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학교에 들어서는 다영은 고등학교와 다를 것 같던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가 조금 김이 새는 것 같았다.

교양 과목 중 '여성과 미래' '내일의 여성'이 도대체 뭐가 다르다고 선택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펌을 한 단발머리의 여자애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난 루다야. 이루다. 너 학교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


-내 친구 이름도 루단데. 난 임다영이야. 근데 학교가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첫 질문부터가 이상한 루다라는 애가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다영은 되물었다.


-건물 외관을 제외하고는 실내 디자인부터 뭔가 고딩교실 연장선 같잖아.


-글쎄... 그런가?


다영은 그러고 보니 TV에서 본 대학교 강의실 실내의 특징, 이를테면 강단을 제외하고는 모든 실내 디자인이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 교실과 같은 점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이 학교 아마도 고등학교를 건립하려다가 대학으로 전향한 게 아닌가 싶어. 아니면 고등학교 외벽만 그럴싸하게 인테리어하고는 대학교로 전환한 거던가.


-그래? 


다영은 애써 들어온 (물론 시험 점수 문제로 간신히 들어온 대학이긴 했지만) 대학이 고등학교 건립하려다 대학이 된 거면 너무 짜증 난다는 생각을 했다.


-이거 학비 환불받고 재수할까도 생각했다니까.


-그래도 재수는 좀 지나친 거 아니야? 시험을 또 준비하고 싶니, 넌?


-고딩 건립하려던 학교면 내가 고딩에서 고딩되려고 시험공부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잖아.


-그건 그렇긴 하네. 그래도 명색이 대학인데 대학생활이 좀 다르진 않을까? 신생대라도 몇 년은 됐으니까 선배들도 있고.


-선배는 무슨 선배. 대학에선 다 무슨 무슨 씨야. 우리 엄마 대학 다닐 때나 선배가 있었지.


하긴 엄마한테 듣던 대학 시절 얘기들로는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가 생겼지만 요즘 대학은 그저 취업을 위한 스펙 쌓을 경험치 쌓는 곳 정도의 이미지가 다 이긴 했다.


-하긴 대학생활이 별로 기대되지 않기도 했어. 아이유나 유승호도 대학 안 갔다고 엄마가 나 대학 떨어져도 기죽지 말라고 그러시긴 했거든.


-너도 어지간히 공부 안 했구나?


-너는 공부 잘해서 이 대학 왔니?


다영은 루다라는 얘가 좀 사람 언짢게 하는 게 자기 친구 루다랑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많이 닮아 보였다.


-니들 시끄러 좀. 여기 공부 잘해서 온 애도 서울 근교 대학엔 원서도 못 넣을 성적이었을 거야. 공부 잘한 애면 애초에 여기 없다.


-이런 게 팩트 사살인가? 난 이루다야.


-알아. 얜 다영이고. 니들 떠드는 소리 다 들었어.


뒷자리에서 긴 머릿결에 컬을 준 여자애가 루다랑 다영이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짜증이 났는지 나무랐다. 루다와 함께 돌아본 다영이 그녀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니?


-난 손주연이야. 강의실 실내 디자인이나 학교 빻았다고 할 시간에 좀 더 건설적인 거 생각하자고 우리.


-이를테면?


-저기 좀 봐.


주연이가 턱짓을 한 곳을 돌아보자 키가 184에서 187까지 되어 보이는 패션 감각이 제법 남다른 남자애들 몇몇이 보였다. 


-최면연애라는 책을 봤어. 저런 애들을 다 사로잡으면서 대학생활을 알차게 보낼 거야 난.


남자 애들 뒤로 후광이 보이나 싶을 때쯤 주연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루다가 두 손을 맞잡으면 맞장구를 쳤다.


-나두 나두.



5


아까 그 남자 애들 세명과 루다, 주연, 다영은 술자리를 가졌다. 저녁시간쯤 학교 인근 '이계' 호프에서 아이들이 모였다. 다른 테이블들도 학생들로 붐볐다. 남자 애들 중 안경 낀 좀 고지식하게 생긴 앤 진우라고 했고 아까부터 아빠한테 배웠는지 아재 개그를 밀고 있는 지루한 애는 상연이라고 했다. 다영이 좀 마음이 가는 헤어스타일이 깔끔한 애는 희찬이라고 한다. 


-볶이


-쑥


-개


-오메기


-떡 


다영, 상연, 루다, 희찬, 주연, 진우 순으로 떡볶이 쑥떡 개떡 오메기떡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주연이 자꾸만 틀렸다. 이번에도 떡을 외치며 머리를 쳤다. 같은 실수를 자꾸 하자. 아이들이 모두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다영이가 맘에 들어 하는 희찬이 주연이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듯 뚫어져라 주연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 화장 좀 고치고 올게. 


다영이는 기분이 상해서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자리를 비우려 했다. 


-그래, 빨리 갔다 와.


진우가 그런 다영을 보고 말했다. 진우의 빨리 갔다 오라고 말하니 다영은 조금 맘이 풀리는 듯했다. '이쁜 건 알아가지고' 이렇게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희찬이가 주연이만 쳐다보는 것이 짐짓 기분이 나빴다. 화장실로 향하는 통로 옆 빈 테이블에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고 다영이 지나쳐가자 그 남자의 의상이 오징어 게임 트레이닝복에서 블루벨벳 정장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다영은 화장실에서 파운데이션을 고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오려 걸음을 옮겼다. 자기들이 있던 테이블 근처로 오다가 다영은 눈을 의심할 상황과 마주쳤다. 루다가 졸린지 상연의 어깨에 기대 있었고 주연이가 희찬이와 대화하는 새 진우가 주연의 잔과 다영의 잔에 무슨 가루약 같은 걸 넣고 있었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니들 다 한 패니?


-다영아. 왜 그래?


다영이가 소리치자 주연이 깜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쟤가 우리 잔에다 약을 타고 있잖아.


-뭐라고? 


-루다가 갑자기 저러는 것도 이상하잖아, 나 화장 고치러 가기 전만 해도 쌩쌩하던 애가 갑자기 왜 저러고 있어. 


-니들 저 말이 정말이야.



6


다영과 주연은 루다를 둘러메고 호프에서 나와 택시를 잡으려 도로를 찾아 나오고 있었다.


-야. 니들 잠깐 기다려 봐. 오해는 풀고 가야지.


다급히 가고 있는데 희찬, 상연, 진우가 뒤따라 왔다. 


-오해는 무슨 오해.


-그거 그냥 비타민이야. 비타민. 니들 술 깨라고 넣은 것뿐이야.


-웃기지 마. 누굴 바보로 아니.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다영아. 


주연이가 다영이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사실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며 놀다 보니 늦은 시간이 다 되었고 지금 이 골목엔 어떻게 된 건지 대학가인데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주연이가 눈치를 주는 의미를 깨닫고 다영이도 갑자기 겁이 났다.


-그러니까 우리 말은 니들이 오늘 꼭 집에 가야 할 이유가 있냐는 말이야.


진우가 가운뎃손가락으로 안경을 고쳐 올리면서 말하자. 그 뒤에서 블루벨벳의 정장을 한 남자가 나타났다.


-세상은 니가 생각하듯 그렇게 더럽기만 한 곳은 아닐 거야.


정장을 한 남자가 말했다. 그 남자가 나타나자. 상연이 갑자기 머리 위에 외뿔이 솟아나며 악어가죽같이 피부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외뿔 괴물로 변한 상연이 그 남자를 돌아보며 외쳤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먼 거리였는데도 단숨에 몸을 날려 오른손 수도로 상연의 허리를 쳤다. 상연이 픽셀 조각으로 변하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는 픽셀 조각들이 남김없이 사라졌다.


그걸 본 희찬은 용의 형상을 한 두 머리의 괴물로 변하고 진우는 익룡 같은 날개가 돋아나며 얼굴이 험상궂은 밀랍인형처럼 변해 그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남자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공중으로부터 급강하하던 진우를 주먹으로 치고 번개처럼 떨어져 내리며 희찬의 두 머리 사이를 수도로 내려쳤다. 희찬의 몸통이 두 동강이 났다. 둘 다 상연처럼 픽셀이 쏟아져 내리더니 사라졌다.


놀란 다영과 주연이 바라보고 있자 남자는 다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꼴페미지? 


다영은 지금 있었던 상황이 놀라웠지만 저런 차별적 발언을 듣고 있자니 그것도 가관이다 싶었다.


-여혐이 판치는 더러운 세상.


다영이 하고 싶은 말을 주연이 소리쳤다.


-내 말이 그 말이야.


다영이 맞장구를 치자 남자는 아까처럼 다영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말했다.


-네가 있는 초신성은 어떤가 구경 왔는데 나이답지 않게 고루하고 차별적인 세계야! 여혐이 아니라 남혐으로 말이야.


=저 남자 날 보러 지구에 왔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다영은 맥락 없는 남자의 말에도 뭔가 로맨틱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근데 왜 여혐이 아니라 남혐이라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고나 하는 말이에요.


-맞아. 얘가 왜 이렇게 됐는데.


다영이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 주연이 남자에게 물었다. 다영도 정신을 차리고 주연과 둘이서 들쳐 맨 루다를 가리키며 맞장구를 쳤다.


-말을 해준대도 지금의 너로서는 알 수 없겠구나. 그냥 너의 안식처를 찾아. 애먼 괴물들 만들지 말고.


그렇게 말하고는 남자는 하늘 높이 급상승하더니 날아가 버렸다.


-이봐요. 누군지는 알려주고 가야죠. 당신 누구냐구요?


다영이 소리쳤지만 남자는 이미 아주 멀리 날아가고 난 뒤였다. 다영인 저 까탈스러운 말투의 남자가 그날 자신의 눈을 바라보던 바로 그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날 구해줬을까? 내가 있는 초신성을 구경 왔단 말은 뭘까? 왜 내 곁에서 맴돌고 있을까?'


-다시 또 만날 수 있겠지?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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