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다영은 뭔가 따듯하면서도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이불 속 같았지만 자기방 이불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하지만 자기방이 분명했고 이불도 3년째 덮고 있는 자기 이불이 분명했다.


-아! 머리야.


다영은 숙취보다도 머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무슨 머리가 이렇게 아파?


다영은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혼잣말을 하며 일어났다.


-엄마.


다영이 거실로 나서며 엄마를 찾았지만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엄마 방으로도 가봤지만 방에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다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없었던 적은 없었어서 더 더 걱정이 됐다. 


다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베란다 쪽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다영 엄마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베란다에 쓰러져 있었다.


-엄마! 괜찮아! 엄마 어떡해.


다영은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를 안고 흐느끼다가 달려 나와 집 전화 버튼에 119 번호를 눌렀다. 



8


병원 응급실에 다영 엄마가 누워있고 다영이가 옆에서 아빠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아빠, 언제 오는 거야. 이럴 때 아빠가 없으니까 더 무서워. 의사 선생님은 검사할게 많다는데 엄마 의식도 돌아오지 않았어.


-아빠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네가 침착하게 엄마 옆에서 보살피고 있어. 우리 딸 다 컸으니까. 할 수 있지.


-알았어. 근데 엄마 아직도 눈을 안 뜨셔. 엄마 이러다...


-불길한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엄마 괜찮을 거야. 니가 잘 보살피고 있으면 아빠가 가면 엄마 곧 일어날 거야. 아니 그전에도 일어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았지. 


-응.


-아빠가 이런 때 곁에 못 있어줘서 미안하다.  


-흐헝~


다영은 걱정과 서러움이 북받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전화를 끊고 엄마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다영은 오른손으로 왼손으로 번갈아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엄마 손을 꼭 잡았다. 


-엄마 깨어나, 어서. 나 엄마 없으면 못 산단 말이야.


-엄마도. 엄마는 우리 딸 없으면 못 살아. 일어나야지, 이제. 


어느새 다영 엄마가 눈을 뜨고는 다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괜찮아?


-다영아 괜찮니?


-내가 무슨 문제야. 엄마가 이렇게 다쳤는데.


-이제 일어나야 해. 이러고 더 있으면 위험하대.


-무슨 소리야. 누가 위험하대. 


-어서 일어나야 해. 집에 가자.


머리에 붕대를 하고서도 자리에서 일어난 다영 엄마는 왼팔에 링거를 연결한 바늘을 뽑고는 피가 흐르는 팔을 꾹 누르며 다리를 내려 신발을 되는대로 구겨 신었다.


-엄마. 안 돼. 의사선생님이 검사받을 게 많댔어.


-검사가 다 무슨 소용이니 아무리 받아도 나아지질 않는데.


-엄마 어디 아팠던 거야. 검사받고 그랬어?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 다 이겨낼 수 있어.


-다친 게 나아야 이겨내는 거지.


-다영아 집에 가자, 제발. 여기가 견딜 수 없이 괴로워.


엄마가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다영인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엄마 말에 홀린 듯이 엄마를 따라나섰다.



9


-엄마 다 됐어. 간은 안 해도 되는 거래. 김치하고 먹으면 될 것 같아.


다영이는 생전 처음 우유죽을 끓여봤다. 늘 엄마가 해주는 것만 먹어봤지 요리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우유죽이라는 건 정말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였다.


-어머, 고소하네. 너 요리 솜씨 타고난 거 같아, 다영아. 


-엄마, 나 일어과가 아니라 조리학과를 진학할 걸 그랬다, 그치?


엄마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우유죽을 드셨다. 


-엄마 근데 머리는 베란다에서 어쩌다 다친 거야. 구급대원 아저씨들은 아무 특이점이 없다고 하던데. 상처로 봐서는 넘어져서 다쳤다기 보다 뭔가 떨어진 건가 싶은데 베란다에 흔적도 없대.


-글쎄 나도 모르겠다. 어쩌다 모든 게 이렇게 된 건지.


-엄마, 정말 무슨 다른 일 있어? 아까 병원에서도 검사 아무리 받아도 나아지질 않는다 그러고. 엄마 하는 말이 다 비관적이야. 


-살다 보면 많은 일들이 있지만 때론 겪고 싶지 않은 일들도 겪게 되고. 그런가 보다.


다영이는 엄마 말씀을 듣고 있다가 문득 창문을 바라봤다. 대낮인데도 뭔가 푸른빛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엄마 저게 뭐야?


-뭐 말이야?


다영의 놀란 목소리에 다영 엄마도 다영의 눈길을 따라 베란다 창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라도 지나갔나? 


-새는 아닌 것 같던데. 빛이 났어, 파란빛.


-멀리서 비행기라도 지나갔나 보다. 


다영 엄마가 다영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하던 순간 마침 그 빛이 다시 아른 거렸다. 


-엄마, 잠깐만.


다영은 호기심과 함께 긴장감도 느껴졌지만 베란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0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나서자 파란 후광이 비치는 한 남자가 공중에 서있었다. 17층 높이에 말이다.


-너.. 너.. 도대체 누구세요.


-너 도대체 누구세요는 반말인 거야 존댓말인 거야? 족보에도 없는 말투나 쓰는 그러는 넌 누군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요? 처음 만난 여자한테 이름 물을 땐 자기 이름부터 먼저 밝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처음이 아니지 않나?


'우리?' 다영은 그가 그냥 하는 우리라는 말에도 조금 남다른 정서를 느꼈다.


-처음이던 아니던 왜 내 곁을 맴도는 건데요?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나 미행해요?


-내가 왜 널 미행해. 난 그냥 너의 세상을 돌아보고 있는 중일뿐이야.


-나의 세상이라고요. 맞아 그때도 그랬죠 날 만나러 지구로 온 거라고.


-내가 그런 말을 언제 해. 지구를 떠돌고 있긴 하지만 그게 널 만나려고 그런 건 아닐 거야.


-언제 했냐니? 이 남자 딱 잡아떼네. 그랬잖아요. '니가 있는 초신성은 어떤가 구경왔다'구.


-너 초신성이 뭔지 모르지? 초신성이 지구로 변신할 정도면 니 얼굴 위에는 있는 건 뇌가 아니라 깡통인 거야.


-뭐라구요?


다영은 발끈했지만 정말 초신성이 지군지 알았어서 그게 아니었구나 싶으니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뭐 그런 건 모를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어쨌든 내가 있는 곳을 구경 왔다는 거잖아요.


-그렇다 치자.


-그렇다 치는 게 뭐예요. 수퍼히어로면 단가? 뭐든 자기 좋을 대로 넘어가고.


-덕분에 수퍼히어로도 돼 보고 괜찮은 마진이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에요.


-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서 와본 거뿐이야.


-내가요?


=이 남자 무시하다 걱정해주다 날 아주 가지고 노는 거야 뭐야 


다영은 푸른 후광의 이 남자의 말투가 거슬리긴 했지만 마치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다소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이 남자에게 물어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여기 오가다가 우리 엄마 다치는 거 목격하지 않았나요? 혹시라도 말이에요.


-밝은 생각을 해, 뭐든. 그럼 니 세상에서 아무도 아프거나 다칠 일은 없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럼 내가 우리 엄마 다칠 일을 생각하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그럼 내가 나으라고 생각하면 우리 엄마가 바로 나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아니 니 엄마는 다친 적이 없다는 걸 니가 수긍하기만 하면 돼.


-무슨...


남자가 다영의 엄마가 다친 걸 마치 다영이 탓인 듯 이야기하는 투라 다영은 많이 발끈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슈퍼히어로잖아? 이 남자 말대로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집중했다.


=엄마는 낫는다. 아니 나았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엄마를 돌아봤는데 엄마는 여전히 머리에 붕대를 감고 천천히 죽을 드시고 있었다.


-접근이 다르잖아. 낫는다나 나았다가 아니라 다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으라구.


=다친 적이 없다고 생각하라는 거야?


다영은 다시 한번 집중해 오늘 아침을 떠올리며 엄마가 다치지 않은 현실을 그리면서 몰입했다. 그러자 순간 머릿속이 밝아지는 듯하며 자기 스스로 수긍하는 듯하게 되었다. 


=맞아. 엄마는 다치지 않았어.


그런 확신과 함께 엄마를 돌아다봤다. 엄마는 아직도 죽을 드시고 계셨지만 머리에 붕대가 보이지 않았다. 


다영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 것이다. 다영은 그리 믿으며 이 놀라운 힘을 일깨워준 그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언제 갔는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지 또 말해 주지도 않고 갔네. 정말 수퍼히어로면 단가? 뭐 그렇게 잘생기지도 않아 놓고는.


다영은 아쉬운 마음에 구시렁대며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 남자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 분명 또 나타날 거야. 내가 필요할 땐 나타났으니까.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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