그 친구에 대한 신뢰도로 인해 뇌리 깊숙히 새겨져서는 이 여성과 교제하고 얼마 안되어 바지 속으로 손이 들어오는데도 불구하고 "아! 얘는 너무 순진해서 남자 몸이 궁금해서 이러는 거야" 라는 말도 안되는 해석을 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일종의 확증편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에 대한 믿음과 친구가 여성을 보는 관점에 대한 신뢰가 어우러져 친구가 그녀에 대해 내린 단정이 최면 제안이 되어 나 자신의 지각을 상실한 채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불러온 것이다. 세상에(적어도 대한민국 내에서라도) 만난지 며칠만에 남자 바지 속으로 손을 넣는 순진한 여자는 없을테니 말이다. 


이것은 사람을 긍정적으로 단정지은 확증편향이었지만 이와는 반대로 부정적 확증편향이 있을 수 있다. 외모와 말투만 보고 어린소년과 손을 잡고 가는 아저씨를 보고 아동성애가 있는 게이인가로 오해 할 수도 있다. 그 이후 뭘해도 나쁘게 해석했는데 알고 보면 정신지체아동을 돌봐 주고 있었던 것을 오해한 상황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처음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본 직후 누군가가 오해의 소지가 될 언급을 거듭 한다면 이런 경우 좀처럼 그 오해는 풀릴 수 없을 것이다. 풀리기 보다 오해가 더더욱 커져가고 골이 깊어져 갈 수 있다. 여기까지는 개인에게 최면이 악용될 수 있는 경우였고, 이제 사회불안 가중 차원에서 보자.


최면을 통해 "'너는 선택 받은 인간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높히 쓰려고 네게 고난과 시련을 주시며 이 모든 것은 네가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끝내 예언과 이적을 성취하게 하는 것이다' 라는 최면 제안을 지속적으로 말과 그러한 정서적 동요를 불러오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거듭한다" 면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예언의 완성이라 믿으며 비판적 사고(검열 작용)와 지각을 상실한 채 행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이와 유사한 각도의 최면 제안이 종교적 신념이나 투철한 사상적 신념과 더해지면 몇백명이 집단자살을 하기도 하고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와 학살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히틀러를 통해 세뇌된 인간들이 선동되어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면서도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던 것도 군중심리와 최면 암시가 더해질 때의 폐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심규선씨의 《너의 존재 위에》 란 노래 마따나 누구든 "나의 존재 위에 나의 의지를 넘어서는 이를 두어선 안될 일이다" 그런 존재에게 언제든 통제권을 넘겨주고 압도 당하는데 자유의지를 사용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말이다.


최면은 고도로 집중한 상태이며 의식과 의지가 명료한 상태라 저자는 말했다. 이 『요가수트라』의 "요가는 의식을 통제하는 것이다" 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도 간과한 것이 있다. 요가에서도 "요가수행 과정에서 '아나하타차크라' 였던가(?)가 각성되면 '상상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은 세상을 바꾸기도 파괴하기도 하지만 자기자신에게 있어서는 그 보다 더 신속하고 총체적인 파괴력을 행사할 수 있다. 게다가 "비판적 사고를 우회(왜곡) 해서 없던 신념과 신앙 마저 심어줄 수 있다" 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다면 "개인뿐만이 아니라 집단의 의지(자기통제권)도 얼마든지 누군가의 마음대로 제어될 수 있다" 는 것도 수긍해야 할 일이다. 
 
 

 

 
특히나 인간의 안정과 안전을 추구하고 행복을 바라는 바람에다 사람들 내면의 원형상까지 이용한 최면 제안들은 꼭 말이 아니라 사회환경 변화와 영화와 드라마 등 매체를 통해서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형성된 신념(프로그래밍된 MEME)이랄까 행동을 유도하는 강제유입 자원들은 현실과 정보를 해석하는 하나의 필터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필터링을 거치면 결국 누군가가 의도한 바대로의 행동(결과)을 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와 목적을 띠고 언제든 지속적으로 개인과 대중에게 악용될 수 있다. 1930년대 부터 미국은 대중심리통제부서를 두었었다. 독일에서는 2차세계대전 당시 괴벨스라는 대중심리통제의 귀재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서양에서는 근래까지도 공식적으로 LSD라는 향정신성 의약품까지 동원해 사람의 심리를 통제하는 연구에 투자를 적지않게 해 왔다. 이제는 미국과 영국을 시작으로 대중심리통제부서를 신설해 행동경제학자들에게 지휘권을 주어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중심리통제의 필요성과 그 파급력을 충분히 실감하고 검증해 본 서양세력이 끝내 국민들의 저항도 받지 않을 학문적 근거를 바탕으로 합법적 조직으로서의 대중심리통제기구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향후엔 유럽과 북미를 너머 세계 각국 정부에서 너나할 것없이 대대적으로 대중심리통제부서를 신설하여 운영할 것이다. 세계 각국 정부가 대중의 의사결정에 개입하여 판단을 유도하는 것을 연구하는 행동경제학을 동원해 합법적인 대중심리통제를 하면서 저항도 받지 않을 것이다. 
 

 

 
환경과 정서를 유도하며 최면 제안과도 같을 신념이랄까가 자신의 해석인양 솟아나오도록 치밀하게 유도해 가면 사람은 최면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타인과 타집단에 대한 공격성향을 띠게 된다. 또 정의라는 얼토당토 않은 역설적 주장을 내세우며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도 서슴치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일상과 일상 속 매체들에서 의도를 지닌 최면 제안들이 거듭되고 있지는 않은지 늘 숙고하며 살아가야 할 일이다.


※ "최면은 인지능력이 흐려지는 상태가 아니며 오히려 내적인 현상에 대해 명료하고 강력하게 인지할 수 있는 상태다." "최면은 고도의 집중 상태다. 의식와 의지가 명료한 상태다. 의식의 초점이 내부로 향하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반응이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보다 더 높은 상태" 라는 맨 위에서 두번째 세번째 포토를 보자. 최면과 명상의 차이를 찾을 수 없는 문장이다. 과거 부터 "명상은 최면과 다르다" 는 주장이 늘 있어 왔다. 


하지만 명상, 기도, 최면을 볼 때 어느 노선까지는 동행을 하고 있다가 세갈래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 갈래 길에서 깨달음이나 사마디를 추구하면 명상이고, 하나님을 향하면 기도이고, 제안(의도)을 통한 결과 도출을 향해 가면 최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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