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밤늦게 죄송해요. 이제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고마워, 학생. 조심해서 가.
유향은 수이를 숙소가 아닌 수이네 집에 바래다주고 수이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중이다. 수이 할머니는 늦은 시간이라 여자만 있는 집에서 간다는 걸 만류할 수도 없고 해서 문 밖까지만 마중을 했다.
수이는 유향이 앉힌 소파에서 옆으로 쓰러져 있다가 나가는 유향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유향은 수이가 걱정됐지만 수이 본인 집에서 수이가 안정을 찾으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돼.
수이 할머니가 수이를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 하다가 꺼낸 말씀이다.
수이는 대답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수이가 방문을 닫자 한참을 '쟤는 이제 어쩌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어떤 말로도 위로할 길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푹 자고 나면 조금은 낫겠지.
할머니는 혼잣말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렇게 빈 공간에 멍한 수이의 심정을 바라보는 듯 유로가 서있었다.
16
수이는 방의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작은 무드 등 조명 옆에서 멍하니 화장대의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말없이 주르륵 눈물을 흐렸다. 그러다 소리내 웃었다.
=왜 난 오빠와 헤어지려고 했을까? 내가 그날 헤어지려고 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날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유로 오빠도 죽지 않았을 거야. 이령이 말이 맞아. 내가 오빨 죽인 거야. 내가 그런 거야.
수이의 뒤에서 거울에 비친 수이의 얼굴을 보고 있던 유로는 수이가 그렇게 생각하자 소리쳤다.
-아니야. 수이야. 니 탓이 아니야. 언제나처럼 널 만나러 가는 동안 난 행복했어. 니가 헤어지려 말하려 했다지만 그렇게 됐다 해도 우린 언제나처럼 금방 다시 만났을 거야. 니 탓이 아니야. 니 탓이 아니라고.
-시끄러우니까 소리 좀 낮춰!
유로 옆에 하얀 슈트 차림의 금발 외국인이 나타났다.
-누구야!
놀란 유로가 다시 소리쳤다.
-시끄럽다니까. 누구 귀먹은 줄 알아. 소리 좀 낮추라고. 온 차원이 다 니 외침뿐인 것 같잖아! 도대체 어떻게 한 영혼의 목소리가 이렇게 큰 거야.
파란 눈동자의 금발 외국인이 그렇게 말하자 유로는 진정하고 다시 조용히 물었다.
-도대체 누구세요.
-나도 너처럼 수이를 수호하는 수호천사야!
-네? 그럼 여태까지 어디 계신 건데요.
-너처럼 수이 곁에 있지만 너와 나는 서로 조금 다른 차원의 공간에 있어. 천국과 너희 천당측의 규약으로 너랑 나는 자주 접촉할 수 없어. 하지만 니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늘 나 역시 수이 곁에 있어.
-이제까지 계속 수호령이셨나요?
-난 수 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을 수호해 왔지. 하지만 수호령이 아니라 수호천사야. 너희와는 급이 다르지.
금발의 수호천사가 턱을 약간 치켜들며 다소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유로는 그의 거만함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심정을 가져다주는 듯했다. 믿을만한 수호천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럼 말씀해 보세요. 수이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이는 지금 평소와 달라. 어떻게의 문제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해. 그렇지 않으면 수이가 아주 위험할 거야.
-지금 평소 심정이랑 다른 건 저도 알지만 이주 위험하다는 말씀은.. 도대체 뭐죠? 미래를 보시나요.
-미래의 여러 경로들을 보지만 그것도 모든 미래는 아니야. 하지만 내가 본 미래를 가져오는 건 비단 수이의 현재 심리만이 아니야.
그때 침대에서 일어난 수이가 조금 어두운 무드 등 불빛에 의지해 거울을 바라보며 조금씩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수이의 머리 위에서 원 안에 역삼각형 위 두각을 자르는 듯한 X표가 그려진 마법써클이 생겨났다.
-저거. 저게 문제야.
유로가 그의 말에 다시 수이를 돌아봤다. 수이 머리 위의 마법써클을 발견한 유로는 다급해졌다.
-저게 도대체 뭐죠? 저게 수이를 위험에 빠뜨리는 건가요?
-오랜 내 경험으로 봐서 저건 유사 이래 존재해온 마법하고는 조금 다른 방식의 마법써클 같아. 이제까지 매번 저거보다는 덜 위험해 보이는 그저 내적 혼란이나 이별을 불러오는 힘이 느껴지는 마법써클만이 수이 머리 위로 떠오르다가 사라지고 떠오르다가 사라졌었어. 그러다 며칠 전 죽음을 부르는 파멸적인 힘이 보이는 마법써클이 나타나더니 이상하게 그것도 금세 사라지더라구. 근데 오늘만 해도 벌써 저 문양의 마법써클이 두 번째 나타나는 거야.
-나타났다 사라지면 문제가 없는 건가요?
-그렇지도 않아. 금세 그 힘이 사라지지는 않거든. 마법써클만 사라지면 그 이후 안정 시키는 건 수호천사의 몫이니까. 그리고 니 몫의 일이기도 하구.
수호천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수이는 화장대 앞에 무릎을 꿇고서 엉성하게 주먹을 쥐고는 손날 부분으로 거울을 쳤다. 거울이 조금 깨지기는 했지만 거울에서 떨어져 나오지는 않자 옆의 화장품을 들고 거울을 쳤다.
-안돼. 수이야. 뭐 하는 짓이야. 그만둬. 제발 그만 좀 해.
유로가 다급히 소리치고 있을 때 금발의 수호천사가 마법써클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손가락으로부터 마법써클에 빛덩어리가 던져지더니 붉게 타오르던 마법써클이 한 바퀴 회전하며 파란색으로 바꼈다. 하지만 수이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조각난 거울 조각 하나를 움켜쥐더니 자신의 손목으로 가져갔다.
유로가 '이제서야 떠오르다니' 하면서 둔한 자신을 탓하며 마법써클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자 유로의 손바닥으로부터 푸른빛이 외곽을 감돌고 있는 새하얀 빛의 줄기가 터져 나오며 마법써클을 깼다. 그런데도 수이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하얀 팔목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오빠, 나도 오빠 곁으로 갈래. 내가 미안하다고..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 오빠한테 꼭 말하고 싶어... 사랑해 유로 오빠.
피가 뿜어져 나오는 팔목을 멍한 채 바라보던 수이는 가만히 그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유로와 만날 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