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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향은 유로의 장례식이 끝나고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아 예전에 머물던 파이트클럽 임시 숙소에 왔다. 파이트클럽 운영자 한 명과 마주 서서 유향은 다짜고짜 재가입을 시켜달라고 요구했지만 왠지 운영자는 절대라는 말까지 써가며 반대했다.
-왜요. 왜 안 받아주는 건데요.
-니 형과 약속을 했다.
-네. 형이랑요... 형은 죽었어요. 저희 엄마 때문에라도 더 여기가 필요하다구요.
유향은 나름 절실했다. 형이 살아있을 때는 자기가 잠시 잠깐 엇나가도 의지할 데가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계를 이어나갈, 어머니를 모실 대책이 절실했다.
-죽어? 그 녀석이 어쩌다 죽어?
-사고였어요. 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다 그만.. 그렇게 됐어요.
-그렇구나. 녀석 남자다운 삶을 살다 갔구나.
-......
그래 형은 유순해 보이지만 정말 상남자였다. 부드럽지만 강한 그 모습이 유향은 배울 수도 없는 진정한 상남자의 모습이라고 유향은 생각했다.
-니 형이 널 빼내기 위해 너 대신 칠전을 벌였다. 여기 다 한 실력 하는 놈들만 모인 거 너도 알 거야. 내 보기엔 니 형은 입식 타격기 하나뿐인데도 불구하고 일곱 명을 모두 쓰러 뜨렸어. 피투성이가 된 채 너 하나 구하겠다고.
-형이 일곱 명 모두를요.
-널 데려가겠다는 집념 하나가 그런 혈전 속에서도 의지를 꺾지 않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 녀석은 그러고 죽은 거야. 걔가 구한 건 철로에 떨어진 아이만이 아니라 방황하는 동생까지란 거다. 그런 녀석과의 약속은 난 깰 수 없다.
길거리 싸움꾼들의 모임인 파이트클럽에서 탈퇴하려면 쉬지 않고 일곱 명의 고수와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다들 탈퇴 의사를 밝히지 못했고 칠전을 모두 이기고 탈퇴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유향은 그제서야 파이트 클럽에서 자신을 순순히 강퇴시킨 것이 납득이 갔다. 그리고 형이 돌아가신 아버지 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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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 생각했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거야. 개학할 때까진 아직 시간도 있잖아? 그때까지 이령일 보살피다가 다시 결정할 수도 있는 거니까.
카페에서 유향과 이령이의 어머니가 마주 앉아 있다. 유향은 처음엔 이령이 어머니가 농담을 하시는 줄 알았다. 고작 고2 여고생을 경호해주는 대가로 그것도 자신처럼 그저 이령이와 같은 동급생인 무경험자에게 그런 고액을 제시한다는 게 선뜻 이해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돈이 얼마간이라도 엄마와 자신의 생계에 보탬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싸움 밖엔 해본게 없지만 누군가를 지키는 건 처음이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아니 막 누구랑 싸우고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냥 옆에서 지켜주기만 하면 돼.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 유향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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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따라와. 성가시게.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일이니까.
이령이는 처음엔 무척이나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향이의 행동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를 보며 왜 엄마가 이 어쭙잖은 녀석을 보디가드로 고용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유향의 모습에서 모든 순간 유로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
-괜찮아.
인도에서 유향을 피해 돌아가려다 이령이 인도 아래로 넘어질뻔 했다. 유향이 이령이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받쳐 들었다.
이령은 유로의 얼굴을 한 유향이 자신을 안다시피하자 문득 아니 한결같이 떠오르는 유로가 더 생각났다.
-조심해야지. 어린애냐?
-뭐?... 꺼져! 이 짝퉁아!
이령은 유향이 유로보다도 더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자 빈정이 상했다.
-근데 어디 가는 거야. 우리.
-우리? 우리가 어디를 가는 게 아니잖아. 내가 가는 데 니가 따라오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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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세워 주세요.
이령은 기사가 딸린 자기 전용차를 타는 대신 택시를 타고 이곳까지 이동을 했다. 사실 이곳에 다니고 있던 걸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유향이 따라와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유향에겐 그냥 친구 집이라고 둘러대면 엄마에게 딱히 이곳이 주의해야 할 대상이라고 인식되게 전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이령이 주택가 대로에서 유향과 같이 내렸다. 몇 걸음 옮기자 마침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고풍스런 목조 건축물이 보였다. 마침 그 집에서 검은 투피스를 입은 여성이 나오는 길이었다. 여성은 이령을 보고는 무거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령이 인사도 잊고 다짜고짜 질문부터 하려했다.
-자매님.. 저 꼭 여쭤볼 말이 있어요.
-아니요, 자매님. 자매님은 더 이상 이곳에 오지 말아주세요.
-네?
-자매님에겐 어둠 깊이 드리웠습니다. 더는 우리 모임에서 자매님을 감당할 분이 안계신 것 같아요.
-제가.. 제가 위험한가요?
이령은 자매님의 영적 수준과 실력을 알기에 그 말에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그렇지는 않아요. 자매님의 행위들은 자매님이 더 잘 알겠죠. 자매님은 세상을 위험하게 할 사람이에요. 우리는 자매님을 우리 자매단의 일원으로 더 이상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세상을 위험하게 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어요. 저는 그저 행복을 추구하려 했을 뿐이에요.
행복을 추구하려 했다는 이령의 말에 검은 의상의 그 여성이 잠시 미간을 찡그리더니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돌아서려 했다.
-자매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답변해 주시면 안 되나요?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자매님도 이젠 더 이상 질문할 필요도 없지 않나요?
그리 말하고 검은 옷의 여성은 차갑게 돌아섰다. 하지만 이령은 이미 대답을 들은 것만 같이 환한 표정으로 유향을 쳐다봤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